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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싸인” 마가복음 9:14-29 (07/14/2019)

 

이기주 작가가 병원에 입원하신 어머니를 뵈오러 갔는데 어느 나이 지긋한 의사를 만납니다. 회진차 병실에 들어오셨는데 그는 팔순을 훌쩍 넘긴 환자를 대할 때도 “환자” 혹은 “어르신”이라고 부르지 않고, “박 원사님” “김 여사님”하고 인사를 건네는 것을 듣고 궁금한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환자” 혹은 “어르신”이라고 불러 드려도 경대하는 건데 거기에 더 나가서 “원사님” “여사님” 부르시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퇴원하는 날 담당 의사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어서 “환자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않으시던데요?” 라고 묻자 그는 “그게 궁금하셨어요?”라고 되물으면서 다음과 같이 답을 하셨다고 합니다.

“환자에서 ‘환’이 아플 ‘환’이잖아요. 자꾸 환자라고 하면 더 아파요.”

“아….”

“게다가 ‘할머니’ ‘할아버지’ 같은 호칭 싫어하는 분도 많아요. 그래서 은퇴 전 직함을 불러드리죠. 그러면 병마와 싸우려는 의지를 더 굳게 다지시는 것 같아요. 건강하게 일하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바람이 가슴 한쪽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어요. 병원에서는 사람의 말 한마디가 의술이 될 수도 있어요.”

 

이런 멋진 의술을 펼치는 분이 계시구나 이 글을 읽으면서 새롭게 느껴 볼수 있었습니다.

의사들의 선서인 히포크라테스 선서가 있습니다. 물론 그리스에서 시작된 선서입니다. 반면 우리 한국에도 오래 전부터 이런 선서가 있었습니다. 500 여년 전 조선 초기에 이석형 공이 ‘의원정심’을 제정했습니다. 의사를 의자, 의원, 의학자로 나누는데 의학자는 최상급의 의사로 성스럽게 환자를 대하여 세상의 존경을 받는 사람이라고 규정합니다.

 

곧 이기주 작가는 어머니를 위한 의사로 의학자를 만난 것 같습니다. 의학자를 만난 환자들은 병원을 들어 올 때의 모습과 나갈 때의 모습이 다르지 않을까요? 병원을 들어 올 때의 걸음과 나갈 때의 걸음이 다르지 않을까요? 그러면 어떻게 다를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상고하며 삶의 의학자를 만난 사람들의 모습을 함께 나눠 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배경은 예수님께서 세 제자 곧 베드로 요한 야고보를 데리고 변화산에 올라 가셔서 변화하신 후의 장면입니다. 놀라운 체험을 하시고 산에서 내려 오셨습니다. 14절 말씀을 보면, 변화산 체험을 하고 내려 와 보니 제자들 곧 9명의 제자들을 큰 무리가 둘러싸고 있었고 이 자리에 서기관들도 함께 있었습니다.

12제자들 중에 리더격인 세 제자들이 없었으니 9명의 제자는 발을 동동구르며 어쩔수 없어했던 것 같습니다. 아마 무리들은 물었을 것입니다. 너희 스승은 어디 갔냐고…?

사실 귀신들린 아이를 데리고 어느 아버지가 지푸라기라도 잡으려고 찾아 왔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스승이 없으니 제자들에게라도 한 번 아이를 낫게 해 달라고 요청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아무리 스승의 흉내를 내도 제대로 잡히지 않습니다. 더 혼란스러워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예수님이 가까이 오시는 것을 본 것 같습니다. 일제히 무리는 주님께 달려와 문안합니다. 이에 주님이 묻습니다.

“너희가 무엇을 그들과 변론하느냐?”

제자들이 답변을 제대로 못하고 있었던지 무리 중 한 사람이 대답합니다.

“선생님, 말 못하게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왔나이다. ……. 내가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달라 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이에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19절 말씀입니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시매.”

주님은 먼저 제자들을 야단칩니다. 믿음이 없는 세대라고…. 그러나 야단만 치시는 주님은 아니십니다. 기회만 생기면 새로운 것을 가르쳐 주기를 즐겨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기회는 챤스다 하고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직접 제자들과 무리들에게 보여주시고 싶으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장면이 눈 앞에서 펼쳐집니다. 아이를 데리고 오니 귀신이 앞에 서 계신 예수를 보고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합니다. 아이는 땅에 엎드러져 구르며 거품을 흘립니다.

제자들과 무리들보다 귀신이 더 주님을 알아 본 것 같습니다. 한편 거품을 흘리고 쓰러진 아이를 보고 마음이 아팠는지 주님은 아버지에게 언제 부터 이렇게 되었냐고 묻습니다. 이에 아버지가 어릴 때 부터라고 답변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22절 말씀입니다.

“귀신이 그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이에 주님은 두번째로 엄중해 지십니다. 23절 말씀입니다.

“할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먼저는 제자들을 향해 ‘믿음이 없는 세대여’ 한탄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버지가 주님의 자존심을 건드립니다.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이에 주님은 제자들과 온 무리가 듣는 가운데 꾸짖으십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이 때 주님은 어떤 눈빛으로 아버지를 보았을까요? 화가 난 눈빛으로…?

의학자가 환자를 존경의 눈으로 대하는 것처럼 주님도 이 아버지를 존경의 눈으로 이미 그 안에 있는 믿음을 보는 것처럼 말씀하시고 계시지는 않으실까요? 하여튼 이 점은 다시 생각하기로 하고, 이에 아버지가 어떻게 반응하나요? 24절 말씀입니다.

“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아버지가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 소리가 얼마나 이상했던지 사람들이 달려 옵니다.

“예수께서 무리가 달려와 모이는 것을 보시고….”

소리지르는 아버지의 모습이 오늘 이야기의 하이라이트가 아닌가 생각 됩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울부짖음을 듣고 주님은 더 이상 아버지를 꾸짖지 않습니다. 대신 귀신을 꾸짖습니다.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이에 귀신이 아이를 떠납니다. 주님께서 아이의 손을 잡아 일으키십니다.

 

결국 주님은 아버지의 절규를 들으시고 아이를 낫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아버지의 절규가 어떤 것이었기에 주님께서 아이를 낫게 하셨을까요?

 

주님은 제대로 믿지도 않으면서 떼를 쓴다면 도와 주시는 분이실까요? 이 아버지의 고백은 믿음의 절규였을까요? 아니면 그냥 떼 쓰는 것이었을까요? 주님께서 절규를 들으신 것으로 봐서 그냥 떼 쓰는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분명 믿음과 함께 한 절규였을 것입니다.

사실 생각해 보십시다.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는 그동안 어떤 마음으로 살아 왔을까요? 믿음으로 이기려고 하지만 아들을 볼 때마다 자신을 잃습니다. 아버지는 늘 자신의 삶의 환경에 눌려서 스스로 자긍심도 없이 지냈을 것입니다. 자신이 부족해서 자녀가 이렇게 되었고 또 자기는 믿음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남들에게 내 놓을게 없다고 생각했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물론 믿음에 대해서도 체계적인 지식도 갖추지 못하였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니 알아도 말을 못합니다.

 

이번에는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용기를 내서 찾아 온 것입니다. 어떤 꾸지람을 들어도 합당하다고 생각하고 찾아 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도 모르게 마음 속 깊게 자리 잡고 있던 고백을 하게 된 것입니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결과적으로 보면 주님은 아버지의 이 고백을 믿음의 싸인으로 받아 주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귀신을 당장 내 쫓으셨습니다.

이 고백은 어떻게 보면 당연하고 평범한 고백입니다. 그런데 이 고백을 들으신 주님은 귀신을 꾸짖습니다.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사실 주님께서 이 고백을 믿음의 싸인으로 받아주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 고백 안에는 두 가지 요소가 들어 있습니다.

하나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내가 믿나이다.” 믿음의 고백이 있습니다. 100%의 믿음은 아니지만 감히 주님께 “믿나이다” 고백할수 있는 믿음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음 고백이 그의 믿음의 고백을 완성시킵니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이 고백으로 인하여 자신의 믿음이 온전하지 못함을 고백할 뿐 아니라 믿음의 성장을 사모하는 고백을 하게 된 것입니다.

곧 아버지의 이 고백은 한편으로는 믿지만 약한 믿음이 더 강해지기를 원하는 극히 인간적인 소박한 고백이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이 고백을 기뻐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이 고백을 오고 가는 세대를 위한 ‘믿음의 싸인’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주님은 “내가 믿나이다.” 외치는 고백도 소중하지만 주님은 도리어 이어지는 고백을 소중히 여기신 것입니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얼마전 재미있는 article을 읽게 되었습니다. 제목은 ‘기계는 생각할 수 있는가?’ 요즘AI(인공지능) 가 성황하면서 과연 AI가 생각을 할수 있는지 질문과 함께 쓴 글입니다. 사실 인공지능하면 몇 년 전에 인공지능 알파고가 이세돌을 바둑으로 이겨서 한창 주목을 끌게 되었던 사실 모두 잘 아실줄 압니다.

자, 그러면 ‘기계가 믿을수 있는가?’ 라는 질문으로 바꿔도 좋을줄 압니다. 그런데 저는 확신합니다. 믿음에 대해서 신학적으로 제일 잘 아는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쉽게 이야기해서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신학자들일줄 압니다. 그런데 이것도 잠시 언젠가는 신학자들을 능가하는 존재가 나타날줄 압니다. 이미 나타나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요즘 한창 뜨고 있는 인공지능(AI)입니다. 인공지능에게 그동안 나온 모든 신학 자료를 넣어 두면 그 어떤 신학자도 당해 낼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컴퓨터가 나오기 전에 이미 비트겐슈타인이라는 학자는 이런 질문을 한 것입니다. “기계는 생각할수 있는가?” 오늘 문맥으로 바꾸면, “기계는 믿을수 있는가?” 그런데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이 학자는 할수 있다 없다를 말하지 않고 다음 질문을 대신 던졌다고 합니다.

“기계가 치통이 있을 수 있는가?”

인간의 아픔이 얼마나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 가는지를 일깨워주는 글이었습니다. 삶의 아픔 없이는 인간이 될수 없고 아픔 없는 생각은 생각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믿음에 대해서 신학자 보다 더 많은 지식을 갖고 있는 AI도 믿음에 대한 지식은 있어도 참 믿음은 소유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아픔이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믿음은 아픔이 있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능치 못 할 일이 없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아버지는 스스로 믿음이 없다는 아픔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 아픔이 있기에 이런 고백을 할수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그런데 아버지가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 마음 속 깊게 담겨져 있는 이런 고백을 할수 있었던 것은 주님의 눈길을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믿음의 아픔 가운데 있는 자기를 성스럽게 내려다 보시는 주님의 눈길 말입니다. 이를 29절 말씀이 확증해 줍니다.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기도 속에서 주님의 눈길을 체험할 때 마음껏 자신의 믿음을 고백할수 있습니다. 의심이 여기저기 묻혀져 있는 바로 그 믿음의 고백을 할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기도 속에서 우리를 성스럽게 내려다 보고 계시는 주님을 느낄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마음 놓고 의심 섞인 고백을 할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성스럽게 내려다 보시는 주님은 우리들의 외침을 들으십니다.

곧 삶의 문제가 없어 보이는 자들이 믿는 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도리어 삶의 아픔으로 인해 외침이 있는 자들이 바로 믿는 자들의 모습니다. 특별히 기도 속에서…. 이 사람들이 현 세대가 필요한 믿음의 싸인을 소지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stop하라고 하실 때까지 외치십시다. 기도 속에서….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이것이 믿는 자의 모습입니다.

 

그러면 기도 속에서 외치기만 하면 될까요? 오래 전 소개해 드린 이야기인데 이번 설교 준비를 하면서 다시 눈에 띄여서 말씀드립니다. 파베라는 이름을 가진 수도승이 한번은 말라죽은 나무 한 그루를 가져다 산 위에 흙을 파고 심었습니다. 그리고는 제자인 요한 콜로그에게 이 앙상한 나무에 매일 한 동이씩 물을 주되 나무에 다시 열매가 맺힐 때까지 주라고 일렀습니다. 그러나 물가는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저녁 때 다시 돌아오기 위해 아침 일찍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3년이 지난 후 나무는 싹이 나기 시작했고 열매를 맺기 시작했습니다.

노수도승은 열매를 따 교회의 수도자들에게 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어서 이리들 와서 순명의 열매를 맛보도록 하시오.”

 

어떻게 매일 3년을 그 먼 길을 다녀 올수 있었겠습니까? 단순히 외치기만 했을까요? 외치기만 한다면 믿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여기 저기 의심의 흔적이 남아 있더라도 믿음은 믿음입니다. 믿음은 곧 하나님께서 행하실 아름다운 일들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도사는 고된 삶의 시간 가운데 아름다운 생각을 늘 하면서 그 길을 다녔을 것입니다. 능치 못할 일들이 이루어질 것을 기대하면서…. 왜냐하면 주님께서 성스러운 모습으로 자기를 보고 계심을 늘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늘 아름다운 생각을 할수 있었고 아름다운 생각과 함께 길고 긴 길을 3년간 다녀 올수 있었을 것입니다. 어느덧 아름다운 생각의 열매들이 순종과 더불어서 맺히게 되었을 것입니다.

기도 중에 아름다운 생각을 이어가십시다. 아름다운 생각이 끊어질 때는 외치십시다. 믿음의 열매를 보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아픔 가운데 기도하는 자들을 성스럽게 여기십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성 어거스틴은 만일 지구 상에 자기만 혼자 살았다고 해도 하나님은 자기만을 위하여 주님을 보내 주셨을 거라는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왜 이런 고백을 할수 있었을까요?

성 어거스틴은 믿음과 의심이 뒤섞여져 있는 자신의 모습을 누구보다 잘 알았을 것입니다. 이런 자기를 성스럽게 보실수 있으신 분은 한 분 밖에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 한 분 이외에는 자신의 수치와 아픔으로 점철된 삶의 구원자가 없슴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주님이 자신의 고백을 들으신 것입니다. 세상에 아무도 이해할수 없는 자신의 의심 섞인 믿음의 고백을 들으신 것입니다. 자신의 고백을 믿음의 싸인으로 받으신 것입니다. 자신의 고백을 믿음의 싸인으로 받으신 주님을 생각할 때 주님은 자신 만을 위해서라도 이 땅에 내려 오실 하나님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더욱 담대하게 주님 앞에서 외쳤을 것입니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음을 도와 주소서.”

그는 오고가는 세대를 대표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 간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들이 보여드리는 믿음의 싸인 하나 만으로도 주님은 이 땅에 오신 것을 만족해 하십니다. 이 절규가 있는 곳에 새로운 기적을 베푸십니다.

 

그리고 지금은 믿는 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성스럽게 여기시며 말씀하십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들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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