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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싸인” 마가복음 7:24-30 (07/21/2019)

 

2차 대전 중 유럽전선에서 한 병사가 중상을 입고 급히 야전병원으로 후송되어 왔습니다. 상처가 너무 깊어 피를 많이 흘렸기 때문에 의식이 들락날락했습니다. 그 때에 한 군의관이 바쁘게 지나가다가 병사를 잠깐 살펴보고 무심코 “이 친구 내일 아침까지만 죽지 않고 버티면 살 가망이 있겠군,” 하고 혼잣말처럼 말했습니다.

그 순간 잠시 의식이 돌아왔던 병사의 귀에 이 한마디 말이 깊이 새겨졌습니다. “내일 아침까지만 죽지 않고 버티면 살아날 가망이 있다,”고 하는 의사의 이 한마디 진단에 필사적으로 매달려서 생사의 경계를 넘나들며 그는 춥고 긴 겨울밤을 잘 견디어 냈습니다. 해가 다시 뜰 때까지만 견디면 죽지 않는다는 희망이 그를 살 수 있게 만든 것입니다.

 

우리 삶에서 희망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려주는 이야기입니다. 아울러 희망은 이토록 소중하지만 결코 멀리 있지 않음도 일깨워 주는 이야기입니다. 바로 가까이에 있습니다. 그러면 요즘은 어디에서 이 소중한 희망을 찾을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 말씀의 배경은 주님께서 드물게 이방 땅인 두로 지방을 방문하셨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주님께서 3년간 공생애 생활을 하셨지만 거의 3년 내내 이스라엘 땅에 머무셨습니다. 잠시 외도를 하신 적이 있는데 바로 오늘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두로 지방은 이스라엘이 아닌 이방땅입니다. 요즘 미국식으로 하면 멕시코라고 생각해도 좋을듯 합니다.  

 

아마 주님은 이스라엘 본토에서 사역하시다가 좀 쉬시고 싶으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몰래 이방 땅 두로로 가서 한 집에 들어 가셨는데 이미 이방 땅에도 주님에 대한 소문이 퍼져 있어서인지 숨길 수가 없었습니다.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주님의 소문을 듣고 와서 주님 발 아래에 엎드립니다. 그런데 그 여인은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입니다. 곧 이방인 중에 이방인입니다. 이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방인들을 개와 같이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곧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람 취급을 하지 않는 이방 여인이 와서 주님 발 아래 엎드리면서 딸을 낫게 해달라고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주님이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27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주님께서는 거침 없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자녀라고 부르고 있고 이방인들을 개들이라고 여기고 계십니다.

그런데 어느 주석가는 예수님의 표현을 변호하는데, 그냥 길거리에 다니는 개들이 아니라 집에서 애지중지 사랑받고 키우는 house pet이라고 강조합니다. 물론 거리를 헤메고 다니는 개라고 하지 않은 것은 좋긴 좋지만 그래도 사람이 아니라 동물로 표현한 것은 더 이상 변호할수는 없다고 봅니다. 이에 애완용 개와 같은 여인은 어떻게 반응하죠? 28절 말씀입니다.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스스로 애완용 개임을 인정합니다. 보통 사람들 같으면 어떻게 했을까요? “그래도 당신은 이방인을 차별하지 않을줄 알았는데 당신도 똑 같군요,” 하면서 실망한채 픽 돌아서서 갔을텐데 도리어 역공을 하고 있습니다.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이에 주님은 부끄러워졌을까요? 이스라엘 사람들 처럼 이방인을 개라고 취급하셨고 이것을 들켰으니 말입니다. 29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주님은 스스로 애완용 개임을 인정한 여인의 말을 듣고 여인의 소원을 이뤄주십니다.

 

 곧 주님께서 딸을 낫게 하는 결정적인 이유를 주님은 당신의 능력에 두고 있지 않습니다. 그 결정적인 이유를 이방 여인 안에서 찾기를 원하셨습니다. 여인의 말에서 찾아 내신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마음을 녹인 그 말은 어떤 말이었을까요?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이 여인의 말을 통해 알수 있는 것은, 여인은 인종차별주의자들이 할수 있는 말에 쉽게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한 마디로 주님의 이 인종차별적인 말씀이 이 여인의 믿음을 박살나게 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더 굳세게 하였습니다. 주님은 “너와 같은 이방인은 내가 사랑하지 않는다” 하셨지만 여인은 도리어 주님을 놀라시게 하는 이 말을 하게 된 것입니다.

 

사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삶의 환경으로 인해 믿음이 자주 자주 흔들리곤 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처럼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 말씀을 하시면 그 앞에서 믿음이 안 흔들릴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 여인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고백한 것입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이 여인은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지만, 주님은 이스라엘 사람이지만 만민의 구주로 오신 분이시기에 결코 사람을 차별하시지 않으실 것을 믿었습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시는 분임을 믿은 것입니다. 자기와 같은 이방인까지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의 테스트에 넘어가지 않고 도리어 주님과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믿음의 고백을 한 것입니다.

 

곧 주님은 이방 땅에 와서 당신이 오신 참 목적을 알고 있는 여인, 이방 여인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결국 그 여인이 갖고 있는 믿음에 대한 댓가를 치뤄주십니다. 마음의 소원을 들어 주십니다. 딸을 낫게 해 주십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이 여인을 오고 가는 세대의 희망의 싸인으로 높이십니다. 이 여인은 이방여인이지만 메시야에 대한 올바른 믿음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메시야에 대한 올바른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오고 가는 세대의 희망의 싸인이 되는 것입니다. 인종이나 학벌이나 소유와 상관없습니다. 주님에 대한 바른 믿음을 소유한 자들은 언제 어디서나 절망 중에 빠진 사람들을 위한 희망의 싸인이 되는 것입니다.

 

좀 억측 같지만, 서두에 한 군의관 이야기를 드렸습니다. 그 군의관의 지나가는 말 한 마디가 희망을 주었다고…. 바로 주님에 대한 믿음을 소유한 사람들의 지나가는 말 한 마디가 이웃에게 희망을 주게 되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우리도 이웃을 위한 희망의 싸인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의 지나가는 한 마디가 이웃에게 희망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웃을 위한 희망의 싸인이 되기 위해서는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을 소유해야 합니다. 주님은 온 인종을 위한 메시야임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메시야에 대한 아름다운 믿음과 소망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환경이 어떨지라도…. 때로는 주님께서 우리를 섭섭하게 하는 말씀을 하시더라도….

어떠한 테스트에도 넘어가지 마시고 끝까지 주님의 자비와 사랑을 믿고 의지하셔야 합니다. 주님께서 온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고 계심을 믿고 확신하셔야 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확신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이럴 때 희망의 싸인이 되어 갑니다.

 

최근 Stanford대학교에서 재미 있는 연구 결과를 보고했습니다. 하루 30분씩 불평하는 사람들의 뇌가 줄어 든다는 연구 결과를 보고했습니다.

사실 놀랍게도 평균 사람은 1분에 한번씩 불평을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쌓이면 뇌가 줄어드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합니다. Stanford대학교에서는 하루 30분씩 불평케 하고는 결과를 보고했는데 사람의 기억력과 배움 및 감정을 조정하는 뇌인 hippocampus가 줄어드는 것을 찾아 낸 것입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이것은 뒤바꿀수 있다는 것입니다. 불평에서 감사로 삶의 태도를 바꾼다면….

 

그런데 아무나 불평에서 감사로 삶의 태도가 바뀌어질까요? 주님에 대한 바른 믿음을 소유하지 않고는 바뀌어질까요?

 

저는 확신합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뇌는 결코 줄어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최고의 주님을 향한 믿음을 갖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그녀의 믿음은 그녀의 뇌를 늘 건강하게 했을뿐 아니라 온 세상의 희망의 싸인이 되게 한 것입니다.

 

주님을 향한 믿음으로 희망의 싸인이 되신 분들의 삶에는 무언가 다른 것을 느끼게 됩니다. 저희 교회와 깊은 인연이 있는 뉴져지 찬양교회 허봉기 목사님이 계십니다. 허 목사님께서 다음과 같은 글을 쓰셨습니다.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노래를 하면, 사람들이 신이 주신 목소리라고 감탄을 한다.

나도 그런 줄 알았다.

어느 날 번뜩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내 목소리는?

놀랍게도, 아니 새삼스럽게 놀랄 일도 아니게

내 목소리도 역시 신이 주신 목소리였다.

사람들이 내 목소리를 우습게 여긴 나머지

신이 주신 목소리라고 딱 말해 주지 않았을 뿐이다.

모든 목소리가 신이 주신 목소리인 것을

파바로티 등속의 사람들 것만 신이 주신 목소리라니….”

 

 사실 허 목사님은 몇 년전 귀한 따님을 갑자기 하늘 나라에 보내게 되었습니다. 최근에 당신의 책을 수정해서 다시 내셨는데, 따님을 잃은 아픔도 표현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책에 신이 주신 목소리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십니다.

따님을 데려가셨을지라도 당신에게 주신 목소리는 신이 주신 목소리임을 계속 자랑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허 목사님이 이런 고백을 할수 있게 된 것은 바로 수로보니게 여인 때문이 아닐까요? 주님께서 어떻게 반응하시던 이방 여인은 당신도 신이 주신 삶을 살고 있음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모욕적인 테스트도 이겨냈습니다. 정말로 신이 주신 삶을 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온 인류를 위한 희망의 싸인이 된 것입니다.

 

감사하게도 올해 네 번째 뉴 멕시코 단기 선교단을 파송합니다. 파송하는 목적은 단 하나입니다. ‘희망의 싸인.’

우리 선교단원들의 지나가는 한 마디가 그들에게 희망을 주게 하기 위해서 올해도 단기 선교단을 파송합니다.

 

단기 선교단 여러분,

올해도 우리가 여러분을 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영원한 소망이 되시는 주님께서 보내시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만큼 여러분은 그들에게 희망의 싸인이 될 것입니다. 어떠한 환경 가운데서도 주님을 향한 믿음 더욱 굳세어 지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주님은 한 가지를 더 원하십니다. 그들도 이미 이 세대를 위한 희망의 싸인이 됨을 확인시키기 위하여 여러분을 보내십니다.

사실 그들이 인디안 보호 지역에 살면서 오늘까지 굳굳하게 살수 있었던 것은 그들 안에 수로보니게 여인의 아름다운 믿음이 있어서가 아닐까요? 그 믿음이 적게나마 있었기에 오늘까지 그 어려운 시간을 이기고 견뎌내지 않았을까요?

 

그러니 그들 안에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을 찾고 맛보고 감격하기 위하여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함께 온 세계의 희망의 싸인이 된 것을 기뻐하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뉴 멕시코는 어떻게 보면 미국에서는 이방 땅과 같은 곳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로 그곳에 미국을 위한 희망의 싸인이 숨겨져 있음을 믿고 떠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나는 나바호 원주민들이 21세기 수로보니게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이 시대의 희망의 싸인입니다. 이들로 인하여 미국은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슬쩍 스쳐지나가는 희망의 멧세지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수고로 인해 그들이 미국의 희망의 싸인임을 일깨워질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놀라운 역사가 이번 선교 여행을 통해 나타날줄 믿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었고 귀신이 나갔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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