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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나라” 이사야 11:6-9 (10/06/2019)

 

얼마 전 제가 매일 접하는 Goodnews.com site에서 최근에 UCLA대학교가 어떤 기관으로부터 기금을 받아서 친절에 대한 연구를 하는 연구소를 만들었다는 소식을 읽게 되었습니다. 소위 science of kindness라고 해서, 친절이 사회에 어떤 유익을 끼치는지를 잘 연구해서 친절한 사회를 만들어가자는 동기인 것 같습니다.

어쩌면 요즘 사회가 늘 갈라지고 특히 정치적 사회적으로 양분화 되어 있는 것을 안타까워 하는 나머지 어느 기관에서 큰 액수를 기증한 것 같습니다. 인문학 사회학 그리고 의학까지 총괄해서 연구가 진행된다고 합니다. 저는 이 뉴우스를 접하면서 학교에서도 친절에 대해서 강조하기 시작한 것을 보면서 희망적인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편 몇일후 뉴스 앵커들이 이 뉴우스에 대해서 의견을 나누는 것을 TV를 통해 보게 되었습니다.

먼저 한 사람이 말하기를, 원래 ‘친절’에 대해서는 교회가 가르쳐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말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기 시작했습니다. 순간 저의 정신을 번쩍 뜨이게 되었습니다. 사실 친절은 좋은 것이고 모든 사람들이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동안 교회를 통해서 친절을 배웠는데 이제는 교회가 그 기능을 거의 잃어버리지 않았는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편 또 다른 앵커가 말을 잇습니다. 자기는 가정에서 친절을 배웠다는 것입니다. 더 큰 충격을 느꼈습니다. 교회도 가정도 친절을 더 이상 가르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학교가 교회나 가정이 해야 하는 일을 대신 하고 있는 사회적 상황 안에서 주님은 저희들에게 어떤 말씀을 하시길 원하실까요? 우리들에게 친절에 대해서 다시금 가르치라고 말씀하실까요?

주님은 오늘 저희들에게 한 그림을 보여 주십니다. 6-8말씀 다시 봉독해 드립니다. 눈을 감고 머리로 그려 보시면 더 좋을줄 압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어느 분이 이 말씀을 상상하면서 다음과 같이 그림을 그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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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의 제목을 저는 이렇게 생각하고 싶습니다.

‘평화의 나라.’

 

그런데 이런 세상이 과연 가능할까요? 물론 가능하겠죠. 그래서 이사야를 통해 말씀하시고 계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로써 알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세상은 단순히 친절의 나라가 아닙니다. 평화의 나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원하는 것은 친절의 나라를 훨씬 뛰어 넘는 평화의 나라이다.”

물론 평화 안에는 친절도 포함되겠지요. 그러나 친절 안에 평화가 포함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는 이러한 평화의 나라를 이룩할수 있을까요?

오늘 세계 성찬 주일이자 정의 평화 환경 주일을 맞이하여 우리가 어떻게 평화의 나라를 이룩할수 있는지 말씀을 상고하며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사실 오늘 본문 말씀 첫절인 6절 말씀은 ‘그 때에’로 시작합니다. ‘그 때에’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때’가 언제일까요?

오늘 본문 말씀으로는 넣지 않았지만 사실 그 전 귀절인 1-5절 말씀도 오늘 본문 말씀으로 삼아야 합니다. 1-5절 말씀이 이루어질 때 ‘평화의 나라’라는 그림이 현실화된다는 것입니다. 11:1절 말씀을 보면,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이새는 다윗의 아버지이죠. 곧 다윗의 자손 중에서 한 싹이 나서 결실할 것인데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곧 평화의 나라는 주님의 오심과 함께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친절의 나라는 사람의 힘으로 얼마큼 가능합니다. 그러나 평화의 나라는 오직 주님께서만 이루실 수 있습니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2절 말씀입니다.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주님만이 평화의 나라를 이루실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영 곧 지혜와 총명과 모략과 재능의 영을 부여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영을 부여 받으셨는데 못 이루실 것이 있겠습니까? 이런 영을 받은 자들을 통해서 표범과 어린 염소가 함께 눕는 역사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면 평화의 왕이신 주님께서는 어떻게 평화의 나라를 이루실까요? 3절 말씀입니다.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아무리 여호와의 영이 임하여도 그 길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평화의 나라로 가는 길은 인간의 생각과는 많이 다를수 있기 때문임을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생각으로 이해되는 과정을 거친다면 과연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고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는 놀라울 일이 생길수 있을까요?

친절의 나라로 가는 길은 우리들의 생각으로 이해되는 과정을 당연히 거칠줄 압니다. 이번에 UCLA에서 친절에 대한 연구소를 개설했다는데 아마 이들은 자기들이 이해하는 영역 안에서 연구하게 될줄 압니다.

그러나 저는 단언합니다. 우리가 이해가 되는 길로는 평화의 나라로 갈수 없다는 것입니다. 평화의 나라로 가는 길은 인간이 이해가 안 되는 길일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친절 연구소에 관한 기사는 Goodnews.com에 나올수 있지만 평화의 나라로 가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이해가 안 되는 길이니 말입니다.

이는 자연 세계를 통해서도 알수 있습니다. 자연 세계에도 이해가 안 되는 점을 쉽게 관찰하게 됩니다.

식물 중에 대표적인 것이 소나무입니다. 소나무는 다른 나무들이 근처에 오지 못하게 어떤 물질을 발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혼자 살겠다는 것입니다. 친절과는 거리가 멉니다.

동물 중에 대표적인 것은 뻐꾸기입니다. 저와 비슷한 나이 또래의 어른들은 모두 뻐꾸기를 좋게 생각하실줄 압니다. 어릴 때 늘 불렀던 노래가 큰 역할을 하기 때문일줄 압니다.

오빠 생각이라는 동요의 가사에 나옵니다.

“뻐꾹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 제”

그런데 실상 뻐꾸기는 얌체 중에 얌체 아닙니까? 뻐꾸기는 에미 애비새들이 알을 품는 고생을 하지 않습니다. 개개비 등 몇 종류의 새들을 등쳐 먹는다고 할까요?

애비가 개개비에게 교란 작전을 피고 있을 때 에미가 개개비 둥지에 알을 낳습니다. 개개비 에미가 알을 푸고 있을 때 애비가 와서 교란 작전을 피면 개개비 에미가 뻐꾸기 애비를 쫓아 갑니다.

그 순간을 틈타서 에미가 개개비 둥지에 가서 알을 낳고는 개개비 알 하나는 둥지 밖으로 버립니다. 순진한 개개비는 뻐꾸기 알을 품어 부화하게 하고 부화된 다음에는 계속 먹이를 날라다 줍니다. 자기 새끼인줄 알고…. 그러면 우리는 어서 속히 뻐꾸기를 죄의 상징으로 여기고 자연 세계에서 없애야 할까요?

 

자연세계를 보면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창조하셨나 심각한 고민을 하게 합니다. 특히 친절의 나라로 향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도저히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이해할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런 자연 세계를 보면서 오늘 이사야의 말씀을 읽으면 고개가 떨구어집니다.

“그의 눈에 보이는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 가운데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인간 세계뿐 아니라 자연 세계에도 비일비재하게 많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확신합니다. 눈에 보이는대로 심판하지 아니하고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지만 한 가지 방향은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4, 5절 말씀입니다.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인 것이며,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

 

공의로 향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의를 이루시되 당신의 성실하심으로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무엇일까요? 평화의 나라입니다. 그래서 6-8절 말씀에 평화의 나라를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뻐꾸기와 개개비가 함께 손의 손을 잡고 날아갈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소나무 아래 다른 나무들도 자라는 때가 올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평화의 나라로 가는 길은 쉽지 않습니다. 많은 오해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니 주님은 어떻게 하셨을까요? 3절 상반절 말씀을 다시 봉독해 드립니다.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주님께서 많은 오해를 받을수 있는 그 길을 끝까지 가실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경외함을 당신의 즐거움으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을 즐거움으로 삼을 때 우리는 세상의 많은 오해를 이겨내며 공의의 세계를 이룩할수 있는 것입니다. 이 때 평화의 나라가 세워집니다.

 

그러면 한 가지 궁금한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을 즐거움으로 삼는 자들의 모습은 어떻게 나타날까요? 저는 앞으로 이루어질 평화의 나라에서 그들의 모습을 찾아 내었습니다.

 

평화의 나라는 어떻게 보면 유머가 가득찬 나라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젖먹이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니 말입니다. 평화의 나라가 유머가 가득한 나라이면 평화의 나라로 가는 길도 유머로 가득한 길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정평환 주일이니 오늘 여러분을 동물의 왕국으로 초대합니다.

 

그런데 ‘물고기’하니 생각나는 게 있습니다. 지난 수요 여성 성경공부시 창세기 1장을 공부했습니다. 생각해 보니 제가 25년 목회를 하면서 한번도 창세기 1장으로 설교를 한 기억이 없습니다. 성경공부를 인도하는 것도 처음입니다. 오늘 설교와 연관해서 깊은 인싸이트를 얻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제일 먼저 만드신 동물이 있습니다. 창세기 1:20절에 보면 물고기입니다. 물고기가 하나님께서 처음 만드신 동물입니다. 물고기를 만드신 후에 새를 만드시고 땅의 짐승들을 차례로 만드십니다.

왜 하나님께서 물고기를 처음 만드셨을까요? 왜 유연한 물고기를 모든 동물의 조상으로 만드셨을까요?

 

이기주 작가가 유머의 어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글을 썼습니다.

“유머는 라틴어 우메레(umere)에서 유래했다. 물속에서 움직이는 유연한 성질을 지닌 물체를 지칭한다.”

유머는 물고기에서 왔다는 것입니다. 옛날 사람들은 물고기에서 유머를 배웠고 그래서 많은 오해도 이기면서 살아 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알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한 DNA는 유머임을 알수 있습니다. 시작도 그렇고 자연 세계의 마지막도 짐승들이 서로 웃으며 노는 장면으로 마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평화의 세계의 모습입니다. 언젠가 온 자연세계가 이처럼 유머로 가득찬 세상이 될 것입니다. 누구를 통해서…? 하나님을 경외함을 즐거움으로 삼는 자들을 통해서 곧 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유머로 넘길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때로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뿐 아니라, 우리는 자주 자주 이웃이 하는 일들도 오해합니다. 왜냐하면 평화의 나라로 가는 길은 우리들의 생각을 넘을 때가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친절의 나라로 가는 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물고기처럼 유연성 있게 헤엄쳐 나가십시다. 이 때 평화의 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친절의 나라를 넘어서…. 암소와 곰이 함께 먹는 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유머가 온 세상을 웃기게 합니다. 온 세상 동물까지도…. 그래서 암소와 곰이 웃으며 함께 먹는 나라가 도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유머의 시작은 물고기가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이 되심으로 온 세상을 밝게 웃게 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유머를 본받아 세상에서 승리하십시다.

‘여호와 닛시.’

 

말씀을 거둡니다.

프랑스의 신부이자 고생물학자인 테야르 드 샤르댕은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유머는 남을 웃기는 기술이나 농담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유머는 한 사람의 세계관의 문제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의 세계관은 유머였습니다. 그래서 물고기를 제일 먼저 창조하셨습니다.

물고기를 보면서 배우십시다. 특히 우리는 오해의 바다 한 가운데 살고 있으니 말입니다. 섭섭한 일을 만날 때마다 생각해 봅시다. 오해일꺼야…. 우리는 오해의 바다를 유연성 있게 헤엄치며 지나게 될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이해가 안 될 때 하나님을 경외함을 즐거움으로 삼으며 ‘무엇인가 오해가 있을꺼야’ 생각하며 미소를 보내십시다. 이 때 친절을 넘어 평화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이 때 온 세상 자연 세계도 완성이 되어 갑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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