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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기는 공동체” 마태복음 18:15-20 (01/05/2020)

 

192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미국 코메디계를 주름잡던 그루초 마르크스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루초가 어느 날 로스앤젤레스 거리를 걷고 있었습니다. 한 신부가 로만칼라 차림으로 어느 번잡한 거리를 지나가다가 그를 발견하였습니다. 신부는 그에게 다가가서 물었습니다.

“당신은 그루초 마르크스가 아니신가요?”

“네, 맞습니다. 신부님.”

신부님이 말합니다.

“당신이 이 세상에 즐거움과 웃음을 선사한 데 대해서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그러자 코메디언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신부님, 저는 당신이 이 세상의 모든 즐거움과 웃음을 빼앗아 가신 데 대해 감사드리고 싶군요.”

 

두 가지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는 말 같습니다. 액면 그대로 받는다면, 종교가 세상에서 웃음을 빼앗아 갔기에 자기 같은 코메디언들이 먹고 살게 해 줘서 감사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교회가 사람들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즐거움과 웃음을 빼앗아가고 있음을 지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얼마전 희망의 신부 차동엽 신부님의 책에서 위에 글을 접해 보았는데 차 신부님은 교회는 즐거움과 웃음을 빼앗아가고 있는 것에 공감하지만 다른 면으로 공헌을 하는 면도 있다고 당신의 생각을 펼쳐 가고 계십니다.

종교인과 비종교인의 범죄 발생률을 비교해 보았는데 2006년도 대검찰청 통계를 보면 비종교인은 15명당 1명, 불교는 31명당 1명, 개신교는 39명당 1명, 천주교는 105명당 1명으로 나왔다고 합니다. 개신교가 불교보다 조금 낫기는 하지만 천주교에 비해서 아주 못합니다.

곧 종교가 비록 사람들 사이에 즐거움과 웃음은 빼앗아 갔을지 몰라도 사회 기강을 위해서 큰 일을 감당하고 있다고 차동엽 신부님은 피력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현재 이대로 만족해야 하나요? 웃음과 즐거움은 빼앗아 가도 사회 기강을 세우는데 공헌을 했으니…. 물론 천주교는 사회 기강을 세운다고 말할수 있지만 저희 개신교는 불교와 대동소이합니다. 하여튼 이 모습이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오늘 교회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신년주일을 맞이하여 본문을 상고하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주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종교는 사회기강을 잡는데는 큰 기여를 하고 하였음을 인정하셨습니다. 15절 말씀 입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한 교우가 죄를 범하면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고 개인적으로 권고할 것을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런데 듣지 않으면 어떻게 하죠? 16절 말씀입니다.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한 사람의 말을 듣지 않으면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 세 증인을 세우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는 모세 율법을 따른 것입니다. 신명기 19:15절 말씀을 보면,

“사람의 모든 악에 관하여 또한 모든 죄에 관하여는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나 또는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며.”

주님은 두 세 사람의 소중함을 인정하십니다. 두 세 사람으로 안 되면 교회가 최종으로 사회 기강을 잡아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교회에 말하고 끝내 이방인과 세리 같이 여기라고 말씀하십니다. 교회는 사회 기강을 잡는데 아주 귀한 역할을 감당해야 함을 강조하십니다.

 

한편 이렇게 말씀하신 주님께서 돌연 화제를 바꾸십니다. 18절 말씀입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왜 갑자기 화제를 바꾸실까요? 아마도 주님은 교회는 사회 기강을 잡는 것보다 더 소중한 곳임을 말씀하시기 위함이 아니었을까요?

당연합니다. 믿는 자들은 남의 죄를 밝혀내는 것이 다가 아님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그 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게 하는 것이 바로 믿는 자들에게 주신 특권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두 세 사람의 모임이 그동안 이웃을 정죄하는데 너무도 많이 사용되어 왔음을 주님은 보셨을줄 압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19절 말씀입니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 세 사람은 증인을 채우기 위한 숫자가 아님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두 세 사람은 하나님의 기적을 보게 하는 숫자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20절 말씀입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당신의 이름으로 두 세 사람이 모일 때 하늘과 땅을 뒤집는 역사가 일어날 것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개신교는 그동안 모이기를 힘쓰자는 말씀을 인용하면서 얼마나 모임을 강조했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늘 두세 사람이 이상이 모여왔고 모이고 있는데 왜 이 놀라운 주님의 역사를 체험하지 못할까요? 아니 도리어 코메디언에게 세상에서 즐거움과 웃음을 빼앗아 가서 자기들의 직업이 소중하게 되었다고 감사를 받게 되었을까요?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다고 했는데 실은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다고 생각만 했지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 것이 아니었나요? 그러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이것만 해결되면 우리는 정말로 사회 기강만을 잡아가는 교회가 되지 않고 이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는 놀라운 교회가 되지 않을까요?

 

최연수 시인의 ‘동행’시가 오늘 본문 말씀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건너가거나

건너오거나

두 길 밖에 없다고 생각하지 마라

뒤따라 갈 수도 있고

나란히 갈 수도 있다.

 

다행이다, 너와 함께여서

 

이 시를 접하고 저는 무릎을 쳤습니다. 동행은 어쩌면 뒤따라 가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가 나란히 간다고 생각하는데 과연 나란히 갈수 있을까요? 누군가는 언제나 앞서게 되어 있습니다. 누군가는 뒤서게 되어 있구요…. 처음에는 어깨동무를 하고 간다고 하지만 불편합니다.

곧 동행할수 있는 방법은 하나인 것 같습니다. 나란히 가다가 필요할 때는 뒤따라 가는 것입니다. 그 때 동행이 이루어집니다.

 

오래전 어느 목사님이 저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건너 건너 아는 분이었습니다. 저에게 당신의 목회철학을 소개해 주었는데 바로 ‘어깨동무’ 목회였습니다.

아주 너무 좋아 보였습니다. 미국 여러 곳에서 어깨동무 목회를 하신다는 소문도 후에 들려 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는 더 이상 소식이 끊겼습니다. 어깨동무 사역을 거두신 것 같습니다.

 

어깨동무는 어릴 때 친구들과 놀 때는 정말로 좋습니다. 그러나 거친 세파에서는 어깨동무가 통하지 않습니다. 함께 갈수가 없습니다. 어깨동무는 했지만 자꾸 마음은 친구보다 앞서 가고 싶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깨 동무한 어깨가 견디지 못하는 것입니다. 곧 함께 갈수 있는 길은 하나 뿐이 아닐까요? 서로 따라 가는 것입니다.

 

자 다시 통계로 돌아갑니다. 천주교인들의 범죄율은 105명당 1명 개신교는 39명당 1명입니다. 천주교인들은 말씀은 개신교인들보다 잘 모르지만 따르기를 잘합니다. 반면 개신교는 온갖 성경공부를 통해 말씀은 많이 압니다. 그것이 주님을 따르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러다 보니 세상에 웃음도 빼앗아 가고 사회 기강에도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물론 이해가 됩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은 얼마든지 하겠는데, 이웃을 따르는 것 쉽지 않습니다. 오래된 교인들일수록 더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다. 오래된 교인이 새로 믿는 교인을 따른다는 것은 거꾸러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땅과 하늘이 뒤바뀌어집니다.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인다는 것은 하늘과 땅이 뒤집어지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거꾸러 행하는 자들의 모임을 통해 일어납니다.

 

교회뿐 아니라 사회에서도 이런 현상은 일어납니다. ‘제로베이스 사고’라는 용어를 얼마전 처음 책에서 보았는데, 이는 경험 없는 자가 어떤 때는 더 좋은 통찰력을 가질 수 있다는 뜻에서 나온 말이라고 합니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항공우편사인 Fedex인데, 예일대 학생이 고안해내었는데 교수님에게는 C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자기의 아이디어를 포기하지 않아 끝내 세계적인 회사가 되었습니다.

경험이 없는 자를 소중히 여길 때 오는 세상을 뒤집는 역사를 보여준 케이스입니다.

 

교회도 그렇지 않을까요? 경험이 없는 자를 소중히 여기는 공동체가 될 때 세상을 뒤집는 역사가 일어나지 않을까요? 두 세 사람이 서로를 따를 때 이러한 공동체가 이루어집니다. 이 때 세상을 섬기는 교회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이 때 이들은 사회 기강만 잡는 자들이 아닙니다. 하늘을 움직이는 자들이 됩니다. 하늘을 가꾸는 자들이 됩니다. 하물며 이 땅은 어떻겠습니까? 웃음이 필요한 곳에는 웃음을 선사하고 울음이 필요한 곳에서는 함께 울고 기적이 필요한 곳에는 기적을 행하고 위로가 필요한 곳에는 위로를 베푸는 자들이 되지 않을까요? 코메디언들에게는 죄송하지만 그들이 더 이상 필요없는 사회를 만들게 되지 않을까요?

 

오늘 신년주일을 맞이하여 ‘섬기는 공동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립니다. ‘섬기는 공동체’는 올해 저희 교회 표어입니다. 두 가지 의미로 정했습니다. 하나는 교회내적으로 또 하나는 교회외적으로 의미하는 바가 있습니다.

교회 내적으로는 서로를 섬기는 아니 서로를 따르는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이 때 우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는 역사가 펼쳐질 것입니다.

 

그런데 이 놀라운 역사를 우리 교회 안에서만 이루어진다면 의미가 없습니다. 아니 이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곧 세상을 섬기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때로는 세상에 웃음을 주어야 하고 때로는 울음이 있는 곳에 가서 함께 울어야 하고 주님의 손길이 되어 주의 능력이 필요한 일을 감당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물론 지금까지도 힘 닿는대로 이런 귀한 일을 감당해 왔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어깨동무 수준으로 하였을지도 모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가 갖고 있는 직책을 넘어 서로를 따르려는 마음으로 한 해를 보낸다면 더 귀한 역사를 펼치게 되지 않을까요?

 

지난 번 교역자 모임을 하며 대화를 나누는데 한 목사님이 전에 시카고에 사셨는데 그곳은 크리스마스 츄리가 온 동네 집집마다 요란했는데, 보스톤에 와 보니 시카고에 비해서 초라하고 적은 숫자의 집이 장식되어 있음을 느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대답이 무엇이었겠습니까? 이곳은 유대인이 많아서….

 

사실 저희 교회  catch phrase 중 하나가 B 40입니다. B40라고 잡았던 이유는 Brookline 주민의 40%가 교인이 되길 바란다는 뜻으로 잡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왜 40…? Brookline 주민 중 유대인이 한 때 38%였습니다. 물론 유대인들 상대로만 전도하자는 것이 아니고 상징적 숫자로 잡아 놓았었습니다. 그래서 오래 전에는 한국 문화 축제를 유대인을 초대해서 한 적도 있었습니다.

B40. 가능합니다. 우리가 섬기는 공동체가 된다면…. 서로를 따르는 공동체, 이웃을 섬기는 공동체가 된다면…. 우리 안에서 거꾸로 가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세상을 뒤집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 모든 것은 거꾸로 가는 두 세 사람의 공동체에서 시작됩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캘리포니아에 있는 한 교회가 1년간 모은 자선기금을 얼마전 LA에 사는 병원비를 지불하지 못하는 주민들의 병원비를 갚아 주었습니다. 주민 약 5,500명의 $5.3 million의 빚을 갚아 준 것입니다. 한 교회가 이렇게 큰 돈을 갚아 준 것을 보면 정말 대단히 큰 교회라고 생각이 들텐데 그렇지는 않습니다.

사실RIP Medical Debt 이라는 기관이 있는데 이 기관에서는 병원비를 사서 값싸게 갚는 기관입니다. 100:1의 비율로 사고 팔고 합니다.

곧 약 5백만불의 빚을 갚으려면 5만불이 필요합니다. 다시 말해 5천불이 있으면 50만불의 빚을 갚아 줄수 있다는 것입니다.

 

두 세 명이 마음을 합하면 그들의 수중에 있는 돈의 100배를 갚아 줄수 있는 길은 이미 열려 있습니다. 하물며 두 세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서로를 믿고 따른다면 100배가 아니라 천배 만배를 갚아줄수 있는 역사가 펼쳐지지 않을까요? 우리가 섬기는 공동체가 될 때 이러한 놀라운 일은 언제든지 가능한 것입니다.

 

주님은 두 세명이 모여 한 사람을 심판하는 것 보다는 두 세 명이 당신의 이름으로 모여 하늘과 땅을 뒤집는 일을 하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축복에 올해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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