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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하라” 야고보서 1:9-11 (02/23/2020)

 

Abraham Heschel이라는 유명한 유대교 랍비가 있습니다. 특히 그 분의 ‘안식’이라는 책은 한글로도 번역이 되어 한인들에게도 꽤 알려진 분입니다. 한 번은 심장마비를 일으켜 많은 어려움을 겪었는데 한 제자가 그를 방문한 후 다음과 같은 글을 썼습니다.

“1972년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 수년전에 그는 심한 심장마비를 겪었을 때 그를 방문하였습니다. 심장마비에서 온전히 회복이 되지 않았는데 그는 병고를 치룬 후 처음으로 방문한 저를 맞이하기 위해 침대에서 나오셨습니다. 많이 쇠약해 보였습니다. 그는 천천히 말을 하셨습니다.

“Sam, 내가 의식을 회복했을 때 처음 든 생각은 절망과 분노가 아니라 감사의 마음이었지. 나의 삶의 모든 순간에 대한 감사. 나는 떠날 준비가 되었지. 나는 생각했어,

“나를 데려가 주세요. 나는 삶 속에서 많은 기적을 보았습니다.”

사실 이것은 어느 책에서 내가 한 말의 의미였어.

“나는 성공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신비(wonder)를 구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나에게 신비를 주었습니다.””

 

헤셀 랍비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감동의 이야기입니다. 그의 삶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나는 성공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신비를 구했습니다.” “I asked for wonder.” 그는 신비를 구했기에 많은 기적을 체험하면서 살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비를 구하며 사는 삶은 어떤 삶일까요? 세상을 등지고 산 속에 들어가던가 수도원에 들어가는 삶을 말하나요?

사실 우리 믿음의 선배들도 성공보다는 신비를 구했습니다. 그러나 유대교와는 달리 구체적으로 구했습니다. 신비를 구하기 위해 사순절을 지키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곧 믿음의 선배들은 주님의 고난과 부활의 신비를 체험하기 위해 부활절 전 주일을 뺀 40일을 사순절로 지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사순절 기간 참회와 절제와 구제를 하였습니다.

그러면 왜 참회와 절제 및 구제를 하기 위해 40일이라는 시간을 정했을까요? 사실 우리는 참회와 절제와 구제는 365일 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특별히 40일 이라는 시간을 정해 놓은 이유가 있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40일이라는 시간을 정하게 된 이유는 주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40일간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신 것을 기념하기 위한 것입니다.

여기에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영원하신 주님께서 40일이라는 시간 속에서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주님께서 시간 속으로 들어 오셨습니다. 그리고 시간의 흐름에 자신을 맡기셨습니다. 이것이 신비입니다. 이 신비에 동참하기 위해서 믿음의 선배들은 사순절을 지키기 시작한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다. 주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신 분이니 눈 깜짝하는 사이에 모든 시험을 다 받으시고 승리하실수도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것을 택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겸손히 시간 안으로 들어 오셨습니다. 그래서 시간의 흐름 속에 자신을 내 던지셨습니다. 시간의 흐름 속에 자신을 내던지셨기에 주님은 시험을 받으며 광야에서 40일을 지내신 것입니다. 그로 인해 주님은 시간의 위대함과 소중함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이 위대한 시간은 단지 인간의 행복만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때로는 광야의 시험을 위해서도 필요함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하여튼 시간이 얼마나 위대하면 주님께서 시간의 흐름 속에 들어 오셨겠습니까?

아니 이렇게 표현하는게 더 나을 것 같습니다. 시간이 소중하기에 주님은 시간 안에 들어 오셔서 고난을 받으셨고 그 결과 시간을 위대하게 만드신 것이 아닐까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이 사순절 기간 주님께서 회복하신 시간의 위대함을 다시금 누리면서 때로는 주님의 고난에 때로는 주님의 부활에 동참할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상고하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9, 10절 말씀입니다.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그가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한 마디로 우리가 자랑할 때 우리는 시간의 위대함을 누리게 됩니다. 아니 시간안에 사신 주님의 위대함을 누리게 됩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가 사순절을 지키는 이유는 자랑하기 위함입니다. 위대하신 주님이 시간 안에 들어 오셨고 시간 안에서 고난을 당하셨음을 자랑하기 위함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도 함께 시간 안에 사는 자로서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도 위대한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일년 내내 하여야 하지만 특별히 40일을 정하여서 주님의 위대함, 시간의 위대함, 그리고 시간 안에 사는 우리의 위대함을 다시금 누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자랑해야 하나요? 야고보는 낮은 형제와 부한 자를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낮은 형제는 지위가 낮기도 하지만 그로 인해 가난한 자들을 뜻한다고 보면 될줄 압니다. 부한 자들은 지위도 높고 돈도 많은 자들이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요즘 우리가 사는 사회와 별로 다를바가 없습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합니다. 낮은 자들은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자들은 낮아짐을 자랑하라고 말씀합니다. 이럴 때 신비함을 체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곧 야고보가 주는 멧세지는 우리 각자는 주어진 환경에서 늘 자랑거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시간 속에 사는 모든 자들은 자랑거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시간 속으로 들어 오셨으니 함께 같은 시간 안에 사는 자들이니 자랑거리가 다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아니 주님께서 시간 속으로 들어 오셔서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셨기에 이제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랑거리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한편 위대한 시간 안에서 자랑하지 않을 때 시간은 폭군으로 변하는 것 같습니다. 11절 말씀입니다.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

자랑하지 않고 시간을 보낼 때 모든 것이 언젠가 쇠잔해 버리고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시간은 우리를 쇠잔케 하는 도구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시간이 폭군이 아니라 도우미가 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죠? 자랑해야 합니다. 무엇을…?

 

먼저 낮은 자 곧 가난한 자들에게 말씀합니다.

“너의 높음을 자랑하라.”

가난하게 낮은 자로서 사는 시간을 주신 이유는 가난한 자로서 최고의 높은 노래를 부르라는 것입니다. 높은 그림을 그리라는 것입니다.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춤을 추라는 것입니다. 이는 가난한 자들에게만 주어진 특권이라는 것입니다.

곧 부활하신 주님을 생각하면서 언젠가 동참할 부활의 놀라운 축복의 세계를 노래로 그림으로 춤으로 표현하는 멋진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들에게 시간을 주신 이유는 언젠가 부자가 되기 위하여 시간의 노예가 되어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주어진 환경에서 최고의 멋진 예술가가 되라는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곧 가난한 자들은 부자들 보다 자기 안에서 높아지시는 주님을 자랑하는 도구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삶을 실천한 사람 중 한 사람이 시간이 가면 갈수록 전 세계인으로부터 각광을 받고 있는 화가 고흐입니다. 그는 찌든 가난 가운데 동생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씁니다.

“나는 두 가지 생각 중 하나에 사로잡혀 있다. 하나는 물질적인 어려움에 대한 생각이고, 다른 하나는 색에 대한 탐구다. 색채를 통해서 무언가 보여줄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서로 보완해 주는 두 가지 색을 결합하여 연인의 사랑을 보여주는 일, 그 색을 혼합하거나 대조를 이루어서 마음의 신비로운 떨림을 표현하는 일, 얼굴을 어두운 배경에 대비되는 밝은 톤의 광채로 빛나게 해서 어떤 사상을 표현하는 일, 별을 그려서 희망을 표현하는 일, 석양을 통해 어떤 사람의 열정을 표현하는 일, 이런 건 결코 눈속임이라 할 수 없다. 실제로 존재하는 걸 표현하는 것이니까. 그렇지 않니.”

그는 도리어 물질적인 어려움 가운데서 최고의 높은 삶을 살아 갈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이런 예술 작품을 만들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요즘도 한국 가면 꼭 만나게 되는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은 제가 대학 다닐 때부터 알고 지내는 분인데 물론 그는 대학 근처에도 가 보신 분이 아닙니다. 재정적으로도 여러번 제가 도울수 밖에 없었던 분입니다.

언젠가는 한국 방문시 만나서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나오는데 저는 계산을 하고 문으로 나서는데 이 분은 식당에서 일하시는 분들에게 90도로 인사를 하면서 축복의 말을 하고 나오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저는 순간적으로 예수님도 저러지 않았나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노래하는 자가 아니면 할수 없는 행동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당신의 높음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행동은 그가 거하는 시간의 위대함을 보여주고 있었고 무엇 보다도 시간 속으로 들어 오신 주님을 드높이고 있었습니다.

 

한편 부한 자들에게 말씀합니다.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하라.”

모든 세상이 거의 그렇습니다. 부자보다 가난한 자들의 숫자가 많습니다. 이 부자들에게 낮아짐을 자랑한다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가난한 사람들과 하나가 되라는 것이 아닐까요? 가난한 사람들과 하나가 되는 길이 무엇일까요? 갖고 있는 것을 다 나누라는 뜻일까요? 그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 겸손히 낮아지신 것처럼 가난한 자들과 하나가 되는 겸손의 덕을 품으라는 의미로 생각됩니다.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낮아지신 주님의 모습을 본받아서 늘 낮아지라는 의미일줄 압니다.

 

그런데 하나가 된다는 것은 똑같이 낮아지라는 의미가 아닌 것 같습니다. 올해 첫 설교에서 ‘섬기는 공동체’라는 표어를 말씀드리면서 어깨동무 사역이 불가능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잠시는 어깨동무가 가능하지만 실제로는 오래 가지 못합니다. 서로 힘이 듭니다. 대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것이 참 하나가 되는 공동체의 모습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부자들이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한다는 것은 이렇게 생각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부자들이 스스로 세상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버리고 세상의 주인공은 가난한 자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부자들이 extra이고 주인공들은 가난한 자들 낮은 자들로 여기고 거기에 맞게 행하는 것입니다.

부자들은 자기들이 extra임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자기들은 돈을 버는 재주가 뛰어나니 돈을 많이 벌어 낮은 자들이 그 돈으로 세상의 주인공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 때 부활의 주님은 기뻐하시지 않으실까요?

이 때 돈을 벌기위해 보냈던 수 많은 시간들도 위대한 시간이 되는 것이 아닐까요? 이를 위해서 주님은 시간 속에 찾아 오신 것이 아닐까요?

 

요즘 한국에 다문화 가정이 많아지고 있고 다문화 가정을 위해서 많은 사역들이 펼쳐지고 있다고 합니다. 어느 다문화 가정의 한 여성이 상담자에게 다음과 같이 한 말을 어느 상담 연구소 소장의 글에서 접해 보았습니다.

“짐작으로 도와주지 말고 무엇이 필요한지 물어보십시오. 그리고 기왕에 다문화 가족을 위해 일하고 있는 기관들을 지원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누가 되었든지 새로이 온 사람이 정착하는 것은 사역에 참여하면서라고 생각합니다. 그들로 하여금 주인의식을 가지고 교회에 정착할 수 있도록 한 걸음씩 가이드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들을 위해서 무엇을 해 줄 것인가 보다는 그들과 함께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교우 여러분,

사순절은 시간을 되찾기 위한 절기입니다. 세속에 빼았겼던 시간을 되찾는 절기입니다. 세속 가운데서 시간은 돈의 수단으로 여기고 살아 왔던 우리들의 삶을 참회하며 시간 안에서 참으로 자유를 회복하는 시간입니다.

곧 주어진 환경 가운데서 최고의 삶을 회복하는 시간입니다. 낮은 자는 높은 수준의 예술 작품을 창조하여 부활의 주님을 높이고 높은 자들은 겸손히 주님의 낮아지심을 자랑하는 시간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결론을 내릴수 있습니다. 주님은 낮은 자의 고귀한 예술도 필요로 하십니다. 부한 자들의 소중한 삶도 필요로 하십니다. 두 작품 세계가 아름답게 조화를 이룰 때 고난과 부활의 주님은 온 세상의 자랑거리가 되지 않을까요?

주어진 환경에서 우리 모습 그대로 자랑하십시다.

 

말씀을 거둡니다.

이번에 한국의 영화 기생충이 아카데미 상을 휩쓴 것을 잘 아실줄 압니다. 많은 분들이 아시고 계시겠지만 봉준호 감독이 수상 소감에서 이번 함께 라이벌이 되었던 감독의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조적인 것이다.”

 

사실 이것을 이미 2천년전에 야고보가 설파한 것입니다. 개인적인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각자의 환경입니다. 어떤 사람은 낮은 자로 어떤 사람은 부한 자로 지금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환경 속에서 말씀대로 살아 갈 때 가장 창조적인 삶을 살게 되지 않을까요?

말씀대로 사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랑하는 것입니다.

 

사순절은 우리들 모습 그대로 주님을 자랑하는 것을 회복하는 시간입니다. 환경이 바뀐 후에 자랑하려는 자는 한번도 자랑할수가 없습니다. 늘 환경이 바꿔지길 원하는 것이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주어진 환경 안에서 어떤 이는 주님의 높아짐을 자랑하십시다. 어떤 이는 주님의 낮아짐을 자랑하십시다. 어느덧 신비한 시간 안에 거하는 우리 모두가 될 것입니다. 아니 시간 안에 신비스럽게 찾아 오시는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그가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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