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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시편 84:1-12 (03/01/2020)

 

류시화 시인이 엮은 시집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이라는 시집이 있습니다. 시집 제목은 바로 알프레드 수자라는 시인의 시입니다. 물론 제일 먼저 그 시를 소개합니다. 다음과 같습니다.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알프레드 수자

 

춤추라, 아무도 바라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노래하라, 아무도 듣고 있지 않은 것처럼

일하라, 돈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살라,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다섯 행으로 쓰여진 시인데 제목은 두번째 행을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다섯 가지 모두 다 소중한 우리들의 삶의 모습일줄 압니다. 그러나 그 중 두번째가 제일 소중하다고 시인은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두번째 행을 그대로 제목으로 삼은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하여튼 이 다섯 가지를 누리며 사는 삶이 최고의 삶인 것 같습니다. 아무도 바라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춤추고 아무도 듣고 있지 않은 것처럼 노래하고 돈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일하고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사는 것 아니 무엇 보다도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 처럼 사랑하는 삶이 그야말로 최고의 삶입니다.

 

그런데 누가 과연 이렇게 살수 있을까요? 다섯 가지 모두 소중하지만 특히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도전하는 것이 우리들에게 주어진 삶이 아닐까요?

 

오늘 사순절 첫번째 주일예배로 드리는데 사실 사순절을 지키는 이유는 불가능해 보이는 것에 도전하기 위함일줄 압니다. 특히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는 삶을 살기 위함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이런 멋진 삶을 살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상고하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시인은 주님의 성전을 사모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사모했는지, 2절 말씀입니다.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성전을 얼마나 사모했는지 영혼이 쇠약해졌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쇠약해졌다는 표현을 쓴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영혼이 갖고 있는 모든 에너지를 주의 성전을 사모하는데 모두 썼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남은 힘이 없습니다. 이제 남은 영혼의 힘으로는, 3절 말씀입니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남은 영혼의 힘으로 참새와 제비를 부러워하고 있습니다. 그토록 사모하는 성전을 가까이 하지도 못하기에 도리어 성전 뜰에 집도 지을수 있는 참새나 제비를 부러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그의 마음의 깊은 소원을 노래합니다. 4절 말씀입니다.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그러면 왜 이 시인은 이처럼 주님의 전을 사모하는 자가 되었을까요? 물론 1절 말씀에 한 가닥 실마리가 보이는 것 같긴 합니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시인은 주의 장막의 아름다움을 보았습니다. 사랑스러움을 보았습니다. 그러면 이 당시 성전이 아름답게 지어져서 사랑스럽게 보였을까요?

사실 성전과 솔로몬의 궁전을 비교해 보면 쉽게 알수 있습니다. 성전과 왕궁은 바로 옆에 지어졌는데 성전은 7년반 걸린 반면 궁전은 13년이 걸렸습니다. 물론 궁전이 훨씬 크게 지었습니다. 안의 치장도 성전과 같던가 아니면 더 오래 걸렸으니 더 섬세하게 지었다고 생각해도 과언이 아닐줄 압니다.

사실 누가 봐도 성전과 궁전 중 더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지어진 것은 궁전이었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지금 노래하고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궁전 옆에 있어서 더 초라해 보일텐데 왜 이 성전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을까요?

 

이 저자가 어떤 배경의 사람이었는지를 알게 되면 이해가 되기 시작합니다. 거의 모든 시편의 시에는 저자의 이름이 서두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의 대부분이 다윗의 시입니다만 오늘의 시편은 ‘고라의 자손’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고라의 자손’이라고 쓰여진 것을 보니 고라는 아주 위대한 인물임에 틀림 없어 보입니다. 그렇지 않고 어떻게 그의 자손이 이런 멋진 시를 짓고 더욱이 주님의 성전을 그토록 사모하겠습니까? 고라의 자손이 쓴 시가 11개나 되고 있습니다. 시편에 150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중 11편의 시가 고라의 자손의 시이니 얼마나 훌륭한 가문이겠습니까?

 

그런데 민수기 27장에 보면 슬로브핫의 딸들이 모세에게 와서 시집 보내 달라고 청원을 하는데 다음과 같이 청원을 합니다. 민수기 27:3절에 보면,

“우리 아버지가 광야에서 죽었으나 여호와를 거슬러 모인 고라의 무리에 들지 아니하고 자기 죄로 죽었고 아들이 없나이다.”

‘여호와를 거슬로 모인 고라의 무리에 들지 아니하고’ 하면서 고라의 집안을 깎아 내리고 자기들 집은 깨끗한 집이라고 하소연하는 것입니다. 곧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고라는 여호와를 반역한 자로 잘 알려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자기 집의 깨끗함을 증명하기 위해서 ‘고라’의 이름를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곧 고라는 신약의 가롯 유다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면 어떤 죄를 지었을까요? 간단히만 설명드리면 고라는 모세와 아론과 같은 레위의 증손입니다. 곧 이들은 사촌입니다. 그런데 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움을 받고 자기는 같은 사촌인데 모세와 아론의 말에 순종해야 했던 것입니다. 실제로 모세와 아론보다 서열은 더 위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순종해야 하니 고라는 사람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킵니다. 민수기 16장에 보면,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서 고라와 함께 한 모든 사람들이 서 있는 땅이 갈라지며 땅이 그들을 삼킵니다.

 그후 고라의 자손들은 어떻게 될까요? 민수기 26:10, 11절 말씀을 보면,

“땅이 그 입을 벌려서 그 무리와 고라를 삼키매 그들이 죽었고 당시에 불이 이백오십 명을 삼켜 징표가 되게 하였으나 고라의 아들들은 죽지 아니하였더라.”

고라의 아들들은 아버지의 죄에 가담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죽지는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큰 상처를 받습니다. ‘고라의 자손’은 이미 상처받은 가문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반역한 가정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그 후 이들은 어떻게 되나요? 원래 레위 자손인데 레위인의 자격을 상실하게 되었겠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들은 성전을 지키는 자들이 됩니다. 특히 찬양하는 자들이 됩니다.

역대하 26장에는 유다왕 여호사밧이 아람왕국과 전쟁을 벌이게 되는데 이 때 크게 공헌한 두 자손이 있습니다. 19절 말씀을 보면,

“그핫 자손과 고라 자손에게 속한 레위 사람들은 서서 심히 큰 소리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니라.”

이들의 찬송으로 대승을 거두게 됩니다.

 

왜 고라 자손들의 찬양이 힘이 있었겠습니까? 자기들의 선조 고라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였지만 자기들을 버리지 않은 하나님의 사랑에 늘 감격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이 어디 계시죠? 주의 장막에 거하십니다. 그러니 그 장막이 얼마나 아름다웠겠습니까?

이처럼 주님이 계신 성전을 사모하면서 고라의 자손은 계속 노래합니다. 5절 말씀입니다.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자기들은 가롯 유다의 자손들과 같은 반역자들이지만 자기들 마음에는 늘 시온으로 향하는 대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자기들의 앞에는 시온으로 향하는 길에 큰 콩크리트 바리케이드가 있어야 당연한데 그렇지 않습니다. 훤히 뚫려 있습니다. 이 놀라운 축복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노래는 계속됩니다. 6절 말씀입니다.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 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

그들은 고라의 자손으로서 시온의 대로를 통해 가고 있지만 그래도 때로는 고라의 자손이라는 아픔을 안고 눈물을 흘리곤 한 것 같습니다. 그럴 때마다 놀라운 체험을 합니다. 자기들이 뿌린 눈물들이 때로는 샘이 되고 때로는 하늘에서 내리는 이른 비가 되는 것을 봅니다. 자기들로 인해서 이웃들도 복을 받는 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이런 기적을 체험하니 어떻게 될까요? 7절 말씀입니다.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

 

이들은 성전에 들어가자 마자 하나님을 뵙게 됩니다. 이 때 뵈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었을까요? 아니 어떤 음성을 들었을까요? 저는 이렇게 상상해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을까요?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이 말씀을 들으며 눈물이 확 쏟아졌을 것입니다. 이들은 자기들의 조상 죄로 인해 많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쪽집게처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습니다. 물론 성경에는 나와 있지 않죠. 그러나 그렇게 말씀하신 것을 느낄수밖에 없었을 것을 저는 확신합니다. 이유는 하나님 자신이 많은 상처를 받았지만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고라에게 상처받으셨습니다. 그러나 고라의 자손을 사랑하셨습니다. 레위 지파에서 내치시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찬양대로 세워주시고 그들을 통해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때로는 그들을 앞세워서 전쟁에서 승리케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상처를 받으셨지만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 처럼 고라의 자손들을 사랑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전에 들어 오는 순간 더 이상 자신들이 받은 상처는 새까맣게 잊습니다. 다른 모습이 이들을 압도했을 것입니다. 상처받은 하나님의 모습이 성전 안에 가득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오늘 좀 신학적인 말씀을 많이 드려서 머리가 복잡해 지셨을줄 생각되는데 어쩔수 없습니다. 사순절이니 이것도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신다고 생각하시고 조금만 더 머리를 괴롭히시기 바랍니다.

성전이 예루살렘에 있죠. 그런데 왜 바로 그 장소에 성전이 세워졌겠습니까? 인도에는 석가모니가 나무 아래서 깨달음이 온 것을 기념해서 그 나무 주위를 성지로 만들어 놓지 않았습니까?

이슬람교를 예를 들면 요즘 그들의 가장 중요한 성지는 메카인데 이는 무하메드의 출생지입니다. 아울러 메카에서 가까운 곳에서 계시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들의 성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예루살렘은 왜 성지가 되었을까요? 다윗이 나라가 강성해 진 다음에 교만해졌습니다. 이제 자기 나라가 얼마나 강국이 되었는지 알기 위해 인구 조사를 시킵니다. 이에 요압 장군은 말립니다. 하나님께서 백 배나 더하게 하실수 있다고 하면서 인구 조사를 말립니다. 그래도 인구조사를 강행합니다.

금방 다윗은 자신이 지은 죄를 깨닫습니다. 이에 대한 벌을 받게 됩니다. 그 전염병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때 갓이라는 선지자의 권유를 듣고 어느 집 타작 마당에서 제단을 쌓습니다. 곧 전염병이 멈추게 됩니다.

이 곳에 바로 후에 성전이 세워지게 됩니다. 다윗이 태어난 곳도 아니요. 아브라함이 태어난 곳도 아닙니다. 다윗이 죄를 짓고 제단을 세운 곳이 바로 성전터가 됩니다.

 

이곳은 바로 하나님께서 상처를 받으신 곳입니다. 곧 성전은 상처 받으신 하나님께서 상처 받지 않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선물인 것입니다. 온 인류를 향한….

 

이처럼 고라의 자손들은 성전을 바라보면서 많은 상처를 받았었지만 도리어 상처 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뵈었던 것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상처로 가득차 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그 수많은 상처에도 불구하고 끝없는 사랑이 흘러나오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이곳에 들어 오고 나가는 자들은 또한 그런 삶의 주인공이 되어 갈 것입니다. 상처를 받았지만 상처를 한 번도 받지 않은 듯 사랑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시편 기자는 성전을 사모하며 고백 한 것입니다. 10절 말씀입니다.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날 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그래서 이들은 늘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가 될 것을 사모하게 된 것입니다.

 

성전 문지기로서 무엇을 보았을까요? 상처 받은 자들이 성전으로 들어가는 것을 늘 봅니다. 반면 이들은 성전 안에서 주님을 뵈옵니다. 그 주님은 상처를 받았지만 한 번도 상처 받지 않은 듯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주님을 뵙고 성전을 나올 때는 새로운 모습으로 나오게 됩니다.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자처럼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을 안고 나옵니다. 이들의 모습을 보는 것이 성전 문지기의 특권이 아니었을까요?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성전 문지기도 한번도 상처를 받지 않은 자처럼 사랑하는 자가 되어 갔을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오늘 사순절 첫번째 주일 예배로 드립니다. 우리는 지금 사순절이라는 시간이라는 성전 안에 들어 와 있습니다. 40일간의 성전 안에서 주님을 만나십시다. 주님의 얼굴을 뵙고자 하는 자들에게 주님은 말씀하실 것입니다.

“한번도 상처를 받지 않은 자처럼 사랑하라.”

주님은 한번도 상처 받지 않은 자처럼 사랑하셨기에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한국 산마루예수공동체를 이끄시는 이주연 목사님이 계십니다. 소외된 자들을 찾아서 목회하시는 분이십니다.

어느날 처음으로 서울역으로 노숙인 형제를 찾으러 갔습니다. 그들 중 어떤 이는 술을 같이 하자고 하고 “어떤 놈”이냐고 소리치고 많은 경우 자기를 거들떠 보지도 않고 때로는 먹던 것을 집어 던지곤 했다고 합니다. 결코 환영을 받지 못했습니다.

다른 노숙인들이 모여 사는 곳에도 가 보았습니다. 주차장에서 늘 보던 한 아저씨는 술이 취하여서 한마디 합니다.

“목사아, 이 새끼야!”

 

그래도 이 목사님은 계속 그들에게 선물도 해주고 청소도 해주고…. 물론 그의 글에는 아직 그들이 변화되었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단지 주님도 이렇게 당하셨구나를 느낀다는 글로 마칩니다.

 

이 목사님은 어느덧 한번도 상처 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는 삶을 살고 계신 것입니다. 그는 멋진 시간이라는 성전에서 주님을 만나고 있고 그 주님의 사랑을 성전 문지기가 되어서 오고 가는 사람에게 전하고 계신 것입니다.

 

사순절이라는 시간이라는 성전 안에서 우리도 주님을 닮아 가십시다. 한번도 상처 받지 않은 자처럼 사랑하는 자들이 되어 가십니다. 성전 문지기의 축복을 누리십시다.

 

시인은 고백합니다.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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