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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을 아끼라” 에베소서 5:13-16 (03/22/2020)

 
  김남조 시인의 ‘시계’라는 시를 먼저 소개해 드립니다.

“그대의 나이 90”이라고
시계가 말한다
“알고 있어”, 내가 대답한다
“그대는 90살이 되었어”
시계가 또 한 번 말한다
“알고 있다니까,”
내가 다시 대답한다

시계가 나에게 묻는다
“그대의 소망은 무엇인가”
내가 대답한다
내면에서 꽃피는 자아와
최선을 다하는 분발이라고
그러나 잠시 후
나의 대답을 수정한다
사랑과 재물과 오래 사는 일이라고

시계는 즐겁게 한판 웃었다
“그럴 테지 그럴 테지
그대는 속물 중의 속물이니
그쯤이 정답일테지……”

시계는 쉬지 않고 저만치 가 있었다

 

김남조 시인이 올해 92세인데 아마 2년전에 지은 시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당신의 소박한 삶을 소박한 시에 담은 것 같습니다. 끝없이 달아나는 시계 앞에서 자신의 마음이 들킨듯 수줍어 하는 시인의 모습을 느낍니다.

이런 시는 90세가 되어야 쓸수 있을까요?

 

제가 얼마전 67세가 되었는데 한번 90 대신에 제 나이를 넣어 읽어 봤습니다. 그랬더니 더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시계는 저를 향해 한판 웃습니다. “그대는 속물 중의 속물이니.” 시계는 나를 놀리며 저만치 달아납니다.

 

벌써 사순절 넷째 주일이 되었습니다. 몇주전 설교에서 사순절을 지키는 이유는 시간의 위대함을 회복함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물론 시간이 위대한 이유는 위대한 주님께서 시간 안에 들어 오셨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이 위대한 시간은 멈출줄 모르고 달아 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억지로 40일이라는 시간을 정하고 사순절을 지키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편 우리가 사순절이라고 정해 놓았지만 시계는 도리어 우리를 조롱하며 한바탕 웃으면서 계속 달려 가는 것 같지 않습니까? 어느덧 넷째 주일이 되었으니 말입니다. 사실 요즘 코로나 바이러스는 우리들의 일상을 멈추게 하지만 시간은 까딱 안 합니다. 자기 갈 길을 갑니다. 묵상집을 펼쳐 첫 장을 읽은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벌써 절반을 넘었습니다.

 

그러면 시간을 멈출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정말 우리는 늘 시간으로부터 조롱을 받으며 살아야 하나요? 그럴리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시간을 창조하셨는데 우리가 시간의 조롱의 대상이 될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시간을 어떻게 대하길 원하실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6절 말씀을 통해 우리가 시간을 어떻게 대할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시간의 흐름을 우리가 콘트롤할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할수 있는 것은 하나 있습니다. 아낄수는 있습니다. 한편 사도바울은 15절 말씀을 통하여 지혜로운 자들은 모두 시간을 아낀다고 강조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지혜로운 자들의 특징은 바로 세월을 아낀다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삶과 시간을 아끼는 삶은 뗄레야 뗄수 없는 상관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시간을 아낀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24/7, 하루 24시간 그리고 일주일을 깨알 같이 아껴쓰는 것일까요?

사실 주석가들은 ‘아낀다’라는 헬라어는 우리가 생각하는 ‘절약’의 뜻 보다는 다른 의미를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어떤 주석가는 ‘구속’ 곧 redeem의 의미가 많은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곧 시간이 시간되게 하는 것을 뜻한다고 할까요? 곧 시간의 위대함을 회복하는 것으로 생각할수도 있겠습니다.

 

김남조 시인은 시간을 알려주는 시계 앞에서 조롱을 당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려 놓았지만 사도바울은 시계 앞에서 조롱을 당하는 삶을 살지 말고 도리어 시간을 구속(redeem)해서 곧 시간을 위대하게 만들어 감을 통해 도리어 시계로부터 존경을 받는 삶을 살자고 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전 어느 교우님께서 입원하신 병원에 갔었는데 복도에 그 병원의 역사를 도표로 그려 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 위에 써 있는 글이 인상 깊었습니다.

“Honoring the past, Celebrating the future”

한글로는 이렇게 의역해 보았습니다. “과거를 아름답게 높이고 미래를 함께 축하하며.” 병원 관계자는 앞으로 병원을 발전시키기 위해 많은 애를 쓰는 분인 것 같습니다.

저는 이 분은 현재라는 위대한 시간 안에서 과거를 높이고 있으며 앞으로 닥아 오는 미래를 즐기고 있는 듯 느껴 보였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분명 시계로부터 존경을 받으며 살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이 이런 삶을 살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시계로부터 존경을 받으며 살아갈까요? 이런 삶을 산 사람이 바로 사도바울입니다. 사도바울을 이런 멋진 삶을 살게 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면 우리도 뒤따라 가면 될 것 같습니다. 13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은 빛으로 말미암아 드러나나니 드러나는 것마다 빛이니라.”

책망을 받아야 할 모든 것 안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과거에 이미 잘 못한 모든 것, 또 하나는 현재 지니고 있는 모든 어두운 면들…. 그런데 사도바울은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책망받을 것과 우리 안에 있는 어두운 것들이 빛으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위대한 사건입니까? 책망받아야 할 것들이 도리어 세상의 빛으로 드러난다는 것 상상할수 없는 놀라운 사건입니다. 달리 생각하면 책망받을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것입니다. 어두움이 크면 클수록 좋다는 것입니다.

 

제가 화가 고흐 이야기를 자주 하는데 한번 더 해야겠습니다. 고흐는 밤하늘 별을 좋아했습니다. 별은 늘 고흐에게 희망을 주었다고 고백합니다. 고흐가 그린 그림 중에 별을 그려 놓은 유명한 그림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화가였다면 이렇게 표현했을줄 압니다. 사도바울에게 희망을 주는 것은 별이 아니라 깜깜한 하늘이었습니다. 어두움 그 자체였습니다. 어두움에 약속의 빛이 비추면 하늘은 화려한 불꽃놀이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어두움 안에 보이지 않는 약속의 별들을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니 그냥 어두움에 빛이 비추어서 불꽃놀이를 한다는 것까지는 그래도 이해가 됩니다. 더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책망받아야 할 것들이 도리어 빛을 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곧 과거의 잘 못된 모든 것과 현재 우리 안에 있는 어두움 할 것 없이 이 빛이 비추면 놀라운 세계가 펼쳐진다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사도바울은 조금 전 소개해 드린 병원 관계자와는 비교도 안 되는 멋진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병원 관계자는 과거의 잘 된 것들을 honor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미래를 미리 축하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과거의 책망받을 것을 honor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니 미래는 더 없이 축하할수 있지 않았을까요?

 

교우 여러분,

과거의 것을 honor하고 미래를 축하하는 삶이 바로 세월을 아끼는 삶입니다. 흘러가는 세월 속에 과거를 아름답게 채색하고 미래를 축하하는 삶이 바로 세월을 아끼는 삶이고 이것이 바로 시간의 위대함을 누리는 삶입니다. 과거의 것들이 책망받을만한 것일지라도….

 

한편 사도바울이 이러한 삶을 살수 있었던 이유가 있습니다. 14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

책망받을 것과 어두움 가운데 있는 죽은 자들을 향해 그리스도의 빛이 다가오고 있는 것을 늘 체험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사도바울의 개인의 경험이기도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를 만나기 전에는 믿는 자들을 잡으로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곧 그는 책망받을 것과 심한 어두움 안에 거하고 있었던 때였습니다. 이 때 그리스도의 빛이 다가 왔던 것입니다. 이 사건이 그의 일생의 이야기가 됩니다. 이로 인해 그는 평생 그리스도의 빛이 다가오는 축복을 누리며 삽니다. 결국 그는 세월을 아끼는 자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에게 다가 온 것이 처음 있었던 일이 아닙니다. 이미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어둠과 책망거리가 가득찬 세상에 오셨던 분이십니다. 그래서 영원한 빛을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이 빛이 우리에게 찾아 옵니다. 과거의 책망거리로 인해 두려워하고 오늘의 어두움 가운데 갇혀 있으며 미래를 두려워 하고 있는 우리에게 찾아 옵니다. 과거를 빛나게 하며 미래의 아름다움을 즐기게 하려고 우리의 현재 속으로 찾아 옵니다.

 

그러므로 이 빛을 받은 사람은 현재라는 시간 안에서 어두운 과거를 두려워 하지 앖습니다. 물론 과거는 항상 우리의 현재 안에 남아 있습니다.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어두운 과거를 우리는 그리스도의 빛으로 채색시키는 것입니다. 곧 새로운 과거를 늘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과거의 이야기를 그리스도의 빛으로 다시 써 내려 가는 것입니다. 아니 다시 그려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 과거를 honor하는 삶이 아닐까요?

아울러 우리는 때로는 현재라는 어두운 시간 안에 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현재의 어두움도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현재라는 위대한 시간 안에서 미래가 찾아 오는 것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빛을 받은 사람들은 결코 미래를 향해 갈 필요가 없습니다. 단지 미래가 찾아 오는 것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미래는 새로운 빛으로 현재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닥아 오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그리스도의 빛이 우리를 향해 늘 찾아 오듯이….

 

곧 사순절은 정신 없이 살던 삶에서 잠시 멈추어 서서 우리 안에 늘 남아 있는 과거를 다시 새롭게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빛으로 채색하는 것입니다.

아울러 놀라운 미래가 우리의 삶으로 찾아 오고 있음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 놀라운 미래는 주님의 보혈과 함께 신비스럽게 찾아 오고 있는 것입니다.

 

올해 사순절은 주님의 보혈 보다는 코로나 바이러스를 더 생각하며 지내는 것 같습니다. 어쩔수 없습니다. 물론 코로나 바이러스를 이길수 있기 위해서는 바이러스에 대해 많이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마지막은 주님의 보혈이 그 무엇도 이긴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다. 주님의 보혈로부터 흘러나오는 빛은 어떤 어두움도 코로나 바이러스가 주는 공포도 놀라운 빛으로 바꿀 것을 잊지 마십시다. 왜냐하면 주님의 보혈로 이루어진 빛의 나라가 우리를 향하여 늘 찾아 오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보혈로 인해 우리들은 위대한 시간 안에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은 사순절 세월을 아끼십시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가장 어두운 곳 골고다까지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가장 소중한 보혈을 흘리셨습니다. 오늘도 그 주님의 빛이 우리를 찾아 오십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흑인 여류 작가인 Maya Angelou가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인생은 숨 쉰 횟수가 아니라 숨죽인 순간들이 얼마나 잦았는가로 평가된다.”

 

그리스도의 빛으로 오늘이라는 시간에 과거와 미래를 바라볼 때 숨죽이는 시간이 많아지지 않을까요?

과거를 주님의 빛으로 아름답게 만들어 가십시다. 미래로부터 닥아오는 빛의 율동을 느끼십시다.  우리는 우리에게 남아 있는 과거를 향해서는 멋진 화가가 되어 갈 것이고 우리를 찾아 오는 미래를 향하여는 멋진 음악가가 되지 않을까요?

 

남은 사순절 기간 멋진 화가 그리고 음악가가 되어 가십시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주님께서도 숨죽이시고 우리들의 작품을 인조이하실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세월을 아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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