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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시를 당하리라” 마가복음 9:2-13 (04/05/2020)

 

유명한 경영학자인 Peter Drucker박사에 대해 많은 분들이 아실줄 압니다. 젊은 시절 그는 고향인 오스트리아 빈을 떠나 함부르크에서 수출회사의 견습생으로 일했습니다. 그 때 우연히 베르디의 오페라 ‘폴스타프’를 보게 됩니다. 개막 한 시간 전부터 극장 앞에서 기다렸습니다. 가난한 견습생 처지라 막이 오르기 직전에 팔리지 않은 제일 싼 표를 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오페라에 큰 감동을 느낀 드러커는 바로 ‘폴스타프’ 관련 자료를 찾아 보다가 큰 감동을 받습니다. ‘인생에 대한 열정과 유쾌한 활기가 넘치는 작품을 칠십육세에 작곡하다니….’

그런데 더 인상 깊었던 것은 베르디의 다음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었습니다.

“이미 최고의 오페라 작곡가로 인정받고 계신데, 이처럼 벅찬 주제를 가지고, 더구나 적지 않은 나이에 굳이 힘들게 오페라 작곡을 계속하십니까?” 베르디는 답합니다.

“나는 일생 동안 완벽하게 작곡하려고 노력했지만, 늘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그래서 내겐 도전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베르디에 영향을 받은 드러커 박사는 아흔다섯 살로 일생을 마치는 순간까지 세계적인 경영학 저서를 집필했습니다. 한편 “그동안 지은 가장 훌륭한 저서가 어느 것입니까”라는 질문에 그는 늘 대답했다고 합니다.

“다음에 나올 책입니다.”

 

얼마전 유튜브에서 남한 소년 축구단이 평양을 방문하는 documentary를 보았습니다. 인솔자들이 버스 안에서 북한 여자 안내원들과 즐겁게 대화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자 안내원이 북한 남자들이 제일 많이 하는 대화의 소재를 소개합니다. 첫째는 군대 이야기 두번째는 체육 이야기 세번째는 군대에서 체육 이야기….

한편 남한 남자들도 똑 같다고 하면서 즐겁게 담소를 나누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베르디와 드러커가 더 위대해 보입니다. 남북한의 남자들은 젊은 시절의 군대와 체육 이야기를 하면서 과거로 향하고 있는데, 이 두 분은 나이가 90이 넘어도, 물론 베르디는 87세를 살았지만, 다음에 만들 작품에 온 마음을 쏟고 살았으니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 주님은 어떤 마음으로 이 땅에서 사셨을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상고하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주님께서 어느 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높은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산 위에서 변화하셨습니다. 마가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3절 말씀입니다.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 그뿐 아닙니다. 더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선지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나타나서 주님과 대화를 하는 것입니다. 이에 베드로가 말합니다. 5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

베드로는 여기 있는 것이 좋겠다고 고백합니다. 물론 마가복음 저자는 베드로가 정신이 없어서 이런 말을 했다고는 하지만 정신 없을 때 하는 말이 더 마음에 있는 말을 내뱉는게 아닐까요?  베드로가 시간을 매는 능력이 있었다면 자신이 그렇게 했을 것이고 자신은 할수 없으니 주님께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간을 매어 주소서.”

 

그러나 시간은 붙잡아 맬수가 없습니다. 문득 둘러 보니 아무도 보이지 않고 오직 예수와 세 제자들뿐입니다. 그리고는 산에서 내려 옵니다. 그렇게 말이 많던 베드로를 비롯하여 세 제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이 때 주님께서 입을 엽니다. 9절 말씀입니다.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아닌 밤에 홍두깨입니다. 방금 전 변화하셨던 분의 입에서 도저히 나올수 없는 말을 듣습니다.

아니 변화하시면 죽음도 비껴갈수 있는데 죽으신다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으니 어떡합니까. 그래서 서로 중얼 중얼거립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다는 것이 무얼까?” 서로 물어 봤자 원하는 대답을 얻을 길은 물론 없습니다.

마침 지혜가 떠 올랐습니다. 방금 주님과 함께 나타난 두 사람이 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엘리야입니다.

사실 구약에 죽지 않은 두 인물이 나오죠? 하나는 에녹입니다. 또 하나는 엘리야입니다. 그런데 죽지 않고 하늘로 승천한 엘리야가 방금전에 나타났습니다. 이는 놀라운 징조였던 것입니다. 엘리야가 나타나서 놀라운 변화산의 역사가 펼쳐졌는데 그러니 이제는 더 놀라운 역사가 펼쳐질 것을 은근히 기대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슬쩍 떠 봅니다. 11절 말씀입니다.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자기들이 궁금한데 야단맞을까봐 서기관들의 이름을 팝니다. 사실 서기관들은 말라기 4:5절의 말씀을 가지고 엘리야의 오심을 자주 말하곤 하였던 것입니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제자들은 이 말씀을 믿고 잔뜩 기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는 자기들의 생각대로 더 놀라운 역사가 이루어지는줄 기대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죽음에 대해서 말씀하시니 이들은 서기관들을 빌려서 궁금한 질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니이까?” 이에 대해 주님은 답변하십니다. 12절 말씀입니다.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하거니와 어찌 인자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하리라 하였느냐?”

주님은 찬 물을 또 끼얹으십니다. 물론 말라기에 나온 말씀을 인정하십니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지 않으시고 계속 구약 전체에 흐르는 이사야서 53장에 제일 잘 나타나 있는 고난받는 종의 말씀으로 답을 하십니다. 제자들은 어리둥절해 있습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답변입니다. 방금 변화하셨던 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씀입니다. 어리둥절해 있는데 주님은 끝맺음을 합니다. 13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가 왔으되 기록된 바와 같이 사람들이 함부로 대우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제자들은 더 어리둥절해 합니다. 엘리야가 이미 왔다는 것입니다. 사실 엘리야는 세례 요한을 뜻합니다. 엘리야는 불병거를 타고 승천하지만 세례 요한은 어떻게 되죠? 헤롯이 동생의 아내를 부인으로 삼은 것을 비판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목 베어 죽임을 당하죠. 엘리야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그 누구도 목베임을 받은 세례 요한을 엘리야로 생각할수가 없었습니다. 두 사람은 극과 극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승천한 엘리야가 얼마전 목베임을 당한 세례 요한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새로운 교훈을 제자들에게 주고 계신 것입니다. 영광과 고난은 뗄레야 뗄수 없는 것임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영광의 엘리야 안에 고난의 세례 요한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둘은 하나라는 것입니다. 거꾸러 표현할수도 있습니다. 고난의 세례 요한 안에 영광의 엘리야가 있다는 것입니다.

서기관들은 이를 떼어 놓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영광의 메시야만 기다렸던 것입니다. 영광의 메시야 안에 있는 고난의 메시야는 생각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들의 교훈에 제자들도 늘 넘어 갔던 것입니다.

 

주님은 세례요한이 엘리야라고 선언하심을 통해서 영광과 고난은 하나임을 선언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당신도 곧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하여야 할 것을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얼마전에는 변화하는 영광을 누렸지만 얼마후에는 멸시를 당하는 고난을 당하실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이기 때문에…, 곧 고난을 통하여 영원한 영광의 세계가 창조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베르디와 드러커는 최고의 작품과 저서를 남기고자 하는 꿈을 평생 갖고 살아서 위대한 작품들을 만들었습니다.

주님은 최고의 영광스러운 세계를 인간들을 위해 만드시기 위하여 이 땅에 내려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꿈은 오직 당신께서 고난과 멸시를 받아야만 이루어지는 것을 아시기에 오늘 고난과 멸시를 당하시기 위해 나귀 타고 예루살렘성을 입성하셨습니다.

 

곧 나귀 타신 예수님의 모습에는 두 가지 모습이 함께 내재해 있는 것입니다. 나귀타신 예수님을 제자들과 많은 사람들이 찬송으로 화답하십니다. 영광의 왕의 모습입니다. 반면 로마황제들이 즐겨타는 말이 아니고 나귀를 타셨습니다. 고난의 종의 모습입니다.

변화하신 예수님의 모습 안에 고난의 종의 모습이 숨어 있는 것이고, 나귀 타고 입성하시는 고난의 종의 모습 안에 영광의 왕의 모습이 숨어 있는 것입니다.

 

Chervin이라는 분이 고통에 대한 책을 지었습니다. 천주교에서 추대한 성인들을 소개하면서 고통받는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려주는 책입니다. 많은 성인들이 기록이 되어 있는데 감사하게도 이유혜라는 한국 순교자도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그 분에 대해서 설교 마지막에 다시 말씀드리기로 하고 이 시간에는 Chervin저자가 고통에 대한 책을 짓게 된 이유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Charles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어느 날 이 세상의 삶에서 당하는 모든 고통이 의미가 없다는 유서를 남기고 생을 마감합니다.

그 후 부부는 극심한 고통에 잠깁니다. 그 어떤 고통과도 비길수 없는 고통을 느낍니다. 오랜 기도와 말씀과 묵상 끝에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은 없다. 사실 모든 고통은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가는 거룩한 길이다. 거기에서 평생 내가 찾으려고 했지만 찾지 못했던 거룩함을 고난을 통해서만 찾게 된다.”

결국 그는 고통 가운데서 성인이 된 성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고난은 영광의 삶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길을 몸소 가시기 위해 주님은 오늘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셨습니다.

 

1921년, 열아홉 살의 터키 청년이 모스크바 대학으로 유학을 떠납니다. 그곳에서 새로운 사상에 접한 시인은 터키로 돌아와 신문과 잡지에 글을 발표합니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곧 체포되었고, 28년 형을 언도받고 12년을 감옥에서 지냅니다. 이 기간 동안 수많은 시를 썼으며, 공산 국가뿐 아니라 서양 국가들에서 잇달아 번역됩니다. 감옥 안에서 쓴 시가 전에도 한 번 소개해 드린 기억이 납니다만 <진정한 여행>이라는 시입니다.

 

나짐 히크메트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쓰여지지 않았다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려지지 않았다

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

가장 넓은 바다는 아직 항해되지 않았고

가장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불멸의 춤은 아직 추어지지 않았으며

가장 빛나는 별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무엇을 해야 할지 이상 없을

그때 비로소 진정한 무엇인가를 있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이상 없을

그때가 비로소 진정한 여행의 시작이다

 

시인은 감옥 안에서 앞날이 가장 불투명하고 불분명할 때 도리어 진정한 여행이 시작되고 있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무엇 보다도 최고의

시는 쓰여지지 않았고 최고의 날은 아직 살지 않은 날이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주님의 마음이 아닐까요? 주님은 앞으로 당신이 받아야 할 고난을 구체적으로 아셨을까요? 누가 어떻게 당신을 조롱하고 얼마나 많은 채찍을 맞으며 누가 당신의 옷을 나누게 될지를 다 아셨을까요? 구체적으로는 아시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아실수 있어도 아실 것을 포기하셨을 것입니다. 도리어 앞이 보이지 않는 고난 앞에서 비로서 인류 역사의 진정한 여행은 시작이 되는 것을 느끼고 계신 것이 아닐가요? 막연한 고난 속에서 진정한 인류의 여행은 시작이 되고 있고 또 앞으로 오는 고난을 통해 최고의 시가 쓰여지고 노래가 지어질 것을 소망하시지 않으셨을까요?

 

그래서 오늘부터는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셔야 했습니다. 고난과 멸시가 난무한 세계로…. 고난은 곧 영광의 세계로 이어지는 여행이기 때문에….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나를 본받으라. 고난과 멸시를 두려워 하지 말아라. 그 때가 진정한 여행의 시작이다.”

 

그래서 주님은 변화산에서 내려오시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찌하여 인자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하리라 하였느냐?”

 

말씀을 거둡니다.

조금전 소개해 드린 이유혜 순교자는 감옥 안에서 뼈가 뿌러지는 심한 고문을 당합니다. 그러나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다음과 같은 마지막 말을 믿음의 식구들에게 남겼습니다.

“나는 지금 죽음 앞에 서 있습니다. 하고 싶은 말을 다 표현할수는 없습니다. 단지 그동안 당한 일과 함께 마지막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더 이상 이 곳에 살고자 하는 마음은 없습니다. 때가 되면 나의 삶을 하나님께 모두 드리고만 싶습니다. 나는 굳게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에 대해 생각하면 할수록 이것은 너무도 가치 있는 일임을 확신합니다.”

 

이유혜 순교자는 고난 받는 것이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고난과 멸시로 인해서 오는 영광의 나라를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받는 고난과 멸시는 결코 헛되이 사라지지 않고 놀라운 영광의 나라로 이어지는 축복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유혜 순교자는 이제 진정한 여행을 막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믿는 이들의 고난과 멸시가 헛되이 사라지지 않게 하시려고 주님께서 오늘 진정한 여행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고난의 길을 가지 말라고 말리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어찌 인자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하리라 하였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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