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부인이 열다섯 살 난 아들의 행동 때문에 속이 많이 상했습니다. 함께 외출할 때마다 저만치 앞서 걸어가기 때문입니다. 제 어미를 부끄럽게 여기는 걸까? 하루는 어머니가 따지자 아들은 무안해하며 말합니다.
“아, 아네요, 엄마. 그냥 엄마가 너무 젊어 보여서 친구들이 내가 새 여자 친구를 사귄 줄로 의심할까 봐 그런 거예요.”
어머니의 상심은 요술처럼 사라졌습니다.
자주 부활절 설교시 말씀드렸습니다. 루터란 교회에서는 부활절 설교는 항상 조크로 시작한다고….
내용은 좀 다르지만, 이와 비슷한 어머니와 아들의 조크와 같은 그러나 실제 있었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프리카 칼타고 바닷가에는 한 유명한 성인 곧 “교회를 어머니로 모시지 않는 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실수 없다”라고 말한 성 키프리아누스 교회가 서 있습니다. 성 키프리아누스는 서기 258년에 순교합니다.
그가 순교한지 약 130년이 지난 후 이 교회에서 두 모자가 밤을 함께 지냅니다. 아들은 탁월한 학자였는데 칼타고의 학생들에게 만족하지 못해서 로마로 향하고자 배를 타기 위해 온 것입니다. 반면 어머니는 어떻게 하든 아들을 로마로 못 가게 하고 다시 고향인 다카스테로 데려가기 위함이었습니다.
어머니가 교회에서 밤을 지새면서 울면서 기도하는 사이 아들은 몰래 빠져나와 배를 탔고 배는 천천히 로마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하였습니다.
기도하다가 눈을 떠보니 아들이 없어 황급히 나가보니 로마를 향하는 배는 이미 천천히 출항하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안타깝게 발을 동동 구르며 떠나는 배의 뒷전을 홀로 바라볼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제는 그 교회 담벼락에 동판으로 다음과 같은 글이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383년, 어거스틴을 떠나보내며 모니카가 눈물 흘렸던 곳.”
이 때 모니카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사실 아들 어거스틴은 칼타고에서 교수 생활을 하였지만 사생아를 나으며 문란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이런 아들이 로마로 간다면 어떻게 될 것인지 기정사실이었습니다. 이를 막으려고 항구까지 따라 왔으며 교회에서 밤새며 기도를 드렸던 것입니다. 그런 어머니를 뒤로하고 떠나는 아들이 탄 배를 보면서 모니카는 아들을 영영 잃어버리는 절망감을 느끼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후에 어거스틴은 어떻게 되죠? 하바드대 철학교수 Whitehead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모든 철학은 플라톤의 주석이고 모든 신학은 어거스틴의 주석이다.’
곧 플라톤이 철학의 아버지라면 어거스틴은 신학의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사생아를 낳았던 아들이 어떻게 신학의 아버지가 될수 있었을까요? 이것이야말로 조크가 아닙니까? 이런 조크와 같은 일을 가능케 하는 위대한 사건이 오늘 이루어진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두 여인이 등장합니다. 이 두 여인은 금요일 저녁 예수가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묻히는 것을 보았던 것 같습니다. 두 여인들은 한편으로는 마음이 놓였을지 모릅니다. 평생 집도 없이 떠돌이 생활을 하셨는데 그리고 강도와 같은 대우를 받으면서 십자가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셨는데…, 이제는 부자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묻혔으니, 죽어서는 그래도 존엄한 죽음을 맛 본 것처럼 되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 속에는 채울수 없는 공허감이 가득찼을줄 압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분을 잃은 상실감으로…. 토요일은 안식일이니 율법대로 집에서 나오지 않고 집에서 상실감 속에 지냅니다.
이제 안식일이 지났습니다. 그 큰 상실감을 조금이라도 메꾸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의 상실감은 두 여인의 발걸음을 무덤으로 향하게 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웬걸 무덤을 막았던 돌은 굴려져 있고 천사가 도리어 돌 위에 앉아 있습니다. 지키던 병사들은 죽은 자 같이 되었는데 천사가 말합니다. 5, 6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시던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무덤을 막았던 돌 위에 짖궂게 앉아 있는 천사는 빈 무덤을 가르키며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See, he is lost”(그가 사라졌어).
저는 이 천사의 모습을 생각할수록 광대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돌 위에 앉아 있는 광대…. 피카소는 스스로 광대라고 했는데 그는 여러 광대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 중 하나를 보여드립니다.
천사는 돌 위에 저런 표정으로 앉아 있었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이 천사가 계속 말합니다. 7절 말씀입니다.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광대 천사가 계속 웃기는 어조로 말합니다. 죽었던 아니 잃어버렸던 주님께서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니 거기서 주님을 만나라는 것입니다. 거기서 잃었던 주님을 다시 찾으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웃기는 일입니다. 희극도 이런 희극이 없습니다.
두 여인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그야말로 급히 빈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달려갑니다. 그런데 갑자기 누가 길을 가로막습니다. 9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평안하냐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두 여인을 가로막은 주님의 인상에는 저런 모습이 담겨있지 않았을까요?
두 여인은 짖꿎게 앞에 나타나신 주님을 금방 알아차린 것 같습니다. 잃었던 분을 되찾은 기쁨에 주님의 발을 붙듭니다. 그리고 경배합니다. 경배하는 두 여인에게 주님은 말씀합니다.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제가 매년 사순절을 준비할 때마다 집 가까이 있는 천주교 서점에 갑니다. 새로 나온 묵상집들을 구입합니다. 올해도 몇 권을 구입하였었습니다. 부활절 설교를 준비하려고 한 묵상집을 펴서 부활절을 위한 글을 읽으려고 책을 폈습니다. 그런데 토요일 것 까지 있고 부활절 묵상글은 없었습니다. 지난 25년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순간적으로 제 마음에 느낀 것이 있습니다. 상실감. 뭔가 있어야 하는데 없습니다. 물론 정확히는 토요일까지가 사순절이니 부활절에 대한 글은 넣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도 부활절이 없는 사순절은 저에게 상실감을 느끼게 했습니다. 그리고는 다른 묵상집을 펴 보았습니다. 마지막 부활주일에는 어떤 글이 담겨 있나 보았습니다. 제목 부터 저를 사로 잡았습니다.
‘Lost and found’.
두 묵상집이 저에게는 하나의 멧세지를 주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한 묵상집에는 은연중 말합니다. ‘Lost.’
다른 묵상집은 말합니다. ‘Lost and found.’
두 여인도 이와 비슷한 것을 느끼지 않았을까요? 여인들은 주님을 잃었다가 다시 찾았습니다. 그런데 다시 찾은 주님께서 엉뚱한 말씀을 하십니다. 주님은 당신을 잃고 상실감에 젖어 있는 제자들에게 갈릴리로 가서 거기서 만나자는 멧시지를 전하라고 합니다.
순간 여인들은 또 어리둥절 해집니다. 사실 제자들은 지금 예루살렘 근처 어딘가 숨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상실감 속에 빠져 있는 제자들에게 찾아가서 빨리 그들의 상실감을 없애 주셔야 하지 않을까요? 왜 그들을 다시 갈릴리까지 위험한 먼 길을 오게 하시고 거기서 만나자고 하시나요?
잘 아시는대로 처음 제자들을 부르시고 사역을 시작한 곳이 갈릴리입니다. 갈릴리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싹트기 시작한 곳입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후 바로 이곳에서 제자들을 만나길 원하십니다. 새롭게 시작하자는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이미 주님은 당신의 깊은 뜻을 제자들을 부르는 새로운 표현을 통해서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여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이제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새롭게 제자들의 관계를 맺기를 원하십니다. 이제는 더 이상 스승과 제자가 아닙니다. 형제로서 사역을 시작하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짖꿎게 장난하는 형제지간이 되시기 원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오래전부터 마음 속에 갖고 있던 소원이었을 것입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이 소원을 이루기 위하여 모든 사람들처럼 태어남의 경험을 하셨고 모든 사람들처럼 즐거움도 누렸고 모든 사람들처럼 고난도 겪었으며 이제 죽음까지 경험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통하여 모든 사람들의 죄를 사해 주는 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머무르시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형제와 자매들에게 놀라운 선물을 주시길 원하셨습니다. 부활의 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부활의 몸을 입으신 것입니다. 함께 부활의 몸을 입은 형제 자매가 되길 원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모니카는 아들을 잠시 잃었지만 모든 사람의 신앙의 아버지로 어거스틴을 되찾았습니다. 물론 아들 어거스틴도…. 제자들은 스승을 잃었지만 영원한 형제 자매를 되찾았습니다. 물론 영원한 스승이신 주님도…. 이제 스승이자 형제가 되신 부활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부활의 주님은 이제 형제들과 함께 멋지게 재미있게 웃기게 이 세상을 구원하는 일을 하시길 원하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온 세상을 웃기시고 계십니다. 주님은 갈리리에서 폭소를 터뜨리시며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우리는 모두 부활의 몸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함께 웃으며 갈릴리로 가십시다.
말씀을 거둡니다.
북 아일랜드의 어느 목사님이 코로나에 걸려 산소 호흡기를 차고 생의 마지막 시간이라고 생각하며 하나님께 구해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아무도 입원실에 들어 올수 없었습니다. 가족도 목사도….
그런데 입원실에 들어 온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청소부였습니다. 청소부가 들어오는데 한 줄기 햇빛을 보는 것과 같았다고 합니다. 청소부가 말을 겁니다. 여러 격려의 말을 해 줍니다. 이 청소부는 14년간 나이제리아에서 선교했던 선교사였습니다. 이제 고향에 돌아와 청소부가 된 것입니다.
청소부는 이 목사님을 위해 기도해 줍니다. 그 후 차차 회복되어서 이제 유튜브를 통해 자신의 간증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부활의 주님은 웃기십니다. 선교사도 되시고 청소부도 되십니다. 우리 모두의 형제 자매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아침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