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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위로 걸어 오시는 이” 마가복음 6:45-52 (04/27/2020)

 

대영제국이 아프리카 대륙의 거의 대부분을 지배하던 시절 케냐에 영국인 총독이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총명해 보이는 마사이 족장의 아들에게 케임브리지 대학에 유학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족장은 좀 내키지는 않았지만 많은 아들 중 하나쯤 세계 최강대국의 명문대에 보내 신학문을 배우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여서 총독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드렸습니다.

유학을 마치고 케냐로 돌아왔을 때, 젊은이는 크게 당황했습니다. 자기 부족을 찾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몇 년 전 부족이 머물던 곳에 가 보았지만 아무도 없었습니다. 늘 그랬듯이 소떼를 끌고 어디론가 떠나버렸던 것입니다.

그는 사자와 하이에나 기린들이 오가는 사바나를 헤매며 자기 부족을 찾아다녔습니다. 몇 달간의 필사적인 탐문과 추적 끝에 그는 귀에 익은 반가운 방울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방울소리를 향해 달렸고 드디어 소떼와 함께 야영 중인 가족과 친척들을 만났습니다. 아들의 고생한 이야기를 들은 족장은 동정은커녕 크게 탄식했습니다.

“아니, 영국까지 가서 도대체 뭘 배우고 왔단 말인가? 배우기는커녕 바보가 다 되어 돌아왔구나. 자기 부족도 못 찾아오는 천치를 어디다 쓴단 말인가?”

 

마사이족으로 산다는 것은 삶이 항상 여행 상태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들에게 똑똑함이란 소떼를 먹일 풀이 어디에 무성한지를 알아내는 능력이고, 행여 낙오하더라도 소떼가 남긴 흔적만 보고도 단박에 부족의 행방을 알아내고 따라잡는 재능이라고 합니다. 족장의 아들은 케임브리지에서 유학하다가 이 능력을 잃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마사이 족의 관점에 의하면 천치바보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일까요? 바로 부활절을 두 주 전에 지냈던 우리들의 이야기가 아닐까요? 부활절에 빈 무덤을 상상하며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외쳤던 우리들의 이야기가 아닐까요? 우리는 부활의 주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주님 보시기에는 이미 천치 바보가 되어 있지 않을까요? 부활의 주님이 어디에 계신지 찾지 못하는….

 

사실 주님께서 부활을 경험한 사람들의 모습이 이렇게 될 것을 이미 아시고 이 땅에 육신으로 계실 때 이미 경고해 주신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 이야기가 이를 확증해 주고 있습니다. 45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 타고 앞서 건너편 벳세다로 가게 하시고.”

주님께서는 당신답지 않게 무척 서두르십니다. ‘즉시’라는 표현이 눈에 띄입니다. 주님은 뭔가 큰 일났다는 듯이 서둘러서 손수 무리를 흩어 보내시려고 하십니다. 곧 제자들을 먼저 즉시 배에 태워 바다 건너편 벳세다로 건너가게 하십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사실 그 전 귀절 말씀을 보면, 방금 주님께서는 물고기 두마리와 빵 다섯 조각으로 장정만 오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마가복음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요한복음에 보면 오병이어의 사건을 보고 무리는 예수를 임금 삼으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제자들도 동조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주님은 대사를 치룬 후 즉시 제자들을 먼저 배에 태워 바다를 건너가게 하시고는 혼자서 그 큰 무리를 흩으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주님께서는 기도하러 산으로 가셨습니다.

 

처음에 제자들은 의아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 큰 일을 해내셨으면 제자들과 축제를 벌이셔야 할텐데 도리어 제자들을 배를 태워 미리 보내시고 무리를 홀로 흩으십니다.

그래도 어떡합니까? 순수히 배를 타고 바다 건너편으로 떠나 갑니다. 이 때 이들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신나지 않았을까요?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기억하며 싱글벙글합니다. 이처럼 흥분한 마음으로 노를 젓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앞으로 올 일을 미리 아신 것 같습니다. 47절 말씀입니다.

“저물매 배는 바다 가운데 있고 예수께서는 홀로 뭍에 계시다가.”

주님은 산에서 기도하시다가 제자들의 신변이 위태로워진 것을 아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해가 저문 후에 주님은 바닷가에 내려 오셨습니다. 48절 말씀입니다.

“바람이 거스르므로 제자들이 힘겹게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쯤에 바다 위로 걸어서 그들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어느덧 심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제자들은 힘겹게 노를 젓고 있었습니다. 더 이상 오병이어의 기적에 대해서 생각할 여유도 없습니다. 목숨부터 건져야 할 판입니다. 정신 없이 노를 저어댑니다.

한편 제자들의 모습과는 전혀 반대로 태연한 모습으로 주님께서는 밤 사경쯤에 바다 위로 걸어서 그들 곁을 지나가십니다.

 

그런데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밤 사경이 언제냐는 것입니다. 주석가들에 의하면 밤 3시-6시 사이라는 것입니다. 밤 3시라고 치십시다. 주님께서 날이 저물었을 때 바닷가에 내려 오셨는데 아마도 밤 8시는 되지 않았을까요? 그러면 밤 8시부터 자정을 넘어 3시라고 하면 거의 일곱 시간을 제자들은 바다 한 가운데서 심한 바람과 싸우며 노를 젓고 있었던 것입니다.

7시간을 심한 바람과 싸웠다는 것은 이젠 모든 힘도 다 잃고 거의 희망을 접었을 때였을지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7시간 제자들은 그 동안 어부로서 경험했던 모든 실력을 다 발휘했었을 것입니다. 이런 방법도 써 보고 저런 방법도 써 보고…. 더 이상 그들의 힘과 실력이 다 바닥이 났을 때였을 것입니다. 49절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 오심을 보고 유령인가 하여 소리 지르니.”

 

한 유령이 걸어 오는 것으로 보입니다. 유령은 항상 태연하지 않습니까? 자기들은 혼비백산해 있는데 그 풍랑 속에 천천히 무엇이 움직이니 유령인줄 알고 소리를 지릅니다. 이 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제가 두 주전 부활주일 설교시 주님께서는 짓꿎은 모습으로 두 여인에게 나타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주님은 이미 육신의 몸을 입고 계실 때부터 종종 짓꿎게 나타나신 것 같습니다.

깜짝 놀라게 하시고는 태연하게 배에 들어 와 앉으십니다. 순간 깜쪽같이 바람도 그칩니다. 바람이 그치는 것을 보고 제자들은 새삼 놀랍니다.

이에 오늘 본문 말씀의 저자 마가는 펀치라인을 날립니다. 52절 말씀입니다.

“이는 그들이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

 

풍랑 속에 천천히 오시는 주님을 유령으로밖에 보지 못한 이유를 마가는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의 교훈을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 위로 오시는 주님을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떡 떼시던 일이 언제 일어났었죠? 3일전에, 1주일전에, 한 달전에…? 불과 몇 시간 전에…. 밤 3시라고 하면 불과 9시간 전에 일어났습니다.

장정만 오천 명이 모여 있으니 약 만 명 이상 모여 있는 무리 앞에 먹을 것은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조각이었습니다. 사실 처음 오병이어를 보면서 제자들은 하나 같이 생각했을 것입니다.

“에게…!”

무한대의 세계 앞에 티끌이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티끌의 한계를 보고 놀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달랐습니다. 티끌의 한계 안에서 무한대를 보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병이어로 장정만 오천명을 먹이고 거기서 그치지 않으셨습니다. 12광주리를 더 남기셨습니다. 이는 티끌의 한계 안에 무한대의 가능성의 세계가 펼쳐질수 있음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12광주리를 남기실 이유가 없으셨습니다. 주님은 120광주리도 남기실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이 놀라운 역사를 제자들은 불과 9시간 전에 체험했던 것입니다. 보았지만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잠시 후 바다 한 가운데서 비슷한 경험을 합니다. 심한 바람 앞에 조그만 나룻배에 제자들은 티끌처럼 느껴졌을 것입니다. 나룻배는 한 때 “에게” 했던 오병이어와 같았습니다.

하여튼 그들은 티끌 같은 나룻배를 믿지 못하니 그 가운데서 젖먹던 힘과 지혜와 경험을 온통 발휘해서 태풍과 싸우려고 합니다. 자기들의 힘을 의지하기 시작합니다. 이처럼 그들은 뭔가를 놓치고 있었습니다. 불과 몇 시간만에…. 마치 마사이 족장의 아들이 신학문을 공부하다가 자기 부족이 있는 곳을 찾는 능력을 잃었듯이…. 제자들은 나룻배의 한계를 넘어 무한대의 세계를 펼치실수 있는 주님의 역사를 잊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어디 계신지도, 주님이 자기들을 찾아 오시는 것도 알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습이 부활절 후 두번째 주일 예배를 드리는 우리들의 모습이 아닐까요? 한계를 느끼지 못하고 잘 나갈 때는 부활의 주님을 실컷 찬양합니다. 반면 한계 앞에서는 어느덧 안절부절 하지는 않습니까? 도리어 우리를 향해 가까이 오시는 주님을 유령으로 착각하고 소리만 지르지 않을까요?

 

두 주전 주님께서는 죽음이라는 무서운 한계를 조롱하듯 깨뜨리시고 부활하셨고 이에 우리가 기쁨의 찬송을 불렀는데 우리는 무덤이라는 한계 보다 훨씬 작고 미약한 한계 앞에서 두려워 떨고 있지는 않는가요?

 

물론 그렇다고 코로나 바이러스는 없는 것처럼 세상 법도 무시하고 의학지식도 남몰라 하고 살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모든 규정과 수칙을 잘 이행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안에서 한계를 철저히 느껴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한계를 느끼며 살고 있습니다. 바이러스 앞에서 우리의 나룻배가 얼마나 작은지 느끼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부활의 주님께서는 이 한계를 마음껏 사용하시지 않으실까요? 이것을 믿는 것이 바로 부활의 주님을 믿는 것이 아닐까요?

 

이와 같은 맥락에서 작곡가 Igor Stravinsky는 창의적인 자유는 한계 안에서 이루어지고 무제한의 자유는 재앙을 초래한다고 말하며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합니다.

“내 각각의 작업에 대해 나 스스로 좁은 틀을 정해 놓고 그 안에서 움직이는 것이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다. 내 운신의 폭을 더 좁히고 주변에 장애물을 더 많이 두를수록, 내 자유는 훨씬 더 커지고 더 큰 의미를 지니게 된다. 무엇이든 제약이 줄어들면 힘도 줄어든다.”

 

사실 오병이어의 사건도 극심한 한계 속에서 터진 사건입니다. 아울러 폭풍속 극심한 한계속에서 주님은 물위를 걸어오셨습니다. 물론 무덤이라는 한계를 통해 주님은 부활의 세계를 만드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매일 매일 만나는 삶의 한계는 우리로 하여금 물위로 걸어 오시는 주님을 만나게 하는 초청장이 아닐까요? 빈 무덤이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초청장이었듯이 말입니다. 우리의 나룻배가 작으면 작을수록 부활의 주님을 더 강하게 만나게 되지 않을까요?

 

교우 여러분,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한계는 모두 다릅니다. 아니 unique합니다. 그처럼 우리를 찾아 오시는 주님의 모습도 우리의 한계 처럼 unique합니다. 제자들이 물위로 걸어오신 주님을 unique하게 만난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한계적 삶 안에서 각자의 바다 위로 걸어 오시는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 주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시는 분이십니다.

 

사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유령으로 느껴질수밖에 없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당시 주님은 육신의 몸을 입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부활의 몸을 입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육신의 몸을 입고 물위를 걸어 오셨던 주님은 이제는 부활의 몸을 입고 물위로 걸어 오시지 않을까요? 그래서 우리는 주님을 볼수도 없습니다. 더이상 유령의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은 오늘도 우리가 있는 곳을 향해 물위로 걸어 오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말라.”

그리고는 두려워 떨고 있는 우리들의 티끌과 같은 나룻배에 오르십니다. 이때 놀라운 역사가 펼쳐집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배에 올라 그들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치는지라.”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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