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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와 거지” 누가복음 16:19-31 (10/04/2020)

고은 시인의 ‘순간의 꽃들’이라는 시집에 나오는 시 하나를 먼저 소개해 드립니다.

 

“초등학교 유리창마다

석양이 빛나고 있다.

 

그 유리창 하나하나가 실컷 신들이었다.”

 

고은 시인이 보스톤에서 사신다면 어떤 시를 쓰셨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바드 대학교 유리창마다” 라고 쓰셨을까요?

 

한국에도 유수한 대학교가 많이 있지 않습니까? 소위 말하는 SKY를 비롯해서…. 그런데 고은 시인은 대학교 유리창을 바라보고 있지 않습니다. 보스톤에 사신다면 당연히 이곳에 있는 유수한 대학교를 언급하지 않으실줄 압니다. Roxsbury에 있는 초등학교를 생각하며 시를 쓰지 않았을까요?

“그 유리창 하나하나가 실컷 신들이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가요? 우리는 무엇을 보면서 이런 고백을 하고 있나요? 아니 주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자들이 무엇을 보고 이런 아름다운 고백을 하길 원하실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상고하며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날마다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호화롭게 즐기며 사는 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부자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지내고 있습니다. 22절 말씀입니다.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며.”

세월에 장사 없다고 거지도 죽고 부자도 죽었습니다. 그런데 거지는 어떻게 되었다구요. 천사들에게 받들려, 복수입니다, 한 천사에게 받들리는 것도 영광인데,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습니다.

우선 천사들에게 받들렸다는 것은 거지는 이 땅에서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거지를 극진히 사랑했던 것입니다. Special guest로 모시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이 이 거지를 향하고만 있었음을 알수 있습니다.

 

고은 시인은 초등학교 유리창을 보면서 아름다운 고백을 하였는데 하나님께서는 거지를 보면서 최고의 아름다운 마음을 품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거지가 죽으니 일제히 여러 천사들이 내려와 받들고 올라 간 것입니다. 한편 23절 말씀입니다.

“그가 음부에서 고통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거지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다는 표현으로 주님께서는 거지 나사로를 얼마나 생각하고 있는 것을 알수 있지만 그 보다 더 주님의 마음을 알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주님은 부자의 이름은 언급하지 않으시는 반면 거지의 이름은 언급하시고 계십니다. ‘나사로’. 물론 거지의 이름도 언급하지 않고도 충분히 멧세지를 전하실수 있으셨습니다. 예를 들어, “그의 품에 있는 자기 집 대문에 있던 거지를 보고” 라고 하실수도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거지에게는 이름을 주시고 계십니다.

 

아마 부자는 이 땅에 살 때는 집 앞에 문패를 크게 써서 붙여 놓았을줄 압니다. 반면 나사로는 그 큰 문패가 붙어 있는 부잣집에서 구걸하였고 심지어 개들이 와서 헌데를 핥곤 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 부자는 이름 없는 사람이 되어서 지옥에서 고통 중에 거하고 있습니다. 반면 아무도 자기 이름을 부르지 않았던 나사로는 지옥에 있는 부자의 입에서도 그 이름이 불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UN 인권위원회에서 일을 했던 장 지글러씨는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라는 책을 지었습니다. 특히 자녀와 대화하는 형식으로 글을 썼는데 다음과 같은 글이 나옵니다.

 

“브라질 세아라 주의 크라테우스라는 곳을 방문했을 때의 일인데, 그곳에서 아빠는 가톨릭 교회의 묘지 옆에 작은 흙더미들로 뒤덮인 넓은 지대를 본 적이 있어. 아빠에게 숙식을 제공한 농가의 한 친구는 그곳을 가리키며 ‘이름도 없는 작은 이들의 묘’라고 말했지. 태어난 지 며칠 혹은 몇 주 되지 않아 배고픔과 쇠약, 설사, 탈수 등으로 숨진 이름 없는 아기들의 무덤이라는 거야.

법적으로는 출생신고를 하는 것이 의무지만 그 아기들의 부모는 너무 가난해서 그럴 형편이 못 돼. 출생신고를 하려면 1~2레알(돈의 단위)를 내야 하거든. 그래서 아기가 죽으면 부모나 다른 가족이 죽은 아기의 유해를 ‘이름도 없는 작은 이들의 묘’에 묻는다는 거야.”

 

곧 고은 시인은 초등학교 유리창의 빛을 보고 놀라움을 느꼈지만 주님께서는 이름도 없는 작은 이들의 묘를 보고 최고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계신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이러한 비유를 지은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물론 오늘 본문 말씀은 가난하면 모두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다는 곧 구원받는다는 말씀이라고 보지는 않습니다.

바리새인들의 교만한 모습 앞에서 자기들은 아브라함을 아버지라고 여기면서 한편으로는 돈을 좋아하는 것을 정죄하고 계심은 확실합니다. 그래서 아버지라고 늘 불렀던 아브라함이 그들에게 어떤 말씀을 하실지를 도리어 말씀하십니다. 25절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그랬더니 부자는 자기 아버지의 집에 아직도 형제 다섯이 있는데 나사로를 보내서 그들은 지옥에 오지 않게 해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이에 아브라함은 그들에게는 모세와 선지자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곧 모세 오경과 말씀 가르치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의 대답이 힛트입니다. 30절 말씀,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이에 대해 31절 말씀,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깊은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거지가 부활한 몸으로 나타난 것을 본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거지들에게 드 높은 이름을 붙이는 자들을 통해 구원의 사역이 계속되고 있고, 바로 아브라함의 자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지에게 드높은 이름을 붙인다는 것 말은 쉬워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특히 요즘 처럼 인터넷으로 전 세계가 하나가 된 시대에는 갈수록 어려워집니다.

요즘은 모든 사람들의 이름이 사라지고 있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불과 몇 명의 이름만 우리들 머리에 맴돌게 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얼마전 어느 교수님이 미래학자의 책을 소개해 주면서 앞으로 대학도 없어질 것이고 교회도 아주 형태가 많이 변할 것을 말씀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대학교가 없어지는 것은 쉽게 이해가 되었습니다. 물론 저는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노벨상 받은 학자의 강의를 온라인으로 들으면 된다는 의미였습니다.

 

곧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1등만 살아 남는 세상으로 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2등 부터는 이름도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오래전 교우님댁을 방문했던 생각이 났습니다. 교우님이 어느 스피커를 향해서 ‘Alexa, today’s weather.’ 하니 조그마한 스피커가 일기 예보를 말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었습니다. 알렉사는 똑똑해서 신문도 읽어주고 원하는것을 다 대답해주는 것을 보고 아주 인상 깊었습니다. 저는 그 때 들으면서 꽤 비싸겠구나 생각했는데 요즘은 아주 흔해진 것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저희 집 사람도 아침 마다 “OK google” 하면서 날씨를 물어 봅니다. 우리집 아들이 선물로 받아 온 것을 엄마한테 드린 것입니다.

“Alexa”, “OK Google”만 부르면 하루가 무사히 시작되는 시대에 살고 있읍니다. 이웃집 사람 이름은 몰라도….

 

이런 때 우리가 가난한 자들의 이름을 안다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고 신기해 하실까요? 21세기의 기적이라고 생각됩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요즘 저희 교단에서는 Matthew 25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습니다. 한 두번 들으셨겠지만 마태복음 25: 35, 36절 말씀에 근거한 운동입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특히 구조적 가난과 구조적 인종 차별을 타파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습니다. 물론 구조적 가난과 구조적 인종 차별은 함께 가고 있습니다. 인종 차별을 하니 자연히 잘 사는 인종이 생기고 못 사는 인종이 생깁니다.

 

요즘 코로나로 인해서 더 확실한 통계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CDC(Centers for disease control and prevention) 자료에 의하면 미국에서 제일 적게 걸린 인종이 당연히 백인입니다.

백인을 1로 생각하면 그다음으로는 아시안들이 1,1배 약간 더 높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흑인들이 2.6배 그 다음으로는 히스패닉들이 2.8배 무려 세 배가 높습니다.

그런데 사망자수는 조금 달라지는데 백인과 아시안이 같습니다. 흑인이 2.1배 히스패닉은 놀랍게도 1.1배. 아마 히스패닉들은 기저질환이 적은가 봅니다. 많은 사람이 걸리지만 사망률은 백인과 아시안하고 거의 같습니다. 반면 흑인은 2배 이상 높습니다.

 

이유는 구조적 가난과 구조적 인종차별은 함께 묶여져 있다는 뜻입니다. 인종차별은 한 마디로 이름이 없다는 것 아닙니까? 이름이 없으니 minimum wage를 줄까 말까 할 정도라는 것입니다. 불법체류자일 경우는 마음 놓고 적게 주겠지요.

가난하니 좁은 집에 여러명이 살고 그리고 밖에서 막 일을 하니 코로나에 잘 걸리고 그러니 좁은 집에 사는 가족들에게 그대로 옮겨 갈수 밖에….

 

그런데 이에 더해서 권력자들과 부자들의 손에 농산물들이 놀아나서 더욱 가난한 자들을 힘들게 하고 있습니다. 지구에서 생산되는 곡식으로 지구에 사는 사람들을 츙분히 먹일수 있다고 합니다.

2012년 자료이긴 하지만 McGill Univ. 와 미네소타 대학교에서 발표한 것을 보면 이미 전 세계적으로 세계인구가 필요한 농산물의 1.5배의 농산물이 나오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잉여 농산물이 사람 보다는 동물 사육등으로 사용된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농산물 값이 비싸져서 가난한 나라 사람들은 사 먹지를 못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구조적 가난의 일환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정치 경제적으로 우리가 할수 있는 일은 극히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떻게든 늘 정치 경제적으로 해결할수 있는 방도도 구상하여야 할줄 압니다.

 

오늘 세계 성찬주일이자 정의 평화 환경 주일을 맞이 하여 이 모든 것보다도 제일 먼저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것이 있을줄 압니다.

 

가난한 자들을 인격적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들에게 이름을 불러드리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들로 인해서 가슴 아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조적 가난과 인종차별 퇴치의 시작이 아닐까요?

주님께서 이미 이들의 이름을 부르시고 계시니 말입니다.

 

이럴 때 주님께서는 가난한 자들을 향해서만 이름을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들로 인해서 가슴 아파하는 자들의 이름도 불러주시지 않으실까요?

 

말씀을 거둡니다.

어느 날 한 라삐가 제자들에게,
“새벽은 언제 오는가?”하고 물었습니다.

제자 하나가, “멀리 있는 나무를 보고 그 나무가 무화과
나무인지 배나무인지 알아볼 수 있는 시간입니다.”

그러자 라삐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이렇게 몇 명이 답을 했지만 모두 틀렸다고 하자
제자들이 되 물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새벽은 언제 옵니까?”

그러자 라삐는 “어떤 사람의 얼굴을 보았을 때
그가 너의 형제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 때가 바로
새벽이란다”

 

우리가 가난한 자의 얼굴을 알아보고 이름을 부른다면 그 때가 새벽이 아닐까요? 이 때 참 평화가 임한 것이 아닐까요?

 

교우 여러분,

이름도 없는 작은 이들의 묘를 방문하는 것 보다는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이름을 부르십시다. 이것이 세계 평화의 시작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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