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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을 더하소서” 누가복음 17:5-10 (10/25/2020)

윤동주 시인의 ‘아우의 인상화’라는 시의 일부를 먼저 소개해드립니다.

 

아우의 인상화

붉은 이마에 싸늘한 달이 서리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발걸음을 멈추어
살그머니 애띤 손을 잡으며
「너는 자라 무엇이 되려니」
「사람이 되지」
아우의 설운 진정코 설운 대답이다.

 

‘설운’은 ‘서러운’을 뜻한다고 합니다.

 

윤동주는 두 남동생이 있었는데 두 남동생을 생각하면서 이 시를 짓게 된 것 같습니다. 우선 첫 연에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라는 표현을 통해 소망이 없어 보이는 현실을 느끼게 합니다. 곧 일제강점기를 통해 여러모로 어려운 시국을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할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의 촛점은 두 형제지간의 대화인 것 같습니다. 형이 묻습니다.

“너는 자라 무엇이 되려니.” 슬픈 얼굴을 띈 동생이 대답합니다.

“사람이 되지.”

 

사람이 되기 어려운 시절을 살고 있음을 윤동주는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때만 사람되는 것이 어려웠을까요?

일제강점기에는 일제강점기대로 사람이 되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요즘은 요즘대로 사람이 되는 것이 쉽지 않은줄 압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는 일제강점기 대로 요즘은 요즘대로 사람이 되는 길이 아직도 남아 있지 않을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상고하며 사람이 사람이 되는 길이 어디에 있는지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사도들이 주님께 구합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이에 주님은 동문서답을 하십니다. 6절,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믿음을 구했는데 주님은 딴전을 피우십니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뽕나무도 움직였을 거라는 것입니다.

아니 믿음을 더해 달라고 하는데, 너희는 전혀 믿음이 없는데 뭘 더할 믿음이 있겠냐고 면박을 주십니다. 사도들의 얼굴은 새빨개졌을 것입니다. 주님께 실망도 했을지 모릅니다. 아니 그렇다면 겨자씨만한 믿음을 주시면 되지 왜 핀잔을 주시나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 대화는 사자성어를 생각나게 합니다. ‘동상이몽.’ 함께 있는 것 같은데 전혀 다른 꿈을 꾸고 있습니다.

 

한편 제자들의 모습도 이해가 갑니다. 오래 전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1: 9절,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이 말씀이 생생히 기억에 남아 있어서 이 말씀에 의지해서 구한 것입니다. 그런데 도리어 겨자씨 만한 믿음도 없다고 꾸짖고 계신 것입니다.

 

사실 제자들이 이 말씀에 의지해서 믿음을 구하게 된 동기가 있었다고 봅니다. 몇 주 전에 말씀드렸습니다. 주님께서 70명의 제자들을 이스라엘 땅에 보내셔서 놀라운 경험을 하게 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 때 그들은 주님께 이처럼 보고했습니다. 누가복음 10: 17절,

“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이런 놀라운 경험을 했는데 이상하게도 그 이후에는 비슷한 역사가 일어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환자들에게 손을 얹어도 아무 일도 생기지 않습니다. 기적은 더 이상 자기들 손 밖을 떠난 것을 느낍니다.

한편 주님께서 “구하라” 하셨으니 자기들이 구하지 않아서 더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구나 생각하며 주님께 요청한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한편 주님은 제자들이 왜 믿음을 구하는지 모르실리가 없습니다. 주님은 다 알고 계셨을줄 압니다. 제자들이 더 이상 기적이 생기지 않으니 당신의 말씀을 의지해서 믿음을 구하고 있는 것을…. 그런데 주님은 모른척 하시고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7-10절,

“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주님께서 대답하시는 내용의 요지는, 이미 그 능력은 주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발휘가 안 되고 있을뿐이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주님을 섬긴 후 계속 주님 곁에 허리띠를 동여매고 다음 일을 받을 마음으로 서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어느덧 섬김의 자리에서 베푸는 자리로 자기들이 올라와 서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스스로 유익한 자들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사실 뭔가 공헌을 하면 스스로 유익한 자라고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런데 제자들은 단지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믿음을 더하여 주소서”하며 구했습니다. 그들에게 주님의 일을 한 후, 곧 능력을 행한 후 정작 필요한 것은 이 고백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오늘 종교개혁주일로 지킵니다. 약 5백년 전에 종교개혁이 일어났는데 요즘도 매년 종교개혁 주일을 지키는 이유가 있습니다. 개혁은 일회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Reformation must be continued.”

“종교 개혁은 계속되어야 한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미 당신의 제자들에게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개혁은 끊임 없이 필요함을 짧은 공생애 기간을 통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능력을 잃을 때마다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라는 고백이 난무할 것을 주님은 이미 내다 보신 것입니다. 스스로 유익하다는 생각에 사로 잡힐 것을 내다 보신 것입니다. 곧 앞으로 이어질 수천년의 교회에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닌 이 고백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사실 지난 2000년 교회 역사 가운데 어떤 고백이 더 많이 주님께 상달되었겠습니까?

“믿음을 더하소서.”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이 두번째 고백이 얼마나 중요한지 역사가 잘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5세기까지 다섯 교회가 리더쉽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 알렉산드리아 교회 콘스탄티노플 교회 로마 교회 안디옥 교회. 이 다섯 교회의 감독들은 모두 동등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옛 교회의 영광은 다 사라졌습니다.

6세기 동로마의 유스티아누스 황제는 콘스탄티노플에 그 유명한 소피아 성당을 건축합니다. 저도 오래전 안식년시 가 보았습니다. 물론 이제는 이슬람 모스크가 되 버렸습니다.

거의 6년동안 매일 5만명의 노동자를 동원하여 지었습니다. 특히 모자이크는 유명합니다. 교회당이 완성되자 유스티아누스 황제는 외쳤다고 합니다.

“솔로몬이여! 내가 이겼노라.”

 

만일 황제가 이처럼 외쳤으면 어떠했을까요?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그렇다면 소아시아 지방이 요즘도 안디옥 교회를 비롯해서 전 세계의 신앙을 이끄는 교회로 남아 있지 않을까요?

 

그러나 참 종교개혁은 과거를 뒤돌아 보며 손가락질 하며 우리는 그렇지 않다고 자만하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오늘 우리의 모습을 살펴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늘 기억하고 스스로 주님 앞에서 겸손히 외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한편 이를 늘 고백하는 자들은 어떤 삶을 살까요? 헤르만 헷세의 ‘동방순례’라는 이야기입니다.

전쟁 이후에 순례자들은 영적 정신적 각성을 위해 동방으로 순례를 떠납니다. 순례 도중에 멸시와 방해를 받기도 했고 젊은이들이 동참해 함께 걷는 좋은 체험도 합니다. 이러한 순례 길에 가장 힘이 되어 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단연 하인 레오입니다. 그는 허드렛일을 하면서 섬기고, 노래를 부르거나 악기를 연주하며, 지친 여정 속에서 쉼터가 되어 주었습니다. 불평이나 하소연을 들어주었고, 가야 할 방향을 친절하게 안내하고, 격려도 해 주었습니다.

잘 진행 중이던 순례는 어느 날 하인 레오가 실종된 후 혼란에 빠집니다. 순례자들은 서로 갈등하게 되고 무기력해졌으며 믿음이 사라지고 가치와 의미를 잃게 되었습니다. 그때 비로서 그들은 사라진 레오 같은 사람이 진정한 리더가 아닌가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후일에 하인 레오가 사실은 그들이 속한 교단의 지도자였다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지도자가 하인이 되어 그들과 함께 했던 것입니다.

 

헤르만 헷세는 주님의 말씀을 잘 이해하고 이처럼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든 것 같습니다.

레오가 실제 인물이라면 그 다음 어떤 장면이 펼쳐질까요? 교황으로부터 칭찬을 받지 않았을까요? 그 때 그는 고백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그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기적이 아닐까요? 이것이 종교개혁이 아닐까요? 주님은 제자들에게 기적을 행할 것을 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제자들로 하여금 사람이 될 것을 원하셨습니다.

사람이 되는 길은 오직 한 길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소한 기적은 따라 오게 되어 있습니다. 병을 고치는 기적은 사소한 기적입니다.

 

요즘 특히 코로나 가운데 있는데 우리들의 삶에 어느 고백이 더 익숙해 있습니까? 당연히 “믿음을 더하소서”가 아닙니까?

그렇다고 뽕나무가 움직여졌나요?

왜 움직여지지 않죠?

더 이상 뽕나무를 움직이게 하는 고백은 “믿음을 더하소서”가 아닙니다. 도리어,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일제강점기라서 더 사람되기 어려운 것도 아닙니다. 자유민주주의는 그나름대로 사람되기 어려운 환경이 주어집니다. 교회가 교회 될 때만이 사람이 사람되는 것이 아닐까요? 이 둘은 뗄레야 뗄수 없는 관계를 갖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언제 교회가 교회가 되어 간다고요?

“믿음을 더하소서”?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이 고백을 통해서 교회는 늘 새로와지는 것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한 때 Ceylon으로 불리웠던 현재는 Sri Lanka라는 인도 옆에 있는 섬나라가 있습니다. 불교가 아주 강한 나라입니다. 불교 국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나라가 기독교 국가가 될 기회가 한 때 있었습니다. 19세기 말 영국의 식민지일 때 많은 불교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했습니다. 많은 선교사들이 왔고 20세기로 향하면서 조만간 기독교가 우세하게 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성장하는 기독교와 멈춰 있는 불교 사이에 특이한 일이 벌어집니다. 두 대표가 나와서 종교교리 대결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The Great Panaduga Debate이라고 부릅니다. 기독교를 대표해서 David이라는 사람이 나왔는데 이 분은 한 때 독실한 불교인이었습니다. 그리고 불교 경전에 학자였던 분입니다. 그리고 불교측을 대표해서도 서양 학문의 한계를 잘 알고 있는 학자가 나왔습니다.

두 사람 모두 열띠게 상대방 종교의 문제점을 제시했습니다. 양쪽은 자기들이 승리했다고 스스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이를 계기로 불교가 다시 회복세에 들어갑니다.

 

신학적 지식을 통해서 주님의 말씀이 전해질수 없다는 것이 증명이 된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신학적 지식은 기적을 낳지 못합니다. 오직 주님 앞에서의 고백만이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갑니다.

 

그러면 어떤 분은 저에게 질문하실지 모릅니다. 제가 BNI이사장으로 섬기고 있는데 왜 BNI를 운영하시냐고…?

 

사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대학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배우면 배울수록 겸손했습니다. 그의 가슴에는 바로 이 고백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신학적 지식이 겸손한 고백을 하는 삶을 만날 때 종교개혁이 일어난 것입니다. 세계 역사를 뒤흔드는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 기적은 새로운 인격, 새로운 교회를 이루어 갑니다. 그러므로 주님 앞에서 고백하십시다.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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