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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의 브엘세바” 창세기 26:23-33 (12/06/2020)

Holocaust를 통해 600만 이상의 유대인들이 살해를 당한 사실 잘 아실줄 압니다. 그 때 살아남은 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이 당시 독일인들은 유대인들을 죽이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지금 사람이 아니라 돼지를 죽이고 있다.”

그러나 이 한 사람은 그들의 계략에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아침 마다 커피 한 잔이 주어지는데 말이 커피이지 물 한 잔이었다고 합니다. 반 잔은 마시고 나머지 반 잔으로 양치를 하고 세수를 하면서 그는 눈으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돼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최고 작품인 인간이야!”

이 눈빛으로 인해서 나찌들은 그를 함부러 대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오늘 대강절 두번째 주일로 지킵니다. 대강절 촛불이 두개 켜져 있습니다. 우리가 대강절을 지키는 이유 중에 하나는 우리들의 눈빛을 새롭게 하기 위함이 아닌지 싶습니다.

지난주에는 유대인의 조상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오늘은 또 다른 유대인의 조상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이야기를 나눕니다. 이 두 사람은 평생 대강절의 삶을 사신 분으로 생각됩니다. 이들은 어떻게 당신들의 눈빛을 새롭게 함으로 하나님의 최고 작품이 되어 갔는지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을 잠시 반복하면,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한갖 한 가족의 가장에 불과한 아브라함에게 찾아와 화친의 악수를 하자고 합니다. 보통 한 가장이 왕을 찾아 가는데 거꾸로 된 것 같습니다.

더 이상한 것은 이 때 아브라함은 아비멜렉 왕에게 자기의 우물을 내 놓으라고 다구쳤고 이에 아비멜렉이 자기는 몰랐던 일이라고 하면서 겸연쩍은듯 아브라함에게 우물을 내줍니다.

이 우물을 받은 후 그곳 이름을 부릅니다. ‘브엘세바,’ ‘맹세의 우물.’ 아브라함은 그곳 이름을 부름으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의 축복이 이루어질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에셀 나무를 심습니다. 이는 만민의 아버지가 되어 이웃을 축복하게 될 것을 믿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주신 세 가지 약속을 확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손, 땅, 이웃의 축복. 그리고 이 세 가지 축복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주어졌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 이제 아브라함은 앞으로는 하나님의 약속이 하나 하나 이루어질 것을 기대하며 즐겁게 하루 하루를 지내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며칠 후 하나님께서 부르십니다. 이삭을 모리아 땅에 가서 번제로 드리라고 하십니다. 잠시 세 가지 약속이 이루어질 것을 즐기다가 청천벽력입니다. 도저히 상상이 안 갔을 것입니다. 이에 아브라함이 어떻게 하죠?

바로 그 다음 날 아침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향합니다. 잘 아시다시피 아브라함은 이삭을 묶고 제단 위에 놓습니다. 그리고 칼을 높이 쳐듭니다. 이 때 이삭은 무엇을 보았을까요? 칼?

저는 확신합니다. 아버지의 눈을 봤을 것입니다. 아버지의 어떤 눈을 보았을까요? 하나님을 향한 원망의 눈…?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확신에 찬 눈을 보지 않았을까요? 자손, 땅, 이웃의 축복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약속에 대한 확신이 아브라함의 눈빛에 가득차 있지 않았을까요? 황홀한 눈빛에 잠시 이삭도 정신을 잃지 않았을까요?

그러더니 웬걸 아버지는 자기를 다시 내려 놓고 수풀에 걸려 있는 숫양을 가져다가 대신 번제로 삼습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에게 준 최고의 선물은 번제단 위에서 내리비치는 최고의 황홀한 눈빛이었던 것입니다.

 

어느 화가가 쓴 글을 읽어 보았습니다. 대학생 시절에는 palette에 뭉게진 색채 조각들로 만들어진 추상적인 화면에 심취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요즘 미술 잡지를 보면 이미 화가들이 팔레트를 그냥 예술작품으로 전시해 놓은 갤러리도 있다는 글도 많이 볼수 있다고 합니다.

한편 학생시절 어느날 교수님이 자기가 쓰고 있는 팔레트를 보자고 하셨답니다. 이유는, 팔레트를 보면 그가 어떤 그림을 그릴 것인지를 알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생도 그렇지 않을까요? 각자의 인생의 팔레트를 보면 그의 미래를 알수 있지 않을까요? 이삭의 인생의 팔레트는 어떠했을까요? 세 가지가 섞여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자기가 보았던 아브라함의 눈빛, 브엘세바, 에셀나무. 물론 아브라함의 눈빛이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지 않았을까요?

 

이 팔렛트 덕분인지 이삭을 후에 흉년이 와서 그랄 골짜기로 쫓겨 갔을 때 우물을 빼앗기고 빼앗기다가 세번째 우물을 빼앗기지 않을 때 르호봇의 노래를 부릅니다.

 

“르호봇, 넓다!”

이 노래를 부름을 통해서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의 눈빛을 소유한 것이 증명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는 오늘 본문 말씀이 등장합니다. 23절 말씀입니다.

“이삭이 거기서부터 브엘세바로 올라갔더니.”

기껏 파 놓고는 브엘세바로 올라갑니다. 브엘세바는 아브라함이 먼저 거했던 곳이죠. 이삭이 르호봇의 우물을 판 후에 곧 브엘세바로 올라간 이유는 성경은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결과적으로만 보면, 그는 믿음으로 새로운 약속의 땅을 향해 떠난 것입니다. 르호봇 우물은 블레셋 사람들에게 선물로 남겨 놓고…. 한편 24절 말씀을 보면,

“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나는 네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이 번성하게 하리라 하신지라.”

하나님께서는 르호봇의 우물을 그냥 놓고 떠나온 이삭을 축복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말이 하나님의 축복이지 이삭은 지금 홀로였습니다. 한 가족뿐이었습니다. 블레셋 영토 안에 사는….

 

다음의 기사가 저로 하여금 아브라함과 이삭의 모습을 깊게 느끼게 했습니다. 미주 크리스챤 신문에는 매주 미전도 종족을 소개하는 기사가 나옵니다. 어느 주간은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습니다.

“카요르트, 키샨간지아, 타즈푸리 부족들이 이용할 수 있는 성경은 아직 없다. 타즈푸리족에 관한 보고에 의하면 12,000명의 인구 가운데 단 한 명의 기독교인 형제가 있다고 한다.”

이 글을 읽으면서 바로 그 단 한 명이 아브라함과 이삭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런 이삭에게 또 다시 아비멜렉이 나타납니다. 군대장관과 더불어 그랄에서부터 이삭에게 온 것입니다. 화친의 맹세를 하자고 합니다.

이에 이삭은 아비멜렉과 일행을 잘 대접하고 이튿날 서로 화친을 맹세 한 후에 환송합니다. 그 때 이삭의 종들이 우물 파는데 성공을 했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처럼 빼앗겼던 것을 되찾은 우물이 아닙니다. 처음 판 우물입니다. 이 소식을 알리니, 33절 말씀입니다.

“그가 그 이름을 세바라 한지라 그러므로 그 성읍 이름이 오늘까지 브엘세바더라.”

 

사실 이곳은 이미 아브라함이 ‘브엘세바’라고 부른 것입니다. 이제 이삭이 또 다시 자기 우물을 판 후 ‘세바’ 곧 ‘맹세’라고 붙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삭이 후에 아브라함이 아니라 자기가 이곳의 이름을 붙였다고 주장한 것일까요? 부자간의 경쟁인가요? 그럴리는 없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통해 왜 하나님께서 이삭이 르호봇 우물을 남겨 두고 브엘세바로 떠났을 때 축복하셨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좁은 골짜기를 ‘르호봇’ 노래를 부르는 이삭의 모습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셨습니다. 이삭은 이미 아브라함의 믿음 아브라함의 눈빛을 소유하고 있음을 확증하신 것입니다.

이삭의 믿음이 확증되었으니 이제 하나님은 이삭을 넓은 곳으로 보내시는 것입니다. 넓은 곳에서 하나님의 증언자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같이 브엘세바의 주인공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곧 아브라함과 같은 급이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침으로 하나님을 향한 약속을 믿는 믿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반면 이삭은 좁은 골짜기에서 “넓다”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을 향한 약속을 믿는 믿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도 이삭도 모두 브엘세바의 주인공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아브라함과 이삭이 동급이 되었다 말씀드렸는데…. 사실 그렇지도 않습니다. 항간에는 ‘아버지 만한 자식 없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런 뜻으로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 이야기의 매력은 하나님의 역사는 항상 발전합니다. 결국 그리스도에게 이르기까지 발전합니다.

이삭이 아브라함 보다 못해 보이는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 나라의 발전을 위해서 이삭의 삶을 아브라함 보다 한 차원 높아지게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세상을 주관하시는 원리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을 비교해서 말씀드린다면, 아브라함의 ‘브엘세바’ ‘맹세의 우물’은 아비멜렉과의 맹세를 뜻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종들이 팠던 우물을 되돌려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람과의 맹세입니다.

반면 이삭은 하나님께서 주신 우물 앞에서 맹세한 것입니다. 곧 하나님과의 ‘맹세의 우물’, 하나님 앞에서의 ‘브엘세바’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삭은 믿음의 후배들에게 큰 도전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믿는 자들에게 브엘세바의 축복을 누릴 것을…, 그런데 그 축복은 이삭 자신이 누린 것보다 한 차원 높아진 축복이 될 것을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한편 이를 위해 우리는 대강절을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브엘세바를 찾기 위하여….

 

한 마디로 우리에게는 우리의 선조보다 더 높은 차원의 브엘세바의 축복이 기다리고 있고 우리의 자녀들에게는 우리 보다 더 높은 차원의 브엘세바의 축복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를 위해 대강절을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녀들을 위해 늘 걱정하는데 걱정마십시요. 그들은 우리보다 한 차원 높은 브엘세바의 주인공들입니다. 문제는 우리입니다. 우리만 대강절을 잘 지키면 자녀들은 따라옵니다.

 

그러면 우리들의 브엘세바는 어디일까요? 우리가 있는 곳이 아닐까요? 우리가 대강절을 잘 지킨다면 우리는 어느새 우리가 있는 곳이 ‘맹세의 우물’이 있는 곳임을 보게 되지 않을까요? 우리만의 축복의 브엘세바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아브라함의 눈빛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기예수의 눈을 바라 본다면 다시 오실 주님을 사모한다면 우리도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브엘세바.’ 아기 예수를 바라볼수록 그 우물을 깊게 파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있는 곳에 에셀나무를 심는 것입니다.

모든 인류를 위해서 우리가 심는 것입니다. 이 에셀나무는 우리만 심을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웃사람들에게 우물물을 나눠주며 아울러 에셀 나무의 열매를 나눠 주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인생에 팔레트에도 세 가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눈빛 아니 아기 예수의 눈빛, 브엘세바, 그리고 에셀나무.

 

말씀을 거둡니다.

원재훈 시인이 어느 TV프로그램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합니다.

“작년 가을에 잠자리 한 마리가 사무실로 날아 왔습니다. 사무실에는 아홉 개의 창문이 있습니다. 그런데 잠자리가 나가지를 못하는 겁니다. 잠자리는 아시다시피 곁눈, 홑눈 합해서 만 개의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만 개의 눈이 다 필요 없었습니다. 창밖으로 나갈 수 있는 한 개의 눈만 있으면 되는데, 그 한 개의 눈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생각했습니다.

‘아, 난 지금 만 개의 눈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 개가 필요한데….’”

 

우리도 그러지 않을까요? 우리에게 필요한 한 개의 눈은 아기 예수의 눈을 바라보는 눈입니다. 바로 그 눈은 아브라함이 이삭이 소유했던 눈입니다. 이 눈을 소유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브엘세바의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 축복은 우리들의 선조들이 누렸고 우리들의 자녀들이 누릴 것입니다. 물론 세대가 지나면서 발전된 브엘세바의 축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의 선조들과 자손들과 함께 대강절을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아기 예수의 빛을 발하는 아름다운 대강절이 될 것을 기원합니다. 다시 오실 메시야를 기다리십시다.

여러분의 삶의 palette에는 어느 물감이 가장 많으십니까?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가 그 이름을 세바라 한지라 그러므로 그 성읍이 오늘까지 브엘세바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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