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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마누엘” 마태복음 1:18-25 (12/20/2020)

제가 매일 듣는 두 가지 노래가 있습니다. 아침에 컴퓨터에 앉으면 우선 르호봇의 노래를 듣습니다. 항상 최근의 르호봇 이야기에 나오는 르호봇의 노래를 듣습니다. 요즘은 누구 노래를 듣는지 지난주 수요일 판을 보신 분들은 아실줄 압니다.

그리고 쉬는 시간에 유튜브를 키면 늘 듣는 노래가 있습니다. 싸운드 어브 뮤직에 나오는 ‘에델바이스’입니다.

많은 분들이 이 노래를 좋아하시고 계실줄 아는데, 제가 좋아하게 된 이유는 마지막 가사에 있습니다.

 

에델바이스, 에델바이스
매일 아침 나를 반겨주네.
작고 하얗고, 밝고 깨끗한 네 모습은
날 만나서 행복해 보이는구나.
눈꽃이여, 늘 꽃피고 자라기를.
언제나 활짝 피고 자라나기를.
에델바이스, 에델바이스
내 조국을 영원히 축복해 주렴.

 

그런데 자기 조국을 축복해 달라고 하는 그 꽃은 실제로는 작고 연약한 모습입니다. 사실 스위스와 오스트리아 두 나라가 에델바이스를 나라꽃으로 삼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가 무궁화인 것처럼…. 우리 무궁화는 나무이고 또 번식력이 강합니다. 물론 예쁘기도 하고요.

그러나 에델바이스는 바위 틈에 피는 아주 연약해 보이는 꽃입니다. 그런데 이 연약해 보이는 꽃을 보면서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조국을 영원히 축복해 주렴.”

 

어떻게 보면 넌센스입니다. 이처럼 작은 꽃이 어떻게 나라를 구해 줍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 마음을 십분 이해합니다. 머리로는 이해가 안 되도 가슴으로 느낌이 옵니다. 그래서 제가 매일 이 노래를 듣는 것 같습니다. 대강절을 통해 우리는 더 이 마음을 간직하게 되지 않았을까요?

 

아마 오늘 성경말씀의 저자 마태도 요즘 우리들과 같이 살고 있다면 에델바이스를 좋아했을 것 같습니다. 아니 에델바이스보다 더 연약하고 도저히 생각지 못한 곳에서 피는 꽃을 좋아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1, 2장은 예수님의 탄생 기사가 기록되어 있는데 객관적으로 보면 예수님의 탄생 기사는 그렇게 썩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아니 예측하기 어려운 사건들이 줄이어 나옵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의 족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조상 중에 네 명의 여인들이 나오는데 별로 메시야의 조상으로 모시기에는 좀 부끄러운 분들입니다.

 

제일 먼저 다말이라는 여인은 유다의 며느리인데 시아버지인 어른인 유다를 통해 쌍둥이 아들을 낳습니다. 그 다음에는 라합이 나오는데 라합은 가나안 땅에 살았던 기생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룻이 나오는데 룻이 제일 그나마 괜찮습니다. 모압 여인입니다. 사실 모세 오경에 보면 모압인들은 이스라엘 총회에 들어 오지 못 하게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솔로몬의 어머니이 곧 다윗의 아내 밧세바인데 이는 이방여인이면서 우리아 장군의 아내였습니다. 간음을 통해서 예수님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마태는 서슴치 않고 이런 예수님의 족보를 자세히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의외의 가문에서 태어난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서곡에 불과 합니다. 예수님의 부모는 어떤 가정이었습니까? 약혼은 했지만 마리아의 배가 불러 오기 시작하고 주위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젊잖게 해결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 때 주의 사자가 나타나서 말씀합니다.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배부른 여인을 데려 오는 자체가 이웃 사람들 보기에는 두 사람 모두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들로 보였던 것입니다. 곧 아기 예수는 세상 사람들 보기에는 문제가 있어 보이는 가정에서 태어난 것니다.

 

그런데 아무리 천사가 나타났다고 해도 이런 일을 감당하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미리 준비시켜 놓으신 것 같습니다. 주의 사자는 이사야서를 인용하며 요셉에게 설명해 줍니다. 아마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성경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22, 23절 말씀입니다.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사실 천사도 의외의 일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처녀가 잉태한다는 도저히 생각할수 없는 말을 합니다.

이 말씀은 이사야서 7:14절의 말씀인데 배경은 아하스 왕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아하스는 히스기야의 아버지인데 히스기야는 선한 왕입니다. 그래서 앗수르 군대도 무찔렀고 병에서 나음도 입었고 태양이 10도 뒤로 물러 갔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히스기야의 아버지가 아하스인데 아하스는 앗수르 제단을 아예 예루살렘 성전에 들여 온 악한 왕이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어느 왕이 다스리고 있을 때 예언했겠습니까? 상식적으로 생각하며 의로운 왕 히스기야 때에 예언을 하는 것이 당연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악한 왕 아하스 왕 시대에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서 예언의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물론 처녀가 잉태하는 것도 의외이지만 그래도 선한 왕이 통치할 때 이런 예언의 말씀이 주어졌으면 그나마 받아드리기가 쉬었을 것입니다.

 

요셉은 이사야서를 읽으면서 늘 이 말씀이 의외라고 생각하며 읽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의외의 사건이 자기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탄생 기사는 처음부터 다 의외입니다. 예수님의 족보도 그렇고, 마리아가 배불러지는 것도 그렇고…. 그런데 이미 모든 것이 세상 사람들 눈에는 의외의 사건이 될 것을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 말씀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임마누엘.”

 

생각지도 않은 바위 틈에 에델바이스가 자라듯이 임마누엘의 역사는 전혀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편 예기치 못한 곳에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것을 잊을 때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우리는 종종 예기치 못한 곳에서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것을 잊고 살지 않습니까? 이어서 소개되어지는 동방박사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귀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이들은 아기 예수를 만나기 위해 떠났는데 별은 이스라엘 땅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그들은 생각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유대인의 왕이 태어났구나.” 더 이상 별을 따라 갈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곧바로 예루살렘 궁으로 찾아 간 것입니다. 유대인의 왕이니 당연히 궁전에서 태어날 것을 기대한 것입니다.

헤롯왕이 당황해서 서기관들에게 물으니 미가서 5:2절을 통해서 베들레헴에 태어난 것을 알게 해 줍니다. 그래서 그들은 베들레헴으로 향합니다. 헤롯왕이 돌아가는 길에 어디에서 태어나셨는지 알려 달라고 했는데 꿈에 주의 사자가 지시하여 헤롯왕에게 가지 않고 고국으로 돌아 갑니다.

그런데 이 때 큰 비극이 생깁니다. 동방박사들에게 속았다고 생각하고 베들레헴 지역에 두 살 이하 아이들을 다 죽입니다. 만일 동박박사들이 예루살렘 궁으로 처음부터 가지 아니하고 미가서의 예언을 따라 베들레헴으로 갔으면 어떠했을까요? 애꿎게 귀한 어린아이들이 희생이 되지는 않지 않았을까요?

 

예측할수 없는 시간에 예측할수 없는 가문에 예측할 수 없는 연약한 아이로 태어나는 것을 잊을 때 이런 비극이 찾아 온 것이 아닐까요?

곧 높은 자들을 통해 ‘임마누엘’의 사건을 기대할 때 도리어 비극은 오늘도 찾아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에델바이스처럼 전혀 예측할수 없는 곳에 예측할수 없는 모습으로 찾아 오는 아기를 향해 ‘임마누엘’을 외칠 때 오늘도 새로운 하나님의 역사는 펼쳐지지 않을까요?

 

많은 분들이 아시겠지만 제가 NCKPc총회장을 역임했고 요즘도 정책자문위원장으로 한인 총회를 위해 섬기고 있습니다. 전임 총회장으로써 제일 어려운 일이 있습니다.

목회지를 찾는 분들이 종종 저에게 추천서를 써달라고 합니다. 전임 총회장이고 지금도 active하게 총회일을 보고 있으니 제 추천서가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하고 부탁하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물론 제가 추천한 분이 된 적도 있지만 많은 경우 되지 못합니다. 없는 이야기를 적을수도 없고 또 거절할수도 없고 최선을 다해 써 주지만….

이 사회는 소위 말하는 저명인사의 추천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줄 서기를 잘해야 한다는 말도 유행하고 있습니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요즘 우리가 사는 시대도 아하스왕 시대과 같지 않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권력자를 통해 놀라운 역사를 바라고 기대합니다. 그럴수록 권력자들의 횡포는 더 심해집니다. 모두 권력을 손에 쥐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성탄주일을 맞이하여 천사는 외치고 있습니다. 조용히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는 예측하지 못하는 곳에 예측하지 못하는 모습으로 가장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하나님께서 찾아 오심을 온 세계가 권력지상주의로 가고 있는 이 때 우리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1943년 2차 대전 당시 독일의 한 소년은 고향 함부르크 도시 전체가 영국 공군에 의해 무참히 파괴되고, 4만 여명이 화염 속에서 불타 죽는 사건을 목격했습니다. 폭격의 처참함 속에서 갈기갈기 찢긴 친구들의 시체를 보면서 그는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나는 살아남았다. 밤에 나는 처음으로 하나님에게 외쳤다. 나의 하나님, 당신은 어디에 계십니까? 무엇 때문에 나는 살았고 다른 사람들처럼 죽지 않았습니까?”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소년은 제2차 세계대전에 독일 학도병으로 참전을 했지만, 영국군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스코틀랜드 포로 수용소에서 3년 동안 지내면서 크리스천이 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1945년 그 당시에 스코틀랜드의 포로로서 영혼의 수렁에 빠져 있던 나를 예수님은 찾아왔다. 잃어버린 나를 찾아오셨다. 내가 길을 잃고 헤맬 때 그분이 나에게 오셨다.”

그 후 그는 신학을 공부했고, 1964년 ‘희망의 신학’이라는 책을 출간하면서 일약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위르겐 몰트만입니다.

 

위르겐 몰트만을 통하여 수 많은 사람들이 삶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희망임을 깨우치게 된 것입니다. 그는 기적의 주인공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임마누엘의 기적의 주인공이 될수 있었을까요? 포로가 된 몰트만에게 미국 군목님이 찾아 와서 성경을 주신 것입니다. 그 목사님은 포로 수용소를 향하여 노래를 부르곤 하시지 않았을까요?

“임마누엘.”

 

주님은 올해도 예측하지 못하는 곳으로 찾아 오십니다. 가난하고 연약한 자들 사이에 임마누엘로 찾아 오십니다. 그들 사이에서 희망의 꽃으로 피어나십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권력자들보다 가난하고 연약한 자들이 많은가 봅니다.

궁전은 하나이지만 마굿간은 온 세상에 널려져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디로 향하시고 계십니까?

 

말씀을 거둡니다.

오늘 성탄주일을 맞아 아쉬운 말씀을 드리자면 사실 오늘은 성만찬뿐 아니라 세례식도 겸해야 하는 날입니다. 특히 성탄주일에 유아세례를 거행하는 것은 아주 의미가 깊다고 봅니다. 아기 예수의 모습을 세례받는 자녀들 안에서 볼수 있으니 말입니다.

지난번에 쉐마의 밤이 성황리에 진행되었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서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모든 순서가 아주 알차게 진행되었습니다. 그중 올해 팬데믹 동안 저희 교회에 11명의 자녀가 태어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11명의 자녀가 임마누엘의 멧세지를 안고 우리의 삶 속에 찾아 온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온 임마누엘의 멧세지가 그들의 삶에서 아름답게 열매 맺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11명의 자녀들을 보면서 노래 부르는 것입니다.

“임마누엘.”

 

성경은 말씀합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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