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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IV: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마태복음 6:5-11(05/16/21)

오늘은 챨리 브라운의 만화로 말씀을 시작하겠습니다. 제 보기에는 챨리 브라운과 스누피의 세기의 대화라고 생각합니다.

챨리 브라운이 스누피에게 말합니다.

“We live once, Snoopy.”(우리의 삶은 단 한번이야, 스누피)

“Wrong, we die once. We live every day.”(아니, 우리는 한번 죽어. 매일 매일 사는 거지.”)

 

얼핏 들으면 챨리 브라운이 더 거시적 안목을 갖고 사는 것 같습니다. 인생을 하나의 긴 예술작품으로 보고 있다고 할까요?

그런데 누가 실제로 매일 매일 보람있게 살겠습니까? 그래서 인생을 위대한 작품으로 가꾸어 나가겠습니까? 챨리 브라운? 스누피?

 

대학 친구들 카톡에 누가 이 코믹을 띄웠습니다. 제가 답하길,

“스누피가 사람 보다 낫네.”

스누피가 챨리 브라운 보다 훨씬 지혜롭다는 뜻으로 답했습니다.

 

스누피가 챨리 브라운 보다 지혜로울수 있었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제 보기에는 스누피는 매일 매일 주기도문을 외우지 않았을까요? 스누피가 사람이라면….

 

요즘 주기도문을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 주기도문에는 7개의 창문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7개의 기도제목이 있습니다.

첫번째 창문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우리는 매일 아침 기도의 창문을 열면서 오늘 만나는 이웃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이름을 기대하게 됩니다.

두번째 창문은, “나라가 임하시오며.” 자주 자주 하나님께서는 침묵으로 응답하시지만 침묵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기대하며 하루를 힘차게 시작하게 됩니다.

세번째 창문은,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인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아낌없이 아들을 내어주셨습니다. 이제는 땅에서 하나님의 인류 구원의 역사가 펼쳐질 것을 기대하며 하루를 시작합니다.

오늘 우리는 함께 네번째 창문을 엽니다. 어떤 기도 제목을 주실까요?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갑자기 톤이 바뀝니다.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일용할 양식을 위해 네 번째 창문을 열라는 것입니다.

앞에 세 창문과 비교하면 좀 격에 맞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이름과 나라와 뜻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시더니 갑자기 매일의 양식을 위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좀 의아한 생각은 들지만 이제 말씀에 순종하여 네 번째 창문을 열려고 하는데 먼저 한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갑니다. 주님께서 주기도문을 가르치기 전 우리 성경 공부 교재식으로 말씀드리면 ‘마음 열기’로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이미 하셨습니다. 외식하는 자나 이방인처럼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8절,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그렇다면 여기에 일용할 양식도 포함되지 않을까요? 그런데 세 가지 높은 차원의 기도를 하라고 하시더니 이제는 일용할 양식을 위한 네 번째 창문을 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이 문제를 피해가려고 어떤 분들은 일용할 양식을 영적인 양식 곧 말씀으로 생각합니다. 한편으로는 일리가 있고 그렇게 생각하며 은혜를 누리는 것도 좋다고 봅니다.

그런데 많은 신학자들은 이를 물리적 양식으로 생각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만일 영적인 양식이라면 주님께서 그냥 쉽게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말씀을 주시옵고” 가르치셨을줄 압니다.

 

그렇다면 계속 한 가지 궁금한 점은 남아 있습니다. 필요한 것을 모두 주신다고 먼저 말씀하셨는데, 왜 이제 와서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하시는가…?

 

이럴 땐 한번 좀 멀리서 관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세 창문을 열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나라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창문을 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거창한 창문들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일용할 양식의 창문 앞에 섰습니다. 그렇다면 좀 멀리서 7개 창문들이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살펴 보면 일용할 양식의 창문이 왜 네 번째 창문으로 세워졌는지 알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음주는 다섯번째 창문을 열게 되어 있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곧 우리의 죄사함이 주제입니다. 그 다음 창문은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해 달라는 것이고 그 다음은 악에서 우리를 건져 달라는 기도의 창문입니다.

 

곧 첫번째 세 창문은 모두 하나님이 주체였습니다.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뜻. 그리고 네번째 창문은 일용할 양식이고, 나머지 세 창문은 우리가 주체가 됩니다. 우리의 죄, 시험, 악….

곧 네번째 창문을 중심으로 앞 뒤가 대칭이 되어 있습니다. 앞은 하나님이 주체가 되고 뒤는 우리가….

 

그렇다면 가운데 있는 곧 네번째 창문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느낌이 오지 않습니까? 우리들에게 매일 매일 주어지는 일용할 양식의 창문 없이는 나머지 창문들은 금방 색이 바래지게 되지 않을까요?

 

그러고 보니 갑자기 코믹을 보는 것 같습니다. 우리 눈 앞에 챨리 브라운과 스누피가 나타나서 대화하는 것 같습니다. 재미 있지만 깊은 내용이 담겨 있음을 느낍니다.

“We live once.”

“Wrong, we die once. We live every day.”

 

우리를 매일 매일 살게 하는 일용할 양식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알려주는 코믹입니다. 이 양식의 소중함을 알고 기도하는 자들을 통해 앞 뒤 여섯개 창문의 찬란한 기도의 제목들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눈에 보이는 일용할 양식을 위해 감사하는 자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역사를 펼치시지 않으실까요? 하늘에서 땅에서….

 

한경직 목사님께서 6/25전쟁을 겪으신 후에는 물 한 컵의 소중함을 체험하셨다고 하시면서 물 한 컾으로도 감사하시게 되었다는 말씀을 전해 들은적이 있습니다.

사실 그 후로 한 목사님께서 물 한 컾만을 위해서 감사하셨을까요? 그야말로 일용할 양식의 소중함을 느끼고 매일 주기도문으로 기도드리면서 하루의 양식으로 인해서 감사하셨을줄 압니다.

곧 한 목사님께서 한국 교회의 큰 기둥이 되신 이유는 바로 물 한 컾으로 인한 감사에서 시작되지 않았나 저는 감히 생각해 봅니다.

 

이로서 알수 있는 것은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넘치도록 주실수 있지만 우리가 작은 분량 하나 하나가 얼마나 소중함을 깨닫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일용할 양식을 위한 기도는 축복으로 가는 열쇠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이 기도를 드리는 자들은 두 가지 축복을 누립니다. 오늘 점심과 저녁 거리가 마련되어 있다면 우리는 오늘도 기도 응답을 받은 것입니다. 아침에 드린 기도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처럼 일용한 양식은 기도 응답의 증거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눈 앞에 펼쳐지는 일용할 양식은 우리들에게 나머지 모든 기도도 응답 받을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곧 일용할 양식은 기도 응답 과정 가운데 있음을 알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을 응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먹고 힘을 내라는 것입니다. 기도 응답 과정에 있으니…. 곧 이 일용할 양식은 놀라운 기도들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일용할 양식을 위한 기도 제목은 7개의 창문 중 제일 가운데 4번째 창문이 될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눈 앞에 보이는 일용할 양식은 금방 우리 몸으로 들어가 사라지는 것 같지만 아주 소중한 것입니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total sum의 법칙 안에서 일용할 양식을 주십니다. 곧 하루 세끼를 먹는다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셋으로 나눠야 합니다.

Total sum법칙을 잘 아실줄 압니다. 피짜 한 판이 있으면 한 사람이 많이 먹으면 나머지 사람들은 적게 먹게 됩니다. 피짜 한 판은 변하지 않기 때문에…. 그래도 작은 피짜 한 조각을 가지고도 감사드립니다. 온 세상을 얻은 것과 같은 감격을 안고 대합니다. 기도 응답의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기도가 이루어지는 과정에 있음을 알고 함께 축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기도문을 드리는 사람들은 이웃을 대할 때는 갑자기 변합니다. Total sum법칙이 무너집니다.

 

박완서 소설가가 ‘넉넉하다는 말의 소중함’이라는 좋은 글을 쓰셨습니다. 6/25동란 중 집안이 망하다시피 해서 단칸방에서 끼니 걱정을 해야 할 때 어머니는 ‘넉넉하다’는 말을 거의 남용하다시피 하셨다고 합니다.

모두 굶주리고 헐벗고 잠자리조차 편치 못한 피난 시절이었는데 어머니는 집에 온 손님을 끼니때 그냥 돌려보내는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자녀들 먹을 밥도 넉넉지 못한데 어머니는 한사코 넉넉하다면서 손님을 붙들어서 끼니는 때워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해가 질 무렵에 온 손님이면 방 넉넉하니 자고 가라고 붙들기가 일쑤였다고 합니다.

넉넉할 거 하나 없는데 어머니는 부자처럼 넉넉한 얼굴을 하시고 사람들을 먹여 보내고 재워 보내곤 하셨습니다. 손님이 간 다음 자녀들은 어머니한테 신경질도 부리고 때로는 울고불고한 적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다음과 같이 글을 마칩니다.

“광에서 인심 나는 게 넉넉한 마음에서 우러나는 것 같다. 가장 궁핍했던 시절을 넉넉한 마음 하나로 가장 부자스럽게 살게 해주신, 그래서 그 시절만 회상하면 저절로 환한 미소가 떠오르게 해주신 어머니가 새삼스럽게 자랑스럽다.”

 

한 경직 목사님은 6/25때 마신 물 한 컾에 감사하였고, 박완서 소설가는 6/25 때 넉넉한 마음으로 사신 어머니로 인해 한국인들의 보배가 되어가지 않았나 싶습니다.

박완서 소설가는 천주교인인줄 아는데 아마 어머니도 믿음으로 매일 일용할 양식을 구했기에 넉넉한 믿음의 삶을 산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왜 이 어머니는 넉넉한 삶을 사셨을까요? 왜냐하면 손님도 함께 기도가 이루어지는 과정의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서로의 힘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요?

그렇다면 이런 결론을 내릴수 있습니다. 주기도문을 드리는 자들은 자기 자신과 가족에 대해서는 양식을 귀하게 아낍니다. 아주 경제적입니다. 물 한 모금도 감사한 마음으로 마십니다. 최소의 노력으로 최대의 효과를 누리게 하려고 노력합니다.

반면 이웃에 대해서는 경제 개념을 잃어 버립니다. 넉넉함 그 자체입니다. 갑자기 오병이어의 기적의 주인공이 됩니다. 수년후 박완서 작가가 어머니를 회상하며 오병이어의 축복을 맛본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이런 기적의 주인공이 되게 하시려고 네번째 창문을 주신 것입니다.

 

곧 네번째 창문을 열면서 주어진 작은 것에 대한 깊은 감사를 드리며 하루를 시작합니다. 아울러 이웃을 위해서는 넉넉한 삶을 삽니다. 기도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서로 힘이 되기 위함입니다. 어느덧 오병이어의 기적의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반면 네번째 창문을 열지 않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반대가 됩니다. 자기에 대해서는 언제나 넉넉합니다. 자기에 대해서는 최고급으로 생활하게 됩니다. 반면 이웃에 대해서는 무척 경제적입니다. 쎈트 하나까지 따지게 됩니다. 이웃과는 언제나 total sum법칙이 적용하기 때문입니다.

한편 자신을 위해서는 total sum법칙이 해당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오병이어의 사건이 자기에게만 떨어지기를 기대하며 살아 갑니다. 자기를 위해서 쓰면 쓸수록 더욱 풍성해 질 것이라는 이상한 착각 가운데 살아 갑니다. 어느덧 이웃은 보이지 않습니다. 만일 보이게 되면 이웃과는 철저한 계산 가운데 살아 갑니다.

 

그러니 이 기도가 얼마나 중요합니까?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사실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는 절대로 total sum법칙이 적용이 되지 않습니다. 제가 어릴 때부터 신기하게 생각하고 있는 창조세계가 있습니다.

초등학교에서 어느날 배웠는데 하늘은 끝이 없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것을 배우고는 하늘을 종종 쳐다 보면서 신기해 했습니다.

“아니 끝이 없다니….”

 

Total sum법칙은 끝이 있는 전제 안에서 통하는 법칙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는 끝이 없습니다. 그러니 그 법칙은 잘못 된 법칙입니다. 도저히 맞지 않는 법칙입니다.

한편 하늘 나라를 생각해 보십시다. 하늘 나라에 가면 부족한 것이 있을까요? 하늘 나라에 한 성도라도 더 들어오면 하늘 나라가 그만치 좁아질까요? 하늘 나라에도 total sum법칙은 존재할수 없습니다.

 

그러나 단 한 군데 total sum법칙이 적용됩니다. 우리에게 매일 주시는 양식입니다. 이 양식을 구하십시다. 가족과 더불어 잘 나눠 먹도록…. 작은 한 조각으로도 감사한 마음으로 대하십시다.

그러나 이웃과는 넉넉히 나누십시다. 이 때 우리는 오병이어의 주인공이 되어 갑니다. 우리 아버지께서 넉넉히 채워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말씀을 거둡니다.

김옥길 이화여대 총장의 탄신 백주기가 되어서 그 분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요즘 오고가고 있습니다. 그 분의 기도문을 읽게 되었습니다. 대학 강당에서 채플시 드려졌던 기도입니다.

 

“오늘도 저희들에게 새 날을 허락하셨고

함께 자리를 같이 하여

하나님께 머리 숙여 간구하옵나니

저희들로 하여금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이웃을 기억하고 돌보게 도와주시옵고

겨울이 왔음에 봄이 멀지 않은 것을 깨달으면서

할 수 있는 일을 열심히 함으로 말미암아

저희들의 따뜻한 손길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게 도와주시옵소서

 

흩어져 있는 모든 저희 식구들과 함께 하여 주시옵고

일선고지에서 이 조국을 지키는

젊은이들의 눈동자를 지켜주시고

추위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돌보아 주시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함께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께서 이 기도를 들으시면서 만족하셨을줄 압니다.

자신에 대해서는 경제적이고 이웃에 대해서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게 하는 기도인 것입니다.

우리도 매일 이와 같은 마음으로 네번째 창문을 여십시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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