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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V: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마태복음 6:5-12 (05/23/21)

어느 기독교에 크게 공헌하신 분이 다음과 같이 자서전적 소설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나는 어려서 교회의 종을 치고 놀면서 큰 즐거움을 느끼곤 했다. 그런데 조금 자라면서 내 양심에 가책 같은 것이 생겨났다. 장난으로 종을 치는 것이 하나님 앞에 경건치 못한 행동이라는 생각이 내 마음속에 서서히 자리 잡았다. 그래서 결국은 종을 치고 싶은 생각을 포기하게 됐다.

그후에는 종탑에 가서 그냥 종을 쳐다보기만 했다. 그러나 종을 치고 싶은 유혹은 내 마음에서 완전히 떠나지 않았다. 얼마 후에는 종을 쳐다보기만 하는 것 자체도 경건치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습관적으로 종탑에는 계속 갔다.

하루는 종을 올려다보다 말고 혹시 이것이 내 머리 위로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갑자기 생겼다. 그래서 종탑에 갈 때마다 큰 대들보 밑에 숨었다. 이제는 종이 떨어져도 대들보가 있으니 안전하지 않을까.

그런데 또 다른 생각이 내 머릿속에 문득 떠올랐다. 만일 누가 종을 치는 도중 이것이 떨어지면 어떻게 할까. 그러면 종은 벽에 맞고는 튀어서 내 머리에 떨어질 것이니 대들보에 숨어보았자 나는 죽을 것이다.

그 후 나는 종탑 문 앞에만 서고 안으로는 들어가지 않았다. 이제는 안전하겠지. 그래서 한동안 종탑 문턱에 서서 종이 울리는 것만을 쳐다보았다.

얼마 지나자 또 다른 생각이 엄습했다. 만일 종탑 자체가 무너지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종탑 문턱에 서 있을 때마다 이런 두려운 생각에 사로잡혔기 때문에 결국 나는 문턱에마저 설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종탑에 갈 일이 있으면 종탑이 내 머리 위로 무너져 내린다는 두려움 때문에 곧바로 거기서 도망쳐야 했다.”

 

어느 정신과 의사가 이 글을 인용하면서 공황장애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기사를 접해 보았습니다. 정신과 의사에게는 어릴적부터 공황장애를 겪은 한 사람의 안타까운 이야기로 보여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글을 쓴 사람은 모든 기독교인들이면 잘 알고 있는 천로역정의 저자 죤 번연입니다. 사실 죤 번연은 말씀드린대로 자신의 자서전적 소설에 자신의 이야기를 기록했는데 제목은 ‘Grace abound to the chief of sinners’(죄인들 두목에게 내리신 은혜)입니다.

이 글을 읽고 정신과 의사는 정신의학적으로 진단을 하고 있지만 죤 번연은 다른 의도를 가지고 자신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고 봅니다. 곧 죤 번연은 자신의 어릴 때 모습은 바로 죄인들의 모습, 죄가 해결되지 않은 사람들의 모습 아니 죄인들의 두목의 모습이라고 보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죤 번연이 천로역정을 감옥에서 썼고, 감옥에는 다른 참고서적은 없었고 오직 성경 하나뿐이었다는 이야기도 들으셨을줄 압니다. 그런데 성경 말고 참고 서적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자신의 삶이었습니다. 그것도 자신 안에 깊이 뿌리 박혀 있었던 죄성의 이야기이었던 것 같습니다. 책 제목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죄인들 두목에게 내리신 은혜.’

 

죤 번연은 정신과 의사에게는 공황장애로 보이는 이 이야기를 어떻게 자신의 자서전에 기록을 하게 되었고 아울러 그는 천로역정과 같은 역사상 길이 남는 작품의 저자가 될수 있었을까요?

저는 감히 말씀드립니다.

“주기도문.”

 

오늘 성령강림주일을 맞이하여 다섯번째 주기도문에 대해 말씀드립니다. 오늘 우리는 다섯번째 창문 앞에서 성령강림주일을 맞이합니다.

첫번째 창문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우리는 매일 아침 기도의 창문을 열면서 오늘 만나는 이웃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이름을 기대하게 됩니다.

두번째 창문은, “나라가 임하시오며.” 자주 자주 하나님께서는 침묵으로 응답하시지만 침묵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기대하며 하루를 힘차게 시작하게 됩니다.

세번째 창문은,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인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아낌없이 아들을 내어주셨습니다. 이제는 땅에서 하나님의 인류 구원의 역사가 펼쳐질 것을 기대하며 하루를 시작합니다.

네번째 창문은,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매일 나려 주시는 양식은 기도의 응답인 동시에 우리들의 기도가 이루어지고 있는 증거로 받고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이웃과도 양식을 나눕니다.

이 처럼 일용할 양식에 대한 확신이 있고 감사하는 우리들에게 주님은 다음으로 어떤 창문을 보여 주시나요? 이제 다섯번째 창문 앞에 섰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당연합니다. 일용할 양식을 먹으면서 우리들의 위대한 기도 제목들이 이루어지는 것을 기대하는 자들이라면 당연히 죄의 문제가 해결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죄가 해결되기 위해서는 죄를 고백하고 죄사함을 구해야 합니다. 죄를 고백하는 자들의 죄를 주님께서는 사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그냥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하면 될텐데 앞에 조건을 다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주님의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초대교회의 예배를 알면 도움이 됩니다. 초대교회는 지금처럼 예배당에서 모인 것이 아니라 가정에서 모였습니다. 비밀리에 모였다고 할까요…. 예배 순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자신의 죄를 고백합니다. 돌아가면서…. 그리고 서로 용서의 확신을 위한 고백을 합니다. 마지막으로는 성도의 교제로 예배가 마쳤습니다. 곧 죄를 먼저 서로 서로 고백한 것입니다.

그런데 AD 325년 Nicea공회후에 콘스탄틴 대제가 로마 시민들을 위해 새로운 제도를 도입합니다. 죄의 고백은 신부에게만 하는 고해성사로 바뀌어집니다. 황제인 본인이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죄를 고백하기가 싫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후에 마틴 루터에 의해서 고해성사도 폐지됩니다. 마틴 루터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입는다는 말씀에 근거해서 고해성사를 폐지하게 된 것입니다.

 

이로서 알수 있는 것은 초대교회에서는 죄의 고백을 중요시 여겼습니다. 중요시 여길수밖에 없는 것이…, 죄가 우리의 위대한 기도를 막는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주님께서는 주기도문을 가르치시기 전에 이미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5:23, 24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이로서 알수 있는 것은 초대교인들은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를 말씀 그대로 믿고 따라 행한 것입니다.

곧 주님은 놀라운 특권을 우리 인간들에게 주고 있는 것입니다. 죄사함은 두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죄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아울러 사람들 사이에 서로의 죄를 사해 주어야 합니다.

 

오래전 나온 ‘밀양’이라는 영화의 주제는 이웃에게 죄를 지은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을 용서해주려고 찾아 갔지만 이미 자기는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을 받았다고 자기를 해한 사람의 용서는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대사가 나옵니다. 이에 대해서 깊은 회의를 가지는 한 사람의 고통을 그린 영화입니다.

그 사람은 주기도문을 잘 못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 죄사함은 하나님과 이웃의 죄사함이 모두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죄사함을 받아야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죄를 지은 자에게서도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준 것과 같이”라는 전제를 붙이신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그동안 우리가 주님께 죄를 고백하면 주님께서 사해주신다고 믿고 고백해 왔습니다. 이것이 개신교의 교리입니다. 그러나 실은 죄사함은 하나님과 인간들과의 공동 작업입니다. 함께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사함의 특권을 인간과 함께 나누시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스데반의 이야기가 이를 확증해 줍니다. 스데반은 사도바울과 그 일행으로 인해서 순교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이런 고백을 합니다.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물론 주님께서도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사실 사도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남으로 인해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으로 가기 얼마전에 사도바울은 스데반으로부터 용서를 받은 것입니다. 인간의 용서와 주님의 용서가 합하여 위대한 사도바울이 탄생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위대한 사도바울의 회심을 위해서 주님의 십자가상의 기도와 함께 스데반의 기도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한편 스데반이 어떻게 사도바울을 용서를 할수 있게 되었겠습니까? 그는 성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받은 자들은 주님의 죄사함의 위대한 역사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죤 번연이 천로역정을 쓸수 있었던 이유도 성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성령을 통하여 죄사함의 확신을 받았고 이에 이웃의 죄사함의 역사에 동참하게 된 것입니다. 어느덧 그의 비참했던 삶은 도리어 많은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는 역사의 도구가 되었던 것입니다. 성령으로 인하여….

 

이처럼 성령을 받은 자들은 놀라운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되어 갑니다. 각자의 위대한 여정을 시작하게 됩니다. 언젠가는 죤 번연과 같이 자기의 자서전을 쓸수 있게 됩니다.

 

오늘 성령강림주일로 지키는데 성령 강림의 모습을 보면 우리 각자에게 임하는 회심의 이야기가 다 다를수 밖에 없음을 알게 됩니다. 사도행전 2:3절,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혀의 끝이 각 사람의 머리에 닿았다는 것은 성령께서 각자에게 독특하게 임하고 계신 것을 말한다고 볼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임하시기에 모두 주님을 닮은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죄성이 다릅니다. 또한 이웃으로부터 받은 아픔도 다릅니다. 곧 같은 성령이 임하셨지만 모두 독특한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곧 각자에게 맞는 독특한 죄사함의 이야기로 임하신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야기가 다르고 스데반의 이야기가 다르고 베드로의 이야기가 다르듯이….

 

이와 같은 맥락에서 Frederick Buechner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신학은 픽션 처럼 본질적으로는 자서전이다. 아퀴나스, 칼빈, 바르트 모두 자기의 신학 시스템을 각자의 방법으로 세워 갔고 또 그렇게 살아 갔다.”

신학자들도 실은 각자의 이야기가 있고 그것을 신학화시킨 것이라는 것입니다. 각자의 죄사함의 이야기가 있고 또 이웃을 용서한 이야기가 있다는 뜻일줄 압니다.

 

우리는 유명한 신학자는 아니라도 각자에게는 독특한 죄사함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용서하신 이야기, 내가 남을 용서한 이야기…. 이 두 이야기가 바로 우리들의 자서전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관현악 중에서 협주곡을 좋아합니다. 지난번 정평환 주최 평화와 사랑의 음악회에서도 관현악은 아니었지만 현악과 바이올린 솔로 그리고 독창이 연주되었습니다.

연주회후에 지휘자 집사님과 대화를 나누었는데 새로운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대학교 재학중에 멘델스죤 바이올린 협주곡을 관현악과 협연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연습시 학생이니 지휘자를 계속 보면서 연주를 하였다고 합니다. 선생님이신 지휘자가 갑자기 말씀하시길,

“넌 왜 나만을 보면서 연주하니!”

협연자는 지휘자의 음악을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음악을 연주해야 한다는 뜻으로 저는 받아 드렸습니다.

 

오늘 말씀과 연관시켜서 이런 결론을 내려 보았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아름다운 음악이 있습니다. 이 음악에는 두 가지 흐름이 있는데 하나는 주님의 보혈로 죄사함을 받은 이야기 또 하나는 서로를 용서한 이야기…. 성령을 통해서 이 두 가지 이야기가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의 자서전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협연이 더 아름다운지 모르겠습니다. 두 멜로디가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어가니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아름다운 두 멜로디가 담긴 기도를 가르치시고 계신 것이 아닐까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말씀을 거둡니다.

21세기에 용서를 상징하는 인물로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Desmond Tutu 대주교가 있습니다.

그의 연설문 중에 두 가지를 인용해 드립니다.

Without forgiveness there can be no future for a relationship between individuals or within and between nations. (용서 없이는 인간관계나 개인 자신 그리고 국가 간에 아무런 미래가 없습니다.)

You and I are created for transcendence, laughter, caring. God deliberately did not make the world perfect, for God is looking for you and me to be fellow workers with God. (우리는 초월성과 웃음과 돌봄을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일부러 이 세상을 완전하게 만드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과 내가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길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교우 여러분,

인류 역사의 위대한 시작은 용서로부터 시작합니다. 주님께서 이를 위해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성령으로 임하셨습니다. 성령을 받은 자들로 하여금 이웃의 죄를 용서하는 축복을 허락하셨습니다. 이 아름다운 이야기의 주인공들로 오늘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주님의 초대에 응하십시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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