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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아이와 같이…” 누가복음 18: 15-17 (02/06/2022)

프랑스 작가 알퐁스 도게의 ‘마지막 수업’이라는 단편소설이 있습니다. 한국 교과서에도 실린적이 있어서 아시는 분도 많으실줄 압니다. 프랑스의 알자스 로렌 지방을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입니다. 프러시아와의 전쟁 곧 보불 전쟁에 프랑스가 져서 독일이 알자스 로렌 지방을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노는 것을 좋아하는 프란츠라는 학생이 이 날도 놀러 갈까 하다가 학교로 가기로 마음을 먹고 늦게라도 갑니다. 항상 학교 앞에 가면 시끌벅적했는데 아주 조용합니다. 선생님은 정장을 하고 서 계시고 교실 뒤에는 마을 유지들도 함께 와 앉아 계셨습니다. 예상밖으로 선생님은 지각한 자기를 꾸짖지 않고 속히 자리에 가 앉으라고 합니다.

선생님은 이 날이 프랑스어를 가르치는 마지막 날이라고 말을 하고 마지막 수업을 시작합니다. 순간 프란츠는 그동안 공부를 제대로 안 한 것을 통탄해 합니다. 프랑스인으로 프랑스 말을 더 이상 배울수가 없게 되었으니….

마지막 수업을 마치면서 프랑스어가 가장 아름다운 말임을 강조하고 나라를 잃어도 말을 잊지 않는다면 감옥의 열쇠를 갖고 감옥에 갇혀 있는 것과 같다고 하면서 언어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칠판에 씁니다.

“프랑스 만세.”

 

아마 한국에서는 한일관계와 비슷한 정서가 포함되어 있기에 이 단편소설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제직임직식을 맞이해서 이 이야기를 먼저 말씀드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마지막 수업시 무엇을 가르쳤을까 생각을 하게 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시간적으로 보면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것을 비롯 여러 차례 나타나셨는데 시간을 초월해서 주님께서 마지막 수업이라고 생각하시고 가르치신 것을 꼽으시라고 한다면 바로 오늘 본문 말씀에 나오는 가르침이 아니었을까 저는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면 주님의 마지막 수업 장면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사람들이 자기 자녀들을 주님의 축복을 받게 하기 위하여 데리고 왔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데려온 사람들을 꾸짖습니다. 여기가 어디라고 아직 사람도 되지 않은 어린이들을 데리고 왔느냐는 것입니다. 이 당시는 어른 남자만 사람으로 생각할 때였음을 잘 아실줄 압니다.

그런데 주님은 도리어 어린 아이들을 가까이 부르십니다. 어린 아이들을 보라는듯이 앞에 세우시고 말씀하십니다. 16절 말씀 하반절,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제자들은 두 번 놀랍니다. 하나는 사람이 아직 안 된 어린아이들을 도리어 어른 보다 귀하게 여기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 보다 더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성경의 주제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책’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시고 이 하나님의 나라에 모든 인류를 초대하시기 원하십니다. 이것이 기록된 책이 바로 성경입니다. 곧 하나님의 나라의 개념은 구약부터 시작해서 신약에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나라의 주인공들이 바로 어린이들이라는 것입니다. 다음 이야기가 이를 증명해 줍니다.

 

주일학교에서 요나가 큰 물고기에서 살아 난 이야기를 배운 한 어린이가 요나와 큰 물고기가 그려진 책을 손에 들고 집으로 가기 위해 버스 정거장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때 늘 하나님의 말씀에 회의적인 한 사람이 꼬마에게 짖궂은 질문을 합니다.

“얘야, 너는 요나가 큰 물고기 뱃속에서 살아난 이야기를 믿니?”

“그럼요. 하나님의 말씀이고 오늘 교회에서 배운 내용인걸요.”

“얘야, 너는 요나가 삼일 밤낮으로 뱃속에 있다가 살아난 것을 증명할수 있어?”

잠시 생각하다가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천국에 가면 요나 아저씨에게 물어 볼게요.”

아저씨가 또 묻습니다.

“요나가 만일 천국에 없고 지옥에 갔으면 어떻게 할래.”

“그러면 아저씨가 물어 보세요.”

 

이 이야기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의 주인공들은 어린이들임을 잘 밝혀 주고 있다고 봅니다. 이 어린이는 온 세상을 가능성의 눈으로 보고 있는 반면 아저씨는 한계의 관점에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바로 이런 어린이를 앞에 세우시고 현장 교육을 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이야기는 주님께서 마지막 수업 시간에 하신 것은 아니지만 내용적으로는 마지막 수업 시간에 하시고 싶은 내용임에는 틀림 없습니다. 아마 주님은 가급적 생애 마지막에 이 말씀을 하시길 원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어린 아이들을 내쫓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조금 이르지만 주님께서는 마지막 수업인냥 어린 아이들을 앞에 세우시고는 요나 이야기와 비슷한 이야기를 하시고는 또 말씀하셨을줄 압니다. 17절 말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이 말씀을 오늘 제직 임직을 받으시는 분들과 구역장님들과 인도자분들 그리고 함께 예배 드리는 우리 모두를 향하여 말씀하시지 않으실까요? 마치 오늘이 마지막 수업이라고 여기시면서….

한편 손을 가슴에 얹고 자문해 보십시다. ‘나는 어린아이와 가까운가 아저씨와 가까운가…?’

 

그러면 마지막 수업에 우리 앞에 서 있는 어린 아이들에게 배워야 할 점이 어떤 점이 있을까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두 가지만 나누려고 합니다.

 

먼저 아이들은 늘 배우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어리기 때문에….

사실 저희 교회에서는 신임 안수집사님들과 신임장로님들만 6개월 교육 시간을 갖고 안수식을 갖습니다. 그런데 원래 교단 헌법에는 신임뿐 아니라 재임 제직들도 모두 똑 같이 교육 시간을 갖도록 되어 있습니다. 많은 제직들을 한꺼번에 하는 것 보다는 적은 수의 신임제직들만 갖는 것이 더 효율적이기에 신임제직만 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왜 교단 헌법에는 모두 교육시간을 갖게 할까요? 어린 아이의 자세가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아무리 경험이 많고 지식이 많아도 도리어 경험과 지식이 방해가 될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어린 아이들의 마음이 있어야 체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소설 Christmas Carol을 지은 Charles Dickens 영국 작가를 잘 아실줄 압니다. 그가 사람을 보는 관점은 다음 두 가지라고 합니다.

하나는, ‘사람은 남에게 배우려 하지 않는다.’ 또 하나는 ‘사람은 자기가 필요할 때만 남을 돌 본다.’ 이 두 가지가 그가 어릴적부터 여러 역경 가운데 터득한 인간관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가슴 아픈 인간관을 갖고 있지만 그래도 인생의 어두운 곳곳에 희망의 요소가 담겨져 있다고 믿었고 그렇게 살면서 많은 훌륭한 소설을 지을수 있었다고 합니다.

 

사실 주님은 챨스 디킨스 보다 훨씬 인간들에 대해서 잘 아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주님도 인간들에게 희망을 잃지 않으시고 인간사에 뛰어 들어 오셨습니다. 주님은 잘 배우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 또한 늘 계산적으로 이웃을 돕는 사람들을 너무도 잘 아셔서 당신의 마지막 수업 시간에는 어린 아이를 앞에 세우신 것이 아닐까요? 어린 아이처럼 늘 배우는 자가 되고 어린 아이처럼 계산할줄 모르는 사람이 되라고 그 때 하나님의 나라를 체험할 것이라고….

 

조금 전 소개해 드린 요나 이야기의 두 주인공이 생각이 납니다. 어린 아이와 아저씨…. 어린 아이는 배우고 있는 자세로 살아 갑니다. 결국 챨스 디킨스처럼 무엇인가를 만들어 가면서 공헌하는 자가 됩니다. 한편 아저씨는 다 배웠고 이제는 평가하는 자세로 살아 갑니다. 물론 아저씨도 공헌을 합니다. 아니 아저씨도 계속 배웁니다.

요나 이야기가 보여 주는 어린이와 아저씨의 배움의 큰 차이가 있습니다. 아이들은 가능성을 배워 갑니다. 무슨 사물을 봐도 무한한 가능성을 찾아가는 과정이 어린이들이 갖고 있는 배움입니다. 아저씨들도 가능성을 배워 갑니다. 무슨 사물을 봐도 한계의 가능성을 찾아 가는 것이 아저씨들이 갖고 있는 배움입니다. 그래서 장정만 5천명을 먹인 오병이어의 사건의 주인공도 어린아이였던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저는 아이들의 두번째 특징은 창조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의 위대함에 동참하는 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오늘 임직예배를 맞이 하여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주님 앞에서 어린 아이가 되어서 늘 배우고 배우십시다. 그 배움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받들게 되어 어느덧 아름다운 역사를 만들어 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하였습니다.

 

오늘 임직받으시는 제직 여러분, 특별히 처음 서리집사로 임직받으시는 분들을 통해 한 어린 아이가 일으켰던 오병이어의 역사들이 펼쳐질 것입니다.

 

한 두번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하루는 역사책 하루는 이민신학책을 번갈아 가면서 읽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한 책만 읽게 되었습니다. 이유는 한인이민 역사책이기 때문입니다. 일석이조이죠.

 

저자는 현재 UCLA교수인 David Yoo박사인데 한인 2세입니다. 1903-1945년의 일제 강점기 시절 한인 미국 이민 역사를 다룬 책입니다. 대표적인 인물로 이승만 안창호 서재필 등이 나옵니다.

물론 그 외에도 하와이와 LA에서 교회를 섬긴 여러 목사님들이 나옵니다. 이 당시만 해도 미국은 한국을 인정하지 않은 때였습니다.

미국은 일본과 gentlemen’s agreement라 해서 일본은 조선을 미국은 필립핀을 식민지로 삼기로 서로 약속을 한 때입니다. 일본이 진주만 (Pearl Harbour)를 폭격한 후 곧 1942년 부터 미국은 자기들의 목적을 위해서 한국인을 인정하기 시작합니다. 그렇다고 한국을 정식 국가로 인정하지는 않은 때였습니다.

 

이럴 때 LA에서 이민자로 생활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었겠습니까? 생활비를 벌어야 하죠, 조선에 독립 자금을 보내야 하죠, 자녀 교육은 물론 교회를 운영해야죠…. 그들은 온통 한계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 중 눈에 띄는 것 한 가지 예를 들면 안창호의 따님은 2차 세계대전이 일어 났을 때 미해군으로 자원입대를 합니다. 그것이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 할수 있는 최선의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안창호 따님의 이야기는 여러 수 없이 많은 애국자들의 이야기 중 하나입니다.

 

이들이 일구어 놓은 역사의 현장을 우리가 이어가고 있구나 그 책을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가슴 속 깊게 느끼게 됩니다.

한편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느껴 봅니다. 이들에게 어린아이의 믿음이 없었다면 가능했을까? 그들은 한계 가운데 무한한 가능성을 꿈꾸었던 자들입니다. 물론 David Yoo박사 때문에 잘 정돈된 한인이민 역사를 한 눈에 읽게 되어서 그에게 감사한 마음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께서 먼저 필요로 하는 자들은 어린이가 되어 하나님 나라를 맛보는 자들입니다. 이들을 통해서 올해도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가운데 임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어린이 하면 생떽쥐베리의 어린 왕자를 빼 놓을수 없습니다. 한 군데를 소개해 드립니다.

 

“사막이 아름다워.”

어린 왕자가 말했다.

그건 맞는 말이었다. 난 언제나 사막을 사랑했다. 모래 언덕 위에 앉아 있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렇지만 침묵 속에서 뭔가 신비한 빛을 내는 것이 보인다.

“사막이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이곳 어딘가에 우물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야….”

 

어린 왕자는 사막을 보며 아름답다고 말합니다. 어린 왕자는 아저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는 우물을 사막에서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무나 어린 왕자의 눈을 갖게 될까요?

어린이의 마음을 갖고 겸손히 배우려는 자들의 눈에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맞이 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수업의 저자 알퐁스 도데는 마지막으로 칠판에 썼습니다.

“프랑스 만세.”

 

주님은 무엇이라고 쓰실까요?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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