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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능의 사람들” 시편 8:1-9 (02/20/2022)

 

교육학자인 박동섭 교수님이 다음과 같은 친구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친구가 어느 자그마한 제조업 회사의 CEO인데 그 회사에서 신입사원 모집을 했습니다. 그런데 한 명을 뽑는데 100명 가까이 지원을 한 모양입니다. 채용조건에 ‘영어를 잘 하는 것’이 나와 있었기 때문에 TOEIC 점수 850-950을 자랑하는 청년들이 많이 응모했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100명 면접을 다 볼 시간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연령과 TOEIC점수로 끊어서 8명이 최종적으로 남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남은 8명 중 거의 대부분이 미국의 대학을 졸업하고 외국은행 등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는 20-30대였습니다.

친구인 사장은 이 지원자들에게 두 가지 작문을 시켰습니다. 하나는 한국어의 자유작문 그리고 다른 하나는 영어로 비즈니스 레터를 쓰게 하는 것, 거래처로부터 납품된 물건에 결함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줬으면 좋겠다는 의뢰의 편지를 쓰는 것이었습니다.

사장인 친구가 놀란 것은 네이티브 스피커처럼 영어를 잘 말하는 청년들이 쓴 한국어 작문실력이 문장력도 논리도 초등학생 정도 수준 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이고, 비즈니스 레터에서는 상대를 ‘질책, 규탄’하는 말투를 아주 자연스럽게 사용하였다는 것입니다.

결국 채용된 사람은 영어 성적은 그 다지 좋지 않지만 거래처 담당자의 입장을 배려하고 매우 정중하게 비즈니스 레터를 쓴 여성이었다고 합니다. 이에 박 교수는 다음과 같이 자기 생각을 나눕니다.

“미국에서 교육을 받은 한국 사람은 왜 ‘명령, 질책, 요구’의 말투가 비즈니스 어법이라고 믿고 있는 것일까요? 미국인들이라도 자신이 실수한 것에 관해서 타인으로부터 위압적인 태도로 비난을 받는 것 보다 부드럽게 응대를 받는 것이 비즈니스 파트너로서 기분이 좋은 것은 우리와 다르지 않을 텐데….”

 

물론 미국 교육 내지 사회가 주는 긍정적인 것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반면 부정적인 것도 많이 있음을 알려주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미국 사회에서 우리는 어떻게 도리어 신나는 신앙생활하며 멋지게 살아갈수 있을까요? 특히 올해는 ‘수년 내에 부흥케 하소서’ 기도하며 지내고 있는데…? 이런 놀라운 역사는 어떻게 이루어질까요? 약 3천년전에 쓰여진 오늘의 본문 말씀인 시편 8편을 통해 하나님의 멧세지를 듣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작은 회사를 맡기신 것이 아니라 훨씬 더 큰 것을 맡기고 계신 것을 알수 있습니다. 1절 말씀을 보면 잘 알수 있습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제가 신학교 첫 조직신학 과목을 들을 때 그 때 교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저의 신학관을 정립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교수님께서는 신학 ‘Theology’의 의미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학문.’

 

곧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노래하게 하시려고 세상을 창조하신 후 사람을 만드신 것입니다. 오늘 시편의 저자 다윗은 신학의 정수를 이해하고 이를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윗은 시편 마지막 절에 이를 반복합니다. 9절 말씀입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시작과 마지막에 이 고백을 함으로 다윗은 온 세상을 보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며 최고의 축복의 삶을 누릴수 있을까요?

 

사실 1절과 9절을 이 시의 제목 내지 후렴이라고 생각한다면 2절이 실제로는 첫절이 된다고 간주할수 있습니다. 2절 말씀,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기대한 것과는 다른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시와는 전혀 다르게 전개되는 것 같습니다.

사실 2절 말씀은 오늘 시편 전체를 해석하는 관점을 완전히 뒤바꿔 놓고 있습니다. 2절만 없이 읽으면 완전히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 세계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시입니다. 한번 1, 3절을 연결해서 읽어 드리면,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얼마나 부드럽게 잘 연결이 됩니까? 누구 보다 시를 많이 지은 다윗이 아무 생각 없이 생뚱맞게 2절말씀을 넣었을까요?

 

이 2절 말씀은 오늘의 시편을 새롭게 보게 합니다. 시인은 자연 세계의 아름다움을 포함해서 모든 인간들이 살고 있는 죄로 물든 세상도 포함해서 시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곧 사람들이 어둡게 보는 인간 세상 안에서도 놀라운 아름다움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2절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의 입으로…”

 

얼마 전에도 요나단과 다윗의 이야기를 말씀드릴 때 말씀드렸지만 다윗이 세상의 문제를 몰라서 이렇게 무조건적으로 세상을 아름답다는 순진한 표현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도 많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자신의 문제도 있었고 남의 문제도 있었고…. 다윗은 10년간 사울에게 쫓겨 다니면서 이 세상의 문제를 너무도 잘 알고 쓴 맛 단 맛 많이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한편 다윗은 이런 문제 많은 세상에서 참으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자들이 누구인지 안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이 보장하는 찬양자로 세워진 레위인들이 아닙니다.

도리어 아직 학교도 다니지 않는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이 리더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학교에서 잘 못 가르치는 것이 있다면 사회가 잘 못 되어지는 것이 있다면, 이를 해결할수 있는 사람들은 아예 학교에 한 발도 내디디지 않은 어린이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들이 참 신학자라는 것입니다. 이들이야 말로 죄악된 세상을 바르게 이끌어갈 권능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어린아이의 눈으로 온 세상을 바라보며 찬양을 시작합니다. 3절,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어린 아이의 눈으로 죄악된 세상 한 가운데 서서 온 우주의 웅장함을 보면서 다윗은 황홀함 가운데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 짓기 전 아담이 보았던 아름다움 보다 더 찬란한 아름다움을 보았던 것 같습니다. 우주의 웅장함을 보면서 다윗은 말을 잇지 못합니다. 시인 다윗도 자연의 웅장함을 언어로 표현할수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4절 말씀을 보면 알수 있습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말로 표현할수 없는 우주의 웅장함 앞에서 시인은 도리어 역설적으로 자신의 왜소함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주 앞에서 작아짐과 함께 하나님 앞에서 더욱 작아지는 다윗의 모습을 느낄수 있습니다. 우주 앞에서 왜소한 자신이지만 왜소한 자신을 위해서 우주를 만드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작아짐으로 하나님의 위대함을 간접적으로 증명하고 있다고 할까요.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작아진 다윗의 고백은 더 놀라운 고백으로 이어집니다. 5절,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다윗은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 질수록 겸손한 자신 안에 도리어 역설적으로 사람의 위대함을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정말로 놀라운 고백입니다.

겸손한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놀라운 선물을 주십니다. 스스로의 위대함을 느끼게 됩니다. 이는 말할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본인 사이에만 주어지는 특별한 축복인 것입니다. 다윗은 이를 몸소 체험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느새 어린아이처럼 작아진 자신에게 영화와 존귀의 관을 씌워주시고 계신 것을 체험한 것입니다. 이 관은 하나님의 대리자로서의 관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고백합니다. 6-8절 말씀,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곧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이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말씀드린대로 이는 자연 세계만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가운데 능력자로 사는 어린 아이들의 모습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다윗은 이를 몸소 체험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관을 썼기에 골리앗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양들을 지킬 때 사자의 입을 찢을수 있었습니다. 어린 아이인 자기에게 이런 능력이 주어졌음을 다윗은 체험에서 나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새로운 아름다운 이야기를 온 세상 가운데 만들어 가는 주인공이 되었던 것입니다. 권능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문제 많은 세상 한 복판에서 도리어 하나님의 최고의 아름다움을 누리는 축복의 주인공이 되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세상은 문제 투성이지만 어린아이로 그 가운데 서 있을 때 도리어 놀라운 하나님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창조되는 축복의 땅으로 변하고 있음을 체험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마지막으로 다시 1절 말씀을 후렴으로 반복함으로 세상 가운데 인간의 특권이 무엇인지 고백합니다. 9절,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그러면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우리는 어떻게 다시 어린 아이가 될수 있을까…? 어떻게 다윗 처럼 이런 노래의 주인공 아니 권능의 사람이 될수 있을까요?

 

다윗이 죄악된 세상에서 역사를 이끌 주인공들이 바로 어린 아이라고 생각하셨는데 이는 주님께서 이를 확증시켜주십니다.

주님께서 공생애 마지막에 예루살렘 입성 후 아이들은 성전을 정결케 하시는 주님을 향해 또 찬양합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이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분노하니 주님께서 답하십니다.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주님은 어른들이 권능의 사람이 되지 못하는 이유를 잘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어린이들이 권능자임을 잊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어린이들의 권능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주님으로부터 핀잔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어른들은 희망이 없다’라는 의미로 이 말씀을 하셨을까요? 그럴리 없습니다.  주님은 아이들에게 세상을 새롭게 하는 권능이 있는데 아이들의 잠재력을 믿고 어린이들과 삶을 나눌 때 어린이들의 축복에 동참할 것이라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다윗도 이것을 원했던 것이 아닐까요?

 

유대문학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한 젊은이가 숲 속을 거닐고 있었습니다. 새들 노래 소리를 들으며 햇빛에 빛나는 나뭇잎들을 보면서 길을 걸어 갔습니다. 해는 점점 저물기 시작해서 젊은이는 집으로 돌아가기로 마음 먹습니다. 그런데 조금 가다 보니 길을 잃고 숲속에서 헤메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어느덧 3일이 지났습니다. 홀로 굶주린 배를 쥐고 두려움 가운데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3일째 되는 날 어느 길에서 수염 기른 한 사람을 만납니다. 나뭇꾼 처럼 보였습니다. 가죽옷을 입고 지팡이를 집고 있었습니다. 젊은이는 소리칩니다.

“드디어! 당신은 나를 숲에서 빠져 나오게 하실 좋은 안내자인 것 같습니다. 저는 3일째 숲에서 헤메고 있습니다.” 나뭇꾼은 말합니다.

“겨우 삼일, 나는 이 숲에서 3년간 헤메고 있는데.”

“뭐라구요? 3년이라구요? 그러면 나에게도 전혀 희망이 없군요.” 그리고 젊은이는 울기 시작합니다.

“아니 아니 젊은이 절망하지 말게. 내가 자네에게 밖으로 나가는 길은 알려줄수 없네. 하지만 나는 어떤 길은 출구가 아닌지 알려줄수 있네.”

 

이 이야기가 주는 교훈이 무엇일까요? 젊은이에게 자기의 실패한 길을 하나씩 알려주라는 것일까요? 그것이 아닙니다. 이 이야기를 젊은이들과 함께 읽고 또 읽으라는 것입니다. 그 때 젊은이는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깨닫는 것은 자녀들의 몫입니다. 단지 선생이 할수 있는 것은 함께 이야기를 읽는 것입니다.

유대문학에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이유는 가르치기 위함이 아닙니다. 함께 읽어내려가기 위함입니다. 그 때 아이들에게 깨달음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의 입에 하나님의 권능이 임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어느 분은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We are each other’s harvest. We are each other’s business. We are each other’s magnitude and bond.” – Gwendolyn Brooks

“우리는 서로의 수확입니다. 우리는 서로의 비지니스입니다. 우리는 서로 힘이 되고 하나가 됩니다,”

 

우리가 어린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읽어준다면 우리는 어린이들로 인해 권능자가 됩니다. 어린이들은 이미 권능자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자녀들로 인해서 수년내에 저희 교회는 부흥케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함께 노래하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말씀을 거둡니다.

처음 언급해 드린 박 교수님이 번역한 책에 보면 일본인 저자는 자신의 집이 목축업을 해서 가축을 기르고 팔기도 해서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갔고 웃는 소리도 분쟁거리도 많은 일상을 지냈다고 합니다. 그런 생활 속에서 어머니가 했던 말이 기억에 남아 있다고 합니다.

“집 안에 여러 사람이 들어오는 것은 좋은 거야.”

 

여러 사람들의 눈과 사람들과의 관계가 중요하다는 지혜가 담긴 말로 받아 드리고 있었습니다. 아마 이런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훌륭한 교육학자가 되었나 봅니다.

 

그런데 사실 요즘 자녀들에게 이야기를 함께 읽자고 하면 앉아 있을 자녀들은 찾기 어렵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눈물 섞인 눈으로 자녀들, 교회 자녀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요?

저희 자녀들은 부모님 이외에도 많은 분들과의 만남을 필요로 하는 사랑스러운 자녀들입니다. 많은 분들과 이야기를 나눈만큼 하나님의 권능자들이 되어 갈 것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지난주 Brookline경찰분들이 오셔서 저희 자녀들을 만나신 것은 아주 뜻 깊은 일입니다. 그 분들이 감사의 마음을 표하러 오셨지만 그들은 사랑의 눈으로 저희 자녀들을 보았습니다. 그만큼 저희 자녀들은 하나님의 권능자가 되어 간 것입니다.

저희 자녀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눕시다. 사랑스런 눈길을 보내십시다. 함께 더불어 우리도 권능자가 되어 갈 것입니다. 그래서 함께 노래를 부르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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