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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의 기도” 시편 8:1-12 (09/11/2022)

자유로운 새가 있었습니다. 다른 새들과 마찬가지로 하늘을 날고 열매를 따 먹으며 맑은 목청을 자랑했습니다. 그런데 그 새에게는 한 가지 습관이 있었습니다.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 때마다, 그것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작은 돌 하나씩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모은 돌들을 분류하면서 즐거운 일이 떠오르면 웃고, 슬픈 일이 기억나면 울었습니다.

새는 언제나 그 돌들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그 돌들을 결코 잊은적이 없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새는 더 많은 돌들을 갖게 되었고, 늘 그런 식으로 과거의 일들을 떠올리며 돌들을 분류했습니다. 마침내 돌들이 무거워져서 새는 하늘을 나는 것이 점점 힘들어졌고 어느 날은 더 이상 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하늘 높이 날던 새는 이제 땅 위를 걸을 수조차 없게 되었습니다. 혼자서는 한 걸음도 움직이기 힘들었습니다. 열매를 따 먹을 수도 없었습니다. 이따금 내리는 비에 겨우 목을 축일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새는 끝까지 견디며 자신의 소중한 돌들을 지켰습니다. 얼마 후 새는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숨졌습니다. 그 새를 떠올리게 하는 한 무더기의 쓸모없는 돌멩이들만이 뒤에 남았습니다.

 

류시화 시인의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현대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이야기라고 생각됩니다. 과거에 묶여서 날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새로 비유해서 잘 보여 주는 이야기라고 생각됩니다. 사실 새들은 오늘도 하늘을 힘차게 날고 있습니다. 과거에 매여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물의 영장인 사람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날고 싶지 않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하면 우리도 하루를 힘차게 날수 있을까요?

 

요즘 시편 말씀을 나누고 있는데 한 편 한 편 말씀을 준비할 때마다 제가 경탄하게 됩니다. 수천년 전 시편 편집자들은 오늘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을 위해서 기가 막히게 시편을 편집해 놓았구나 경탄하게 됩니다. 우리로 하여금 복잡한 디지털 시대를 살지만 새처럼 날수 있는 방법을 이미 보여주고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그동안 시편 강해를 잠시 요약하면 1, 2편은 시편의 도입부입니다. 서론이라고 생각할수 있습니다. 1편은 개인에게 임하는 복을 말씀하는 반면 2편은 공동체에 임하는 복을 말씀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시편의 남은 148편들은 1편과 2편 사이에 위치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곧 시편은 개인과 공동체에 임하는 축복의 말씀인 것입니다.

이 도입부 후 첫 시인 3편은 기도의 정석에 대한 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곧 시편은 기도문이라는 것입니다. 기도문에 곡조를 붙여서 불리웠습니다. 그리고 지난주 나눈 4편은 첫 기도문으로 ‘저녁의 기도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나누는 5편은 ‘아침의 기도문’입니다.

 

저녁 기도문이 먼저 나온 이유는 유대인들에게는 저녁이 하루의 시작이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 저녁 기도를 드리고 한 잠을 자고 아침에 깨서는 기도를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요? 1, 2절,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정을 헤아려 주소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

이 말씀을 읽자마자 떠오른 장면이 하나 있었습니다. 한동안 저희 집 앞 집에 자주 소방차와 응급차들이 오곤했습니다. 아프신 분이 사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다윗은 아침에 일어나서 제일 먼저 하나님께 응급 신호를 보냈습니다.

“아버지, 큰 일 났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응급차를 아침마다 다윗이 있는 곳으로 보내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아침 기도 같지 않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녁 기도 시 잠들기 전에 비슷한 기도를 올렸었습니다. 시편 4:1,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여기까지 봐서는 아침기도인지 저녁기도인지 알수가 없습니다. 한편 3절 말씀을 보면 아침기도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다윗은 아침마다 기도하고 또 바랐던 것입니다. 그런데 한글 번역으로는 ‘바라리이다’로 되어 있는데, NRSV는 ‘watch’(눈 여겨 본다)로 되어 있습니다. 많은 주석가들이 watch라는 해석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곧 다윗은 아침마다 기도를 드렸고 확신을 가지고 어떻게 응답되는지를 watch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저녁에 드린 비슷한 기도는 어떻게 되나요? 저녁의 기도는 듣지는 않으시니 이제 드리는 아침 기도만 확신을 갖고 기대하며 바라본다는 뜻인가요? 그럴리 없습니다.

 

다윗은 저녁의 기도를 드리고 잠이 깊게 들었었습니다. 자기가 잠이 깊이 들어 있을 때 하나님은 주무시지도 않으시고 졸지도 않으시고 밤새 일하실 것을 당연히 믿으며…. 하나님은 새 날을 준비하셨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새롭게 준비하신 하루를 기대하며 눈을 뜹니다.

 

지난주 오랫만에 비가 많이 왔습니다. 약 3일 가량 온 것 같습니다. 저의 집 동네에 작은 개울이 흐르는데 비가 좀 오래 안 오면 금방 마르는 개울입니다. 이번 여름 내내 말라 있었습니다. 월요일부터 비가 내렸는데 화요일에 산책 삼아 개울로 향했습니다. 마음에 큰 기대를 안고 ‘어제 비가 많이 내렸으니 이제는 많이는 아니더라도 물이 흐르겠지…’ 생각하면서…,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개울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다윗은 하나님께서 밤새 개울물이 줄줄 흐르게 해 주신 것도 잘 알고 아침 눈을 떴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다윗은 저녁에 드린 기도를 아침에 반복했을까요? 다음 말씀을 보면 실마리가 풀릴지 모르겠습니다. 4-6절,

“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머물지 못하며 오만한 자들이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하리이다 주는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시며 거짓말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시리이다 여호와께서는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와 속이는 자를 싫어하시나이다.”

 

이 귀절을 읽으면 한편으로는 속이 시원하지만 한편으로는 가슴이 아려 옵니다. 여기에 보면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언급됩니다. 오만한 자, 행악자, 거짓말하는자,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 속이는 자…. 이들을 다윗은 삶에서 지겹도록 만나 왔던 것입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사울 왕입니다. 단지 소설 속에 만났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실제로 만났습니다. 뼈속 깊게 이들로 인한 아픔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계속 만나게 될 것까지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실마리를 잡은듯 합니다. 아침의 기도를 왜 저녁의 기도처럼 비슷하게 응급차를 부르는듯한 기도를 드렸는지 알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매일 새롭게 창조하시는 이 아름다운 세상을 매일 망치는 사람들이 다시 생각이 난 것입니다. 오만한 자, 행악자, 거짓말하는 자,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 속이는 자…. 그래서 다윗은 다시 비슷한 기도를 드릴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같은 기도 같지만 내용적으로는 다른 기도인 것입니다. 저녁의 기도는 하루 있었던 일을 생각하며 드린 기도이었고 아침 기도는 하루 있을 일을 생각하며 드리는 기도였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는 반복적인 기도이지만….

그런데 저녁의 기도를 아침에 반복할 때 놀라운 확신을 갖게 됩니다. 7절,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리이다.”

 

다윗은 저녁의 기도 아침의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은 이 악한 자들을 뛰어 넘어 하늘을 날수 있도록 하시는 분임을 깨닫습니다. 곧 이들이 다윗을 땅에 매어 두지 못합니다.

사실 다윗의 원수인 사울 왕은 늘 다윗을 속였습니다.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기를 날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다윗은 도리어 자기를 죽이려는 사울을 복수하기는 커녕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두번씩이나 있었는데 죽이지 않습니다.

도리어 복수하는 시간에 다윗은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이 당시는 성전에 하나님이 계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성전을 향해서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다윗의 영혼은 도리어 하나님을 향하여 나는 경험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나는 경험을 하면서 다윗은 많은 찬양시를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의 마지막은 찬양시들로 마칩니다.

 

한편 다윗은 오늘도 예배 중에 다으과 같은 기도를 드립니다. 8절,

“여호와여 나의 원수들로 말미암아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

다윗은 수 많은 원수들로 인해 도리어 그들을 뚫고 하늘을 날게 해 다라는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기도의 사람들은 원수들을 만날 때 도리어 날게 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원수들 앞에서 아니 그들의 위로 나는 새가 되었습니다. 아침의 기도를 통해 하늘을 날게 된 것입니다.

 

한편 날아가는 다윗을 주위에서는 가만 둘리가 없습니다. 9, 10절을 보면 다윗을 향해 대공포화를 쏘는 자들의 모습이 나옵니다. ,

그러나 다윗은 포화 위를 날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저녁의 기도 그리고 아침의 기도가 다윗으로 하여금 포화 위를 날게 한 것입니다.

 

이제 다윗은 오늘도 포화 위를 날게 될 것을 확신하고 온 천하가 듣도록 찬양합니다. 11, 12절,

“그러나 주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 외치고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로 함 같이 은혜로 그를 호위하시리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감싸인 자신의 모습을 생각합니다. 담대한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다윗은 놀라운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삶은 은혜로 감싸 있다고…. 은혜로 감싸인채 모든 역경을 넘어 하늘을 나는 새가 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 나라를 세우는 왕이 된 것입니다.

 

얼마전까지 보스톤에 ‘Blue men’이라는 쇼가 있었는데, 한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 몸을 blue men처럼 푸른 페인트를 칠하고 있다고 가정해 보았습니다. 저와 악수하는 사람들은 푸른 페인트로 그분들의 손도 물들일 것입니다. 양심이 있다면 상대방의 손을 닦아 드려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푸른 페인트가 아니라 상대방이 은혜로 물든다면 당연히 닦아 드릴 필요는 없겠죠.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며 은혜를 나누어야 하겠죠.

그런데 손만 은혜로 감싸였을까요? 눈도 입도 귀도 모든 부위가 은혜로 감싸였을 것입니다. 다윗은 은혜로 세상을 보았고 은혜롭게 세상의 소리를 들었고 그의 입에서는 은혜의 말이 쏟아 져 나왔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의 시작은 저녁의 기도 그리고 아침의 기도…. 분명한 것은 우리가 기도드릴 때 주님은 열심히 우리들의 기도를 받아 적으십니다. 기도가 마친 후 우리가 깊은 잠이 들 때 일을 시작하십니다. 그리고 아침 일과를 시작할 때 일을 벌이십니다. 주님께서는 하루 종일 우리들을 은혜로 호위하시는 일을 하십니다.

 

여섯 살 난 딸을 가지신 어느 가정의 이야기입니다. 엄마가 청소기를 들고 청소를 시작하면 여섯 살 난 딸이 쪼르르 빗자루를 들고 와 엄마에게 말한다고 합니다.

“엄마, 공주가 도와줄까요? 공주가 해줄까요?”

 

그런데 엄마는 사실 제발 안 도와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열심히 먼지를 모아 놓으면 쪼르르 와서 열심히는 쓰는데 오히려 힘들게 모아놨던 먼지를 다시 흩어 버리기만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아빠는 그런 딸의 모습을 지켜 보는데 이런 생각이 들곤 한답니다.

“그래도 이렇게 엄마랑 함께 해 줘서 행복하다.”

그래서 엄마는 나중에 다시 청소를 하더라도 꼭 공주에게 청소를 부탁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서툴러도 아니 망치는 것 같아도 주님은 우리에게 맡기십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은혜의 페인트가 칠해 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저녁의 기도 아침의 기도 가운데 주님을 만난다면 말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사명은 우리 몸에 묻혀 있는 은혜의 페인트로 온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는 것입니다. 우리는 은혜의 페인트로 감싸인채 하늘을 나는 새들입니다.

 

한편 우리가 하늘을 나는 은혜의 새가 될수 있었던 진짜 이유는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저녁의 기도와 아침의 기도를 우리와 함께 드리셨습니다.

누가복음 22: 39절에 보면 주님께서 겟세마네에서 기도를 하시는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 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

주님께서는 습관을 따라 저녁 기도 내지 밤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한편 마가복음 1:35절에 보면,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주님은 아침 일찍 한적한 곳으로 가서 기도하셨습니다. 주님은 시편의 말씀을 이렇게 완성하셨습니다.

 

한편 주님의 손과 발이 닿은 모든 곳에는 은혜가 넘친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이 은혜는 시간을 초월합니다. 어쩌면 time machine을 타고 모든 시간을 은혜의 시간으로 바꾸어 놓으십니다. 주님은 만왕의 왕이 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바뀌어진 은혜의 시간을 매일 누리는 것입니다. 오늘이라는 은혜의 시간을…. 오늘이라는 시간을 나는 새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로….

 

말씀을 거둡니다.

유한양행이라고 한국의 유명한 제약회사가 있습니다. 한 때 정치자금을 내지 않아 세무조사를 받았는데, 아무리 털어도 먼지 하나 나지 않는 회사라고 세무사가 평을 했을 정도로 깨끗한 회사입니다.

창립자는 유일한 회장이신데 9살에 미국 감리교 선교회에서 후원을 해서 어릴 때 미국에 와서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성장합니다. 후에 사업에 성공을 합니다. 이 때가 일제 강점기인데 조국을 방문하니 너무 가난하게 살아서 한국에 약품을 만드는 회사를 설립하기로 결심을 합니다. 결국 유한양행을 설립합니다. 제약회사 가운데는 월급이 제일 많았다고 합니다.

 

그에 대한 좋은 이야기가 너무 많은데 한 가지는 자기의 모든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셨습니다. 유한양행은 더 이상 가족들의 손에서 벗어났습니다. 이것이 유 회장님의 유언이었습니다.

감사하게도 기독교인으로서, 그의 삶의 철학은 다음 고백에 담겨져 있다고 봅니다.

 

“어제는 한낮 꿈에 지나지 않고 내일은 하나의 환상일 뿐이다.

하지만 최선을 다한 오늘은 어제를 행복의 꿈으로 만들고

내일을 희망의 비전으로 변화시킨다.”

 

그는 매일 매일을 최고의 은혜의 하루로 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제도 내일도 은혜의 날들이 되어 갔습니다.

그가 한국에서 사회 생활을 할 때는 일제 강점기 그리고 후에는 군사독재 시절이었습니다.  남들은 모두 타협을 하는데 어려운 상황에서 그는 모든 부정과 부조리를 넘어 하늘을 나는 새가 되었습니다. 초지일관 삶의 원칙을 지켰습니다.

 

이 놀라운 삶을 누가 살아 갈까요?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날이니라.”

 

저녁과 아침의 기도의 축복, 기도의 리듬이 몸에 배인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이 놀라운 삶에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함께 다윗처럼 역경을 넘어 나는 새가 되어 가십시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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