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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누가복음 4:16-19 (08/11/2024)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사내 대장부는 집을 나가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 라는 뜻입니다. 윤봉길 의사가 독립운동을 위해 충청도 집을 떠나 만주로 향하기 전 남긴 유서에 적힌 말입니다.

윤봉길 의사는 그후 1932년 4월26일 만주 홍커우 공원에서 열린 일본군 전쟁 승리 기념식에서 폭탄을 던짐으로 일본군 대장과 거류민단장을 즉사케 하고 세명의 주요 인물들을 중상을 입힙니다.

거사 직전에 김구선생을 만나는데 김구 선생에게, “선생님의 시계보다 제 시계가 더 비싼 것인데, 저는 이제 몇 시간만 시간을 더 보면 되니 시계를 바꾸어 찹시다”라고까지 말했다고 합니다. 그의 여유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후에 1962년, 대한민국 정부가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합니다.

 

‘장부출가생불환’

오늘 본문 말씀에 나오는 주님의 모습을 연상케도 합니다. 물론 주님은 두 차례 집을 떠나셨습니다. 첫번째로는 30살이 되어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위해 요단강으로 가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습니다. 그리고는 광야에서 사탄에게 40일 시험을 받으십니다. 돌아오는 길에 갈릴리를 지나면서 가르침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는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16절,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다시 주님은 고향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안식일이 되서 늘 하시던 습관대로 회당에 예배를 드리러 가셨습니다. 그리고는 성경을 읽으려고 섰습니다. 그 다음 표현이 흥미롭습니다. 17절,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여기까지 상황을 설명해 드리면 솔직히 주석가들도 좀 의견이 갈리지만 이 당시 회당에서 진행되는 예식은 세 순서로 나뉘는데, 처음에는 각자 기도 시간 그 다음으로는 말씀 시간 마지막으로는 가난한 자들을 위해 헌금했다고 말합니다. 특히 말씀 선포 시간은 랍비가 하던지 아니면 검증된 평신도가 특별히 청하면 허락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여튼 주님은 평신도 지도자 자격으로 나와 말씀을 읽는 자리에 섰습니다. 그리고는 회당에서 일하는 스탶에게 아마도 부탁한 것 같습니다. 이사야의 글을…. 이 당시는 당연히 두루마리였지요. 두루마리로 된 이사야서를 건네 받고는 어딘가를 펼치셨습니다. 바로 이사야 61장 1절입니다. 그리고는 선포하십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주님은 이사야의 예언이 당신에게서 이루어졌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말씀드린대로 주님은 첫번째 출가하신 후 요단강으로 향하셨다고 했죠. 그곳에서 세례를 받습니다. 이 때 성령을 받습니다. 이 경험을 하셨기에 주님은 당당히 이사야의 예언의 말씀을 읽으신 것입니다. 다시 봉독해 드립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성령을 받은 당신을 보내신다는 것입니다. 두번째 출가인데 목적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함을 마치기 전에는 결코 돌아 오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한편 이사야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는 것’임을 선포합니다. 여기에 단어 하나가 눈에 띄입니다. 두번씩이나 사용되었습니다. 그것은 ‘자유’입니다. 한편 눈먼 자가 다시 보게 되는 것도 자유케 하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고 볼수 있습니다. 곧 세 가지 자유를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묶어서,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다.”

주의 은혜의 해는 희년 곧 jubilee를 말합니다. 주님은 희년의 주인공이 되어서 세상을 향할 것임을 나사렛 어느 회당에서 이사야서를 읽으며 함께 한 자들 앞에서 선언하고 계신 것입니다.

 

한편 희년의 해를 선포하는 자들은 어떤 길을 가게 될까요? 오늘 본문 말씀은 아니지만 이 고백의 주인공에게는 어떤 삶이 펼쳐질 것인지를 누가는 계속되는 사건 전개를 통해 이미 말씀하고 있습니다. 29, 30절,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되 예수께서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주님은 고향인들의 배척을 받으셨습니다. 물론 후에는 이방인들의 손에 붙잡힐 것도 아셨겠죠. 이 모든 것을 아시면서도 주님은 당신의 공생애를 시작하신 것입니다.

 

오늘 특별히 8.15광복절 기념예배를 맞이하여 이 말씀을 나누게 된 가장 큰 이유가 있습니다. 말씀드린대로 오늘 본문 말씀에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가 있습니다. 물론 두 번 뿐이지만…. ‘자유’입니다.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님은 당신의 백성을 자유롭게 하시려고 장부출가생불환을 결단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선 고향친지들에게 배척을 받게 될 것을 잘 아셨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당신의 자유로 이것을 선택하셨습니다. 이는 바로 당신의 자유로움의 표현이었습니다.

그 누구도 모든 인간들에게 주어진 자유를 빼앗을수 없습니다. 그 중 가장 고귀한 자유는 바로 포로된 자와 눌린 자를 자유케 하는 자유입니다. 윤봉길의사도 당신의 자유로 집을 떠났습니다. 자유를 잃은 민족을 위하여…. 이를 그 누구도 막을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주님도 당신의 자유로 나사렛을 떠났습니다. 자유를 잃은 당신의 백성들을 위하여…. 주님은 자유인이었습니다.

한편 주님은 우리 모두를 자유인으로 초대하셨습니다. 당신의 희년의 행진에 동참키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8: 31, 32절,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제 고등학교 친구가 약 40여년전에 어스틴에 있는 텍사스대학에 유학을 오게 되었습니다. 교정을  구경하다가 본관 외부 건물벽에 새겨진 한 문장을 대하게 됩니다. “네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이 문장을 딱 읽는 순간 너무 철학적인 기분이 들었다고 합니다. 누구의 말인가? 아리스토텔레스인가 아니면 플라톤?

그 인상이 너무 강열해서 저자가 누군가를 찾아 보려 했으나 그당시엔   휴대폰도 없고 인터넷도 없던 시절 차일피일 미루다가 몇달후에 교내 성경공부반에 들어가 공부를 하다가 마침 요한복음 8장22절에서 이 귀절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때의 감격이 컸다고 합니다.

“아, 이게 인간이 한 말이 아니었구나…”

 

이에 총장님을 찾아가 이런 명문장을 학생들 보라고 써 놨으면, 문장뒤에 반드시 저자의 이름을 써 놔야 되지 않겠습니까? 라고 말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그 무엇 보다도 가장 중요한 내용 곧 “내 말에 거하면 참 제자가 되고”를 왜 뺐냐고도 따지고 싶었다고 합니다. 이 부분이 가장 중요한 내용인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서…

그런데 첫학기의 영어 실력도 그렇고  친구들도 “총장님이 뭘 어떻게 하겠니?” 해서 그만 두었다고 합니다. 친구는 아주 잘 깨달았습니다. 이 문장에 가장 중요한 것은 ‘내 말에 거하면 참 제자가 되고’임을….

 

그러면 참 제자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요? 바로 주님을 닮은 모습입니다. 자유인의 모습입니다. 주님을 닮은 자들은 자기의 고귀한 자유를 빼았기지 않습니다. 이 고귀한 자유를 사용하여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합니다.

 

오늘 8.15광복기념예배를 드리는데 우리 모두 잘 압니다. 광복의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원자탄 투하였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저는 확신합니다. 그것은 하나의 계기가 되었을지 몰라도 수 많은 민족의 자유를 위하여 당신의 자유를 사용한 무수한 구국선열 때문이 아닐까요? 윤봉길 의사를 위시하여….

현재 국가에서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은 수는 18,018명이라고 합니다. 곧 1만8천명 이상의 구국선열들이 당신의 자유를 민족의 자유를 위하여 바쳤기에 저는 광복의 축복이 저희 민족에게 허락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중 가장 크게 눈에 띄는 것은 기독교인들의 자유로운 희생이라고 생각합니다. 잘 아시겠지만 3.1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독립유공자수는 33명입니다. 그런데 이 중 기독교인들은 16명입니다. 거의 절반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반면 이 당시 기독교인수는 인구의 2-3%였다고 보고 있습니다. 곧 이 비율대로 하면 33명 중 1명 정도 꼴입니다. 그런데 16명 곧 16배였습니다. 이유가 무엇이었겠습니까? 이 들은 주님의 말씀을 따랐던 자들입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결국 이들 모두 같은 유서를 쓰지 않았을까요?

장부출가생불환.

 

물론 33인 중에는 여성독립유공자는 없지만 유관순 여사등 357명이 독립유공자로 등록이 되어 있습니다. 실은 위안부 등 역사 속에 드러나지 않은 수 많은 분들도 있을줄 압니다. 이들도 비슷한 유서를 썼을줄 압니다.

 

한편 우리가 미국땅에 살고 있으니 흑인들의 해방도 잠시 생각해 봄이 좋을듯 합니다. 우리가 이처럼 미국땅에 살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흑인들이 당신의 자유를 온 인류의 자유를 위해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물론 링컨 대통령을 통해서 흑인 해방이 이루어졌지만 동등한 자유를 획득한 것은 한참 후입니다. 정확히 흑인들이 자유로 투표할수 있게 된 것은 1965년도가 되서였습니다. 린든 비 죤슨 대통령 때입니다. 유명한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이 서명식에 함께 참석하였습니다.

 

그런데 마틴루터킹 목사님 이전에 Mrs. Rosa Parks가 흑인인권운동의 불꽃을 일으킵니다. 1955년 12월 1일 일에 지친 Rosa Parks가 버스안에서 백인들의 자리에 앉아서 체포됩니다. 이것이 흑인인권운동의 시작이라고 생각되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실은 이미 그녀는 20년동안 인권운동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12년간은 이미 NAACP라고 제일 큰 흑인 단체의 알라바마주에 있는 몽고메리 챕터의 서기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곧 그녀가 버스에서 자리를 내주지 않을수 있었던 것은 자기가 알고 있는 수많은 동료들이 있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후 마틴루터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결국 그는 1968년 4월 4일 멤피스에서 암살을 당합니다. 당신의 자유로….

마틴루터가 자유인으로 암살당할 것을 선택할수 있었던 이유는 Rosa Parks를 비롯 수많은 자유인들이 배후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실은 역사 속에 밝혀지지 않은 수많은 자유인들로 인해서 주님의 희년의 행진에 동참할수 있었던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 모두가 윤봉길 의사나 Rosa Parks여사나 마틴루터킹 목사가 될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작은 자유인이 되어서 이런 위대한 자유인들을 위해 우리의 자유를 사용할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가 주님의 희년의 행진에 동참할 때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당신의 자유를 희년의 행진에 동참하는 자유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행진으로 인해 한민족이 해방되었고 흑인들이 자유를 찾았습니다.

이제 주님은 우리를 보내십니다. 포로된 자들에게 눈 먼 자들에게 눌린 자들에게…. 우리들의 고귀한 자유를 버리지 마십시다. 희년의 행진에 동참하십시다.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사십시다.

 

말씀을 거둡니다.

저희 교회 첫 희년 비전선언 항목이 ‘삼세대가 함께 배우는 교회’인데, 이를 실천하기 위하여 영어 세글자를 사용하여 acronym을 만들었습니다.

 

YPK

Y: 윤동주—(명동교회)

P: 사도바울—(안디옥교회)

K: 마틴 루터 킹—(에벤에젤교회)

 

이 세 사람은 모두 이민교회에서 자란 인물들입니다. 윤동주는 만주 연변에 있는 작은 명동교회, 사도바울은 소아시아에 있는 안디옥 교회, 마틴 루터 킹은 아틀란타에 있는 에벤에젤 교회.

이민교회를 주님께서 세우신 이유 중 가장 으뜸인 것은 이런 인물을 키우는 사명이라고 생각해서 YPK를 오래전부터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 사람 모두 혼자서 이런 귀한 인물이 된 것이 아닙니다. 주위에 많은 분들이 참 자유인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 귀한 공동체의 열매가 이 세 인물을 통해 맺혀진 것입니다.

그러니 함께 말씀 안에 거하여 주님의 작은 제자가 되십시다. 우리들의 어깨를 자녀들이 밟도록 내어 주십시다. 우리들의 어깨를 밟고 자녀들은 온 인류를 가슴에 안게 될 것입니다. YPK에 버금 가는 인물들이 탄생될 것입니다.

이미 시작된 위대한 희년의 행진을 자녀들과 함께 동참하십시다. 이 위대한 행진을 주님께서 시작하셨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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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Title Writer Date
366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누가복음 4:16-19 (08/11/2024) webmaster 2024.08.12
365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II)” 다니엘 3:19-30 (08/04/2024) webmaster 2024.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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