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지난 주 설교를 쉼보르스카의 시 ‘두 번은 없다’로 시작하였습니다. 이유는 이 시는 전도서와 많이 일맥상통하기 때문에 소개해드린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도 같은 시 6번째 연으로 시작하겠습니다.
힘겨운 나날들, 무엇 때문에 너는
쓸데없는 불안으로 두려워하는가.
너는 존재한다 – 그러므로 사라질 것이다
너는 사라진다 – 그러므로 아름답다
예리한 시인의 삶에 대한 통찰력을 엿볼수 있습니다. 먼저 시인은 노래합니다.
“너는 존재한다-그러므로 사라질 것이다.”
모든 존재는 사라진다는 진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예외는 있죠. 창조주 하나님…. 그런데 시인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너는 사라진다-그러므로 아름답다.”
사라지기에 아름답다는 표현은 이성적으로는 이해가 안 되지만 우리 마음속 깊이 울림을 주는 것 같습니다.
곧 시인은 표현하고 있습니다. ‘산다는 것은 무척 아름다운 일이다. 언젠가 사라지기 때문에….’
오늘 세계성찬주일이자 정의평화환경주일로 지킵니다. 시인은 어쩌면 오늘 세계성찬주일을 지키는 온 인류를 위해 이 시를 오래전 지은 것 같습니다. 시인은 마치 외치고 있는듯 합니다.
“삶이란 아름다운 것입니다. 우리 모두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가 되십시다.”
이런 멋진 시를 지었기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것 같습니다.
한편 요즘 나누고 있는 전도서의 저자 솔로몬은 어떨까요? 솔로몬은 세계성찬주일을 맞이하는 우리들에게 어떤 멧세지를 주길 원할까요? 아니 사라지는 인생을 어떻게 풀어 나갈까요? 전도자는 2, 3절을 통해 시인보다 더 화끈하게 모든 산 자는 다 사라질 것을 말씀합니다. 3절만 봉독해 드리면,
“모든 사람의 결국은 일반이라 이것은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모든 일 중의 악한 것이니 곧 인생의 마음에는 악이 가득하여 그들의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고 있다가 후에는 죽은 자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라.”
곧 존재하는 자들은 사라질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왕이건 노예이건 강대국에 사는 사람이건 약소국에 사는 사람이건 모두 이 땅에서는 미친듯이 살다가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전도자는 시인과 달리 아름답다라는 표현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한편 4절,
“모든 산 자들 중에 들어 있는 자에게는 누구나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기 때문이니라.”
전도자는 아름답다는 표현은 하지 않지만, 좀 다른 관점에서 보고 있습니다. 산 자들은 미친듯이 살지만 소망이 있다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산 개와 죽은 사자를 비교함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이 당시 듣는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표현입니다. 이 당시 문화에는 개는 형편 없는 동물이었습니다. 요즘 세대와는 너무나도 큰 차이가 있습니다. 주님도 당신을 찾아 온 이방 여인 가나안 여인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반면 사자는 동물들의 왕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특히 이 당시는 왕권을 상징하는 동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전도자는 말합니다. 살아 있는 자가 소망이 있는데 이유는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기 때문이라고….
이를 바꿔 생각하면 살아 있는 평민이 죽은 왕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아니 살아 있는 노예가 죽은 왕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전도자는 살아 있는 자의 고귀함을 이처럼 역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주에는 새교우환영만찬 모임이 있었는데 어느 교우님이 아주 은혜로운 말씀을 나누셨습니다. 교우님은 후에 주님을 영접하였고 부인은 부모님으로부터 신앙을 물려받은 모태신앙인데, 한번은 주일에 교회 가기 싫다고 했더니, 돌아온 말은, “숨쉬지 마!” 였다고 합니다.
숨을 쉬는 산 자로서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께 예배하러 가기 싫으면 죽은 사자도 아닌 죽은 개와 같다는 뜻이였던 것 같습니다.
이 창조주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셨는데 어떻게 숨쉬는 자로서 감히 예배하러 가지 않을수 있느냐고 야단을 맞았다는 것입니다. 이 가정은 아마도 전도자의 지혜를 소유하신 분들 같습니다. 숨 쉰다는 것이 산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숨쉰다는 것은 바로 소망을 뜻한다는 것을….
전도자는 계속해서 숨쉬는 자들의 삶의 소중함을 설명합니다. 5, 6절,
“산 자들은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들은 아무것도 모르며 그들이 다시는 상을 받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이름이 잊어버린 바 됨이니라. 그들의 사랑과 미움과 시기도 없어진 지 오래이니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 중에서 그들에게 돌아갈 몫은 영원히 없느니라.”
사실 전도자는 죽은 자들을 경히 여기자는 뜻이 아닙니다. 죽고 나면 아무 것도 할수 없으니 지금 숨 쉬며 살고 있는 이 시간이 얼마나 가능성으로 가득찬 축복의 시간인지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는 깊은 교훈이 있습니다. 지금 숨을 쉬고 있는 ‘나’라는 인생을 소중히 여길뿐더러 함께 숨을 쉬고 사는 모든 이웃들을 경외감을 갖고 바라보자는 것입니다. 모든 살아 있는 자들은 사랑의 대상을 넘어서 경외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살아있는 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펼쳐실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정말로 하나님께서는 숨쉬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통해 당신의 일을 펼치시고 계실까요?
이번에 Helene 태풍 피해 소식을 많이 접해 보셨을줄 압니다. 수백여명의 사망자를 낳은 무서운 태풍이었습니다. 먼저 이번 피해자들 가족에게 조의를 표합니다.
그런데 이제는 가면 갈수록 태풍 피해가 심해질수 밖에 없다고 봅니다, 이유는 climate change와는 관계 없는 또 다른 요소가 있습니다.
어느 건축업자의 이야기입니다. 요즘은 더 이상 two by fours가 two by fours가 아니라고 합니다. 요즘은 말이 two by fours이지 실제로는 1 and 1/2 by 3 and 1/2 라는 것입니다. 건축자재들이 얇아지고 있다고 합니다.
한편 전에는 12-14년 된 나무들을 사용하였는데 요즘은 7년 된 나무들을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빨리 이득을 챙기려고….
이것만해도 부담스러운데 한 가지 더 말씀드리면, 요즘 나무 농장에서는 나무들을 일렬로 곧 straight로 심는다고 합니다. 그래야 나중에 거두기 쉽다고 합니다. 그런데 단점은 서로 나무가 일렬로 서 있기에 바람을 덜 맞는다는 것입니다. 바람은 일렬로 서 있는 나무들 사이 공간으로 지나가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무가 든든히 자라려면 바람을 많이 맞을수록 좋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뿌리도 든든해지고 든든한 나무로 자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재목 자체의 질이 떨어질뿐 아니라 크기도 작아졌다는 것입니다. 새로 지은 집에 사시는 분들에게는 죄송한 말씀을 드려 죄송하네요. 만일 요즘 짓는 집들도 오래 전 지은 집처럼 든든하게 지어졌더라면 이번 인명 피해도 줄지 않았을까요?
이처럼 이번 태풍은 물론 자연재해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인재 곧 사람이 불러 온 재해가 덮쳐 있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산 자들의 죄성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도 전도자는 말씀할까요? “산 자들 중에 들어 있는 자에게는 누구나 소망이 있음은….”
이런 자들은 소망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면 예외 조항이 있을까요? 사기꾼들은 포함이 안 되는 것인가요?
그럴리 없습니다. 전도자의 이 말씀을 완성하기 위하여 주님께서 오셨습니다. 마태복음 5: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여기서 율법을 모세오경을 비롯한 모든 구약의 말씀으로 생각하면 좋을줄 압니다.
곧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소망이 있다는 전도자의 말씀을 완성하기 위하여 오셨고 십자가에 달리셔서 당신의 살과 피를 찢기시고 흘리셨습니다.
그리고 그 것을 모든 산 자들에게 거져 주셨습니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에게까지…. 아니 특별히 죄인들을 위하여 흘리셨습니다. 사기꾼들을 포함해서….
그런데 확실한 것은 지금도 거져 주시고 계십니다. 죽은 자들에게는 주시지 않으십니다. 산 자들에게만 주십니다. 왜냐하면 산 자들은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끔찍한 죄를 범했을지라도….
이처럼 모든 산 자들은 주님의 살과 피를 받기에 충분한 자격이 있는 자들입니다. 살과 피를 받을 때 죄사함의 역사가 일어나며 성령을 통하여 믿음의 놀라운 역사가 펼쳐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결론을 내릴수 있습니다. 실제로 산 자들이 소망이 있음은 주님의 죽으심 때문입니다. 주님의 죽으심이 없다면 산 자들도 소망이 없습니다. 도리어 절망입니다. 죄 가운데서 도리어 이웃을 해하는 악의 주인공으로 살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종종 영어로는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은 ‘Celebration of the Lord’s Supper’라고 표현합니다. 주님의 살과 피에 참여하는 것은 하나의 축제입니다. 산 자들의 축제인 것입니다. 이 축제에 참여한 자들은 소망 가운데서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멋진 삶을 살게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 축제에 참여한 자들은 거져 받았으니 이웃에게 거져 주는 삶을 살게 됩니다. 정의평화환경을 위하여 사는 자들이 됩니다. 이 축제에 함께 동참하십시다. 아름다운 무지개 빛을 발하십시다.
말씀을 거둡니다.
지난주 제가 사는 타운을 산책하고 있었는데 어느 집 앞에 있는 꽃을 나누는 basket cart를 보았습니다. 제가 갔을 때는 꽃들이 모두 가져 간 후였습니다. 그래도 그 마음이 너무 타칭해서 사진을 찍게 되었습니다.
정원에 꽃을 많이 키우는 집인데, 그냥 혼자 시들게 하느니 원하는 분들이 가져 가라고 해서 예쁜 카트에다가 담아 놓았던 것 같습니다.
특히 아래 적혀 있는 글이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Free Flowers’
꽃과 같이 아름다운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꽃을 선물하는 정말로 살아 있는 분들이 사는 가정임을 느낄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살아 있음을 감사하게 느끼시는 분들이고 아울러 살아서 함께 숨을 쉬는 분들에게 아름다움의 선물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정치는 잘 모르지만 요즘 이스라엘이 미국에서 거져 받은 폭탄을 뿌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란이 자기 추종세력들에게 거져 폭탄을 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크라이나도 매한 가지 아닐까요?
왜 이들이 이렇게 되었을까요? 산 자들을 경외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요? 이웃에게 꽃을 드려 보았더라면 좋았을텐데….
그런데 이들도 산 자들입니다. 그래서 이들에게도 소망이 있습니다. 주님의 성만찬에 참여한다면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도 예쁜 꽃을 보내십시다. 언젠가 성만찬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모든 산 자들은 아름다운 자들임을 보게 될 것입니다.
전도자는 말씀합니다.
“모든 산 자들 중에 들어 있는 자에게는 누구나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기 때문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