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테의 신곡 지옥편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단테가 순례하던 지옥의 한구석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불꽃이 비처럼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앉아 있는 곳은 뜨겁게 달구어진 모래로 가득했습니다. 뜨거운 바닥에 놀라 이리저리 펄쩍 뛰면서 한편으로는 날아오는 불꽃을 쳐 내느라 정신없는 모습이 마치 여름날에 벼룩, 파리, 빈대에 물어뜯기는 개가 주둥이와 발목으로 버둥대는 모습과도 같이 보였습니다. 고통으로 가득한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던 단테는 이상한 점 하나를 발견합니다. 이렇게 서술합니다.
“고통스러운 불꽃을 맞고 있는 사람들의 목에는 돈주머니가 걸려 있었다. 특정한 색깔과 표시가 선명하게 보였다. 그들은 돈주머니를 흡족하게 여기는 듯했다.”
한편으로는 고통스러운 불꽃을 맞고 있지만 그 고통을 잊고 도리어 만족해 하는 무리가 지옥 한 구석에 모여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목에 건 돈주머니로 인해서 한편으로는 흡족해 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자본주의가 극으로 달한 세상에 사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분명 고통스러운 불꽃이 늘 우리 주변에 떨어집니다. 그런데도 견딜수 있는 것은 우리들 목에 걸려 있는 돈주머니로 인한 것이 아닐까요?
물론 돈주머니가 꽉 찬 분들은 당연하겠지만 텅빈 사람들조차도 언젠가 돈주머니가 채워질 것을 꿈꾸며 불꽃을 견디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아마 전도서의 저자도 단테와 같은 예리한 통찰력을 갖고 있었을줄 압니다. 그러면 오늘 자본주의 사회에 살면서 돈주머니를 가슴에 달고 살수 밖에 없는 우리들에게 전도자는 어떤 말씀을 주실까요?
오늘 청지기 헌신주일이자 부부청년부 헌신예배로 드립니다. 청년부부들뿐 아니라 우리들 모두 평생 돈주머니의 딜레마를 안고 살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1년에 한번 청지기 헌신주일로 지키는 이유는 도리어 불꽃이 난리를 피고 있는 이 땅에서부터 천국의 삶을 살기 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지옥 불꽃 가운데 살면서 불꽃을 맞지 않고 도리어 천국을 맛보며 살수 있을까요?
전도자는 말씀합니다. 1절,
“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많은 주석가들이 이는 자선의 행위로 해석합니다. 어느 주석가는 이 당시 주변 나라에 비슷한 잠언들을 소개하면서 자선의 행위임을 강조합니다. 애굽의 속담입니다.
“선행을 하라 그것을 물에 던져라. 물이 말랐을 때 그것을 찾으리라”
곧 자선을 베푸는 것을 이 당시 주변 문화권에서도 물에 던지는 것으로 비유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궁금한 생각이 듭니다. 왜 하필 물에 던지는 것으로 비유를 했을까요?
자선은 물위에 떡을 던지는 것과 같다는 뜻이 아닐까요? 물에 떡을 던져 보신 분들 계십니까? 저는 가끔 New Hampshire에 가면 자주 가 보는 곳이 있습니다. 그곳에 작은 연못이 있는데 물고기들이 있고 물고기 먹이를 동전을 넣고 살수 있는 곳입니다. 물고기가 없을 때는 먹이를 던지지 않습니다. 동전만 소비하는 것이니….
그런데 전도자는 자선사역은 떡을 물에 던지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던진 것이 중요하지 그 결과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한국 속담에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와 일맥 상통한다고 봅니다. 자선은 ‘밑 빠진 독에 물 붓는다’ 생각하고 베푸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자선단체에 기부를 할 때 요즘은 이 돈 중에 몇%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돌아가나 궁금해 하시는 분들이 많은 줄 압니다. 사실 저희 교단 총회에 저희 교회에서 이런 저런 기금을 보내는데 100% 모두 필요한 사람들에게 가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알기로는 15%는 행정비로 사용됩니다. 이는 다른 기관 보다는 아주 적은 행정비로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여러분들에게 참고적으로 말씀드리지만, 전도자는 너무 거기에 예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참 자선은 바로 ‘밑 빠진 독에 물을 부을지라도…,’에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교회 헌금도 매한가지입니다. 이럴 때 어떤 일이 일어난다고요?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사실 지금도 lobby에는 작년도 70주년 행사의 일환으로 100여년전 한국에 선교사로 오신 분들의 사역을 전시해 놓고 있습니다. 저희 교회가 장로교이고 또 실제적으로 한국 선교에 가장 큰 역할을 한 교단은 장로교이기에 장로교 선교사분들의 사진이 많이 전시되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한국의 최초 선교사는 유대인으로서 루터교 목사인 귀출라프 선교사입니다. 24살에 아시아 선교를 위해 헌신을 하고 중국 선교사가 됩니다. 이 분은 전통적인 선교의 틀에서 벗어나신 분이라서 선교본부와 마찰도 많으셨던 분이라고 합니다.
중국 선교사였지만 조선 선교에도 관심을 가져서 조선 땅을 밟기도 합니다. 선교본부가 원하지 않는데도…. 1832년 7월입니다. 정확히는 충청도의 섬들과 제주도를 선교합니다. 잠시 동안….
귀출라프의 선교를 옥성득 교수님은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
“귀츨라프가 또한 충청도의 고대도 도착 이후 아픈 이들에게 약을 공급해 주었으며, 60명의 노인 감기 환자를 위해 충분한 약도 처방해 주었다. 첫 의료 선교의 시도였다. 그는 주민들에게 감자를 심어주었으며, 감자 심는 법, 포도 재배법, 좋은 포도즙 만드는 법도 글로 써주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이 있습니다. ‘감자 심는 법.’ 한국의 감자는 귀츨라프를 통해 들어 온 것입니다.
사실 그는 짧은 시절만 체류하였기에 말씀은 제대로 전할 시간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무엇 보다도 육신의 건강을 위해 감자를 전파했습니다. 요즘 우리 자녀들이 키가 많이 커졌는데 어쩌면 감자 덕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말씀드린대로 귀츨라프는 독특한 선교를 했기에 선교본부와는 좋은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귀츨라프를 통해서 전해진 감자는 선교본부의 입장에서는 어쩌면 떡을 물 위에 던지는 행위였을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결국은 수많은 결실로 도로 찾게 된 것이 아닐까요?
한편 자기가 뿌린 것들이 밑빠진 독에 물 붓기는 아닌지 귀츨라프도 고민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일기도 적었습니다.
“아무튼 이는 하나님의 사역이다. 나는 자주 기도하면서 조선 선교를 하나님의 은혜로운 보살핌에 맡겼다. 조선에 뿌린 거룩한 진리가 사라질 수 있을까? 나는 그럴 수 없다고 믿는다. 주께서 정하신 시간에 열매가 맺힐 것이다.”
아마 선교국에서는 귀츨라프에 대해 못 믿어워 하였을수도 있습니다. 밑빠진 독에 물 붓는 것으로 생각했을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도로 찾으시고야 마신 것입니다. 그 열매 중 하나가 저희들과 저희 자녀들이 아닐까요? 물론 귀츨라프는 이 땅에서는 열매를 보지 못하였지만 지금은 하늘나라에서 기쁘게 보고 계실줄 압니다.
그러면 선교국에서는 왜 귀츨라프를 못마땅해 했을까요? 전도서를 제댈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2절,
“일곱에게나 여덟에게 나눠 줄지어다. 무슨 재앙이 땅에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함이니라.”
자선이나 선교비를 책정할 때 여러 곳으로 나누면 좋다고 일단 생각하면 좋을듯 합니다. 저는 이것을 이렇게 보고 싶습니다. 자기가 중요시 여기는 선교지와 자선사역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른 분은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곧 일곱 명이 되던 여덟명이 되던 각자에게 주시는 생각에 따라서 섬기면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가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면 혼자서 그렇게 하면 되지 다른 곳을 섬기고자 하는 사람을 방해하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이유가 있는데 우리는 땅에 무슨 재앙이 임할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미래를 확실히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각자에게 다른 섬김의 은사를 미리 주신 것이 아닐까요?
생각해 보십시다. 만일 귀츨라프가 조선 땅을 밟고 싶어 했는데 주변 사람들이 말렸더라면 역사는 어떻게 진행되었을까요?
곧 남들의 생각은 달라 보여도 좋은 일을 하려고 할 때 축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물론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 같이 미련해 보일지라도….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이것이 청지기들에게 요구하는 믿음입니다.
곧 청지기들은 남들이 밑빠진 독이라고 말릴지라도 물을 붓는 자들입니다. 아울러 밑빠진 독에 물을 붓고 있는 형제자매들을 축복하는 자들입니다.
저희 교단에 유명한 저술가로 Lamott이라는 영성가가 있습니다. 그 분이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과 나의 차이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하나님은 결코 당신은 나와 같다고 생각하시지 않습니다.”
“What’s the difference between God and me? God never thinks she’s me.”
놀라운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많은 신앙인들은 종종 착각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와 같은 생각을 갖고 계실 것이라고….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이를 깨닫는 자들은 물 위에 떡을 던집니다. 그리고 떡을 던지는 이웃을 말리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도로 찾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한편 이를 확증하기 위해서 전도자는 말씀합니다. 5절,
“바람의 길이 어떠함과 아이 밴 자의 태에서 뼈가 어떻게 자라는지를 네가 알지 못함 같이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네가 알지 못하느니라.”
물론 요즘은 의학이 많이 발전되었지만 그래도 아이가 어떻게 생기고 자라는지 100% 다 아는 것은 아닙니다. 알아 가고 있는 것뿐입니다. 아이가 자라는 것도 온전히 알지 못한다고 인정하는 것이 청지기의 삶의 시작인 것입니다.
세상을 다 안다고 생각할 때 청지기의 사명은 왜곡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될까요? 6절,
“너는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놓지 말라 이것이 잘 될는지, 저것이 잘 될는지 혹 둘이 다 잘 될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청지기는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고 매일 매일 주어진 일에 충실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곧 이들은 늘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는 자들입니다.
전도서의 이 말씀을 이루신 분이 바로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매일 매일 주어진 삶에 그리고 사역에 충실하셨습니다. 물론 주님은 이것이 잘 될는지 저것이 잘 될는지 다 아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전도서의 청지기의 모습을 완성하시려고 이것이 잘 될는지 저것이 잘 될는지 모르시는 분처럼 일하셨습니다.
잘 아시는대로 주님을 따르는 수많은 무리에게 말씀만 들려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오병이어로 장정만 5천명 이상을 먹이시고 12광주리를 남기셨습니다.
그런데 이 중 수많은 사람들이 후에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무리가 됩니다. 주님이 모르셨을까요? 그러나 주님은 매일 매일에 충실하셨습니다. 그리고 무리들에게 떡을 베푸셨습니다. 아니 물 위에 떡을 던지신 것입니다.이 사람이 잘 될는지 저 사람이 잘 될는지 모르는듯이 무조건 떡을 던지신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이를 먹은 자들이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주님은 끝내 십자가에서 당신의 살과 피를 던지셨습니다. 물 위에….
그러나 먼 훗날 주님은 도로 찾으셨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주님께 돌아 왔습니다. 이들의 복음 전파로 많은 죄인들을 도로 찾으셨습니다. 우리도 바로 그 무리 중 하나인 것입니다.
청지기들은 주어진 삶에 최대한도로 충실한 삶을 사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충실한 삶의 열매 중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이웃의 것을 이웃에게 드리는 것입니다. 때로는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것과 같을지라도…. 특히 자기의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이라는 착각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웃이 밑빠진 독에 물을 붓더라도 이웃을 축복하는 자들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롱펠로우의 ‘화살과 노래’라는 시입니다.
공중을 향해 화살 하나를 쏘았으나,
땅에 떨어졌네, 내가 모르는 곳에.
너무 빠르게 날아가는 화살을
시선은 따라갈 수 없었네.
공중을 향해 노래 하나를 불렀으나,
땅에 떨어졌네, 내가 모르는 곳에.
어느 누가 그처럼 예리하고 강한 눈을 가져
날아가는 노래를 따라갈 수 있을까?
오랜, 오랜 세월이 흐른 후, 한 참나무에서
화살을 찾았네, 부러지지 않은 채로.
그리고 노래도, 처음부터 끝까지,
한 친구의 가슴속에서 다시 찾았네.
청지기의 삶은 공중에 화살을 쏘는 것과 같습니다. 많은 화살이 사라지는 것 같아도 언젠가 찾게 될 것입니다. 롱 펠로우는 젊은 청년의 가슴에 박힌 화살을 찾았습니다.
사랑하는 부부청년부 교우 여러분,
여러분이 오늘 예배를 드리는 이유는 누군가가 쏜 화살로 인해서입니다. 여러분도 멋진 화살을 쏘십시요. 떡을 물 위에 던지듯… 언젠가 도로 찾게 될 것입니다.
전도자는 말씀합니다.
“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