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추수감사주일이자 창립 71주년 기념 예배를 드리는데 언젠가 소개해 드렸던 다음의 시가 먼저 떠 올랐습니다. 터키의 시인 나짐 히크미트의 ‘진정한 여행’입니다. 첫 부분만 나눕니다.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씌여지지 않았다.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려지지 않았다.
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
오늘 71주년을 맞이하여 첫 희년 신앙고백서를 나누었고, 71년의 교회 연혁을 나누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제2의 희년을 향한 비전선언을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말씀 선포 시간의 서두를 ‘진정한 여행’이라는 시로 시작합니다.
사실 21년전 50주년을 희년으로 지키기로 당회에서 결정을 하고는 첫번째 작업이 첫 희년 신앙고백서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21년전 이 자리에서 첫번째로 고백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한편 1년 후 곧 51주년 예배시 제2의 희년을 향한 비전선언을 당회에서 채택하여 이 자리에서 나누게 되었습니다. 지난 50년을 감사함을 통해서 새로운 50년을 바라보자는 결단이 담겨져 있는 비전선언입니다. 그리고 벌써 20년이 흘렀네요. 무엇보다도 빠질 수 없는 것은 지난 20년을 포함해서 창립에서부터 지난 71년의 저희 교회의 역사를 간단히 나누었습니다.
얼마전 어느 기독교단체에서 미주 한인 교회사를 편찬하였는데, 특히 1970년 이전에 설립된 교회를 소개하는 내용을 첫 장에 다루었습니다. 12개 교회가 설립되었는데 그 중 12번째로 저희 보스톤한인 교회가 설립되었다고 기록되었습니다.
물론 여러가지 사회적 여건상 네 교회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여덟 교회가 지금도 모이는데 잘 모이는 교회도 있고 그렇지 못하고 명맥만 유지하는 교회도 있는 것 같습니다.
곧 저희 교회는 한인 이민교회사에 현존하는 교회로서는 여덟 번째 교회가 되어 오늘 71주년 기념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저희 교회를 포함해서 저희 교회보다 일찍 설립된 일곱 교회, 그리고 그후로 세워진 무수한 이민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오늘 오랜만에 이삭의 르호봇 이야기를 나눕니다. 팬데믹 전부터 교인이셨던 분들은 자주 들으셨을 줄 압니다. 그 후에 오신 분들도 많으니 간단히 이삭의 르호봇 이야기를 다시 나눕니다. 오늘 본문 전 배경부터 말씀드립니다.
아브라함이 죽은 후입니다. 이삭은 이제 그야말로 가장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흉년이 들었습니다. 아브라함 때도 흉년이 들었었는데 이 때 아브라함은 애굽으로 내려갔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하나님께서는 흉년을 맞이한 이삭에게 나타나셔서 애굽으로 가지 말고 하나님께서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으셨다면 당연히 아브라함처럼 애굽으로 갔을 것입니다.
한편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곳은 그랄이라는 곳인데 이는 당시 블레셋 사람들이 살던 곳입니다. 이 곳에 살면 아브라함에게 주신 축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제정신이라면 그랄에 갈수가 없습니다. 무서운 블레셋 사람들이 사는 곳인데…. 이에 이삭이 어떻게 하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합니다.
13절,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순종의 결과입니다. 애굽으로 안 내려간 결과….
그런데 이도 잠시, 거부가 된 이삭을 시기하는 블레셋 사람들이 우물을 막습니다. 그리고는 그 곳을 떠나라고 합니다. 어쩔수 없이 애굽으로 갈 수는 없고, 하나님께서 애굽으로 가라하지 않으셨으니, 남은 곳은 그랄 골짜기였습니다. 순종의 사람 이삭은 하나님께 순종하여 좁은 그랄 골짜기에 내려가서 정착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물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그랄 골짜기에서 우물을 팠는데, 그랄 사람들 곧 블레셋 사람들이 와서 빼앗았습니다. 그 우물의 이름을 ‘다툼’이라는 뜻으로 ‘에섹’이라고 부릅니다. 뭐 그래도 또 물이 필요하니 다른 우물을 팝니다. 그런데 또 다시 와서 빼앗습니다. 이번에는 ‘대적함’이라는 뜻으로 ‘싯나’라고 부르고는 또 양보합니다. 그래도 물은 계속 필요하지 않습니까? 세번째 우물을 팝니다. 빼앗길 것을 각오하고…, 그런데 이상하게도 빼앗지 않습니다.
이에 이삭은 그 우물 이름을 ‘르호봇’이라고 부릅니다. ‘르호봇’의 뜻은 ‘넓다.’
22절 말씀,
“이삭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여 이르되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였더라.”
순종의 사람 이삭의 위대함이 엿보입니다. 이삭이 우물을 판 곳은 좁은 곳이었습니다. 골짜기였습니다. 그런데 도리어 이삭은 노래 부릅니다.
“르호봇”(넓다.)
이 노래를 들으셨는지 하나님께서는 이삭에게 나타나십니다.
24절 말씀,
“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나는 네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이 번성하게 하리라 하신지라.”
이삭의 위대함이 두 가지로 잘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첫번째는 순종의 사람입니다. 두번째는 노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좁은 골짜기가 무너져 떠내려 가도록 크게 부릅니다.
“르호봇!” “넓다!”
제가 이 본문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큰 은혜를 받은 무렵 한 책을 접하게 되는데 미국 이민 사회를 예리하게 분석한 책이었습니다.
두 분이 공저를 하였는데 미국 사회를 ‘맥월드 대 게토(McWorld vs. Ghetto)’라고 표현합니다. 맥월드는 맥도날드와 매킨토쉬를 상징하고 있고 게토는 잘 아시는대로 흑인가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두 학자는 맥월드와 게토 사이 좁은 땅에 사는 자들이 바로 이민자들이라고 설명합니다. 아주 기가막힌 설명입니다. 이민자들은 이 두 세상 사이 좁은 경계지역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민자들이 어쩔 수 없이 이 곳에서 산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하나님께서 이민자를 이 좁은 곳에 살게 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이민자들에게 주신 사명이 있습니다. 르호봇의 노래를 부르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곳이 바로 좁은 경계지역이라도 여기서 부르는 노래는 두 세상이 모두 듣게 되어 있습니다. 이민자들이 부르는 노래를 맥월드에 사는 사람도 듣고 게토에 사는 사람도 듣습니다.
그러면 한 가지 궁금한 생각이 듭니다. 이 노래를 누군가는 계속 불러야지만 이민자들의 사명은 계속 이어지게 되지 않을까요?
다시 이삭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이삭은 바로 이민자로서 르호봇의 노래를 그랄 골짜기 좁은 곳에서 불렀습니다. 이 노래를 누가 또 들었을까요? 이삭의 아들 야곱이 들었을까요?
오늘 본문은 26장인데 에서와 야곱의 출생 이야기는 25장에 나옵니다. 그리고 27장에 야곱이 부모 품을 떠나 삼촌 집으로 떠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곧 그랄 골짜기에 야곱은 함께 있었습니다. 야곱은 르호봇의 노래를 아버지로부터 들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평생 좁은 이민생활 가운데 늘 아버지의 노래, 르호봇의 노래를 불렀을 것입니다. 이 야곱이 부르는 노래를 열두 아들과 딸들이 들었을 것이고…. 이는 이스라엘 민족의 노래가 되어 갔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경에 남아 있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이스라엘 민족의 르호봇의 노래는 주위 모든 이웃들이 당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시대와 장소가 바뀔 때마다 노래의 가사는 조금씩 달라지지 않았을까요?
여기서 잠시 나짐 히크미트의 ‘진정한 여행’중 일부를 다시 나누어야겠습니다. 첫 두 줄입니다.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씌여지지 않았다.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려지지 않았다.
오늘 우리는 이 시를 우리들에게 어떻게 적용시켜야 할까요? 이삭의 ‘르호봇의 노래’는 더 이상 필요 없고 늘 새로운 노래만을 불러야 할까요? ‘새 노래’라고 하니 떠오르는 시편이 있습니다.
시편 149:1절,
“할렐루야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성도의 모임 가운데에서 찬양할지어다.”
그렇다면 시인은 더 이상 이삭의 르호봇의 노래는 오래 된 것이니 더 이상 부르지 말자라는 뜻일까요?
성서해석의 가장 중요한 원칙이 있습니다.
‘그 때 거기서, 지금 여기로’입니다.
시편 149편의 ‘새 노래’라는 의미는 이미 이삭이 르호봇의 노래를 부른지 거의 천년이 지났을 때입니다. 1000년이 지난 후의 르호봇의 노래를 새롭게 부르자는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새 노래를 부르기 위해서는 늘 마음 한 구석에는 생각해야 합니다.
‘그 때 거기서, 지금 여기로.’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저희들과 비교하면 거의 4000년전의 일입니다. 그러나 새 노래를 온전히 부르기 위해서는 늘 4000년을 오고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음악계에서도 classic이 없이 현대 음악이 있을 수 없는 것과 비슷한 논리일 줄 압니다.
이삭이 부른 노래는 이민자들의 기준이 되는 노래입니다. 이 노래에만 묶여 있으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르호봇의 노래를 기준으로 삼을 때 우리는 참된 새 노래를 부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 때 거기서 지금 여기로’ 오고가신 분 중에 한 분이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가장 좁은 골고다 산상 십자가에서 르호봇의 노래를 부르셨습니다. 주님은 옆에 있는 강도에게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23: 43,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사도 바울도 그 나름대로 르호봇의 노래를 새롭게 부릅니다.
디모데전서 6: 7, 8절,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우리가 이러한 마음으로 르호봇의 노래를 새롭게 부른다면 우리들의 자녀들도 본받게 되지 않을까요? 앞으로 30년 후 제2의 희년에도 새 노래를 부르게 될 것입니다. 만일 이삭의 르호봇의 노래를 기준으로 삼으면서 30년간 노래를 부른다면….
이 시간 앞으로 30년 후 저희 교회는 어떻게 될까 한번 쯤 생각하는 것도 좋을줄 압니다. 저희 교회 모습 중 제가 확신하는 것이 있습니다. 저는 얼마전 저희 교회 장로님들 가정을 살펴 보았습니다. 며느리나 사위가 한인인지 타인종인지 계산해 보았습니다. 쓸데없는 것을 계산한다 생각하실지 몰라도 저희 교회 미래를 내다 볼 수 있는 자료가 될 것으로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거의 2:1로 타인종이 한인보다 많았습니다. 감사하게도 현재 EM이 많이 활성화되어서 너무 감사한 일입니다. 지난주부터 Community Hall에서 예배를 드립니다.
저는 기대합니다. 제2의 희년에는 저희 자녀들 2세, 3세, 4세들이 그들 나름대로의 ‘르호봇의 노래’를 부르게 될 것을…. 그리고 이들의 노래가 바로 시편 기자가 말하는 ‘새 노래’가 될 것을….
우리 후손들이 부르는 새로운 르호봇의 노래를 맥월드와 게토에 사는 이웃들이 듣게 되지 않을까요?
이와 같은 맥락에서 저는 나짐 히크미트의 진정한 여행은 바로 우리 교회를 응원하고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씌여지지 않았다.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려지지 않았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삭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여 이르되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였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