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유명한 대통령 챨스 드골이 있습니다. 오래 전 안식년 때 파리에 방문했었는데 파리 공항 이름이 바로 챨스 드골 공항이었습니다. 프랑스를 방문하시는 분들은 오고 가실 때 드골을 만날수 밖에 없습니다.
이 유명한 드골은 실은 시골 초라한 고향 묘지에 묻혀 있다고 합니다. 국립묘지가 아니고…. 그 이유가 있는데 바로 자기의 딸 옆에 묻히길 원했다는 것입니다. 세 자녀가 있었는데 막내 딸은 다운 증후군 곧 장애인 딸이었습니다.
평생 나라를 위하여 일하다가, 물론 때로는 타국 생활도 오래 하였는데, 늘 드골의 마음에는 장애인 딸이 한구석 차지했던 것 같습니다. 결국 모든 세상의 삶을 마치고는 장애인 딸 옆에 함께 편히 쉬길 원했던 것 같습니다.
드골이 힘든 역경을 이겨내고 승리의 삶을 살수 있었던 것은 예쁜 장애인 딸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 우리들에게는 누가 있을까요?
오늘 말씀의 배경은 확실치는 않지만 그래도 무난한 것은 아마도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리아에게 멸망당했을 때인 것 같습니다. 1절 말씀에 보면 스볼론 땅과 납달리 땅이 나오는데 이는 북왕국에서도 갈릴리 근처에 있는 땅을 말합니다.
자, 그러면 편하게 이미 북왕국이 멸망을 당했다고 생각하십시다. 이제 이사야를 통해 하나님의 멧세지가 들립니다. 이 때는 아직 남왕국은 멸망당하기 전이니 남왕국 사람들에게 이 멧세지가 전달됩니다. 남왕국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면서 1절 말씀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볼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저주 받았다고 생각했던 북왕국 땅을 도리어 하나님께서 영화롭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를 듣는 사람들이 누구라고요? 남왕국 사람들입니다. 사실 남왕국 사람들은 늘 노심초사하고 있었습니다. ‘북왕국이 멸망 당했으니 그 다음은 우리가 아닐까?’
그런데 웬걸 하나님께서 북왕국을 영화롭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남왕국도 희망이 있다는 생각을 당연히 하게 됩니다. 그 뿐 아닙니다. 3절,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탈취물을 패전국이 나눕니까, 승전국이 나눕니까? 당연히 승전국입니다. 그렇다면 북왕국은 패전국이 아니라 승전국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탈취물을나누고 있다는 것입니다. 도저히 믿겨지지 않습니다. 정신을 잃고 어리둥절해 있는 남왕국 사람들에게 계속 말씀하십니다. 4절,
“이는 그들이 무겁게 멘 멍에와 그들의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주께서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미디안의 날은 주석가들은 당연히 기드온의 승리의 날이라고 해석합니다. 사사기에 나오는 기드온의 이야기 잘 아실줄 압니다. 처음 기드온 군대는 3만2천명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숫자가 너무 많아서 자기들의 힘으로 승리했다고 착각할까봐 기드온에게 두려워 하는 자들은 떠나게 합니다. 결국 만 명만 남았습니다.
그래도 많다고 생각해서 물 가에 가서 물을 마시게 하고는 손으로 움켜 입에 대고 핥는 자만 데리고 나가라고 합니다. 이에 남은 숫자는 300명입니다.
이 300명으로 웃기는 전쟁을 합니다. 밤중에 횃불과 나팔 소리로 공격을 하니 깜짝 놀라 미디안 군인들은 서로 서로 칼로 죽입니다. 대승을 거둡니다. 이 날이 바로 미디안의 날입니다.
이 것이 거의 500년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500년전에 있었던 이 놀라운 역사가 북왕국에 다시 펼쳐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남왕국은 더 말할나위 없는 승리가 보장되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500년전이면 세종대왕 시절과 비슷합니다. 그 때 있었던 좋은 일들이 새롭게 펼쳐질 것이라는 소식을 들으면 얼마나 흥분하겠습니까?
그런데 이 예언을 듣는 남왕국 사람들은 마음 속에 한 가지 질문이 생겼을줄 압니다. 이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기드온이 미디안 군대를 무찌르기 전에 하나님께서 신기한 싸인을 보여 주신 것을….
저희 집사람이 요즘 자주 드리는 기도가 있습니다. 실은 어느 목사님 가족을 위한 기도입니다. 그 가족이 하나님의 강하신 인도하심이 필요하다고 생각이 되어서 이런 기도를 드리곤 합니다.
“양털 이슬을 보여 주소서.”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미디안과 싸우라고 하니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확인하는 방법을 하나님께 묻습니다. 기드온이 기도합니다. 사사기 6: 37,
“만일 이슬이 양털에만 있고 주변 땅은 마르면 주께서 이미 말씀하신 것 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줄을 내가 알겠나이다.”
그랬더니 정말 이슬이 양털에만 있고 주변 땅은 말라 있었습니다. 그래도 못 믿겠으니 이제는 좀 바꿉니다. 39절,
“내게 이번만 양털로 시험하게 하소서 원하건대 양털만 마르고 그 주변 땅에는 다 이슬이 있게 하옵소서”
다음날 보니 양털만 마르고 그 주변 땅에는 아침 이슬이 있었습니다.
자 이런 기드온의 이야기 미디안의 날의 이야기를 잘 아는 남왕국 사람들은 은근히 어떤 생각이 들었겠습니까?
“우리들에게도 양털 이슬을 보여 주소서.”
이 때 지혜의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양털 이슬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6절 상반절,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여기에 이사야의 아니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가 엿보입니다.
‘한 아기’가 바로 북왕국 남왕국을 비롯 모든 인류를 위한 ‘양털 이슬’이라는 것입니다. 아니 단순한 ‘양털 이슬’이 아닙니다. 6절,
“…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기드온은 양털 이슬의 기적을 보고 믿음으로 나가 싸워서 승리했는데 이제 남왕국 백성들에게는 양털 이슬과는 비교도 안 되는 분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보기에는 연약해 보입니다. 한 아기입니다. 전쟁과는 거리가 멀게 보이는…. 그런데 이 한 아기 안에 무한한 잠재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아기를 보고 있는 자들에게 한 아기가 하실 일을 보여주십니다. 7절,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전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다윗에게 약속하신 모든 것뿐 아니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모든 것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루어질수 밖에 없는데 이사야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기드온은 양털 이슬을 보고 싸움에 나갔지만 이사야는 이스라엘인들에게 더 이상 양털 이슬을 찾지 말고 한 아기를 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 때 하나님의 열심은 세상 가운데 역사한다는 것입니다. 북왕국도 회복되고 남왕국은 더욱 강력한 다윗의 왕조가 세워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이 한 아기가 이미 2천년전에 탄생했음을 믿고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이미 멸망한 북왕국과 같은 처지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언제 멸망당할지 모르는 남왕국과 같은 처지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한민족이나 미국 그리고 인류의 미래에 대해서 회의를 느끼십니까?
한 아기를 생각하십시다. 한 아기께 경배하십시다. 한 아기는 바로 기묘자요 모사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영존하시는 아버지요 평강의 왕이십니다.
처음 소개한 드골은 아마 평생 귀여운 장애인 따님을 생각하면서 군인으로서 정치인으로서 생활했던 것 같습니다. 결국 평생 사랑했던 따님 옆에 묻히셨습니다. 국립묘지를 사양하고….
한편 우리에게는 한 아기가 계십니다. 평생 아기 예수를 사랑하십시다. 놀라운 일이 우리 주위에 일어날 것입니다. 미디안의 날의 연속의 삶을 살 것입니다. 이루어질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열심 때문에….
얼마전 친구 목사가 한국에서 어느 교회에서 설교한 동영상을 보내 왔습니다. 친구라고 보내 주었는데 안 볼수도 없고, 산책하면서 들었습니다.
부흥사가 되어서 설교하였습니다. 들으면서 피식 웃을수 밖에 없었던 순간이 있었습니다. 다음과 같이 설교를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행복하십니다. 저를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복을 받습니다. 모든 일이 잘 됩니다. 행복해집니다. 억울한 사람에게는 기쁨이 되고, 삼대 독자가 손자를 두고….”
한편으로는 웃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도전이 되더라구요.
“나는 저렇게 설교할수 있을까? 저 친구는 무슨 베짱으로 저렇게 큰 소리를 치지…!”
가만 집에 와서 생각해 보니 바로 아기 예수를 만난 사람들의 모습이 아닌가 도전이 되었습니다.
아기 예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남들에게는 뻥처럼 들릴지라도 어쩔수 없는 모습이 나올수 밖에 없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제 친구 목사의 말을 순수하게 받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열심이 임해서 이루게 하실 것이다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 주신 약속입니다. 아브라함을 통해 우리 모두에게 주신 약속입니다. 창세기 12:3,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이것을 우리가 어떻게 믿을수 있을까요? 양털 이슬일까요? 아기 예수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기 예수로 태어나심을 믿는 사람은 어쩌면 제 친구 목사처럼 엉뚱하게 들리는 말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항아리와 횃불과 나팔 소리로 미디안 군대를 무찌른다는 것은 웃기는 일입니다. 이것의 시작은 양털 이슬이었습니다. 하물며 아기 예수의 탄생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열심이 항상 함께 하시지 않으실까요?
말씀을 거둡니다.
나태주 시인이 인생에는 중요한 ‘3여(餘)’가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餘’는 남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까? 하루 중에는 저녁, 일년 중에는 겨울, 일평생 중에는 황혼기를 ‘삼 여’로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곧 하루를 마치는 저녁을 어떻게 보내고, 일년을 마치는 겨울을 어떻게 보내고 일생 중에는 황혼기를 어떻게 보내느냐가 그 삶을 좌우한다는 말씀이셨습니다. 크게 공감하였습니다. 드골은 ‘삼 여’의 지혜를 소유했던 사람 같습니다. 마지막 인생을 귀여운 딸과 함께 잠들기를 원했습니다.
실은 아기예수는 우리들의 ‘삼 여’의 시간에 함께 하시길 원하십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아기예수의 숨소리를 들으면서 잠이 듭니다. 겨울에는 아기 예수의 포근함을 느끼면서 하루 하루를 지냅니다. 인생의 황혼기에는 우리를 위해 흙으로 오신 아기 예수께 감사하며 하루 하루를 지냅니다.
이를 위해 아기 예수가 탄생하셨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