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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마태복음 6:24-34 (2025/1/5)

한 때 미국의 국무장관까지 역임했던 콜린 파월 장군이 있습니다. 그는 군인으로서는 최고의 자리인 합참의장에까지 오른 사람입니다. 잘 아시겠지만 흑인입니다. 그의 삶을 바꾼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대학시절 그로서리 가게에서 일을 하였는데, 퇴근할 무렵에 창고에 콜라박스가 넘어져 주위가 어지럽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보통의 상식으로는 그냥 지나치면 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지 않고 깨끗하게 청소를 하고 갔습니다.이를 주인이 우연히 보고서는 주인이 그의 학창시절을 지나는 동안 든든한 후견인이 되어주었다고 합니다.

그 때 그 일을 계기로 그는 그의 전 인생을 좌우할 모멘텀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누군가 보고 있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는 아주 간결하게 말합니다.

“Someone is watching. Who is someone? Someone is God.”

그는 육군사관학교 곧 웨스트포인트 출신이 아니고 ROTC출신으로서 장군까지 올라갔는데, 항상 누군가가 보고 있다는 이 사상 가운데 최선의 행동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표현이 어떤지 모르겠지만,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눈치를 보는 인생을 살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입니다.

 

새해가 밝았습니다. 올해 우리도 하나님의 눈치를 보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한 해가 되는 여정을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러한 삶이 어떤 삶인지 오늘 본문 말씀은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33절,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사실 콜린 파월은 이 말씀을 따라 일생을 산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방금 드린 이야기가 증명합니다. 그는 지금까지도 존경받는 인물 중에 한 사람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그러면 21세기에 하나님 눈치를 보며 사는 삶은 과연 어떤 삶일까요? 24절,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사실 눈치를 본다는 표현이 좀 불편하게 들리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어떤 사회 조직에서도 우리는 제일 힘 센 사람의 눈치를 보곤 합니다. 감히 말을 건네지는 못하는 대신…. 어떤 면에서 그 분에 대한 위력을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세상에 내려 와 보니 사람들이 하나님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있음을 보신 것 같습니다. 도리어 재물의 위력에 주눅이 들어서 재물을 손에 쥐고 주물럭 주물럭하는 자들의 눈치를 보고 사는 모습을 보신 것 같습니다.

당연히 이 당시는 로마 제국이고 로마 제국에 붙어서 사는 자들이 바로 재물을 주물럭 주물럭 하는 자들임을 보신 것입니다. 이를 보고 주님은 너무도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이는 곧 ‘하나님과 세상 권세를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리라’입니다.

 

자, 그러면 여기서 잠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과 재물을 섬기는 자들에게 어떤 마음이실까요?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은 나중에 나누기로 하고…. 당연히 재물을 섬기는 자들을 향해서는 가슴이 메워오실줄 압니다. 안타까움에 늘 괴로워하실줄 압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25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주님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들은 어느덧 자기도 모르게 목숨보다 음식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몸보다 의복을 더 중요하게 여기면서 생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를 들어서 음식과 의복을 더 중요시 하는 자들을 꾸짖으십니다.

 

첫번째로는 공중의 새를 예를 듭니다. 새들은 농사도 짓지 않고 창고도 없는데 하나님께서 기르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의복에 대해서는 들의 백합화 예를 듭니다.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백합화 보다도 못하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렇게 결론을 내리십시다. 32절,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주님은 어쩌면 모욕적인 말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당시 이방인과 같다는 것은 하나의 욕이었습니다. 주님은 이들에게 이방인들이라고 욕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마음속 깊이 사랑하니까 욕을 퍼부우시는 것입니다.

곧 이들은 이방인과 같고 새와 백합화보다도 못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무슨 근거로 이런 심한 말까지 하실까요?

 

사실 저희 집에는 요즘 애완용 pet이 없습니다. 있다면 뒷마당에 새 먹이 통을 설치해 놓아서 늘 새들이 와서 먹고 가는 모습을 보면서 pet이 없는 공허감을 채워줍니다.

그런데 종종 타운 게시판에 보면 언제부터 언제까지는 가급적 먹이를 주지 말라고 합니다. 새들을 위해서…. 새들이 알아서 먹이를 찾아 먹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그 뜻은 사실 하나님께서 기르시도록 놓아 두라는 것입니다.

 

몇년 동안 새들이 찾아 오는 것을 보면서 느끼는 점이 있습니다. 사시사철 방문하는 새들은 다릅니다. 물론 참새처럼 한결 같이 사시사철 남아 있는 새도 있습니다. 그런 새들은 별로 인기가 없습니다. 시절에 따라 찾아 오는 새들을 더 반기게 되고 그런 새들이 찾아 오면 먹이를 쪼아 먹을 때 놀래지 않게 하기 위해 문도 조심스럽게 열고 닫습니다.

 

한편 뒷 뜰에는 사시사철 여러가지 꽃이 핍니다. 이른 봄에는 크로커스, 수선화, 개나리 등이 피어납니다. 여름에는 민들레 클로바 나팔꽃, 가을에는 국화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가만 보니 한 가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새들을 여러 종류로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각자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American Robin은 봄에 왔다가 여름이 지나면서 중남미로 날아 갑니다. 반대로 눈이 오면 오는 새도 있습니다. junco는 봄에는 추운 곳으로 갔다가 겨울에 뉴잉글랜드로 날아 옵니다. 모두 자기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봄에 크로커스는 항상 크로커스로 피어나고 여름이 되면 고개를 숙입니다. 수선화도 개나리도…. 반면 딸기꽃은 여름에 활짝 피어납니다. 꽃들도 각자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시사철 변할 때마다 뒷마당에는 늘 새로운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나타나는 것을 보면서 감사하며 지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세상에 내려 와서 보니 모든 사람들이 다 똑같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모두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똑같이 염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염려의 추한 꽃을 피우고 걱정의 썩은 열매를 맺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모습은 이방인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한편 이런 염려의 추한 꽃만 피우고 있는 사람들 틈에 주님은 특별한 사람을 만난 것입니다. 콜린 파월이라는 대학생을 보신 것입니다. 이 학생의 삶의 모토를 듣게 된 것입니다.

“Someone is watching. Who is someone? Someone is God.”

그후 주님은 콜린과 함께 동행하시며 놀라운 축복으로 채우시지 않으셨을까요? 끝내 국무장관까지….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으니 한 가지만을 바로 보고 삽니다. 한 가지를 목표로 해서 살아 갑니다. 그 한 가지는 곧 먹을 것과 입을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세상 권력에 굴복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 결과 모두 같은 염려의 추한 꽃과 같은 걱정의 썩은 열매를 맺습니다. 모두 한 이야기의 주인공이 됩니다. 꽃과 열매가 같기 때문입니다.

 

물론 새와 풀들도 한 이야기의 주인공들입니다. 그러나 성격이 다릅니다. 새와 풀들은 종류마다 다른 이야기의 꽃을 피우고 다른 이야기의 열매를 맺힙니다. 참새와 제비는 서로 다릅니다. 개나리와 딸기꽃은 다릅니다. 새들과 풀들은 각자의 다른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주님은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위하여 염려하는 자들은 새와 풀보다도 못한 자들 곧 이방인들과 같다고 질책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요즘도 그렇지 않습니까? 특히 대학교 전공 택할 때 많은 경우 우리 자녀들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잘 해결해 주는 전공을 택하라고 하고 있지 않습니까?

 

Nigeria에서 어릴 때 자라고 미국 유학 와서 작가가 된 Chimamanda Adichie 작가가 있습니다. 유명한 Tedtalk 동영상이 있는데 제목은 ‘Danger of single story’입니다.

미국 유학 와서 기숙사에 룸메이트가 백인 학생이었습니다. 처음 자기가 영어를 하는 것을 보고 놀래더라는 것입니다. 어디서 영어를 배웠냐고 묻기도 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가수가 Maria Carey라고 하니 그럴수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깨닫게 된 것은 힘있는 자들은 약한 자들을 자기들 생각에 맞추어 한 가지 이야기로만 판단하고 평가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 작가도 Nigeria에서 교수 딸로 비교적 부유하게 살았는데, 집에 와서 일하는 소년 가정을 방문하였을 때 본인도 깜짝 놀랐던 것을 회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가정은 가난하여 문화도 없고 어떤 삶의 재미도 없는 늘 먹고 살 것만 걱정하는 가정으로만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소년의 어머니도 그나름대로의 문화인임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인생은 싱글 스토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싱글 스토리로 전락할 때 바로 새보다도 백합화 보다도 못한 인생이 된다는 것입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걱정하며 살 때 어느덧 미숙한 싱글 스토리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 아닐까요? 새들보다 풀 보다도 못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닐까요?

 

반면 멀티플 스토리의 주인공의 삶을 살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바로, 33절,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여기에서 주님을 섬기는 자들은 공중의 새와 들에 피는 꽃과는 또 다른 차원의 존재임을 나타내고 계십니다. 말씀드린대로 젊은 학생 콜린이 장군을 거쳐 국무장관까지 이르게 된 것은 바로 하나님의 눈치를 보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평생 여러 가지 모양으로 변해 가면서 어디서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가 된 것입니다. 그는 멀티플 스토리의 주인공이 되었던 것입니다.

새들과 꽃들은 한 가지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마칩니다. 그러나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자들에게는 여러가지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콜린 장군처럼….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동식물과는 달리 멀리플 스토리의 주인공들로 만드신 것입니다.

 

오늘 신년 주일 예배로 드립니다. 올해 교회 표어를 오늘 말씀으로 정했습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이제는 그야말로 팬데믹에서 온전히 벗어났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팬데믹 동안 세상은 늘 우리들로 하여금 의식주를 걱정하게 하였습니다. 우리들의 마음을 분산시켰습니다. 물론 앞으로도 의식주의 문제는 늘 우리들을 쫓아 다닐줄 압니다.

올해도 우리에게는 늘 두 가지 길이 마련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섬길 것이냐 재물을 섬길 것이냐?

 

재물을 섬길 때 우리는 모두 한 가지 이야기의 주인공이 됩니다. 염려의 꽃과 걱정의 열매의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할 때 우리는 멀티플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시면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아름다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새해를 시작하면서 이런 야무진 꿈에 젖어 보았습니다. 우리 전 교인들이 하나님을 잘 섬겨서 모두가 멀티플 이야기의 주인공이 된다면, 우리 교회를 통해 주님께서 크게 영광 받게 될 것이 아닌가?

 

한편 이런 질문도 하실 분이 계실줄 압니다.

‘멀티플 스토리의 주인공이 되려면 콜린처럼 젊었을 때부터 그의 나라를 구하는 삶을 살아야만 할까요?’

물론 그러면 더욱 좋지만 제 생각에는 멀트플 스토리의 주인공이 되는데는 나이 제한이 없다고 봅니다. 아니 어쩌면 나이가 들수록 더 멀티플 스토리의 주인공의 가능성이 높아질수도 있습니다.

 

사실 유명한 심리학자 에릭 에릭슨은 인간의 심리 발전 단계를 8단계로 나누는데 7번째 단계를 generativity(심리 생식성)이라고 표현합니다.

육신적 자녀를 낳는 나이는 지났지만 도리어 이 때는 심리적 정신적 자녀들을 낳기를 원하는 단계라는 것입니다. 그에 의하면 우리는 나이 들어서 훨씬 많은 생식력을 발휘할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심리 생식성…. 자기가 살았던 삶 특히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하여 산 삶의 열매를 함께 나눌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 모두가 이런 축복의 주인공이 되게 하시려고 주님께서는 한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셨습니다. 주님의 이야기는 십자가라는 이야기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이야기로 인해서 우리 모두는 싱글 스토리에서 멀티플 스토리의 주인공이 된 것입니다.

 

올 한 해 수없이 많은 이야기의 꽃을 피우십시다. 이를 위해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34절,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올 한해 될 일을 예상하고 미리 염려하지 마십시다. 올 한해 될 궂은 일은 하나님께서 만드시는 2025년이 우리 대신 염려 할 것입니다. 우리는 대신 소망 중에 즐거워 하십시다. 왜냐하면 미래를 꽤뚫으시는 분은 하나님뿐이시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지난주에 23년전에 타주로 이사가신 교우부부가 처음으로 다시 방문 오셨습니다. 그 때 속했던 구역 분들을 만나고 싶으셨는데 실은 그 가정은 1부 예배를 마치시고 댁에서 찬양대 초청 모임이 있으셔서 이미 귀가를 하신 참이었습니다. 어쩔수 없이 전화로만 안부를 묻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옆에서 두 가정의 대화를 듣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방문하신 교우님이 말하시기를, “저도 이젠 60이 넘었는데요….”

저희 교회를 떠날 때 37세였으면 당연히 60세가 넘게 되어 있습니다. 저도 그 말을 들으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제 기억에는 37살의 청년의 모습만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옆에 있던 부인이 말하기를…,

“60세, 아유, 징그러워…!” 그후로 종종 제 머리에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60세가 징그럽다면 나는…?”

감사하게도 오늘 말씀 준비를 하면서 드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목숨과 몸을 소중히 여기신다는데,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60세가 넘은 교우에게 무엇이라고 하실까?’

금방 든 생각은,

“Cute!”

 

올해 60세가 되시는 교우님들, 곧 환갑을 맞이하시는 교우님들, 환갑을 축하드립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생신날 아침 제일 먼저 여러분에게 하나님은 축하를 하시지 않으실까요?

“Cute!”

60세를 맞이하여 여러분의 목숨과 몸을 통해서 펼쳐질 아름다운 귀여운 이야기들을 기대하시면서….

 

물론 60세 이상 되신 분들을 향해서도 “Cute!”말씀하시는 하나님께서 그 이하 분들에게는 어떠실까요?

“Super cute!”?

 

하나님께서는 목숨과 몸을 갖고 있는 모든 사람을 cute하게 생각하십니다. 왜냐하면 이들을 통해서 당신의 나라와 당신의 의를 구하는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새롭게 쓰여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젊었을 때부터 멀티플 스토리의 주인공이 된다면 훗날 정말로 아름다운 멀티플 이야기들이 꽃 피우지 않을까요?

 

교우 여러분,

2025년도를 염려와 걱정으로 채우게 하시려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아름다운 이야기로 장식하게 하기 위함이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새해를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주님은 올해도 우리들을 통해 펼쳐질 아름다운 이야기를 기다리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졸졸 따라 다니십니다. 우리들의 이야기에 젖어드시고 싶으셔서….

 

한편 더욱 아름다운 이야기를 쓸수 있도록 우리 모두에게 또 약속하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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