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소천받으신,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말씀 개혁에 앞장서셨고 또 많은 책을 펴내서 현대 교계에 큰 선한 영향을 주신 뉴욕 Redeemer 교회의 Tim Keller목사님이 계십니다. 현재는 뉴욕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는 종종 설교시 가끔Redeemer교회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흥미롭게 소개하였다고 합니다. 먼저 Redeemer 교회가 뉴욕에 만들어진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습니다. 회중은 모두 감사하다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목사님은 뉴욕에 교회를 개척하게 된 경위를 설명합니다.
부인과 함께 뉴욕에 개척을 하게 된 이유는 교회 개척을 장려하는 장로교 교단(PCA) 덕분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장로교 교단에 속하게 된 이유는 실은 신학교 마지막 학기에 만난 한 교수님 덕분이라고 이어갑니다.
그 교수님이 그 신학교에 오기 위해서는 오랜 기간 기다려야만 했다고 합니다. 그 분은 영국인이기 때문에 비자 문제가 해결이 안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가지 행정상 문제로 계속 비자가 나오지 않다가, 드디어 비자가 나와서 팀 켈러 목사님이 마지막 학기에 그 교수님에게 배우게 된 것입니다. 어떻게 비자가 나왔을까요? 당시 신학생 중 현직 대통령의 아들이 한 명 있었습니다. 그를 통해 행정상 문제를 알아봐준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학생이 대통령의 아들이 되었을까요? Watergate사건으로 Richard Nixon대통령이 사임을 한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Watergate사건이 밝혀지게 되었을까요? 그 당시 백악관의 경비원이 우연히 문고리가 채 잠겨지지 않은 사무실을 발견한 것이고, 이에 그 안에서 일어나는 대화를 듣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결국 그 결과로 대통령의 아들이 신학생이 되었고, 비자 문제가 신속하게 해결되어서 마지막 학기에 그 교수님 강의를 듣고, 팀 켈러 목사님이 뉴욕에서 교회 개척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Watergate로 미국이 혼란 가운데 있을 때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역사하신 것입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찾는 자들을 위하여 세상 모든 역사를 사용한 것입니다. 이들이 진정 역사의 주인공이 되었던 것입니다. 뉴욕에 훌륭한 교회가 개척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역사가 최근에만 일어나고 있을까요?
지난주부터 다니엘서 강해를 시작하였습니다. 성경에 계시록이라고 생각되는 책이 구약과 신약에 한 권씩 있습니다. 신약에서는 물론 요한계시록입니다. 구약에서는 다니엘서입니다. 요한계시록은 당연히 계시록이겠지요. 그러나 다니엘서를 계시록이라고 하니 좀 의아하게 생각하실 줄 압니다. 일단 그렇게 믿고 계속 강해 말씀에 경청해주시기 바랍니다.
계시록의 특징을 크게 두 가지만 말씀드리자면, 첫째로, 신비스러운 장래 일에 대해서 많이 언급합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해서 언급되어 있는데, 앞으로 올 마지막 세상에 대해서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다니엘서에도 곳곳에 장래 일에 대해서 언급이 되어있습니다.
두번째 특징으로는, 상징어를 많이 사용합니다. 대표적으로 요한계시록에 보면 666이라든지 ‘십사만 사천’등 상징어가 많이 사용됩니다. 상징어를 많이 사용하기에 해석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죄송하지만 저도 요한계시록 강해를 몇 년 전에 했었는데 전부를 못하고 처음에 나오는 일곱 교회에 대해서만 강해 설교를 드렸습니다. 그래도 다행한 것은 장로교의 시조라고 여겨지는 John Calvin도 신·구약 전체를 주석했는데 단 하나를 제외하였습니다. 요한계시록. 이유는 많은 상징어를 풀어야 했기 때문일 줄 압니다.
사실 지난번 전도서도 강해하길 주저했지만 성령께서 지시하신다고 확신하고 강해 설교를 시작했었는데, 이번에도 마음속으로는 주저했습니다. 실은, 다니엘서는 단순히 다니엘과 친구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상징어들과 함께 앞뒤 문단들이 좀 헷갈리는 애매한 구성으로 되어 있습니다. 물론 신비스러운 미래의 이야기를 하니 어쩔 수 없을 줄 압니다. 그래서 앞으로 한 주 한 주 기도하는 마음으로 겸손하게 하나님의 말씀인 다니엘서 강해를 계속하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31절부터 삼았지만 실은 2장 전체가 되어야 합니다. 먼저 지난주 말씀을 요약해 드리면, 다니엘과 세 친구는 바벨론 첫번째 포로 행렬에 속해서 바벨론으로 잡혀옵니다. 다행히 느부갓네살 왕이 이 네 명을 특별교육을 시킵니다.
그러나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는 바벨론 포로가 될 것을 이미 내다 보시고 요시야 왕을 통해서 말씀 개혁 운동을 일으키신 것입니다. 이 때 말씀에 푹 빠지게 된 사람들이 바로 다니엘과 세 친구들입니다.
한편 말씀에 젖어 사는 소년들이 환난을 당하자 도리어 기적의 소년들이 되어갔던 것입니다. 채소만 먹어도 왕의 음식을 먹는 소년들보다 더욱 윤택해졌고, 그뿐 아니라 학식과 지혜가 뛰어난 지혜자들이 된 것입니다. 이 일이 느부갓네살 왕 아래에서의 1년차에 되어진 일입니다.
이제 느부갓네살이 통치한지 2년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왕에게 이상한 꿈을 보여주십니다. 너무 고통스러워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결국 왕은 바벨론의 술객들과 점쟁이들을 불러서 자기의 번민을 토로합니다. 그랬더니 술객들은 꿈을 알려만 주시면 해석해드리겠다고 아룁니다. 사실, 당시 이들은 말이 술객이지 모두 지식인들이었고, 이들은 수많은 꿈과 그 상징들을 연구한 도사들이기에 자신만만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왕은 이 지식인들보다 한 수 더 위입니다. 아주 지혜로운 왕입니다. 도리어 자기가 꾼 꿈이 무엇인지 말한 후 해석하라고 합니다. 꿈을 알려 주면 적당히 그럴싸하게 대답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난리가 났습니다. 자기들로서는 그런 실력까지 없다고 하자 왕은 바벨론의 모든 지혜자들을 죽이라고 합니다. 이 소식을 듣고 다니엘이 근위대장에게 왕께서 시간을 주시면 해석을 알려 드리겠다고 전합니다. 그리고는 17-18절,
“이에 다니엘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그 친구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에게 그 일을 알리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이 은밀한 일에 대하여 불쌍히 여기사 다니엘과 친구들이 바벨론의 다른 지혜자들과 함께 죽임을 당하지 않게 하시기를 그들로 하여금 구하게 하니라.”
다니엘은 친구들과 합심기도를 시작합니다. 물론 함께 있으면 오해를 받을지 모르니 각자 방에서 기도를 드립니다. 누구에게 드릴까요?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제가 당연한 말을 하는 것처럼 들릴텐데, 기도를 하면 당연히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하지 다른 신에게 기도할까 의아해 하실줄 아는데, 이를 강조하는 이유는, 실은 다니엘과 세 친구들의 이름 때문입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이 새로운 바벨론 이름을 받았다고 지난주 나눴습니다. 그들의 이름의 뜻은 바벨론의 신들의 이름들이 포함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다니엘의 뜻은 ‘God is my judge’(하나님은 나의 심판주)입니다. 그런데 바벨론 이름은 벨드사살인데 이 뜻은 ‘Bel protect the prince’. ‘Bel’은 잘 아시는 바알인데 이는 바벨론의 최고의 신 Marduk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환관장이 다니엘을 ‘벨드사살’이라고 부를 때 다니엘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이는 기도문과 같습니다. ‘바알이여 왕자를 보호하소서’. 정말로 듣기 싫었을줄 압니다.
저희 아버님께서 생전에 자서전을 쓰셨는데 젊은 시절은 꼬박 일제 강점기에서 지내셨습니다. 그런데 가슴 아픈 것은 당연히 아버님도 일본 이름이 있으셨을텐데 전혀 당신의 일본 이름을 언급 안 하셨습니다. 이제는 도저히 알길도 없습니다. 그래도 ‘천황신이여 왕자를 보호하소서’라는 이름은 결코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여튼 아버님은 그 이름을 결코 남기지 않으셨습니다. 이유는 아버님 안에는 두 가지 이름이 늘 싸웠던 것 같습니다. 결국 그토록 싫었던 일본 이름은 언급 조차하시길 거부하신 것입니다.
곧 이처럼 두 하나님이 다니엘 안에서 격돌한 것입니다. 결국 위기 때 다니엘은 누구에게 향하고 있다고요?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바벨론 왕은 이를 방해하려고 이들에게 바벨론 신의 이름을 지어준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극한 상황이 되었을 때 다니엘과 세 친구는 자기들의 하나님께 아뢰는 것입니다.
결과는, 하나님께서 그 밤에 환상으로 느부갓네살이 꾼 꿈을 보여 주십니다. 그리고 해석까지…. 그로 인해 다니엘과 세 친구는 높은 지위를 얻습니다. 이들로 인해서 바벨론의 모든 지혜자들도 목숨을 건집니다.
자 그러면 어떻게 다니엘은 이런 왕의 꿈까지 보게되고 해석하게 되었을까요? 지난주에는 다니엘과 친구들이 기적의 소년들이 될수 있었던 것은 율법 곧 말씀을 사랑하였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다니엘서 2장을 통해서 알수 있는 것은 이들은 기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무릎의 사람들이었습니다. 합심기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말씀과 기도가 만날 때 그 어떤 것도 이기게 됩니다.
이제 하나님의 응답을 받은 다니엘은 왕 앞에 나가서 아룁니다. 31-33절,
“왕이여 왕이 한 큰 신상을 보셨나이다. 그 신상이 왕의 앞에 섰는데 크고 광채가 매우 찬란하며 그 모양이 심히 두려우니 그 우상의 머리는 순금이요 가슴과 두 팔은 은이요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요 그 종아리는 쇠요 그 발은 얼마는 쇠요 얼마는 진흙이었나이다.”
사실 이들에게는 신상이 아주 익숙해 져 있었습니다. 늘 마둑의 신상을 보아 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둑과는 다른데 마둑은 위에서 아래까지 모두 금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왕이 본 신상은 위에서 부터 차례로 달라집니다. 금에서 은으로 그리고 구리로 마지막에는 쇠와 진흙으로….
그런데 신기한 장면이 이어집니다. 34절,
“또 왕이 보신즉 손대지 아니한 돌이 나와서 신상의 쇠와 진흙의 발을 쳐서 부서뜨리매.”
손대지 아니한 신비한 돌이 나타나 제일 아래 다리 부위를 이루고 있는 쇠와 진흙으로 만들어진 다리 부위를 쳐서 부서뜨립니다. 그러면서, 35절,
“그 때에 쇠와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다 부서져 여름 타작 마당의 겨 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 곳이 없었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나이다.”
더 놀라운 것은 다리 위를 구성하고 있던 부위들도 겨 같이 되어 온데간데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반면 손 대지 않은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여 진 것을 본 것입니다.
이에 다니엘은 결론을 내립니다. 앞으로 계속 강대국들이 차례로 나타날 것이지만 언젠가 손대지 않은 돌이 나타나서 모든 강대국들이 해 놓은 자취를 다 없앨 것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금, 은, 구리, 쇠와 진흙에 대해서 많은 신학자들이 바벨론부터 시작해서 페르샤 그리스 로마 그리고 현재라는 해석을 합니다만 오늘 그것까지 나눌 시간은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세상 모든 강대국들의 모든 역사는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손 대지 않은 돌로 이루어지는 영원한 나라 새하늘과 새 땅이 도래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다니엘의 놀라운 해석을 왕은 듣고 왕은 어떻게 반응하죠? 세상의 모든 역사는 물거품으로 돌아 가니 영원한 세계를 사모하게 되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대신 다니엘과 세 친구가 자기 왕국에 쓸모 있다고 생각해서 바벨론의 높은 지혜자로 삼아서 바벨론의 정치를 맡깁니다.
자,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이런 꿈을 느부갓네살에게 주셨을까요? 이 꿈을 꾸고 해석을 들은 느부갓네살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돌아 오지 않았습니다. 이로서 알수 있는 것은 이 꿈은 다니엘과 세 친구와 함께 포로로 잡혀 온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말씀에 심취했던 사람들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다니엘은 놀라운 것을 깨닫게 되었을줄 압니다.
이때까지 아직 구약은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거의 3/4정도는 완성되었다고 볼수 있습니다. 물론 모세오경부터 다윗의 시편까지 많은 구약은 완성이 되었습니다.
다니엘은 이 환상을 통해서 그동안 배워 왔던 율법서를 비롯 자기가 알고 있었던 모든 구약이 하나의 퍼즐이 되어서 주루룩 맞아 떨어지는 것을 체험한 것입니다.
마지막 퍼즐은 바로 ‘손대지 않은 돌’이었습니다. 손 대지 않은 돌이 나타남과 더불어 온 인류 역사는 정점을 찍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동안 배운 말씀은 모두 손 대지 않은 돌로 향하고 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제 자기가 보고 깨달은 이것을 기록함으로서 후세대들도 자기 처럼 어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며 끝까지 소망을 잃지 않게 하는 위대한 민족이 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곧 다니엘서는 포로로 잡혀온 이스라엘인들뿐만 아니라 오고가는 세대에게 소망의 소중함을 알려주는 책입니다. 언젠가 손 대지 않은 돌이 온 세상에 태산처럼 가득차게 될 것을 확신하는 가운데 매일 새로운 꿈을 꾸는 소망을 주는 책인 것입니다.
만일 다니엘이 말씀은 잘 알고 있는데 무릎 꿇는 일을 게을리 했다고 가정하십니다. 바벨론 사람들이 매일 같이 자기 이름을 부를 때 이를 이겨 낼수 있었을까요?
“벨드사살, 벨드사살” “바알이여 왕자를 보호하소서. 바알이여 왕자를 보호하소서.”
교우 여러분,
우리가 어릴 때부터 말씀을 배웠고 지금도 열심히 말씀을 읽고 배운다고 가정하십시다. 그런데 기도를 게을리 할 때 우리의 귀에 세상 신들은 속삭이지 않을까요?
“바알이여 아무개를 보호하소서. 보호하소서.”
반면 우리가 말씀과 함께 기도의 무릎을 매일 있는 처소에서 꿇는다면 우리는 보게 될 것입니다. 손 대지 않은 돌이 온 세상에 언젠가 태산을 이루게 되는 것을….
지금도 세상은 금, 은, 구리, 쇠와 진흙의 세상 같지만 더 놀라운 분이 주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분은 바로 손 대지 않은 돌이십니다. 언젠가 다시 오실 주님이십니다.
말씀과 기도의 사람들은 지금도 일하시는 손 대지 않은 돌의 역사를 체험합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 왕들이 하는 일들로 인하여 좌절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놀라운 미래를 꿈꾸며 늘 소망 중에 즐거워합니다.
말씀과 기도로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십시다. 다니엘처럼 벨드사살이 되길 거부하십시다. 바알의 축복을 거부하십시다. 대신 “God is my judge.”
이 고백을 하는 자들이 바로 ‘손 대지 않은 돌’의 증인들입니다. 이들이 바로 오늘의 교회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손 대지 않은 돌은 영광스러운 교회를 통하여 역사하십니다. 이 사명을 감당하도록 저희 교회를 수많은 우상으로 둘러 쌓여 있는 이 보스톤 한 복판에 세우셨습니다. 우리를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셨습니다.
주님은 ‘손대지 않은 돌’이고 우리는 주님의 몸입니다. 오늘 우리는 아름다운 교회가 되어 손대지 않은 돌이신 주님게 영광을 돌리는 예배의 주인공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정체성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최근 이스라엘과 하마스 전쟁이 휴전이 되었고 남은 인질 내지 포로들을 교환하는 오랜만에 좋은 소식이 들립니다.
어느 기자가 오래전 하마스의 인질이 되었다가 풀려 나온 분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당신은 이미 풀려 나왔는데 지금 심정은 어떻습니까?”
“마지막 인질이 풀려 나올 때까지 저는 계속 인질로 남아 있는 심정입니다.”
이 이야기를 듣자 마자 주님의 마음이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세상 모든 죄인이 구원을 받을 때까지 죄인들과 함께 아파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이 주님께서는 아픈 마음만 갖고 계신 분이 아닙니다. 손 대지 아니한 돌이 되어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 세상의 어떤 권세도 사용하시는 분이십니다. 끝내 그들을 무너뜨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위대한 일을 말씀과 기도의 사람들과 함께 이루어 가시길 원하십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과 함께 일하셨던 것처럼….
이처럼 주님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미천하게 보이는 교회를 통하여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교회는 바로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입니다.
올 한해 세초부터 세말까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그리스도의 영광의 도구가 되십시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 때에 쇠와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다 부서져 여름 타작 마당의 겨 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 곳이 없었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