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m Keller목사님이 소개하는 이야기입니다. 두 사람이 잡혀서 감옥에 가게 되었습니다. 감옥에 갇히기 전 한 사람은 아내와 자식이 모두 죽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반면 다른 사람은 아내와 자녀가 살아 있고 자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일 년도 채 지나지 않아 첫번째 사람은 몸이 쇠약해지더니 감옥에서 세상을 떠납니다. 두번째 사람은 끝까지 버텨서 10년 후 석방되어 나갑니다.
켈러 목사님은 이 이야기를 통해 이렇게 결론을 짓습니다. 미래가 현재의 삶을 결정짓는다고…. 곧 희망이 오늘이라는 시간에 가장 중요한 원동력이라는 뜻일 줄 압니다.
여러분은 요즘 어떤 희망이 여러분의 삶의 원동력이 되고 있습니까? 오늘도 다니엘서 강해를 계속합니다. 포로생활을 하는 다니엘과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어떤 희망이 있었을까요?
오늘은 4장 말씀을 나눕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두번째 꿈을 꾸었습니다. 이 번에는 지혜자들에게 자기의 꿈을 먼저 말하라 하지 않고 먼저 들려줍니다. 그리고는 해석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무도 해석을 못합니다. 뒤늦게 다니엘이 왕궁에 들어 오는데, 왕은 다시 다니엘에게 꿈을 들려줍니다.
꿈은 다음과 같습니다. 왕은 꿈에서 땅의 중앙에 곧 온 세계의 한 가운데 자라는 큰 나무를 봅니다. 나무는 결국 커져서 하늘에 닿았습니다. 세계 어디서도 모두 그 나무를 볼수 있게 커졌습니다. 요즘 전 세계가 어디서나 미국을 다 볼 수 있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그 나무로 말미암아 전 세계가 혜택을 받습니다.
그런데 한 순찰자, 즉 한 거룩한 자가 하늘에서 내려와서 소리를 지릅니다. 나무를 베고 혜택을 받는 모든 짐승이나 새들을 쫓아내라고…. 그러나 뿌리의 그루터기는 남겨둔 채 쇠와 놋줄로 동이라고…. 그런데 정말로 듣기 원하지 않는 말을 꿈에서 듣습니다. 4:16절,
“또 그 마음은 변하여 사람의 마음 같지 아니하고 짐승의 마음을 받아 일곱 때를 지내리라.”
어리둥절한 채 이 꿈을 말하니 다니엘은 잠시 놀랍니다. 그러면서 어쩔 수 없이 해석합니다. 한 마디로 세계가 두려워하는 최강대국이 되지만 언젠가 왕좌에서 쫓겨나서 광야에서 들짐승과 함께 살게 될 것을….
다니엘은 기간을 말하는데 ‘일곱 때를’ 이렇게 지낼 것을 말합니다. 제가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계시록에는 상징어를 많이 사용하는데 이 ‘일곱 때’도 당연히 상징어입니다. 그냥 오늘은 편하게 이렇게 해석해도 좋을 줄 압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고통의 기간이 다 찬 후’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해석은 그 다음에 나옵니다. 26절,
“또 그들이 그 나무뿌리의 그루터기를 남겨 두라 하였은즉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줄을 왕이 깨달은 후에야 왕의 나라가 견고하리이다.”
곧 하나님께서 정하신 저주의 시간이 지나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진 후 다시 왕의 나라는 더욱 견고해 질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한편 꼬리표를 하나 답니다. 27절,
“그런즉 왕이여 내가 아뢰는 것을 받으시고 공의를 행함으로 죄를 사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김으로 죄악을 사하소서 그리하시면 왕의 평안함이 혹시 장구하리이다 하니라.”
곧 바벨론 왕국은 견고해질 테지만 그 후에는 왕이 얼마나 공의를 행하는지에 따라서 왕이 만수무강할지가 열려져 있다고 해석을 합니다.
여기까지가 오늘 본문 말씀 전에 나오는 느부갓네살의 두번째 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계속해서 오늘 본문 말씀으로 이어집니다. 28절,
“이 모든 일이 다 나 느부갓네살 왕에게 임하였느니라.”
사실 다니엘 4장의 특징 중 하나는 주어가 ‘나 느부갓네살’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지금 느부갓네살은 자기가 꾼 꿈의 해석대로 자신에게 임한 것을 1인칭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친근하게 들립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그는 꿈을 꾼지 12 달이 지나서 바벨론 왕궁 지붕을 거닐고 있었습니다. 지붕에서 저 멀리 보이는 모든 땅이 다 자신이 이룩한 업적이라고 자만감에 가득찼던 것 같습니다. 마음에 있는 자만감이 마음에만 머물러 있겠습니까? 왕은 고백합니다. 30절,
“나 왕이 말하여 이르되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으로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 하였더니.”
스스로 이런 고백을 하였더니, 31절,
“이 말이 아직도 나 왕의 입에 있을 때에 하늘에서 소리가 내려 이르되 느부갓네살 왕아 네게 말하노니 나라의 왕위가 네게서 떠났느니라.”
교만이 하늘을 찔렀더니 그 순간 왕위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처참하게 되었던지 그는 고백합니다. 33절,
“바로 그 때에 이 일이 나 느부갓네살에게 응하므로 내가 사람에게 쫓겨나서 소처럼 풀을 먹으며 몸이 하늘 이슬에 젖고 머리털이 독수리털과 같이 자랐고 손톱은 새 발톱과 같이 되었더라.”
짐승처럼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얼마 동안 짐승처럼 되었을까요? 일곱 때…. 하나님이 정하신 분량이 다 찰 때까지…. 이 때 느부갓네살은 어떻게 할까요? 34절,
“그 기한이 차매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을 우러러보았더니 내 총명이 다시 내게로 돌아온지라 이에 내가 지극히 높으신 이에게 감사하며 영생하시는 이를 찬양하고 경배하였나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 나라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짐승처럼 지내야 하는 시간이 다 찼을 때 드디어 하늘을 우러러보게 됩니다. 그리고는 맑은 정신을 회복하여서 지극히 높으신 이에게 감사드렸음을 왕은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36절,
“그 때에 내 총명이 내게로 돌아왔고 또 내 나라의 영광에 대하여도 내 위엄과 광명이 내게로 돌아 왔고 또 나의 모사들과 관원들이 내게 찾아오니 내가 내 나라에서 다시 세움을 받고 또 지극한 위세가 내게 더하였느니라.”
전보다 더 견고한 나라가 되었고 더 견고한 왕위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왕은 모든 사람들에게 선포합니다. 37절,
“그러므로 지금 나 느부갓네살은 하늘의 왕을 찬양하며 칭송하며 경배하노니 그의 일이 다 진실하고 그의 행하심이 의로우시므로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그가 능히 낮추심이라.”
느부갓네살은 자신은 세상에서 가장 큰 나라의 왕이지만 더 크고 지극히 높으신 왕이 있음을 고백하며 그를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교만한 자들을 그는 끝까지 찾아가서 낮추신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는 정말로 놀라운 고백입니다.
한 마디로 다니엘서는 느부갓네살 왕을 전화위복의 행복한 위대한 왕으로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다른 성경에서는 느부갓네살은 예루살렘 성을 파괴하고 많은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 온 난폭한 왕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전혀 정반대의 모습을 봅니다. 느부갓네살이 교만했지만 하나님의 손 안에서 겸손해졌고 다시 왕위에 올라 나라를 굳세게 하였을 뿐 아니라 최고의 신앙인이 되어서 최고의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실은 느부갓네살의 이야기는 여기가 마지막입니다. 5장부터는 다른 왕이 등장합니다. 다니엘서 기자는 가장 좋은 내용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포로로 잡아 온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이야기를 마치고 있는 것입니다.
자, 이 때 바벨론에 잡혀온 이스라엘 포로들은 다니엘의 이 이야기를 듣고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우선 다니엘이 느부갓네살의 두 번째 꿈을 해석한 시기가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느부갓네살이 유다에게 행한 포악한 일들을 잠시 나열해드리겠습니다.
1차 바벨론 포로는 BC 605년입니다. 이 때 다니엘과 세 친구가 잡혀옵니다. 8년후 곧 BC 597년에 두번째 포로를 잡아옵니다. 이 때는 포로뿐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의 모두 성스러운 기구도 탈취해 옵니다. 그리고 11년 후 BC 586년에 유다 마지막 왕 시드기야를 잡아옴으로 유다가 완전히 멸망합니다.
이 때 시드기야의 아들들을 시드기야가 보는 앞에서 죽입니다. 한편 시드기야의 눈을 빼기도 합니다. 포악이 극을 달한 것입니다. 이런 비참한 역사는 유다가 완전히 멸망하기까지 첫번째 포로부터 시작해서 20년간 진행된 셈입니다. 곧 다니엘서에 나오는 느부갓네살의 이야기는 다분히 이 20년 동안에 있었던 이야기로 생각하면 무난합니다.
자, 그러면 지난 20년간 그토록 유다를 괴롭혔고 또 괴롭히고 있는 느부갓네살이 꿈을 꾸었고 이 꿈을 다니엘이 해석해준 것입니다. 유대인들 같으면 이를 어떻게 소화할 수 있었을까요?
두 그룹으로 나뉘어졌을 줄 압니다. 한 그룹은 절대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황폐해진 예루살렘 성과 성전 그리고 피해받은 수많은 동족들을 생각하면서…. 그런데 그 중에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었을 줄 압니다. 꿈을 해석한 다니엘이 받아들이고 있는 것 처럼….
그러면 다니엘은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요? 여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느부갓네살이 들짐승과 같이 되어 있었던 시간입니다. 곧 ‘일곱 때’입니다. 이 시간이 지나서 느부갓네살은 다시 왕권을 회복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높이는 자가 되었습니다.
다니엘은 보았던 것입니다. 일곱 때의 시간 속에 하나님의 아들이 함께 하셨다는 것입니다. 심판의 시간 저주의 시간에 앞으로 오실 그리스도가 함께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한 가지 이유 곧 가장 비참한 인간의 시간에 하나님의 아들이 함께하신다는 이유로 시간이 다 찼을 때 느부갓네살은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두 차례 하나님의 아들이 다니엘서에 등장했습니다. 첫번째로는 산에서 손대지 아니한 돌이 나타나서 신상을 쳐부섰습니다. 바로 이 돌이 메시야이십니다. 두 번째로는 세 친구가 풀무불 속에서 이미 와 계신 하나님의 아들을 만난 것입니다.
이번에는 특별히 이미지로는 보여지지 않지만 포악한 느부갓네살 왕이 일곱 때를 지난 후 새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분명 하나님의 아들이 일곱 때의 역사 속에 함께 하셨기에 획기적인 반전의 계기가 되었음을 알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느부갓네살이 감당해야 할 모든 고통의 시간에 함께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니엘이 느부갓네살의 꿈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요인인 것입니다. 지혜의 다니엘은 이를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았을 줄 압니다. 그러니 다니엘과 같은 지혜로운 유다인들도 비록 느부갓네살의 난폭함은 너무도 안타깝지만 이를 뒤집고도 남는 하나님의 아들이 함께 하시는 일곱 때를 받아들이기에 이들도 감격적으로 그의 꿈을 받아들이게 되었을 줄 압니다.
제가 이 꿈에 대해서 두 그룹이 있을 것이라 말씀드렸는데, ‘일곱 때’의 깊은 뜻을 간과하는 사람들은 도리어 느부갓네살에 대해서 좋게 평가하는 사람들에게 바보들이라고 생각했을 줄 압니다. 현실을 파악하지 못하는 바보와 같은 사람들이라고….
반면 이 꿈을 받아들이는 자들에게는 놀라운 축복이 따라옵니다. 인류의 역사에 대한 놀라운 희망을 발견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놀라운 미래를 보장받게 됩니다. 이 꿈을 받아들이는 자들은 자신의 삶과 가족의 삶에도 엄청난 미래가 보장되어 있음을 믿게 됩니다. 결국 자신의 삶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삶에도 무한한 축복의 세계가 열려있음을 보게 됩니다. 세상 현실을 모르는 무지한 바보들이라는 평을 한편으로는 받게 되지만….
이들이 이 꿈을 받아들이는 이유는 바로 이들의 일곱 때의 신비를 믿기 때문입니다. 일곱 때의 신비를 믿는 자들은 세상적으로는 바보들이 되는 것입니다.
실은 다니엘서에 대해서 책을 쓰신 분이 있는데 이 부분을 설명하면서 한 가지 질문을 제기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다니엘은 이처럼 느부갓네살을 높이고 있는데 과연 하늘 나라에 가면 느부갓네살을 만날수 있을까?’
그의 숨은 의도는 당연히 느부갓네살은 구원을 못 받았을거라는 전제로 이런 질문을 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결코 느부갓네살을 천국에 들어가지 못했다라고 단언하지는 않습니다. 지혜롭게도….
그런데 다니엘이 우리들에게 주는 메시지는, 실제로 하나님 앞에서 느부갓네살이 구원을 받았고 바벨론이 축복을 받고 못 받고는 우리 상관할 바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아니 꼭 집어서 다니엘 자신에게 원하시는 것이 있었습니다. 거룩한 낭비의 주인공이 되라는 것입니다.
곧 우리는 느부갓네살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자가 아니었을지라도 같이 인간된 우리는 그를 최고의 인간 느부갓네살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천국에서 하나님 앞에서 찬양을 그 누구보다도 멋지게 드리고 있는 느부갓네살이라고 생각하고 존경하라는 것입니다. 만일 그가 천국에 못 들어 간다고 할지라도…. 확실한 것은 주님이 그와 함께 일곱 때를 고통 중에 지내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거룩한 낭비의 주인공들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바보들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이 다니엘을 장수하게 만들었습니다. 1: 21,
“다니엘은 고레스 왕 원년까지 있으니라.”
다니엘은 바벨론 왕국보다 더 오래 살았습니다. 바벨론의 멸망을 보았습니다. 대충 다니엘은 포로로 잡혀 온 후 최소 70년은 산 것입니다. 거룩한 낭비의 주인공으로 살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자신의 최고의 기대와 생각을 온 이웃과 이웃 나라에 퍼 주는 바보로 살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러니 결코 거룩한 낭비는 낭비가 아닙니다.
우리가 만일 거룩한 낭비의 삶을 살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낭비입니다. 하나님 바보가 되어서 다니엘처럼 살 때 우리는 최고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느부갓네살을 분석하는데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습니다. 천벌을 받을 그를 높이는데 시간을 낭비하였습니다. 거룩한 낭비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장수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거룩한 낭비의 주인공이 되십시다.
말씀을 거둡니다.
벌써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저희 대학 동기들의 카톡방이 있습니다. 종교와 정치 이야기는 하지 말자고 하면서 시작되었지만 그래도 가끔 종교 이야기가 흘러 나옵니다. 지금도 늘 마음에 남아 있는 내용은, 도저히 기독교인들은 이해가 안 된다는 글들이 있습니다. 물론 드물지만…. 몇 명 독실한 크리스천 친구들도 있지만 한 두 명이 조금 답변을 할 뿐입니다. 그런 이야기가 오고 갈 때면 소수의 바보들이 된 느낌을 받습니다. 최근 기왕 최고의 바보가 되자는 생각과 함께 이런 생각을 종종 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하늘나라에 가면 거룩한 낭비를 한 주인공들이 축제를 벌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요한계시록 7: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거룩한 낭비의 주인공들이 모든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셀 수 없이 모여 주님을 찬양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들이 이런 찬양을 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들과 함께 일곱 때를 같이 지내셨습니다.
이중에 느부갓네살이 있지 않을까요? 저는 저의 친구들의 얼굴도 상상해 봅니다. 오늘도 우리 주변의 친지들의 일곱 때에 늘 함께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바보들입니다. 바보 다니엘의 뒤를 이어 우리도 거룩한 낭비의 주인공이 되어서 세상 사람들의 위대한 미래를 꿈꾸며 바보의 길을 걸어 가십시다. 우리가 아는 모든 사람들이 바로 어린 양 앞에 서서 찬양을 드리고 있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나 느부갓네살은 하늘의 왕을 찬양하며 칭송하며 경배하노니 그의 일이 다 진실하고 그의 행하심이 의로우시므로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그가 능히 낮추심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