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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하던 대로…” 다니엘 6:10-18 (2025/3/9)

제가 약 40년전에 미국으로 이민 온 셈인데 처음 몇 개월은 저희 누님댁에서 살았습니다. 그 당시만해도 컴퓨터가 일반화되지 않은 때라서 우편물이 많이 왔습니다. 저희 누님은 우편물 중에 제가 보지 않길 바라는 것들을 재빨리 없애려고 애쓰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매번 그럴수가 없었습니다. 어떤 우편물이었기에 누님은 제가 보길 원치 않았을까요?

 

제가 한국에 살 때 이미 남다른 신앙을 갖고 있다는 것을 잘 아는 누님은 제 눈에서 자선단체에서 보내는 우편물은 보지 않기를 바랬습니다. 이유는 미국 오자 마자 직장도 없고 돈도 없으면서 말씀에 순종한다고 한국에서 가져 온 쥐꼬리 만한 돈을 모두 자선단체에 마구 보낼 것을 걱정하셨던 것입니다.

물론 저희 누님도 신실한 크리스챤입니다. 후에 선교사로 섬기시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제가 마구 보냈을까요?

 

오늘 사순절 첫째 주일 예배를 드립니다. 사순절은 참회와 절제 구제를 통하여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고 우리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되찾는 축복의 계절입니다. 곧 사순절기간 고난을 통해 부활의 길을 가신 주님을 만나고 아울러 우리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되찾는 축복을 누리는 계절입니다.

우연인 것 같지만 사실 세상 일에는 우연이 없습니다. 모든 일에 하나님의 섭리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지난주에는 Peabody Essex Museum에 유길준 기념관이 재개관되는데 이를 한인동포사회가 도와야 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저는 기왕 3.1절 주간에 오시라고 부탁드렸습니다. 이 일은 기독교인들뿐 아니라 Korean American들에게는 소중한 사역이기 때문에 초대하였습니다. 특히 총영사님이 동영상을 통해 말씀하셨는데 총영사님은 Korean American의 정체성을 강조하셨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지난주에는 Korean American의 정체성에 대해 더 마음을 모으는 주일예배였다면, 지난 재의 수요일부터 시작된 사순절은 먼저는 Christian의 identity를 다질뿐 아니라 이를 넘어 각자의 authentic self(진정한 자아)를 찾아 가는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먼저 identity(정체성)과 authenticity(진정성)을 구분하는 좋은 예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요즘 매년 어느 가정이 선교헌금을 드리시는데 국내 선교와 해외 선교 두 사역에 나누어서 드리시고 계십니다. 이유를 들었는데 부인은 해외 선교에 관심이 많으시고 남편은 국내 선교에 관심이 많으시기 때문이라고 들었습니다.

두 분은 모두 신실한 기독교인이라는 identity를 소유하신 분들입니다. 그러나 authenticity는 다릅니다. 한 분은 국내선교에 꽂혀 계시고 한 분은 해외선교에….

한 가정에서도 이런데 우리 교회 전체를 보면 어떨까요? 우리 모두는 한 identity입니다. 그러나 각자의 진정한 자아는 다양합니다. 그러므로 사순절은 우리들의 identity를 함께 견고히 하며 아울러 각자의 진정한 자아를 새롭게 하는 축복된 계절인 것입니다.

 

자신의 정체성과 진정성을 잘 가꾸어 간 대표적인 인물이 요즘 함께 나누고 있는 다니엘입니다. 오늘은 6장을 나누는데 시간 관계상 그 중 일부만 봉독해드렸습니다. 6장에는 다니엘이 사자 굴 속에서 살아나오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곧 다니엘의 진정성은 사자굴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그런데 세 친구는 사자굴 이야기에 나오지 않습니다.

반면 3장에는 세 친구가 풀무불에 던져지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때는 다니엘은 빠졌습니다. 물론 우리가 알지 못 하는 배경이 당연히 있겠지만 다니엘서 이야기를 액면 그대로 받아드리면 다니엘은 풀무불에는 들어가지 않았고 대신 사자굴에는 들어갔습니다. 세 친구는 풀무불에는 들어갔지만 사자굴에는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한 마디로 풀무불은 세 친구의 진정한 자아가 완성되는 곳이었고, 사자굴은 다니엘의 진정한 자아가 완성되는 곳이라고 생각해도 무리가 없을줄 압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 놀라운 축복을 사순절에 함께 누릴수 있을까요? 10절,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먼저 오늘 본문의 배경을 잠시 말씀드리면, 지난 주에는 5장에 나오는 벨사살 왕에 대해 나눴습니다. 벨사살왕과 함께 바벨론이 멸망하고 이제 다리오 왕이 통치하는 메대왕국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다리오는 다니엘을 잘 알아서 계속 왕은 다니엘을 자기 밑 최고의 통치자로 세웁니다. 이를 메대 사람들이 가만 둘리가 없습니다. 시기하기 시작하고 드디어 계략을 세웁니다.

한 가지 방법뿐이 없는 것을 그들은 알았습니다. 율법을 범하게 하는 방법을 찾아 내기로 합니다. 결국은 앞으로 한 달 동안 왕 외의 어떤 신이거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굴에 던져 넣는 법령을 제안합니다. 왕은 허락합니다.

 

다니엘은 이 사실을 당연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은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기도하며 감사하는 다니엘의 모습이 우리들이 이번 사순절에 함께 본받아야 하는 모습임을 먼저 말씀드립니다.

 

다니엘의 정체성은 유대인 포로였습니다. 아니 유대인 이민자였습니다. 곧 다니엘은 하루에 세 번씩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드림을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지켰던 것입니다. 그런데 법령이 발표 되었습니다.

물론 어떤 유대인들은 다니엘처럼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드리다가 겁이 나서 멈춘 사람들도 있었을지 모릅니다. 실은 이 때 율법을 아는 모든 유대인들은 포로 중에도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드렸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정체성의 표현이었습니다.

실은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하면서 드린 기도가 있습니다. 역대상 6:38-39절,

“자기들을 사로잡아 간 적국의 땅에서 온 마음과 온 뜻으로 주께 돌아와서 주께서 그들의 조상들에게 주신 땅과 주께서 택하신 성과 내가 주의 이름을 위하여 건축한 성전 있는 쪽으로 향하여 기도하거든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그들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그들의 일을 돌보시오며 주께 범죄한 주의 백성을 용서하옵소서.”

 

곧 유대인이라면 포로로 잡혀가면 있는 곳에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드리게 되어 있었습니다. 다니엘은 이를 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많은 유대인들도 이를 행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문제는 왕의 칙령이 떨어진 후에도 이 율법을 지키느냐 아니냐가 관건일줄 압니다.

 

다니엘처럼 어떤 환경에도 불구하고 지키는 자들은 authentic self를 소유한 자들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는 자들은 유대인의 identity는 있어도 authentic self는 잃은 자들입니다.

어떤 환경에도 진정으로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하고 감사한 자들은 authentic self를 소유합니다. 형식적으로 율법을 지키며 기도한 자들은 환난이 왔을 때 피합니다. 이유는 authentic self를 소유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진정한 자아를 소유한 자들에게는 어떤 축복이 임할까요? 계속되는 다니엘의 이야기가 잘 풀어준다고 생각합니다.

다니엘이 법령을 어긴 것을 알고 다니엘의 정적들은 왕께 고발합니다. 이에 왕이 어떻게 하죠? 왕은 심히 근심하여 다니엘을 구원하려고 마음을 쓰며 그를 건져내려고 힘을 다합니다. 그러나 어쩔수 없이 왕은 허락합니다. 그런데 왕은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16절,

“이에 왕이 명령하매 다니엘을 끌어다가 사자굴에 던져 넣는지라 왕이 다니엘에게 이르되 네가 항상 섬기는 너의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시리라 하니라.”

물론 왕의 기도라고도 할수 있습니다만 왕은 다니엘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눈치채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둘은 놀라운 비밀이 있는 관계임을…. 세상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왕은 어렴풋이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니엘이 제발로 사자굴에 들어가는 것은 상상도 할수 없었던 것입니다. 왕이 눈치를 챈 하나님과 다니엘의 비밀이 무엇이었을까요?

 

구체적으로는 알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니엘 스스로 사자굴을 선택한 것을 보고 추측할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사자굴에 던져짐도 두려워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버릴줄 알았습니다. 달리 말해서 자기가 사자굴에 던져질지라도 하나님을 경외함을 포기하지 못합니다. 자신을 가볍게 생각한 것입니다. 자신 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더 중요시 여깁니다. 포로로 잡혀 갔을 때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하라는 말씀이 자신 보다 더 소중합니다.

이와 같은 지혜는 자신의 습관에서 터득했을줄 압니다. 말씀대로 순종하며 늘 하던대로 예루살렘을 향하여 하루 세번 기도함을 통해 터득했을줄 압니다. 이 세번 드리는 예식이 하나의 예식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은 늘 새롭게 하나님을 만납니다. 비밀스러운 체험을 매번 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할 때마다 자신의 더러운 죄성을 보곤 하였을 것입니다. 자기를 죄에서 구원하실 분은 하나님뿐임을 늘 새롭게 깨달았을 것입니다. 자신을 구원할 분은 바벨론 왕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도리어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 온 사실도 감사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서기자는 다니엘은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벨론으로 잡혀 온 사실 조차 감사의 제목이 되어 갔던 것입니다.

감사하면 할수록 자신의 추악한 죄성을 깨닫고 깨닫게 되면 될수록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찬양과 함께 하나님을 의지하였던 것입니다.

결국 죄성에 가득찬 자신은 가볍게 여깁니다. 모든 것을 구원의 주 하나님께 맡깁니다. 그는 자신의 진정성을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체스터톤은 이런 표현을 합니다.

“위대한 성인의 특징은 가벼워지는 능력에 있다. 천사도 자신을 가볍게 여기기에 날 수 있다. …… 교만은 모든 걸 무조건 엄중하게 끌어내린다. 이에 사탄은 자기 무게에 짓눌려 망했다.”

 

결국 성인들은 자신의 진정성을 찾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자신을 가볍게 여깁니다. 사자굴에도 던져짐을 당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의 시작은 ‘전에 하던 대로’입니다.

저희도 올해도 전에 하던 대로 묵상집도 만들었고 또 참회와 절제와 구제의 사순절을 지킵니다. 그냥 보내지 마십시다. 참회를 통해서 우리의 죄성을 깊게 체험하십시다. 그리고 우리에게 맞는 각자의 절제의 삶을 가지십시다. 아울러 구제의 축복도 누리십시다. 우리는 진정한 우리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다니엘을 닮은 자들이 될 것입니다.

 

다시 이어지는 다니엘의 모습을 살펴 볼까요? 다니엘을 사자굴에 넣고는 걱정이 되었는지 왕은 다니엘을 사자굴에 넣은 후 밤이 새도록 금식하고 잠을 못 이룹니다. 다음 날 아침 새벽에 굴에 가까이 가서 슬픈 소리로 다니엘을 부릅니다. 20절,

“…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네가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이 사자들에게서 능히 너를 구원하셨느냐?”

다니엘이 답합니다.

“왕이여 원하건대 왕은 만수무강 하옵소서 나의 하나님이 이미 그의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으므로 사자들이 나를 상해하지 못하였사오니 이는 나의 무죄함이 그 앞에 명백함이오며 또 왕이여 나는 왕에게도 해를 끼치지 아니하였나이다.”

역시 왕의 생각이 맞았습니다. 다니엘과 하나님은 특별한 사이였습니다. 둘 사이에 놀라운 신비스러운 관계가 형성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왕은 다니엘을 고발한 사람들뿐 아니라 처자들까지 함께 사자굴에 던져 넣게 합니다. 체스터톤의 말처럼 교만한 자들은 사자들에게 깔려 죽었습니다. 도리어 다니엘은 가볍게 사자 등에 올라 타고 하늘을 난 것입니다.

 

다니엘이 자신을 가볍게 여겼을 때 하나님은 무겁게 내려 오셔서 다니엘을 도우신 것입니다. 다니엘의 방패가 되신 것입니다. 이것이 다니엘과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관계였습니다. 다니엘이 자신을 가볍게 여겼기에 다니엘은 사자굴조차도 가볍게 여기게 된 것입니다. 다니엘에게 무거운 분은 하나님 뿐이셨습니다.

 

다니엘은 사실에서 진실을 보는 자가 된 것입니다. 남다른 눈을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자신을 보는 관점이 달랐습니다. 사자굴을 보는 관점이 남달랐습니다. 자기를 모략하는 사람들을 보는 눈이 달랐습니다. 사자를 보는 눈이 달랐습니다. 이 모습이 진정한 자아를 되찾은 자들의 모습니다.

자기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세상 권세자들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사자굴을 무섭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기를 가볍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세상 권세자들도 사자굴도 가볍게 생각합니다. 이들에게는 사실에서 진실을 보는 눈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바로 진정한 자아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순절을 지키는 이유는 우리들의 identity를 넘어 진정한 자아를 되찾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사순절을 진정한 마음으로 지킬 때 어떤 환경에서도 감사하는 자가 됩니다. 사자굴도 감사하는 자들이 됩니다. 도리어 사자굴에서도 건짐을 받는 자들이 됩니다. 아니 사자 등에 올라타는 자들이 됩니다. 이들은 사실에서 진실을 보는 자들이 됩니다.

 

지난주에도 언급해 드렸지만 얼마전 매릴랜드에 있는 솔즈베리한인장로 교회 집회에 다녀 왔습니다. 그동안도 집회 때마다 늘 하는 말씀 중 하나인 이삭의 르호봇의 노래에 대해서 하루 말씀을 드렸습니다.

간단히 다시 소개해 드리면 이민자 이삭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쫓겨서 그랄 골짜기로 내려가 삽니다. 그 곳에서 두 번 우물을 팠지만 빼았깁니다. 세번째 팠는데 다행히 빼았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삭은 그 곳 이름을 ‘르호봇’ 이라고 부릅니다. 르호봇의 뜻은 ‘넓다’입니다. 실은 좁은 골짜기인데 도리어 거꾸러 ‘넓다’라고 노래를 부릅니다. 그랬더니 더 큰 축복을 이삭은 받게 됩니다.

이삭의 정체성은 유대인 이민자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자아는 ‘르호봇’이었습니다. 좁은 곳에서 도리어 ‘넓다’ 노래하는 자인 것입니다.

 

그 때 솔즈베리에는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습니다. 설교를 하는데 빗소리가 요란하게 들렸습니다. 물론 보스톤은 눈이 내리기 시작했을줄 압니다.

제가 빗소리를 들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 비가 내리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르호봇의 고백은 우리로 하여금 사실에서 진실로 바꾸는 축복을 누리게 합니다. 비가 내리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비는 우리를 축복하기 위해 내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진실입니다.”

 

이삭이 거한 좁은 골짜기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실에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진실로 바꾸었습니다. “르호봇” 외쳤습니다. 르호봇의 진실된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어 간 것입니다. 르호봇은 이삭의 authentic자아의 표현인 것입니다.

 

우리들의 identity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모두 Korean American입니다. 그런데 모든 인류에게 공통된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는 구원받지 못할 죄인들입니다. 이것이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어떻게 진실로 바꿀수 있을까요?

이 사실을 뒤집기 위해서 진리가 오셨습니다. 진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을 믿는 자들은 이미 진정한 자아를 새롭게 찾은 것입니다. 세상을 새롭게 볼수 있게 된 것입니다.

주룩 주룩 내리는 비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고백하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은혜입니다.

 

이 십자가의 은혜가 우리들 가운데 마음껏 꽃 피우도록 이번 사순절 기간 참회와 절제와 구제의 삶으로 십자가의 주님을 깊게 만나십시다. 진정한 자아를 회복하십시다. 사실에서 진실로 우리의 삶을 장식해 나가십시다. 이를 위해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우리는 사실 속에서 질식할 수밖에 없었던 죄인들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진실의 세계를 만드신 것입니다. 이 축복을 누리십시다. 십자가를 깊게 묵상할수록 사실에서 진실을 보게 됩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제가 서두에 누님집에 살 때 자선단체에 마구 돈을 보냈는지에 대해 말씀을 안 드렸는데, 결론적으로 저는 보내지 않았습니다. 반면 지난번에 말씀드렸듯이 장애인 선교 단체에는 보냈습니다. 그 단체는 저의 진정성과 연결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이번 사순절을 통하여 우리들 각자에게 주시는 authentic축복을 누리십시다. 우리는 모두 다니엘을 닮은 각자의 사자굴에서 승리하는 멋쟁이들입니다. 이를 위해 주님께서 당신의 사자굴인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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