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2월 호주 어느 해변가에 killer whale 150마리가 모래사장에 뒹굴고 있었습니다. 그 중 90마리는 겨우 건져서 다른 곳에 가서 놓아 주었고 60마리는 그냥 그 바닷가에서 죽은 것 같습니다.
왜 이처럼 많은 고래가 바다를 떠나 모래 사장까지 들어 왔을까요? 호주 관계자들은 하나 같이 정확한 원인은 알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 확실한 것은 고래들은 방향을 잃었습니다.
오늘 사순절 넷째 주일예배를 드립니다. 오늘도 다니엘서 강해를 통해서 우리는 방향을 잃은 것은 아닌지 잃었다면 어떻게 회복할수 있는지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도 계속되는 다니엘서 이야기는 이스라엘민족이라는 공동체는 어떤 방향으로 가야하는 운명 공동체인지에 대한 귀한 멧세지가 담겨져 있습니다.
8장의 이야기는 다니엘이 벨사살왕 3년에 본 두 번째 환상에 대한 말씀입니다. 8장 14절까지가 다니엘이 본 환상이고 15절 이후에는 역시 첫번째 환상처럼 다니엘이 해석을 못해서 가브리엘 천사가 해석해 준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간 관계상 가브리엘 천사의 해석을 빌려서 환상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첫번째 환상에는 사자, 곰, 표범과 무서운 짐승 곧 네 짐승이 등장한 반면 두번째 환상에는 숫양과 숫염소가 등장합니다.
먼저 숫양은 두 뿔을 갖고 있는데 두 뿔 모두 길지만 나중에 난 뿔이 더 길어졌다고 합니다.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숫양이 있는데 두 뿔 모두 길지만 그중 하나는 훨씬 깁니다. 소스라치는 느낌을 주지 않습니까? 하여튼 가브리엘은 해석해 줍니다. 첫번째 뿔은 바로 메대왕이고 두번째 긴 뿔은 바사왕들이라고…. 이 들의 특징은, 4절,
“내가 본즉 그 숫양이 서쪽과 북쪽과 남쪽을 향하여 받으나 그것을 당할 짐승이 하나도 없고 그 손에서 구할 자가 없으므로 그것이 원하는대로 행하고 강하여졌더라.”
이 숫양은 방향을 잃은 고래 같습니다. 여기저기 박고 다닙니다. 그래도 힘은 강해졌습니다.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계속 제 머리를 맴도는 괴테의 말이 있었습니다.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이 숫양은 방향보다는 속도를 좋아한 것 같습니다. 여기저기 박고 다닙니다. 너무 빨리 돌아 다니면서 박으니 어떤 짐승도 감당할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두 뿔난 숫양을 보면서 이런 생각 저런 생각에 잠겨 있는데 또 다른 동물이 보입니다. 숫염소가 등장하는데 가브리엘은 이를 헬라 왕국으로 해석합니다. 곧 다니엘은 이 때 바벨론 왕 시절에 살고 있는데 앞으로 나타날 세 왕국을 알게 된 것입니다. 메대, 바사, 헬라. 메대와 바사는 숫양의 두 뿔로, 헬라는 숫염소로 환상 중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런데 숫양과 달리 숫염소는 방향을 중요시하는 동물로 등장합니다. 곧 헬라왕국은 방향을 중요시 여겼습니다. 8절에 보면 숫염소 머리에서 네 뿔이 나오는데 하늘 사방을 향하여 납니다. 곧 숫염소는 하늘 권세로 향하는 짐승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숫양은 방향 없이 여기저기 좌충우돌하는 짐승이었다면 숫염소는 하늘까지 향하는 짐승이었다는 것입니다. 방향이 있었습니다. 10, 11절,
“그것이 하늘 군대에 미칠 만큼 커져서 그 군대와 별들 중의 몇을 땅에 떨어뜨리고 그것들을 짓밟고 또 스스로 높아져서 군대의 주재를 대적하며 그에게 매일 드리는 제사를 없애 버렸고 그의 성소를 헐었으며.”
정확히 해석하기는 어렵지만 어느 주석가는 하늘 군대는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제사장들과 함께 매일 드리는 제사를 못 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곧 헬라 왕들은 성소로 향했습니다. 예배를 방해하는 것이 그들의 방향이었습니다. 그중 제일 악한 왕을 주석가들은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왕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안티오쿠스가 바로 9절 말씀에 나옵니다.
“그 중 한 뿔에서 또 작은 뿔 하나가 나서 남쪽과 동쪽과 또 영화로운 땅을 향하여 심히 커지더니.”
사실 안티오쿠스가 할례도 금지시키고 제사도 못 드리게 합니다. 아니 예루살렘 성전에 제우스 제단을 세우고 제우스를 섬기게 합니다. 하지만 다행입니다. 13절,
“내가 들은즉 한 거룩한 이가 말하더니 다른 거룩한 이가 그 말하는 이에게 묻되 환상에 나타난 바 매일 드리는 제사와 망하게 하는 죄악에 대한 일과 성소와 백성이 내준 바 되며 짓밟힐 일이 어느 때까지 이를꼬 하매.”
아마도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께서 대화를 하시는 것 같습니다. 언제 이 성전 모독이 끝날 것 같은지 대화를 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다니엘이 들으라고 대화를 하시는 것이겠죠? 다니엘은 귀담아 듣습니다. 14절,
“그가 내게 이르되 이천삼백 주야까지니 그 때에 성소가 정결하게 되리라 하였느니라.”
이천삼백 주야만 지나면 다시 성소가 회복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환상 중에 들은 마지막 장면입니다.
그래도 끝은 좋습니다. 다시 예배가 회복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니엘이 받은 환상이고 가브리엘의 도움을 받아 이해한 미래역사입니다. 이것을 다니엘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했습니다.
왜 기록했겠습니까? 자기를 위해서…? 후대를 위해서 기록했습니다.
제가 설교 준비를 할 때 먼저 제가 말씀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받은 은혜를 어떻게 하면 많은 교우분들이 또 같은 은혜를 받을까 생각하면서 오랜 시간에 걸쳐서 설교문을 작성합니다.
다니엘도 매한 가지 였을 것입니다. 언젠가 성소를 모독하며 예배를 방해하는 최악의 왕이 나타날 것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한편 마지막으로는 희망을 줍니다. 이천삼백 주야가 지나면 예배는 회복된다고…. 다니엘은 지금 후대를 위해서 바벨론 포로가 되어서 다니엘서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다. 다니엘이 이 책을 쓴 후 약 30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스라엘인들은 다니엘의 예언이 이루어지는 것을 봅니다. 메대, 바사, 헬라왕국이 차례로 나타났고 드디어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등장을 목격합니다.
이 때 이스라엘인들은 큰 힘이 되지 않았을까요? 조금만 참으면 된다고 그동안 방향을 잃지만 않으면 된다고…. 언젠가 성소가 정결케 될 것을….
그런데 왜 주야로 표현했을까요? 이천삼백 주야라고…, 날짜로 계산하면 편한데, 날짜로는 1150일입니다. 천백오십 일이 지나면 성소가 정결하게 된다고 말씀하면 더 쉽게 알아들을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11절에 보면 “매일 드리는 제사를 없애 버렸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성소에서는 제사장들이 매일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루에 몇번…? 출애굽기 23: 39,
“한 어린 양은 아침에 드리고 한 어린 양은 저녁 때에 드릴지며.”
곧 주야로 두번 드린 셈입니다. 여기에서 구약에 나오는 예배학에 대해 말씀드리지 않을수 없습니다.
성소는 매일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하늘 보좌에서 성소로 내려 와 계시고 제사장이 제사를 드리는데 사람들은 있는 처소에서 마음으로 성소로 향하는 것입니다. 아침과 저녁에…. 매일….
그런데 매일 매일 드리면서 이들의 마음은 어디로 향했을까요? 공간적으로는 성소로 향합니다. 이스라엘인들은 늘 예루살렘 성전으로 향했습니다. 다니엘도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드리지 않았습니까?
한편 시간적으로는 주어진 시간 속에서 다가오는 안식일을 기다리며 제사를 드렸습니다. 요즘 우리 식으로 하면 주일을 기다리며…. 민수기 28: 9,
“안식일에는 일 년 되고 흠 없는 숫양 두 마리와 고운 가루 십분의 이에 기름 섞은 소제와 그 전제를 드릴 것이니.”
곧 매일 드리는 제사 위에 몇 가지를 더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로서 알수 있는 것은 그들의 매일 매일의 삶은 시간적으로는 안식일을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즘식으로 하면 월요일부터 매일 제사를 드리지만 하루 하루 드리면서 그들은 실제로 주일로 마음은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날은 모든 일을 쉬면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날인 것입니다.
곧 공간적 개념으로는 매일 성소로 향합니다. 아울러 시간적 개념으로는 매일 안식일로 향합니다. 이것이 진정 예배하는 자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아마도 날짜 보다는 하루 두번 드리는 예배를 강조하기 위해서 이천삼백 주야를 강조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모든 예배는 안식일로 곧 주일로 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안식일 아니 주일에 예배를 드릴 때는 이스라엘 인들의 마음은 아니 우리들의 마음은 이제 어디로 향하여 예배를 드려야 할까요?
다니엘서와 깊은 관련이 있는 요한계시록에서 해답을 찾을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4:13,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피조물이 이르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주일에는 하나의 공동체가 되어 우리들의 마음의 방향은 하늘의 예배로 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늘의 예배로 향할 때 우리는 이미 하늘 보좌 앞에서 드리는 예배의 참여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배하는 자들은 언제나 하나님 보좌 앞에서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누가 제일 싫어하겠습니까? 사탄이 싫어합니다. 그래서 사탄의 역할을 하는 자가 있을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 오실 때까지 언제나 우리 주위에는 안티오쿠스가 서성거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감사하게도 우리 주변에 날뛰는 안티오쿠스는 언젠가는 멸망합니다. 그러나 안티오쿠스는 완전히 멸망하기 전까지 택한 받은 자들로 하여금 성소로 그 마음을 향하지 못하게 유혹합니다. 함께 죽자고….
그러면 오늘날 안티오쿠스는 우리들에게 어떻게 유혹할까요? 구체적으로 한 가지만 나누겠습니다. 얼마전 어느 책을 읽다가 너무 shocking한 책 제목이 눈에 띄어서 그 자리에서 구입한 책이 있습니다.
‘A Royal “Waste” of Time.’ (고귀한 시간의 낭비)
진정한 예배는 세상적으로는 시간 낭비와 함께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시간을 아낄 때 참 예배는 드려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시간을 낭비할 때만 참 예배가 드려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무신론자들에게는 종교생활은 모두 시간 낭비입니다. 이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종교생활을 하는 분들이 시간 낭비를 안 하고 종교 생활을 할 때부터 생긴다는 것입니다. 시간 낭비를 안 하는 종교인들을 통해서 결코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맛 볼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안티오쿠스가 누구인지 알 것 같습니다. 특히 바쁜 자본주의 사회에서 종교생활을 하는 우리들의 안티오쿠스의 악한 지혜를 알 것 같습니다.
안티오쿠스는 신앙인들의 귀에 속삭입니다. “economy라는 말 알지, 최소의 노력으로 최대의 효과를 얻는 것. 신앙생활도 그렇게 해 괜히 낭비하지마!”
안티오쿠스는 그렇게 해서 성소를 파괴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스톤에도 수많은 교회들이 콘도로 변했습니다. 안티오쿠스의 교묘하게 악한 지혜가 이긴 것입니다.
가끔 미국 교회 장례예배에 참석하면 깜짝 놀라곤 합니다. 10시에 시작하면 대개 9:45분까지 조객들이 와 앉아 있는 모습을 봅니다.
그럴 때마다 부러운 마음도 듭니다. 저희 교회 교우들이 예배전 15분 전까지 오시면 얼마나 좋을까…. 물론 소그룹성경공부나 다른 교회 봉사를 하다가 늦는 것은 이해가 됩니다.
이처럼 거룩한 낭비가 더욱 필요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어쩌면 인터넷을 통해서 우리는 경제적 동물이 아니 경제적 짐승들이 되어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우리는 사회에 영향을 끼치지 못합니다. 도리어 짐승들의 밥이 됩니다.
이와 같은 때에 오늘도 우리는 주위에서 우리를 유혹하는 안티오쿠스의 책략에 넘어가지 않으려고 사순절을 지킵니다. 쓸데 없이 40일간 참회와 절제와 구제의 삶을 삽니다. 참회와 절제는 시간의 낭비이고 구제는 물질의 낭비입니다. 안티오쿠스로 인해서 잃어버릴뻔 했던 우리들의 삶의 방향을 다시 새롭게 하기 위함입니다.
주님도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시간을 낭비하셨습니다. 소중한 40일간을 광야에서 낭비하셨습니다. 아울러 물질도 낭비하셨습니다. 돌을 떡으로 만드실수도 있으신데 결코 만드시지 않으셨습니다. 시간도 물질도 낭비하셨습니다. 성소를 정결케 하시려고….
교우 여러분,
남은 사순절, 아침 저녁으로, 주야로 거룩한 낭비의 시간을 가지십니다. 6일간 이런 삶을 살다가 주님의 날 함께 온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서 예배를 드리십시다. 우리들이 참 예배의 주인공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셔서 이제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예배를 드릴 때 우리는 이미 주님으로 인해서 하늘 나라에서 드리는 예배에 동참하는 축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주님의 정결케 하시는 능력으로 인해 우리는 오늘도 하늘 보좌 앞에서 드리는 예배에 참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사막 여행을 한 후 ‘사막을 건너는 여섯 가지 방법’이란 책을 펴낸 스티브 도나휴 저자는 이런 제안을 합니다.
“지도보다는 나침반을 따라가라.”
사막에 지도도 있겠지만 한편으로 지도가 늘 바뀐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차라리 지도는 무시하고 나침반을 따라가는 것이 안전하다는 것입니다. 곧 보이는 모래언덕을 기준으로 삼지 말고 나침반이 알려 주는 방향을 따라 가라는 것입니다.
우리 눈 앞에 보이는 모래언덕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너는 예배 드릴 자격이 없어. 포기해 세상 법칙 대로 살아!”
반면 나침반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예배를 드릴 최적격자는 스스로 예배드리기에 부적격자임을 아는 자야. 괜찮아 계속 예배자가 되.”
이런 멧세지를 주시는 성령의 나침반은 이번 사순절 우리를 어디로 인도할까요? 어디에서 쓸데없이 귀한 시간을 보내게 하실까요? 갈보리 산 골고다로 인도하십니다. 그곳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게 하십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옆에 있는 강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누가복음 23: 43)
주님께서는 예배드리기에 최고로 부적격자인 강도를 예배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하늘 보좌 앞에서 드리는 예배자로…. 이를 위해 당신의 피로 성소를 정결케 하셨습니다. 또한 우리를 정결케 하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십자가에 달린 강도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가 내게 이르되 이천삼백 주야까지니 그 때에 성소가 정결하게 되리라 하였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