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041325
다니엘 9: 16-19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잘 아시는대로 올해는 33분의 신임서리집사님들이 임직을 받으셨습니다. 지난 토요일 쉐마의 밤에서 신임제직들의 순서가 있었는데 특히 신임 서리집사님들은 노래와 함께 33인 답게 헌신을 다짐하는 선언문도 작성하여서 발표하셨습니다. 다음과 같습니다.
- 우리는 보스톤 한인 교회 서리 집사임을 선언하노라.
- 주님께 예배드림으로 최고의 영광을 돌리리라.
- 다니엘과 같은 아이들이 자라날 수 있게 말씀 개혁에 동참하노라.
- 최고의 거룩은 영혼의 치유와 회복인 것을 알고,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리라.
- 넘쳐 흐르는 예수님의 사랑으로 맡겨 주신 영혼을 섬기리라. 아멘.
특히 세 번째 항목이 눈에 띄입니다.
“다니엘과 같은 아이들이 자라날 수 있게 말씀 개혁에 동참하노라.”
오늘도 계속되는 다니엘 강해 말씀을 통해서 오늘 우리와 우리 자녀들이 본받아야 할 다니엘의 모습이 무엇인지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본문 이해를 돕기 위해 역사 공부를 좀 하고 가야 할 것 같습니다. 다니엘이 포로로 잡혀 왔을 때는 바벨론왕국 느부갓네살 왕 때였습니다. 이미 다니엘은 8장에 나오는 두번째 환상을 통해서 바벨론 왕국 후에 일어날 나라들에 대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첫번째가 메대왕국입니다. 그 후로는 바사왕국 그리고 헬라 왕국까지 다니엘은 환상 중에 보았습니다.
자, 드디어 바벨론 왕국은 멸망당하고 메대왕국이 들어섰습니다. 이 때 세번째 환상을 받게 됩니다. 바로 오늘 9장 말씀입니다.
반복이지만 첫번째 두 번째 환상이 어떤 환상이었는지 아시는 것이 세번째 환상을 이해하시는데 도움이 되기에 간단히 다시 말씀드립니다.
첫번째 환상은 인자 같은 이 곧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내려 오셔서 참패를 당하심으로 하늘과 땅을 연결시키셨다는 내용의 환상이었습니다.
두번째 환상은 하늘 보좌와 땅의 성소가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를 사탄이 방해합니다. 사탄은 예배를 방해합니다. 그러나 하늘 보좌로 향하고 있는 택한 자들의 예배는 언젠가 하늘나라에서 완성이 됩니다. 하지만 헬라왕국까지 최소한 기다려야 합니다.
이 두 환상을 바벨론 마지막 왕 벨사살 왕 때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한쪽으로는 헬라왕국의 도래를 기다려야겠지요. 그러나 그 전에 메대왕국과 바사왕국이 먼저 나타나야 합니다. 이 때 땅의 성소는 정결케 되고 여기에서 드리는 예배는 하늘 보좌로 상달될 것임을 알고 이를 다니엘은 기다리게 된 것입니다.
이런 기다림 가운데 있는데 드디어 메대왕국이 도래했습니다. 다니엘은 두 가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일단 메대왕국이 등장해서 감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바사왕국을 거쳐 헬라왕국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그런데 한편 다니엘은 이미 나이가 많이 들었습니다. 어떤 학자는 이미 이 때 다니엘의 나이는 82세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다니엘의 심정을 이해하실수 있으시겠죠? 이 때 다니엘이 할수 있는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당연히 ‘기도’입니다. 두 가지 환상이 속히 이루어지기를 기도드릴수 밖에 없었습니다. 3절,
“내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덮어쓰고 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하고.”
기도가 19절까지 이어집니다. 18-19절까지를 보면 다니엘의 간절한 기도를 느낄수 있습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여 들으시며 눈을 떠서 우리의 황폐한 상황과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성을 보옵소서 우리가 주 앞에 간구하옵는 것은 우리의 공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함이니이다,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귀를 기울이시고 행하소서 지체하지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바 됨이니이다.”
다니엘은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하실 자비로우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21, 22절을 보면, 다니엘이 기도할 때에 가브리엘이 빨리 날아서 저녁 제사를 드릴 때 나타나서 말합니다. “다니엘아 내가 이제 네게 지혜와 총명을 주려고 왔느니라.”
아마도 아침 제사를 드릴 때 기도를 시작하였는데 저녁 제사를 드릴 때 쯤 가브리엘이 도착한 것 같습니다. 온 이유는 지혜와 총명을 주려고….
어찌 보면 실망입니다. 다니엘이 원하는 것은 속히 헬라왕국이 도래해서 예루살렘 성전이 회복되는 것인데, 지혜와 총명을 주려고 왔다니 말입니다.
하여튼 지혜와 총명을 주려는 이유는 당연히 무엇을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깨달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가브리엘은 23절과 25절에서 두 번씩이나 깨달을 것을 명령합니다.
“깨달으라.” “깨달으라.”
결국 다니엘은 깨닫게 됩니다. 한편 구체적으로 다니엘이 무엇을 깨달았는지는 2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곧 그 통치 원년에 나 다니엘이 책을 통해 여호와께서 말씀으로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알려 주신 그 연수를 깨달았나니 곧 예루살렘의 황폐함이 칠십 년만에 그치리라 하신 것이니라.”
다니엘은 예레미야의 70년 예언을 비로서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아하!’ 했다는 것입니다. 언제? 이스라엘의 회복 성소의 회복을 위해 간절히 기도드린 후에….
사실 예레미야는 두 번씩이나 바벨론 포로가 70년이 될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예레미야 25:11절과 29:10절…, 25:11절,
“이 모든 땅이 폐허가 되어 놀랄 일이 될 것이며 이 민족들은 칠십 년 동안 바벨론의 왕을 섬기리라.”
이러한 관점에서 9장의 문장 구조를 먼저 말씀드리면, 1, 2절은 제목입니다. 제목은 ‘70년의 신비를 깨달음.’ 깨닫게 된 동기는 다니엘의 기도인데 3절에서 19절까지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20절 이하가 다니엘이 깨달은 70년의 신비의 내용입니다.
먼저 결론을 말씀드리면 9장의 환상을 통해 알수 있는 것은 다니엘은 이미 받은 두 환상과 예레미야의 70년 예언은 뗄레야 뗄수 없는 관계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70년과 두 환상의 관계를 계속 살펴가 보겠습니다.
저를 믿고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연수 계산을 해 드릴 시간이 없습니다. 곧 다니엘은 예레미야가 이 예언을 16년전에 하였는데 이 예언을 이제 깨달았다고 기록한 것입니다. 이 단어를 주목하셔야 합니다. ‘깨달았나니’.
깨달았다는 것은 원래 알고 있었는데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곧 다니엘은 예레미야 선지자가 16년전에 예언한 것을 알고 있었는데 이제야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언제…?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덮어쓰고 기도하였을 때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예레미야의 70년의 의미는 단순한 숫자적 의미가 아님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깨달은 내용은 24절인데 24절에 ‘70’ 곧 ‘일흔’이라는 숫자가 나옵니다.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일흔 이레를 기한으로 정하였나니 허물이 그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용서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환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이가 기름 부음을 받으리라.”
곧 24절 이하의 말씀이 다니엘이 깨달은 예레미야의 70년 예언이라는 것입니다. 두 가지 단어 내지 문구에 귀를 기울어야 합니다. ‘일흔 이레’, 그리고 ‘지극히 거룩한 이’.
먼저 왜 70년은 어디 가고 ‘일흔 이레’로 답을 하실까요? 주석가들은 ‘이레’를 칠년으로 해석합니다. 70곱하기 7년 하면 490년입니다.
아직도 풀리지 않네요? 70년이라고 예레미야는 예언을 했는데 갑자기 490년으로 더 늘어졌나요?
레위기 26: 34, 35절,
“너희가 원수의 땅에 살 동안에 너희의 본토가 황무할 것이므로 땅이 안식을 누릴 것이라 그 때에 땅이 안식을 누리리니 너희가 그 땅에 거주하는 동안 너희가 안식할 때에 땅은 쉬지 못하였으나 그 땅이 황무할 동안에는 쉬게 되리라.”
곧 포로 생활하는 동안 땅은 안식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땅은 490년간 안식년을 안 지켰기에 70년 안식년을 갖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70년은 꼬박 포로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드디어 다니엘은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 70년은 그동안 채우지 못한 안식년 70년이라는 세월이구나….’ 그래서 일흔 이레로 답하신 것입니다.
곧 하나님께서는 가브리엘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해서 너희를 위해서 안식년 제도를 만든 것이었다. 너희가 어겼지만 나는 이렇게 해서 너희에게 안식년을 지키게 하는 것이다.’
이는 바로 자비하신 하나님의 축복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드디어 다니엘은 기가막힌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70년은 한편으로는 언젠가는 끝이 난다는 의미의 숫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영원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아울러 상징적인 70년 동안 하나님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포로생활을 하는 이스라엘과…. 곧 70년의 바벨론 포로 생활은 이스라엘인들이 안식년을 지키는 시간으로 간주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벨론에서 안식년을 지킴으로 하나님께 경배를 드렸던 것입니다. 곧 바벨론은 하나님의 성소가 되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과 함께 예루살렘 성소를 떠나 오셨습니다. 안식년을 바벨론에서 지키는 이스라엘 민족과 함께…. 그리고 바벨론에 당신의 성소를 차리신 것입니다.
결국 다니엘은 깨닫게 된 것입니다. “여기가 바로 하나님의 성소구나…! 70년간 여기에서 하나님을 섬기다가 언젠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겠구나.”
이에 다니엘은 회개하지 않았을까요? 70년이 언제 끝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지금 여기에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잊고 있었음을…. 여기가 하나님의 성소임을…. 여기서 드리는 예배는 바로 하늘 보좌로 연결되고 있음을….
이미 다니엘이 받은 첫번째 두번째 환상은 실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첫번째 환상은 땅과 하늘이 연결되는 내용이었고 두번째 환상은 땅에서 드리는 예배가 하늘 예배로 연결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세 번째 환상을 통하여 이는 이미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한편 바벨론포로들의 예배가 하늘 보좌의 예배로 연결시키기 위해서 오실 분을 다니엘은 누구라고 표현하고 있죠? 조금 전에 주목해야 할 두 번째 문구가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24절 하반절 말씀,
“…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환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이가 기름 부음을 받으리라.”
이를 다니엘은 동족들에게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안식년을 보내고 있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고 계시다고….’ 이유는 지극히 거룩한 이가 기름 부음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이처럼 인간을 사랑하셔서 인간들이 벌 받는 곳에 하나님은 찾아 오십니다. 아니 기름 부음을 받을 이를 보내십니다. 골고다까지…. 이 예언이 2천년전 주님께서 나귀 타시고 예루살렘성에 들어 오시고 후에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완성됩니다.
오늘 종려, 고난 주일로 지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로 향하시는 하루 하루의 여정을 우리는 따라가면서 예배를 드리는 한 주간을 지냅니다.
십자가는 엄청난 저주의 사건입니다. 그러나 이는 놀라운 축복의 사건입니다. 인간들이 받아야 할 저주의 상징인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주님이 움직이셨습니다. 찾아 오셨습니다. 골고다까지…. 시간과 공간 속으로 찾아오셔서 주님은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이는 놀라운 축복의 시작인 것입니다.
저주의 골고다를 성소로 바꾸셨습니다. 주님이 움직이신 것입니다. 인간이 받을 저주의 장소를 향해, 그리고 축복의 장소로 바꾸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통하여 약속하신 안식의 축복을 완성시키신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다니엘 처럼 70년이 언제 끝날 것인가 고민할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이미 70년 포로 생활은 끝났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로….
그러면 오늘 우리가 다니엘처럼 사는 것은 어떤 삶일까요? 오늘 우리가 있는 곳이 바로 하늘 보좌로 연결되는 자리임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기도드리는 것입니다.
다니엘이 기도할 때 가브리엘이 움직였습니다.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는 다니엘에게 하나님께서는 가브리엘을 움직이게 하신 것입니다. 다니엘이 기도를 시작할 때 빨리 날아서 저녁 제사를 드릴 때 즈음에 다니엘 기도처에 도착한 것입니다.
그런데 다니엘의 기도가 가브리엘을 움직일수 있었던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자비로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신의 아들에게는 자비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도리어 십자가 위에 꽁꽁 붙잡아 두셨습니다. 우리가 기도드릴 때 가브리엘을 움직이게 하시려고…. 정말로 자비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교우 여러분,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지금 가브리엘을 움직이게 하고 싶지 않으실까요? 이에 하나님께서 필요로 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말씀을 거둡니다.
“나는 기도가 가장 좋았다”라는 말로 당신의 책을 펴 내신 최상훈 목사님이 계십니다. 목사님은 기도의 본질을 겟세마네 동산의 주님의 모습으로 표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가장 힘들었던 순간 제자들에게 기도를 부탁하셨습니다.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얼마나 힘들었으면 제자들에게 이런 부탁을 하셨을까요? 그래서 주님은 아신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얼마나 힘들면 기도할까…! 주님은 십자가의 형벌을 피하고 싶어 간절히 기도하셨고 제자들의 기도마저 필요로 하셨던 것입니다.
기도하는 자들의 아픔을 아시는 주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받으셔서 하나님께 드리시지 않으실까요? 이 기도를 자비하신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실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다니엘의 기도를 듣고 가브리엘을 움직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도 가브리엘을 움직이게 하십니다.
다니엘의 기도에 동참할 때입니다. 나라와 민족과 인류를 생각하면서…. 아울러 우리들의 후손의 후손의 후손의 후손을 위하여….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자비하신 하나님께서는 가브리엘을 움직이십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꼼짝 없이 매달리신 댓가로….
그러니 기도하십시다. 지금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필요로 하십니다.
다니엘은 기도드립니다.
“우리가 주 앞에 간구하옵는 것은 우리의 공의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함이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