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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하노니…” 빌립보서 1:1-2 (2025/5/18)

얼마전 유튜브에서 본 이야기입니다. 약 20년전에 경상북도 진주 하씨 부인의 묘를 이장하다가 놀라운 자료를 발견케 되었습니다. 400년이 된 무덤이었습니다. 관을 여니 약 170여개의 편지가 부인의 가슴 위에 차곡 차곡 놓여 있었다고 합니다.

남편인 곽주가 부인 하씨에게 보낸 편지가 105점으로 가장 많았고 시집간 딸이 어머니 하씨에게 쓴 편지 42점, 하씨가 곽주에게 쓴 편지 6점, 그리고 친정어머니가 보내온 편지 등이 있었다고 합니다. 후손들은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이 유물들을 국립대구박물관에 기증했습니다.

남편이 부인에게 이처럼 많은 편지를 보낸 이유는 첫 부인과 사별하고 재혼하였는데 이미 첫 부인에게 난 아들이 장성해서 새 어머니와 함께 사는 것을 부담스러워해서 어쩔수 없이 별거를 하였고 대신 시시때때로 편지로 왕래한 것 같습니다.

특히 곽주가 과거 시험을 보러 서울로 가던 중 보낸 편지들에는 아이들과 아내를 걱정하는 마음이 절절하게 담겨 있었다고 합니다.

“아기들 데리고 어찌 계신가. 기별을 몰라 걱정하네.”

 

부인은 평생 이 편지를 잘 보관했던 것 같습니다. 부인이 세상을 떠날 때 가족들은 부인의 가슴 위에 편지들을 포개어 놓았던 것입니다. 곧 남편의 사랑이 가득찬 편지와 함께 이 생을 마친 어찌보면 특별한 삶을 살았다고 할까요?

 

물론 남편의 편지가 제일 많았지만 딸이 보낸 편지, 친정 어머니가 보낸 편지, 그리고 본인이 남편에게 보낸 편지도 안고 묻힌 것을 보면, 아마도 부인은 유언으로 편지들과 함께 저 세상으로 가기를 원한 것이 아닐까 생각도 해볼수 있겠습니다.

 

부인에게는 왜 이처럼 편지가 중요했을까요? 이 세 사람이 부인이 부인이 되게 한 사람들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오늘부터 빌립보서 말씀을 나눕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개 학자들은 빌립보서는 사도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쓴 편지로 생각합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은 왜 편지를 썼을까요?

물론 빌립보서를 한 주 한 주 살펴 보면 이유를 알수 있을줄 압니다. 그러나 먼저 이 점을 생각해야 할줄 압니다. 사도바울은 편지를 어떻게 썼을까? 아니 좀 치사해 보이지만 이런 질문이 더 빠를줄 압니다. ‘사도바울은 빌립보 편지를 쓸 때 돈이 얼마나 들었을까?’

요즘 시대에 편지를 쓰는데 돈이 얼마나 드는지를 묻는다는 것은 정말로 시대에 뒤떨어진 질문이겠지만, 실제로 사도바울이 편지를 쓸 때는 큰 돈이 들었습니다.

조금 전에 보여드린 진주 하씨네 때만해도 종이가 나왔을 때이지만 사도바울은 파피루스에 편지를 써야만 했습니다. 정확한 액수는 알수는 없지만 어느 자료에 의하면 ‘로마서를 쓰기 위해서는 현재 돈으로 $2275이 필요했을 것이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로마서는 16장이고 빌립보서는 4장이니 물론 장수로 크기를 계산하는 것은 좋은 방법은 아니지만, 여튼 ¼을 곱하니 $550이 나왔습니다. 자, 우리들 중에 $550씩 내고 편지를 쓸 사람 있겠습니까? 그야말로 재벌이 아니고….

사도바울은 $550을 사용하면서 편지를 썼어야 했습니다. 곧 한 줄 한 줄 써내려가는 것이 돈이었습니다. 곧 너무 길게 쓰면 사도바울에게 물질로 섬기고 있는 분들에게 큰 부담을 주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이를 모를리가 없습니다. 그래도 사도바울은 편지를 씁니다. 한 글자 한 글자가 무의미한 글자 곧 값없는 글자가 없게 하도록 온 신경을 쓰면서….

 

사실 성경은 이런 여건 가운데 모두 쓰여진 것입니다. 그 중 오늘부터는 빌립보서를 나눕니다. 한 글자 한 글자의 소중함을 생각하면서 함께 새로운 여정을 시작합니다. 1절,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짧은 표현 안에 화려한 관계 가운데 있는 사도바울의 모습을 엿볼수 있습니다. 제가 하씨 부인이 아마도 유언으로 편지들과 함께 묻어 달라고 했을 거라고 말씀드렸는데, 이유는 평생 자신을 자신이 되게 하였던 주변 사람들과의 귀한 관계의 소중함을 인식했기 때문이 아닐까 감히 생각해 봅니다. 하씨 부인에게 소중했던 관계는 남편이었고 딸이었고 친정 어머니였던 것 같습니다.

 

사실 사도바울도 1절 말씀을 통해 자기를 자기가 되게 했던 세 관계를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첫번째가 그리스도 예수, 두 번째가 디모데, 세번째가 빌립보 교인들….

오늘 첫 강해 설교를 통하여 사도바울을 사도바울이 되게 한 이 세 관계를 살펴 봄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사도바울에게 가장 중요한 분은 그리스도 예수였습니다. 그래서 고백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

그리스도와 자신과의 관계는 주님과 종의 관계였음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이 관계가 어느 관계보다도 가장 소중한 관계라는 것입니다. 이 관계를 시작으로 다른 두 관계로 이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실 다른 편지들 곧 에베소서와 골로새서 등에는 ‘종’ 대신에 ‘사도’라고 고백합니다. 그나름대로 이유가 있을줄 압니다. 그러나 빌립보서에는 ‘종’으로 표현합니다. 아마도 이유는, 2장에 나오지만 주님에 대한 고백을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로 고백하고 있기 때문에 ‘종’이라고 빌립보서에서 고백했을수도 있다고 봅니다. 2장에 가서 다시 나누기로 하고, 사도바울이 사도바울이 되는데 가장 중요한 관계는 주님과의 관계이고 그것은 바로 주님과의 종된 관계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면 편지를 쓸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편지의 권위가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바울이 쓰는 권위라는 것입니다.

 

한편 사도바울은 ‘종’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주님과의 관계를 온전케 한 것은 고난이었음을 은연 중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자기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으신 종이 되었고 이제는 자신이 주님을 위해서 십자가의 고통을 감당하는 종이 되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도바울은 주님과 고난으로 연결된 특별한 관계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몸에 그리스도의 고난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누가 감히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라고 고백하겠습니까?

 

두번째로 사도바울은 자기와 디모데와의 관계를 언급합니다.

“그리스도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사도바울은 디모데와 함께 그리스도의 종이 디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면 바울만 종이고 디모데는 종이 아니라는 뜻일까요? 아니면 함께 종이라는 뜻일까요? 자세히 주석해 드릴 시간은 없습니다. 이는 함께 종이 되었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자기를 위한 고난의 종이 되고 자기는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의 종이 된 이 특별한 관계는 자신과 디모데의 관계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고난의 길을 함께 가는 동역자의 관계입니다.

 

여기서 빌립보 교회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잠시 살펴 봐야 겠습니다. 빌립보 교회가 세워지기 위해선 사도바울과 디모데의 관계가 너무도 중요했습니다. 아니 빌립보 교회뿐 아니라 현재 그리이스에 위치한 모든 성경에 나오는 교회들이 세워지는데 이 둘의 관계가 정말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사도바울이 전도 여행을 세번 떠나는데, 첫번째는 소아시아 지역만 선교합니다. 이 때 디모데가 바을의 가르침을 받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직 동역자는 아니었습니다.

두번째는 1차 선교지를 돌아 보기로 하고 떠나지만 성령께서 강권하여 그대로 파송교회인 안디옥 교회로 가지 못하게 하십니다. 도리어 오랜 시간 소아시아를 방황하게 합니다.

저도 튀르키에를 가 보았지만 정말로 바울이 방황한 곳은 험한 곳입니다. 한참 헤메이게 하시다가 결국은 마게도니야로 건너가게 하십니다. 이 때 누구와 동행하냐 하면 디모데와 동행합니다. 바울은 제자 디모데와 함께 소아시아 지역을 방황하다가 드디어 드로아라는 곳에서 마게도니야인의 환상을 보고 마게도니아로 건너 가게 된 것입니다. 어느덧 디모데는 동역자가 된 것입니다.

바울과 디모데는 험한 여정 가운데 둘도 없는 그리스도의 종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디모데를 세우신 또 다른 이유가 당연히 있으셨습니다.

마게도니야는 당연히 헬라 문화권이고 디모데는 아버지가 헬라인이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2차 전도 여행을 위해 디모데를 예비해 두셨고 디모데와 더불어 마게도니야로 건너 가는데, 제일 먼저 도착한 곳이 바로 빌립보입니다. 이 곳에서 자주 장사 루디아를 만납니다. 루디아 집이 빌립보 교회가 됩니다.

 

곧 유롭의 첫번재 교회가 빌립보 교회인데 이 교회가 세워지는데 꼭 필요했던 것은 바울과 디모데의 동역 관계였습니다.

그런데 이 여정 속에서 둘의 생각이 항상 같았겠습니까? 세대 차이 문화 차이 등 많은 차이가 있었습니다. 게다가 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함께 오래 지내면 누구에게나 사람 냄새가 난다.”

 

그러나 디모데는 끝까지 사도바울과 함께 하였습니다. 지금 감옥에 갇힌 바울 옆에 디모데가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디모데가 끝까지 바울 곁에 지킬수 있었던 것은 그도 그리스도의 종이었기 때문입니다. 고난의 주님을 바라 보며 묵묵히 바울과 고난의 길을 함께 걸어 간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사도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으로 자신을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바울과 디모데의 아름다운 관계로 인해 직접적으로 덕을 보고 있는 자들이 바로 빌립보 교인들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이로서 알수 있는 것은 사도바울이 사도바울이 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관계가 주님이었고 두번째로는 디모데이었지만 이 편지를 쓰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빌립보 교인들이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립니다. 사도바울이 사도바울이 되기 위해서는 주님과의 관계가 최우선이었습니다. 그 아름다운 관계는 디모데를 만나게 하였습니다. 디모데와의 동역의 관계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빌립보 교인들을 만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편지를 쓰는 것입니다.

 

‘너’라는 책을 지은 김병후 박사님이 계신데 제가 저 나름대로 내용을 요약하면, ‘너’는 바로 ‘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세종대왕의 위대함을 한글에서 느낄수 있습니다. ‘ㅓ’를 거꾸러 하면 ‘ㅏ’가 되듯이 너와 나는 뗄레야 뗄수 없는 관계라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먼저 주님이라는 ‘너’(You)를 만났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아름다운 모습이 바울의 모습 곧 ‘나’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디모데라는 ‘너’를 만났습니다. 디모데를 통하여 젊고 싱싱한 모습이 바로 자신의 모습 곧 ‘나’가 되어서 그 험한 길을 잘 견디어 낸 것입니다.

이제 사도바울은 ‘너’라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쓰면 쓸수록 두 관계는 더욱 빛나게 되고 가장 먼저 덕을 보는 자는 바로 편지를 쓰고 있는 ‘나’ 바울인 것입니다.

 

사실 사도바울은 감옥에서 고통 중에 빌립보 교인들에게 인사와 더불어 다음과 같이 축복합니다. 2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이 축복을 할 때 누가 제일 먼저 축복을 받을까요? 누구에게 먼저 은혜와 평강이 임할까요? 사도바울에게 임합니다. 감옥 안에서 고통 중에 있는 사도바울에게 먼저 임합니다.

제가 이런 맥락에서 자주 말씀드리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 입에서 나온 말로 지은 집에 산다.”

이웃에게 나쁜 말할 때 우리는 나쁜 말로 지어진 집에 살게 됩니다. 이웃을 축복할 때 우리는 축복된 집에 살게 됩니다. 그것도 우리가 축복한 이웃과 더불어…. 이것이 바로 너와 나의 신비입니다.

 

사실 주석가들은 하나 같이 빌립보서의 주제를 ‘기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참 기쁨의 시작은 주님 안에서 서로의 고통을 나누면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디모데와 하나가 되는 기쁨을 누렸고 그 결과 이 기쁨을 편지를 통해 빌립보 교우들과 나누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끝인가요? 바울과 빌립보 교인들이 너와 나의 축복을 누리게 하기 위하여 쓰녀진 것일까요? 끝이라면 빌립보서가 성경이 될수 없었죠? 어느덧 빌립보서는 오고 가는 세대를 위한 서신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빌립보서를 읽으면서 어떤 환경에서도 기뻐하는 자가 될 것을 결단하고 또 결단하는 것입니다. 한편 결단하는 자들은 편지를 씁니다. 고난이 심하면 심할수록 $500이 들어도….

 

저에게 늘 카드를 보내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크리스마스 카드는 물론 부활절 카드도 보내십니다. 곧 1년에 두 번…. 저는 카드를 받은 후 늘 허둥지둥 감사의 편지를 보내곤 합니다.

거의 20년간 빠짐 없이 보내십니다. 골든 콘웰을 졸업하시고 같은 교단에서 목회하시는데 오래 전 이 분이 목회하시는 교회 집회도 간적이 있습니다.

다른 지역에서 새로운 목회를 시작한지 꽤 되셨습니다. 실은 개척교회입니다.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 보내는 카드라서 늘 가슴에 와 닿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느덧 저에게 ‘너’가 되었습니다.

 

사실 이번 주 설교 준비 전에는 바로 이 목사님께 편지를 보냈습니다. 척박한 목회 현장에서 아픔 가운데 목회를 하시며 일년에 두번씩 꼬박 꼬박 보내시는 모습이 올해는 더 가슴에 깊게 닥아 왔고, 저의 편지가 도저히 감사의 표현을 다 할수 없다고 생각해서 이번에는 교회에 감사헌금을 보내드렸습니다. 작은 고통에 동참하려고…. 물론 빌립보서와 같은 편지를 쓰려면 $500은 감사헌금을 드려야 하는데 그렇지는 못했습니다.

 

한편 오늘 설교 준비를 하면서 저의 모습과 이 목사님의 모습을 비교해 보았습니다. ‘이 분은 어려운 목회를 하면서 왜 일년에 두번씩 그것도 항상 먼저 카드를 보내시나…?’

해답은 쉽게 나왔습니다. 늘 그리스도의 종 됨을 저 보다 더 강하게 느끼고 사시는 분이십니다. 아울러 디모데와의 깊은 교제가 있으실 분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사람 냄새가 나기 시작할 때 멈추는 교제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동역하는 동역자가 있는 분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요즘 소그룹 성경공부에서 야고보서를 배우는데 오늘은 특별히 욥의 인내에 대해서 나누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욥의 인내’ 하면 몸에 진창이 나서 기왓장으로 긁는 것이 제일 먼저 떠오르는데, 실은 욥기 전체를 보면 가장 많이 차지하는 것은 친구들과의 관계입니다. 세 친구들이 와서 욥을 정죄합니다. 인간 냄새 나는 친구들을 끝까지 참고 끝으로 축복하는 것이 욥의 인내의 정수입니다.

 

이 분은 이런 인내의 목회를 하시는 분임을 더욱 확신케 되었습니다.

 

아울러 편지를 쓰면서 느낀 것은, 고통 가운데 있는 ‘너’가 ‘나’가 되고 ‘나’가 ‘너’가 되는 것이 바로 주님 안에서 누리는 최고의 축복인 것을 새삼 느껴 보았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빌립보서를 주석한 분이 다음과 같은 글로 주석을 시작하였습니다.

“사도바울의 기대와 달리 이 편지는 오고가는 수많은 시대의 수많은 심령에게 쓰여진 것이다.”

곧 사도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쓴다고 썼지만 그의 기대와는 달리 빌립보서는 시대를 초월해서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고백하는 수많은 심령들에게 큰 용기를 주고 그래서 고난 가운데 감탄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임을 오늘 이시간 우리들에게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빌립보서를 통해 감동을 받는 자들은 편지를 쓰게 되지 않을까요?

 

그러므로 빌립보서는 우리로 하여금 편지를 쓰게 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종된 삶을 새롭게 살게 합니다. 아울러 동역자들과의 아름다운 관계를 새롭게 가꾸게 합니다. 이 때 우리의 손은 어느덧 펜을 들고 있을 것입니다.

 

아마 빌립보 교인들은 감옥에서 보낸 편지를 읽고 크게 감동을 받고 사도바울을 본받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들도 편지를 쓰는 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에게 오래 잊혀졌던 사람들에게,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에게,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에게, 감옥을 갇힌 사람들에게….

그들은 아름다운 ‘너’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번 빌립보 강해를 마치면 모두 편지를 쓰는 축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고난 가운데 쓰닌 편지는 놀라운 위력을 가집니다. 빌립보서처럼…

 

말씀을 거둡니다.

제가 존경하는 목회자 중 최근에 하늘나라 가신 분은 유진 피터슨 목사님이 계시고, 오래 전 하늘 나라 가신 분은 Jonathan Edward목사님이 계십니다.

 

이 두 분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물론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대표적인 것이 이 두 분은 목회하면서 늘 그 지역 목회자들과 함께 공부하였습니다. 1 주일에 한번씩 만나서…. 곧 이 두 분은 이 당시 자기들이 사는 마을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말씀이 무엇인지 함께 고민하고 연구하는 목사님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지금까지 큰 자취를 남기시지 않았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들은 서로가 디모데가 되고 바울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이분들의 글과 편지는 지금도 큰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그리스도의 종이었고 아울러 서로의 종이었고 마지막으로 성령의 도우심으로 교인들의 종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이젠 우리가 안 믿는 자들과 소외된 자들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도바울과 디모데를 닮아 가십시다. 그들의 편지를 흉내내십시다. 안 믿는 자들에게도 사회적으로 잊혀진 자들에게도 편지를 쓰십시다.

 

우리 모두의 ‘너’인 사도바울은 말씀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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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Title Writer Date
394 “편지하노니…” 빌립보서 1:1-2 (2025/5/18) webmaster 2025.05.19
393 “마지막을 기다리라” 다니엘 12:1-4, 13 (2025/5/11) webmaster 2025.05.12
392 “그의 종말이 이르리니…” 다니엘 11:40-45 (2025/4/27) webmaster 2025.04.28
391 “평안하라 강건하라 강건하라” 다니엘 10:16-21 (2025/4/20) webmaster 2025.04.21
390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다니엘 9:16-19 (2025/4/13) webmaster 2025.04.14
389 “성소가 정결케 되리라” 다니엘 8:9-14 (2025/3/30) webmaster 2025.03.31
388 “인자 같은 이” 다니엘 7:9-14 (2025/3/23) webmaster 2025.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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