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 –
(빌립보서 1:3-11)
이영길 목사
지난번 첫번째 빌립보서 강해 설교시 말씀드린 것 같습니다. 빌립보서 강해를 마치면 우리 모두의 손에 펜이 들려지고 이웃에게 편지를 쓰게 되길 바란다고….
이 시간 먼저 세기적으로 유명한 편지를 주고 받은 형제들의 편지를 소개합니다. 잘 아시는 고흐와 동생 테오간에 주고 받은 편지가 있습니다. 바울과 디모데의 관계를 고흐와 동생 테오의 편지에서 찾아 볼수 있었습니다.
사실 형이 많은 편지를 동생에게 보냈고 동생도 간간히 형에게 보냅니다. 거의 초기에 형이 동생에게 보낸 편지가 있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지금은 편지로 이야기할 수밖에 없지. 될 수 있으면 많이 감탄해라! 많은 사람들이 충분히 감탄하지 못하고 있으니까.”
한편 아무리 그려도 팔리지 않고 늘 우울증에 시달리는 형에게 동생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긴 편지를 보냅니다.
“내가 형만큼 섬세하진 못하지만, 이따금씩 형이 느끼는 감정에 나도 함께 휩싸이면서 도저히 풀 길 없는 많은 생각들을 하게 돼. 용기를 잃지마, 형. 그리고 내가 얼마나 형을 그리워하는지 잊지 말길.”
이들의 편지를 요약하면, 형은 동생에게 말합니다.
“감탄하라.”
동생은 형에게 말합니다.
“용기를 잃지마.”
이런 편지 왕래 없이 오늘의 고흐가 있을까요? 사실 가까운 Museum of Fine Arts에도 여러 점의 고흐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 작품들이 그곳에 전시될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형제지간의 편지가 아니었을까 생각이 듭니다. 곧 그들의 편지가 고흐로 하여금 인류 역사상 손꼽히는 걸작들을 남기게 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는 놀라운 예술가로 아름다운 작품을 남기게 된 것입니다. 창작의 대가가 된 것입니다.
고흐와 하나님을 비교해서 죄송스럽지만,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시고 지금도 구원의 사역을 통해 창조의 일을 계속하시는데, 창조의 하나님은 구원 사역을 위해 무엇이 필요하실까요?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니 그 무엇도 필요하지 않으실까요? 말씀을 상고하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본문 말씀을 상고하기 전 지난번 첫번째 빌립보 강해 설교시 나눈 말씀을 다시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의 모습을 짧은 인사를 통해서 보여 주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특히 ‘너’와 ‘나’의 관계로 소개해 드렸습니다. ‘너’는 곧 ‘나’가 된다는 뜻으로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에게는 세 분의 ‘너’가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첫번째 ‘너’는 주님이십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피가 자기 자신 안에 흐르고 있고 바로 그리스도를 바라 보면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였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두번째 ‘너’는 함께 동역자인 디모데였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젊은 디모데의 희생적 모습을 통해 늘 용기를 얻으며 젊고 씩씩하게 자신의 모습을 가꾸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세번째 ‘너’는 사도바울의 편지를 받는 빌립보 교인들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을 위해 축복하며 기도할수록 더욱 축복을 받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지금 빌립보서를 쓰고 있는 바울의 모습은 이 세 가지 ‘너’가 ‘나’가 되어 있는 모습입니다. 빌립보서 구석 구석에 이 바울의 바울됨이 쭉 깔려 있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당연히 이 바울의 모습을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더 구체적인 자신의 모습을 보여 주면서 한편으로는 귀한 멧세지를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3, 4절,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먼저 사도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위해 감사하며 간구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감사와 간구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종이 된 바울 그리고 디모데와 피로 맺은 동역자가 된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생각하며 감사할수 밖에 없었습니다. 간구드릴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이유를 5, 6절에서 밝힙니다.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어떻게 보면 5절은 감사하는 이유이고, 6절은 간구하는 이유라고 생각해도 좋을줄 압니다. 우선 5절 말씀을 통해 알수 있는 것은 사도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첫날부터 지금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어서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감사할수 밖에 없는 이유는, 지난번에 나눈 빌립보 교회의 배경을 생각하면 쉽게 알수 있습니다. 다시 간단히만 설명하면…, 사도바울은 세계 전도 여행을 세 차례 했습니다. 그중 빌립보 교회는 2차 전도 여행 때 세워진 교회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제대로 전도여행을 시작한 것은 2차 전도여행이라고 생각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1차 전도여행은 사도바울이 바나바와 소아시아를 짧게 다녀 옵니다. 이 때 디모데를 제자로 삼게 됩니다.
곧 1차 선교여행은 어떻게 보면 훈련용이었던 것 같습니다. 본격적인 선교여행은 2차부터 시작되는데 그 중 제일 첫번째 교회가 바로 빌립보 교회인 것입니다.
곧 빌립보 교회는 유롭에 처음 세워진 교회이니 본받아야 할 교회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빌립보 교회는 세워지자마자 사도바울을 도와 선교에 앞장 서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니 사도바울에게는 빌립보 교회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교회였던 것입니다. 지금 감옥에 갇혔어도 빌립보 교회를 생각하니 저절로 감사가 흘러 나오는 것입니다. 이에 사도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생각하면서 감사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를 생각하면 한국의 최초의 교회인 소래교회가 생각납니다. 황해도 작은 마을에 세워진 교회인데, 세워지자마자 전도를 열심히 했습니다. 멀리 알메니아와 인도에 구호금도 보냈습니다. 빌립보교회도 그랬을 것 같습니다. 이에 감사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어느 기도에 대해 글을 쓴 분은 감사가 최고의 기도라고 표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곧 사도바울은 최고의 기도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감사의 기도는 곧 간구의 기도로 바뀝니다.
사도바울은 짧은 오늘 본문 말씀에서 두 가지 비슷하지만 다른 단어를 사용합니다. 4절에서는 ‘간구’, 9절에서는 ‘기도’.
간구와 기도를 칼 베듯이 구분하기는 어렵지만 간구는 특별히 눈에 띄게 부족한 것을 채워달라는 뜻으로 사용된다고 합니다.
사실 빌립보 교회는 정말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사랑스러운 교회였지만 아무리 사랑스러워도 부족한 것은 당연히 있습니다. 특히 빌립보 교인들에게는 현재 갈등이 좀 있었습니다. 6절 말씀을 보면 사도바울의 고뇌를 느낄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잘 알고 있습니다. 교회가 세워지자마자 복음 전파에 앞장 선 멋진 교회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 안에서 하나님께서 착한 일을 시작하셨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갈등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은연 중 말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나와 디모데도 여러 가지 어려움을 거쳤고 갈등도 있었지만 잘 이겨내고 함께 복음을 위해 섬겼습니다. 여러분도 하나가 되어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착한 일이 주님의 날까지 이루게 될 것을 확신합니다.”
한편 사도바울이 이와 같은 확신을 가질수 있었던 이유가 있습니다. 7절,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
사도바울의 신학을 한 글자로 표현한다면, ‘은혜’입니다. 사도바울이 빌립보서를 시작하면서 자신을 소개할 때 첫 문구가,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입니다. 자기와 같은 살인자가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다는 것이 바로 ‘은혜’였습니다.
신학자들은 사도바울의 신학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난 사건에서 시작되었다고 설파합니다. 살인자 사울에게 찾아 오셔서 사도바울 곧 그리스도의 종이 되게 하신 것이 바로 ‘은혜’라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경험이 바울의 신학의 핵심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모든 믿는 자들이 이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곧 살인자를 그리스도의 종으로 삼으시는 하나님께서 부족한 자들을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그중에 대표적인 그룹이 바로 빌립보 교인들인 것입니다.
그러니 사도바울은 이 은혜를 받은 자들을 위해서 마음껏 감사와 간구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자기와 같은 은혜 받은 자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8절 말씀에 잘 드러납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사도바울은 디모데와 깊은 연민의 감정을 갖고 있었습니다. 동역자로서…. 그런데 그 아름다운 관계가 비록 지금은 갈등 가운데 있지만 함께 은혜 받은 자들인 빌립보 교인들과도 나누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디모데 못지 않은 깊은 연민의 정을 느끼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연민의 마음은 또다른 기도로 인도합니다. 9절 이하,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사실 바울은 함께 은혜를 받고 있는 빌립보 교인들을 위해 기도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기도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빌립보 교인들도 함께 기도하는 자가 될 것을 은연중에 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들의 기도를 필요로 하십니다. 우리들의 기도는 곧 하나님께 보내는 편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편지 곧 우리의 기도를 통해 당신의 위대한 창조 사역과 더불어 구원 사역을 펼치십니다.
얼마전 한번 소개해드렸습니다. 어릴 때 집이 가난해서 세 형제 중 자기가 가운데인데 어쩔수 없이 권사님댁에 3년간 살다고 온 최상훈 목사님이야기를 말씀드렸습니다. 그 분의 책에 보니 시편 109:4절을 소개하는데 한글 번역은 “나는 기도할 뿐이라”로 되어 있는데 원문을 직역하면 “나는 기도이다”라고 번역되어 있다고 쓰신 것을 보았습니다. 사도바울은 지금 빌립보 교인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듯 합니다.
“나는 기도이다.”
한편 사도바울은 자신을 본받아 빌립보 교인들에게도 권하는 것입니다.
“너희도 기도가 되어라.”
그런데 사도바울이 이렇게 고백할수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아마 사도바울은 세번의 선교 여행 중 여러번 많은 어려움을 겪었을줄 압니다. 그래서 고난 중에 깊은 기도에 잠기기도 하였을줄 압니다.
그러던 중 놀라운 장면을 보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지금도 하늘 보좌 옆에서 기도하시는 주님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로마서 8:34절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사도바울은 부활 승천하신 주님이 지금도 기도하고 계심을 본 것입니다. 이 주님의 모습을 생각하며 사도바울은 기도의 사람이 되어 갔던 것입니다. 아니 기도 자체가 되어 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기도하는 모습을 먼저는 디모데와 나누었을 것입니다. 서로 기도의 동역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는 빌립보 교인들에게도 기도의 동역자가 되길 원해서 기도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 가지 궁금한 생각이 듭니다. ‘요즘 디지털 시대에 우리 자신이 기도가 되는 것은 어떤 것일까….’ 사도바울이 요즘 우리들과 함께 지난다면 사도바울은 어떤 기도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 줄까요?
얼마전 미주 크리스챤 신문에 좋은 기사가 났습니다. ‘요즘 AI시대에 어떻게 지혜로운 교회가 될까’라는 주제로 쓴 글입니다. 저자는 디지털 기술은 시간을 파괴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자기가 원하는 시간에 자기가 원하는 정보를 얻고 만난다는 것입니다. 결국 저자는 주장합니다.
“시간을 만들라.”
“매일, 매주, 그리고 매년 당신의 삶에 리듬을 심으라. 이러한 리듬은 당신으로 하여금 교회, 하나님 그리고 세상을 더 깊이 알아가도록 도와준다.”
의학을 공부했던 사람으로써 드리고 싶은 말씀은 우리들의 몸은 시계입니다. 자기 나름대로 규칙적으로 움직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잠 잘 때와 식사할 때와 일할 때와 운동할 때…. 자기나름대로 시간에 따라 규칙적으로 움직이기를 원합니다.
기도도 매한 가지입니다. 우리 몸은 규칙적인 시간에 우리가 무릎 꿇고 기도하길 원합니다. 그 때 기도가 제일 잘 됩니다.
이처럼 정해진 시간에 기도하는 모습을 하나님도 원하시지 않으실까요? 각자의 기도 습관을 함께 나눌 때 우리는 서로에게 아름다운 ‘너’가 되고 ‘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 한 가지 말씀드리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바울의 중보의 기도입니다. 중보의 기도까지 가기 어려운 분들은 오늘 말씀이 좀 와 닿지 않으실수가 있습니다. 다음의 말씀이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나는 기도이다’ 말씀하신 최상훈 목사님은 교회 표어가,
“1시간 기도하면 시험을 이기고, 2시간 기도하면 능력을 받고, 3시간 기도하면 크게 쓰임 받는다.”
사실 본인은 어릴 때부터 하루 서너 시간씩 기도하였고 그 때 드린 기도 그 때 저축한 기도를 요즘 찾아 쓰신다고 고백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요즘 시간이 파괴된 때에 3시간은 커녕 1시간도 어렵지 않습니까? 그래서 제가 한 가지 제안을 드립니다.
함께 합심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두 세 시간까지 기도 안 하셔도 놀라운 일을 해낼수 있습니다. 구역원들간에, 소그룹 성경공부에서, 위원회 별로, 부서별로, 기도의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신듯 합니다. 마태복음 18: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저는 이렇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루 30분씩 기도하시는 세분들이 1주일에 한번씩 만나 합심 기도를 드린다면, 세배가 됩니다. 어느덧 1시간 30분을 기도한 효과가 생깁니다. 네 분이 만난다면, 2시간 기도한 효과가 생깁니다.
교우 여러분, 공동체가 함께 드리는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새로운 역사가 새로운 미래가 펼쳐지게 하십니다. 우리는 기도이고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받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들의 기도를 가지고 착한 일을 이루어 가십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아프리카 최악의 독재자로 악명을 떨쳤던 우간다의 전 대통령 이디 아민이 있습니다. 그는 구테타로 정권을 잡고 교회를 악랄하게 핍박했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을 학살했습니다. 당시 우간다 교회는 이런 박해를 이겨내기 위해 처절하게 기도했습니다. 이 당시 가장 큰 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키파샘판디 목사가 있었습니다.
1973년 부활절 아침에 총으로 무장한 암살단이 교회당으로 몰아쳤습니다. 그리고 목사님께 총부리를 겨눴습니다. 그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이제 내가 잠깐 기도하겠습니다. 그 다음에 죽이세요.” 말했습니다.
“여기 이 사람들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불쌍히 여기시고 이 죄를 용서하소서.”
그랬더니 암살단이 자신들을 위해 기도해 줘서 고맙다고 하고 그냥 가버렸다고 합니다.
결국 목숨을 건 결사적인 기독교인들의 기도로 현재 우간다는 기독교 신자 80%인 기독교 국가로 발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우리들의 기도를 필요로 하십니다. 그 기도로 당신의 선한 일들을 완성시키십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 모두 기도가 되십시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