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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를 주신 이유” 빌립보서 1:27-30 (2025/6/15)

약 2년전에 저의 신학교 친구 부부가 보스톤을 방문했었습니다. 고향이 켄터키인 백인 친구입니다. 친구는 졸업하자마자 중동지방에 선교사로 떠났습니다. 거의 40년간 선교사로 섬기고 있는 훌륭한 친구입니다.

졸업 후 처음 만났고 특히 보스톤을 방문하였기에 Plymouth를 방문하여서 메이플라워호를 들어가 보게 하였고 그리고 민속촌이라고 할수 있는 plantation을 돌아 보았습니다. 무더운 날씨라서 저는 빨리 둘러 보고 차로 돌아오길 원했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는 한 없이 머무르길 원하는 눈치였습니다. 그곳에 있는 청교도 복장을 하고 안내하는 백인들과 계속 대화를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제가 너무 오래 기다린다고 생각했는지 plantation을 아쉬운 마음으로 떠나면서 하는 말,

“다음에 와서는 하루 종일 머무르고 싶네….”

저는 그 말을 들으며 좀 의아해했습니다.

“뭐 볼 것도 별로 없는데 기껏 필그림들이 살던 집 모양을 흉내낸 가짜 집들이 10개도 안 되는데 뭐가 또 오고 싶을까…?”

그후로는 외부에서 손님이 와서 그곳을 방문할 때면 그 친구 생각이 나곤합니다. 그러면서 요즘은 이런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이곳이 이 친구의 마음의 고향 중 하나이구나. 물론 첫번째로는 자기가 태어난 켄터키, 두 번째로는 바로 자신의 조상들이 유롭을 떠나 처음으로 도착한 Plymouth,….’

이곳에서 친구는 상상의 날개를 펴며 처음 도착한 조상들의 모습을 만났던 것 같습니다.

 

오늘도 빌립보서 강해를 계속합니다. 사도바울은 지금 로마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감옥에서 그토록 보고 싶고 가보고 싶은 곳이 어디일까요? 아마도 둘째 가면 서러운 곳이 빌립보, 그 중에서도 빌립보 교회가 될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유롭에서 세운 첫번째 개척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뿐이 아닐줄 압니다. 저는 평생에 보스톤 한인 교회에 오기 전 다섯 교회를 다녔었는데 모두 특징이 있고 기억나는 모습이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빌립보 감옥에서 있었던 놀라운 일이 생각나곤 했을 것입니다.

혹시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말씀드리면, 바울이 실라와 함께 여종을 괴롭혔던 귀신을 쫓아 냈는데 이로 인해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여종은 귀신의 힘을 빌어 점을 쳤고 이에 여종의 주인이 고발해서 감옥에 갇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찬양과 기도를 드리던 중에 감옥문이 열리고 착고가 풀어지는 기적을 체험합니다.

이처럼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생각하면서 감옥에 갇혀 있어도 그 때 생각에 미소를 머금곤 했을줄 압니다.

 

이렇게 빌립보 교인들을 그리워 하는데, 어느 날 놀라운 선물을 받았습니다. 물론 언젠가 시간이 되면 다시 나누겠지만, 에바브로디도 편으로 빌립보 교인들에게 귀한 선물을 받았었습니다. 이에 선물에 대한 감사한 마음도 전할 겸, 더 중요한 것은 늘 마음 속으로 그리워하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안부와 함께 꼭 전하고 싶은 권면도 전할 겸 편지를 쓰게 된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후에 감사의 마음만 전하면 되지 비싼 돈을 드려 편지를 썼을리가 없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 본문 말씀은 비교적 앞에 나오니 사도바울이 꼭 들려 주고 싶은 말씀중 첫번째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본문 말씀을 살피기 전에 26절까지를 잠시 요약해 드리면…. 늘 말씀드립니다. 반복이 중요합니다.

1-2절 말씀에 사도바울은 자신의 모습을 소개합니다. 그리스도의 종이고, 디모데와 동역자이고, 빌립보 교인들을 섬기는 자신의 모습을 소개합니다.

그리고는 3-11절까지는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한편 지난 주에는 21절 말씀을 통해서 사도바울의 자신의 평생 꿈을 소개해 드렸습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그리고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그토록 사랑하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꼭 하고 싶은 권면의 말씀을 시작합니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아마 대부분의 한글 성경에는 ‘생활하라’에 footnote가 달려 있을 것입니다. 저의 성경에는 4)로 써 있고 아래 footnote를 보면 ‘또는 시민 노릇’으로 써 있습니다. 곧 이렇게도 해석이 가능합니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시민 노릇하라.”

제가 요즘 두권의 주석책을 참고로 말씀을 준비하고 있는데 두 주석가 모두 ‘시민 노릇하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헬라어로는 ‘폴리튜에스테’인데 첫 ‘폴리’는 ‘폴리스’ 경찰이 아니라 ‘도시(민주적)’를 뜻합니다.

저는 링컨의 말을 빌어 이렇게 풀이 해 볼수 있었습니다.

“너희는 거룩한 공동체의 공동체에 의한 공동체를 위한 삶을 살아라. 이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복음적 삶이다.”

 

자, 그러면 여기서 이런 궁금증을 갖게 됩니다. 왜 사도바울은 그 아름답게 보이는 빌립보 교회에게 시민적 공동체를 강조하는 신앙인이 되라고 부탁하고 있을까…? 이 궁금증을 안고 계속 말씀을 살펴 보겠습니다.

 

실은 이어지는 27절 하반절과 28절 말씀이 저의 해석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고 봅니다. 27하반절,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사도바울은 한 마음, 한 뜻을 강조합니다. 이는 사도바울에게 있어서 신앙의 본질은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곧 ‘공동체의 공동체에 의한 공동체를 위한’ 것이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좀 감이 잡힙니다. 한 마음 한 뜻을 강조한다는 것은 교회 안에 좀 의견 충돌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대로 공동체가 되는데 큰 방해가 되는 것 같습니다. 사도바울은 공동체가 주님의 사역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얼마전 교육3부 주관으로 선교세미나를 줌으로 열었습니다. 저도 많은 도전을 받았습니다. 다음 편이 기다려지고 있습니다. 한번 듣고 나면 얼마 지나면 곧 잊어 버리기가 십상인데 지금까지 제 머리에 맴도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제 기억에서 말씀드리니 좀 착오도 있을줄 압니다만 양해하고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요즘 이슬람이 급속도로 커지고 있는 것 잘 아실줄 압니다. 그 중 대표적인 나라가 인도네시아인데, 한국 선교사들이 인도네시아에 많이 나가 계신줄 압니다. 어느 선교사가 그곳 이슬람 지도자 중 한 사람, 곧 이맘에게 열심히 신구약을 신학적으로 꿰뚫어 가면서 말씀을 전하셨다고 합니다. 열심히 다 듣더니 마지막으로 하는 말이…,

“나에게 기독교의 공동체를 보여 주세요.”

실은 이슬람은 기독교 보다 훨씬 탄탄한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Ummah라고 합니다. 코란에 근거해서 철저하게 움마라는 공동체가 형성되는데 우리는 교회라고 하지만 움마에 비하면 너무도 허술한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씀을 설교 시간에 드리는 것도 좀 아슬아슬한데, 어떤 선교사들은 이슬람교도들을 선교하러 갔다가 도리어 선교를 당하는 분도 계시다고 합니다. 가장 큰 이유는 Ummah와 비슷한 공동체를 교회에서는 찾아 볼수가 없어서….

 

어느덧 자본주의에 물든 교회는 더 이상 신앙공동체가 아닌 개개인의 개개인에 의한 개개인을 위한 종교 단체가 된 것이 아닌가 깊은 성찰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공동체의 중요성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사도바울은 사랑하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위대한 신앙 공동체를 세워 나가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28절,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

 

간단히만 요약하면 이제는 움마에 속한 자들이나 이와 비슷한 그룹의 사람들이 하나님께 무릎을 꿇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참 진리의 공동체가 주님을 믿는 공동체임을 깨닫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자신들 안에 남은 것은 멸망임을 알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런 공동체가 될 것을 곧 모두가 시민 노릇하는 공동체가 될 것을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어서 신앙적 시민 공동체에 필요한 것을 알려줍니다. 29절,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에 사도바울의 천재성이 드러납니다. 이 것을 설명하려고 사도바울은 시민 정신을 강조하는 단어를 사용한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기독교 시민의 개념으로 해석해 드리고 있는데, 사도바울은 기독교 시민의 특징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는 주님을 믿는 것이고 또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이라고….

 

사실 민주 시민들에게 있는 특징 두 가지가 있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배워 온 것입니다.

권리와 의무.

기억나는 몇 가지만 나열하면 표현의 자유, 직업의 자유 등 많은 권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권리만 있나요? 또한 의무도 있습니다. 납세의 의무, 국방의 의무 등….

만일 시민이 권리만 주장하고 의무를 이행하지 않으면 그 나라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생존 불가로 될 것이 뻔합니다.

 

이는 신앙 공동체도 매한 가지라는 것입니다. 사실 빌립보도 하나의 작은 도시 국가 였습니다. 이 작은 도시 국가가 여러 가지 이유로 잘 성장하고 있었는데, 이유는 시민들이 권리와 함께 의무도 잘 이행했기 때문입니다.

이 도시 국가 빌립보를 생각하면서 지금 사도바울은 신앙공동체 빌립보 교인들에게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너희의 권리 마음껏 누려라…, 그러나 의무 또한 꼭 실행하여라.”

 

그런데 어쩐 일인지 사랑하는 빌립보 교회에 다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30절,

“너희에게도 그와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이제 궁금증이 확 풀리는 것 같습니다. 시민 정신을 강조하다가 불현듯 왜 ‘싸움’이야기를 하나요? 실은 이들에게 싸움이 있었습니다. 무슨 싸움이냐 하면 믿음과 고난의 충돌입니다. 아니 권리와 의무의 충돌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좋아 보입니다.

사도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는 것에 회의를 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곧 의무는 등한시하고 권리만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의 시작은 사도바울이 늘 생각하면서 은혜를 받았던 빌립보 교회 하면 생각나는 그 놀라운 은혜의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곧 빌립보 감옥에서 있었던 그 기적과 같은 사건입니다. 그 때는 세상을 뒤짚는 놀라운 사건이었고 그로 인해서 빌립보 교회는 더욱 왕성하게 성장했겠지만, 이제는 그 위대한 사건이 발목을 잡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빌립보 교인들도 늘 그 때 그 일을 생각하면서 늘 힘을 얻고 있었고 늘 자부심마저 갖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사도바울은 로마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지 모릅니다.

‘그 때 놀라운 역사를 행하신 하나님께서는 왜 사도바울을 풀어주시지 않으실까?’

 

사실 빌립보 교인들이 이 두 가지 사건 곧 빌립보 감옥에서 일어난 일과 현재 로마 감옥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으로 인해 그 안에서 늘 의견 충돌이 생겼던 것입니다. 이를 너무나 잘 알기에 사도바울은 이렇게 정리합니다.

사도바울은 은연중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때는 믿음으로 인한 권리를 누리게 해 주신 것이고, 지금은 믿는 자들의 의무인 고난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 모두 은혜이다.’

 

이로서 알수 있는 것은 이 두 가지 큰 사건으로 인해서 어느덧 교회는 갈등 가운데 있었고 어느새 하나가 되는 시민 정신이 사라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곧 사도바울이 시민 공동체라는 주제로 믿음과 고난을 언급하는 깊은 이유가 있습니다. 시민 정신을 강조하는 이유는 작은 시민이 되어서 작은 의무를 실행하다 보면 더 큰 의무도 감당하는 자들이 됨을 은연중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작은 이웃을, 작아 보이는 어린아이를 귀하게 여길 때 정말로 큰 일을 이루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루 아침에 고난도 받는 자가 될 것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작은 신앙공동체의 시민이 되어 의무를 하나 하나 감당하는 것이 은혜의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반면 한 때 큰 일을 했던 것에 집착하게 되면 더 이상 작은 일에 대한 의무는 무시한 채 엉뚱한 착각 가운데 산다는 것입니다.

 

오래전 흑인 노예가 성행할 때 많은 백인교회가 전세계로 선교사들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칼하게도 가까이 사는 흑인들의 인권은 무시하였습니다. 큰 선교만 생각했고 작은 자들을 무시한 참된 시민적 신앙인들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보면, 요즘 이슬람의 위협이라는 거대한 과제가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데 이도 아주 쉬운 일상 생활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인터넷으로 인한 과잉 정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어느 학자는 이런 과잉정보 시대에 사는 자들의 특징 중 하나가 ‘지역 사회를 등한시하기’라고 주장합니다. 너무 글로벌한 시대, 아니 화성까지 유튜브로 찾아 보면서 연구하고 걱정하는 시대에 살다 보니 바로 이웃을 만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오늘날 대중 매체 환경으로 인해서 21세기를 사는 평균 젊은이는 지역 정치보다 국가 정치에 대해 훨씬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다. 대선 후보와 대법원 사건에 대해서는 강력한 의견을 가지고 있지만, 정작 자기가 사는 도시의 시장이나 시의원은 이름 조차 모른다. 주변 지역 사회가 직면한 가장 시급한 과제가 뭔지는 관심도 없다.”

또한 그는 다음과 같은 질문도 합니다.

“경찰의 잔혹 행위에 항의하는 수백만 명의 Z세대 중 과연 몇 명이나 자기 동네에 사는 경찰관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을까?”

 

인터넷은 우리로 하여금 큰 유익도 주었습니다. 그래서 온라인 선교 세미나도 가질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편 인터넷은 우리의 공동체를 파괴시킵니다. 공동체를 파괴시키지 않는 한 인터넷은 너무도 유익한 것입니다.

 

이런 결론을 내릴수 있습니다. 우리는 인터넷을 잘 사용해야 합니다. 아울러 전보다 더 가깝게 이웃을 만나야 합니다. 인터넷을 사용한만큼 in person으로 이웃을 만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터넷의 권리를 누림과 함께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의무를 감당하는 것이 아닐까요?

이 때 우리는 안 믿는 자들에게는 멸망의 증거가 되고 믿는 자들에게는 구원의 증거가 되는 삶을 살게 될줄 압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이슬람의 확장을 막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므로 오늘날 사도바울이 보스톤에 사는 우리에게 편지를 쓴다면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쓰지 않을까요?

“권리 곧 표현의 자유, 주거의 자유 등 모든 자유를 누리세요. 그러나 의무도 소중합니다. 가까운 이웃에게 의무를 다 하십시오. 이 때 든든한 신앙적 시민 공동체가 되어 갑니다. 움마를 이기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이유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고난이라고는 할수 없지만 작은 의무를 감당했던 저희 집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최근에 저희 앞 집에 튀르키에 사람이 이사를 왔습니다. 주차장에서 자신이 즐겨 타고 있는 mountain bicycle을 씻고 있어서 처음으로 인사를 나눴습니다. 제가 코리안이라고 하니 이 분도 튀르키에와 코리아는 형제 국가라고 좋아했습니다. 물론 저는 목사이고 저의 가족에 대해서 간단히 소개하고 인사를 마쳤습니다. 그 다음 날 집사람이 사온 케잌를 환영한다면서 선물했습니다.

 

얼마후 주일 저녁에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서 문을 열었더니 맛있는 튀르키에 디저트를 들고 서 있었습니다. 오전에 왔었는데 아무도 없어서 그냥 갔다고 하면서 제가 목사이니 교회 갔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저녁에 다시 왔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의 종교는 물어 보진 않았습니다. 주일에 집에 있었던 것을 봐서 교회는 다니지 않는듯 합니다. 그래도 저는 제가 목사라고 말한 것을 잘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제가 할 작은 의무를 다 한 것이라고 봅니다. 물론 이 것은 작은 시작에 불과하겠지만….

권리와 함께 의무를 다 하십시다. 멋진 기독 시민이 되십시다.

 

주님께서도 작은 어린 아이들을 영접하셨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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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7 “은혜를 주신 이유” 빌립보서 1:27-30 (2025/6/15) webmaster 2025.06.16
396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빌립보서 1:12-21 (2025/6/8) webmaster 2025.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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