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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4일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여호수아 14장 6-15절

김지하 시인의 ‘틈’이라는 시입니다.

 

아파트 사이사이

빈틈으로

꽃샘 분다.

 

아파트 속마다

사람 몸속에

꽃눈 튼다

 

갇힌 삶에도

봄 오는 것은

빈틈 때문

 

사람은

 

새 일은 늘

틈에서 벌어진다.

 

 

기억나시는 분들이 계시겠습니다만 작년에 한번은 저희 집 뒷마당에 자라고 있는 뽕나무를 사진으로 보여드린적이 있습니다. 아스팔트와 돌축대 사이의 틈을 비집고 나와서 자란 자랑스런 뽕나무입니다. 올 해도 뽕나무 잎이 푸르게 나고 있습니다. 그 뽕나무를 볼 때 마다 언제나 생각하는 것은 작은 틈 사이를 비집고 나왔지만 씩씩하게 자라고 있는 것이 대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김지하 시인도 틈의 소중함을 잘 아는 분이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틈’ 이라는 멋진 시를 쓴 것 같습니다. 시인도 저희 집 뒷 마당의 뽕나무와 같이 멋진 삶을 사신 분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는 감옥이라는 틈 가운데서 도리어 엄청 커 가신 분입니다.

요즘 젊은 세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많은 분들이 김지하 시인을 저항시인으로 알고 계실줄 압니다. 곧 오랜 시절 감옥에서 지낸 분이십니다. 감옥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셨기에 저는 이 시에서도 감옥을 언급하실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아파트를 먼저 언급하십니다.

 

아파트 사이사이

빈틈으로

꽃샘 분다.

 

아파트 속마다

사람 몸속에

꽃눈 튼다

 

아파트는 어떻게 보면 감옥과는 좀 대조적인 느낌을 주는 곳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시인은 아파트 사이 사이에 부는 꽃샘 바람을 느끼고 있습니다. 아파트 틈 사이로 부는 바람으로 인해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 몸속에 꽃눈이 튼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인이 아파트 사이사이를 광장으로 보지 않고 빈틈으로 보는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다음 소절에서 본인의 정체가 드러납니다.

 

갇힌 삶에도

봄 오는 것은

빈틈 때문

 

시인은 감옥에서도 봄을 맞이하곤 했던 것입니다. 빈틈 때문에…. 아마 감옥에서 빈틈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아파트 사이를 광장으로 보지 않습니다. 빈틈으로 봅니다. 그것을 틈으로 보기에 안에 사는 사람들에게 무진장한 소망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끝으로 고백합니다.

 

사람은

 

새 일은 늘

틈에서 벌어진다.

 

오늘 오순절 성령강림주일로 지킵니다. 어떻게 보면 역사의 한 틈의 이야기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2000년전 마가의 다락방에 120명이 모여서 무엇인가를 바라고 열심히 기도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마가의 다락방이라는 틈을 통하여 놀라운 바람이 온 세계에 불었습니다. 성령의 바람이 불었습니다. 그래서 온 세상에 따뜻한 봄이 찾아 온 것입니다. 성령도 틈을 좋아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마가의 다락방이라는 틈을 통하여 바람으로 불어 오신 성령께서는 지금도 틈 사이로 세상 가운데 임하시지 않으실까요? 요즘은 어떤 틈을 통하여 성령은 역사하실까요?

김지하 시인이 한 실마리를 주고 있다고 봅니다.

“사람은

틈”

곧 사람을 통해서가 아닐까요? 2000년전에는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사람들을 통해서 성령의 바람은 불어 왔습니다. 그렇다면 성령은 지금도 사람이라는 틈을 통해서 세상에 불어 올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이 놀라운 역사의 틈이 될수 있을까요?

 

저는 역설적이지만 성령께서 좋아하시는 틈의 사람을 구약에서 찾아 보았습니다. 바로 오늘 봉독한 인물인 갈렙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물론 구약에서의 성령과 신약에서의 성령은 같으면서도 다른 면이 있습니다. 신학적인 말씀을 지세히 드릴수는 없습니다. 한 마디로 99%는 같다고 생각해도 무방하다고 봅니다. 갈렙의 모습이 바로 성령충만한 사람들의 모습이자 성령충만을 사모하는 자들의 모습이라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저는 얼마든지 성경 안에서 근거를 찾을수 있다고 봅니다. 간단히만 말씀드리면, 주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지상명령을 내리셨습니다. 마태복음 28:19, 20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들은 성령을 받기 전에 이미 이런 지상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지상명령을 감당할 힘이 없었습니다. 이 때 이들은 갈렙의 기도를 했을 것입니다.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드디어 마가의 다락방이라는 역사의 틈새로 성령께서 강림하셨습니다. 이제 120문도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성령 충만함 가운데 주님의 지상명령을 수행하기 시작합니다.

지상명령을 수행하면서 더 크게 이들의 가슴에는 갈렙의 노래가 울려 퍼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그러면 갈렙이 이 멋진 노래를 어떻게 해서 부르게 되었는지 본문을 상고하며 잠시 살펴 보겠습니다.

때는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40년을 마치고 요단강을 건너서 하나님께서 주신 가나안 땅을 점령하였을 때입니다. 모세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을 이끌고 있던 때입니다. 갈렙이 여호수아에게 와서 요구를 하는 장면입니다. 7절 말씀입니다.

“내 나이 사십 세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가데스 바네아에서 나를 보내어 이 땅을 정탐하게 하였으므로 내가 성실한 마음으로 그에게 보고하였고.”

모세가 출애굽한 후 12정탐꾼을 가나안 땅에 보내지 않았습니까? 그 중 긍정적인 보고를 한 사람은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이었습니다. 마치 갈렙은 혼자 모세에게 보고하는듯 말하는데 이유는 지금 이 말을 듣는 사람이 여호수아이기 때문입니다. 9절 말씀입니다.

“그 날에 모세가 맹세하여 이르되 네가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원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하였나이다.”

모세가 갈렙이 긍정적으로 보고한 것이 기특해서 약속을 합니다.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원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그리고 이를 여호수와가 함께 들은 것을 아니 자신 있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0절 말씀입니다.

“이제 보소서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모세에게 이르신 때로부터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방황한 이 사십오 년 동안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를 생존하게 하셨나이다 오늘 내가 팔십오 세로되.”

모세에게 그 약속을 받은지 45년이 지났습니다. 이제 갈렙의 나이는 팔십오세가 되었습니다. 팔십오세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계속 11절 말씀입니다.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도 내가 여전히 강건하니 내 힘이 그 때나 지금이나 같아서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으니.”

스스로 팔십오세 청년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전 어느 교우님댁에서 몇몇 분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어느 분이 스마트폰으로 방금 받은 좋은 소식이라면서 저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최근 UN에서 나온 자료라고 하면서 이제는 청년시기가 17-70세가 되었다고 말씀하시면서 저에게 보여주셨습니다. 70세 이하가 되시는 분들은 청년부 내지 부부청년부 회원이 될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갈렙은 70세도 아니고 85세가 되었습니다. 85세이지만 자기는 청년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장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12절 말씀입니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85세 난 갈렙이 지금 원하는 땅은 험한 산지입니다. 그곳에는 등치가 큰 아낙 사람들이 살고 있던 곳입니다.

사실 모세가 갈렙에게 어떤 약속을 하였습니까? 네가 험한 곳을 선택하면 그 땅을 주겠다고 약속하였습니까? 아닙니다. 갈렙이 믿음으로 긍정적인 보고를 한 것을 들은 모세는 어떤 땅이든 주겠다고 약속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85세가 되었으면 편한 곳을 달라고 해도 무관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갈렙은 이제 가나안 땅을 정복한 후 여호수아에게 말합니다.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그 결과 어떻게 되었나요? 13절 이하 말씀입니다.

“여호수아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을 위하여 축복하고 헤브론을 그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매 헤브론이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의 기업이 되어 오늘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음이라. 헤브론의 옛 이름은 기럇 아르바라 아르바는 아낙 사람 가운데에서 가장 큰 사람이었더라 그리고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

여호수아가 갈렙을 축복하였고 갈렙에게 헤브론을 줍니다. 아낙 사람이 많은 헤브론을 차지하게 되고 그 결과 그 땅에 전쟁이 그칩니다.

결국 가나안 땅에 마지막 승전고를 부르도록 한 사람은 85세된 갈렙입니다. 갈렙의 노래가 바로 가나안 점령을 완성 시킨 셈입니다.

“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이 노래를 부르면서 돌진해 오는 85세 난 갈렙을 누가 감히 대항하겠습니까? 그뿐일까요? 갈렙의 모습을 보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용기백배하지 않았을까요?

저는 확신합니다. 갈렙은 이스라엘의 틈이었습니다. 85세라 모두 무시한 작은 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틈 사이로 놀라운 바람이 불어 온 것입니다.

갈렙의 틈을 통해 가나안 땅이 점령되었다면 이제 성령을 받은 자들을 통해서 더 놀라운 일이 펼쳐지지 않을까요?

성령의 강권하심 가운데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노래를 부르는 자들을 통해 놀라운 일들이 펼쳐지지 않을까요?

 

오늘 성령 강림주일 예배를 드립니다. 성령께서 여러분의 삶에 임하시고 계심을 믿으십니까? 갈렙의 노래에 동참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오늘도 성령은 갈렙의 노래를 부르는 자들을 통해서 새로운 바람이 되어 세상에 찾아 오시지 않으실까요?

오늘도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라는 노래가 불려지는 틈새로 성령은 찾아 오실 것입니다.

 

저희 교회 catch phrase중 하나가 ‘B40’입니다. 새 교우님들을 위해서 다시 말씀드립니다. 저희 교회가 위치한 Brookline에는 유대인들이 38% 살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아주 적은 숫자입니다. 그래서 Brookline을 복음화 한다는 뜻에서 B40라는 catch phrase를 만들었습니다. 물론 유대교와 경쟁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을 복음화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Brookline은 산지 중에 산지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이곳에 세우신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우리로 하여금 노래를 부르게 하심이 아닐까요?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우리가 이 노래를 부르는 틈을 타서 성령의 바람이 이 곳에 불어 오지 않겠습니까?

 

교우 여러분,

저희 교회는 Brookline의 틈입니다. 우리가 노래를 부를 때 새 일은 펼쳐질 것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한국을 산지로 삼고 평생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노래를 부르신 많은 분들이 계십니다. 특히 저희 교회가 속한 미국 장로교 안에 많은 분들이 한국을 위한 작은 틈이 되셨습니다.

많은 분들이 세상을 떠나셨지만 아직도 수 십명이 모여서 함께 살고 계신 곳이 있습니다. North Carolina의 Black Mountain이라는 작은 마을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들의 모습을 동영상으로 보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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