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소련의 문호 쏠제니친의 ‘느릅나무 둥치(Elm log)’라는 짧은 수필이 있습니다.
“통나무 톱질을 하던 중 우리는 느릅나무 둥치를 하나 썰려고 들었다가 그만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지난해 그 나무를 켜서 쓰러뜨린 다음 트랙터로 끌어내어 통으로 있던 것을 토막을 내고 토막을 다시 트럭에 싣기도 하고 떼로 엮어 물에 띄우고 해서 여기까지 운반해온 이래 아무렇게나 땅에 굴려 두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이 느릅나무는 항복하지 않았던 것이다.
줄기에서 싱싱한 푸른 싹이 돋아나고 있었다. 언젠가는 제대로 생긴 느릅나무가 되거나 아니면 적어도 바람소리가 나도록 우거진 가지가 될 싹이었다.
우리는 이 나무 토막을 사형대에 걸 듯이 벌써 모탕 위에 얹었었다. 그러나 톱으로 그 목을 켤 수가 없었다. 어떻게 그대로 켜버린단 말인가. 그렇게도 살려고 하는데 – 우리보다도 더 강하게.”
그 유명한 솔제니친이 왜 이런 글을 쓰게 되었을까요? 솔제니친의 깊은 내면 세계는 자기에게 삶의 도전을 주는 그 무엇을 그리워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자기가 땔감으로 쓰려고 했던 느릅나무에서 시퍼런 싹이 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를 글로 남긴 것입니다.
느릅나무의 싹을 보면서 각자가 갖는 도전은 다 조금씩은 다를줄 압니다. 솔제니친은 살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보았습니다. 살려고 하는 강한 의지가 솔제니친의 가슴을 강하게 울렸던 것입니다.
오늘 대강절 첫번째 주일을 맞이 해서 첫번째 촛불을 켰습니다. 다음 주는 두 개의 촛불 그 다음주는 세개의 촛불을 킵니다. 네번째 촛불이 켜짐과 함께 우리는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성탄예배를 드립니다.
우리가 왜 대강절에 촛불을 하나씩 켜 가면서 예배를 드립니까? 켜져 가는 촛불을 보면서 우리는 오셨고 또 다시 오실 그리스도의 강한 의지를 볼수 있기 위함이 아닙니까? 약속대로 오셨고 또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강한 의지가 촛불과 함께 훨훨 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대강절을 보낼 때 훨훨 타오르는 촛불을 보면서 다시 오시고자 하시는 그리스도의 강한 의지를 다시금 느끼고 감격하게 될까요? 그래서 우리도 느릅나무처럼 푸릇 푸릇한 싹을 발할수 있을까요?
저는 아브라함의 모습에서 대강절의 참 삶의 모습을 찾아 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창세기 12장에서부터 25장까지 곧 도합 14장에 걸쳐서 이어집니다. 시간 관계상 오늘 본문은 13:14-18절까지만 봉독해 드렸지만 12장부터 나오는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오늘 본문 말씀으로 생각하고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75세에 다음과 같은 약속을 받습니다. 창세기 12: 1, 2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75세에 이런 엄청난 약속을 받습니다. 이 약속이 아브라함의 삶을 느릅나무처럼 푸릇푸릇한 싹을 발하게 한 첫 축복이었을줄 압니다. 그런데 이러한 약속을 받는 것은 좋은데 받는 순간 그의 삶의 운명은 바로 기다림으로 바뀝니다.
한편 성경은 아브라함이 기다림 가운데 어떻게 살았는지는 자세히 설명은 하지 않습니다. 이에 대해 추측할수 있도록 에릭 프롬은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Uncertainty is the very condition that impels man to unfold his powers.”
“불확실함이 도리어 사람 안에 있는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게 하는 조건이 된다.”
사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무척 짖꿎으셨습니다. 큰 민족을 이루게 해주시겠다고 약속은 하셨지만 어떻게 어떤 과정으로 될 것이라는 말씀은 안 하셨습니다. 그저 미지의 세계를 향하여 떠나라고만 하십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에릭 프롬에 의하면 수많은 능력이 언제 발휘된다구요? 불확실한 미래를 통해 발휘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불확실한 미지의 세계로 떠나게 하십니다. 미지의 세계로 떠난 아브라함은 기다릴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아브라함은 조카 롯과 함께 기다림의 여정을 시작합니다. 함께 가나안 땅에 들어 갑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도 믿었지만 조카와 함께 하니 자못 위로도 되고 든든도 하고 큰 민족이 이루게 될 때 롯도 한 몫을 차지하게 할 계획도 세웠을지 모릅니다.
아니나 다를까 나그네 생활이지만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아브라함과 롯이 부자가 되어 갔습니다. 이렇게 둘 다 부자가 되니 아브라함은 더 확신이 생겼을줄 압니다. 조카 롯과 더불어 큰 민족이 이루게 될 것이라는…. 그런데 아브라함의 추측은 어긋났습니다. 아브라함과 롯의 목자가 다투기 시작합니다. 롯과 함께 큰 민족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이 아니었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이 놀라운 말을 합니다. 창세기 13:9절 말씀입니다.
“내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여기에 놀라운 교훈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막연히 기다리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롯과 함께 큰 민족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을 깨달은 아브라함은 롯과 헤어지기로 결심합니다. 그런데 자기가 먼저 좋은 땅을 차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롯에게 좋은 땅을 양보합니다. 아마 아브라함은 확신이 있었을 것입니다. 롯에게 좋은 땅을 허락해도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향하신 약속은 반듯이 이루어질 것을 믿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쉽게 롯에게 좋은 땅을 내어 주었을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본문 말씀의 배경입니다.
자 이렇게 롯에게 양보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는 가만히 계실리가 없습니다. 14, 15절 말씀입니다.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드디어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당신의 불확실 했던 약속의 한 가지 베일을 벗기십니다. 가나안 땅 동서남북 보이는 모든 땅을 주시기로 약속하십니다.
순간 아브라함은 감사하기도 하지만 이런 생각이 들었을지 모릅니다. ‘이 넓은 땅을 차지하려면 롯의 도움이 필요한데 이제 롯을 보내 놓았으니 언제나 내가 이땅을 차지 할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16절 말씀입니다.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헤어진 조카 롯을 그리워하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땅의 티끌을 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티끌이 무수한 것처럼 자손이 무수하게 될 것을 약속해 주십니다.
그런데 조금 이상한 것은 ‘땅의 티끌을 셀수 없는 것처럼’으로 표현하면 더 확실하겠는데 표현이 애매합니다. ‘땅의 티끌을 셀수 있다’고 표현합니다. 이것도 불확실한 것을 좋아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여튼 이 점은 다시 생각하기로 하고, 불확실한 약속이 이제 하나 하나 그림이 잡히기 시작합니다. 물론 그래도 큰 민족이 되기까지의 그림은 아직 그려지지 않았지만…. 이제 가장 구체적인 것으로 보여줍니다. 땅의 티끌로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그 후 아브라함은 흙 한 톨 한 톨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겠습니까? 옆에 롯은 없지만 늘 땅을 밝고 다니는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흐믓한 생각이 듭니다. 땅의 티끌처럼 셀수 없이 많은 자손들이 생겨 날 것을 기다립니다.
그 후 그는 낮을 좋아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낮에는 항상 보입니다. 땅의 티끌이…. 땅의 티끌을 보면서 큰 나라를 꿈을 꿉니다. 전에도 늘 보아 왔던 땅의 티끌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땅의 티끌을 보는 것이 큰 기쁨이 된 것입니다. 전에도 땅을 사랑하고 흙을 사랑했겠지만 이제는 더욱 사랑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나의 사랑, 흙….”
그는 기다림 가운데 놀라운 선물을 받은 것입니다. 흙을 만지면서 위대한 꿈을 꾸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애매한 표현을 하셨는지 감이 잡히는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제 어린 아이처럼 모래 장난을 하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모래알 하나 하나를 보면서 신기해 합니다. 셀수 없는 모래알이지만 아브라함은 세기 시작해 봅니다.
하나, 둘, 셋,… 열, 백하나, 백둘…. 세다가 더 못 세겠다는 듯이 하늘로 모래를 신나게 던집니다. 셀수 없는 것 같지만 셀수 있고 셀수 있는 것 같지만 셀수 없는 것이 모래알 아닙니까? 그래서 이렇게 표현하신 것이 아닐까요?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그동안 아브라함에게는 흙은 삶 자체였습니다. 아니 생계였습니다. 유목민으로서 많은 가축과 가족이 흙에 의존해서 생활을 합니다. 지금도 계속 생계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가 더 붙었습니다. 흙은 미래의 약속이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아브라함은 참고 인내하며 기다림 가운데 흙을 대합니다. 아니 모래 장난을 시작한 것입니다.
때로는 모래 장난을 하고 있는 아브라함을 보고 아내 사라는 나무래고 나무랬을 것입니다. 툭하면 아브라함이 사라집니다. 어디 가서 일하나 하고 찾아 보면 모래 장난을 하고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어느새 모래 장난이 되어 갔을 줄 압니다. 그런데 이 모래 장난은 하나님께 대한 예배였던 것입니다.
모래 장난을 하다가 사라에게 야단을 맞으면 모래 장난을 그만 두고 일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하는 모든 일은 흙을 만지는 일입니다.
유목민으로서 양을 키우더라도 언제나 흙과 더불어 사는 것입니다. 그동안은 장난이 심해서 흙으로 온통 뒤덥혀 있는 양들을 보면 미웠는데 도리어 더 예뻐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보니 양을 키우는 것도 재미 있어집니다.
어느덧 자기가 일을 열심히 재미있게 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약속은 더 가까이 닥아 옴을 느낍니다. 이젠 삶 전체가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은 매일 매일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들어 놓았던 것입니다.
그래도 흙과 더불어 고생하는 시간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단지 이 시간을 대하는 마음이 달라졌습니다. 왜냐하면 아담의 죄가 들어 온 이후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잔디밭을 1년내내 손을 안 대고 가만히 놓아 보신 분 잘 아실줄 압니다. 땅은 누구 편입니까? 잡초 편입니까? 잔듸편입니까? 당연히 손을 안 써주면 잡초편을 듭니다.
그러나 전에는 잡초가 더 크게 보였지만 이제는 흙으로 인한 약속이 더 가까이 보입니다. 흙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지만 이 흙은 미래의 약속의 상징이 된 것입니다. 언젠가 흙처럼 셀수 없이 많은 자손을 갖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곧 아브라함은 흙과 애증관계가 됩니다. 흙은 고통을 줍니다. 아울러 희망을 줍니다. 어느덧 희망 가운데 일하는 아브라함의 삶에서는 푸릇푸릇한 향내가 나기 시작합니다. 느릅나무처럼…. 가시덤불과 엉겅퀴 사이에서 아브라함은 느릅나무가 되어 간 것입니다. 희망의 향기를 내는 느릅나무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을 할수 있게 됩니다. “우리도 모두 농부가 되거나 아브라함처럼 유목민이 되어야겠네요?”
우문우답을 한다면, 사실 우리가 생활을 위하여 하는 모든 것은 다 흙을 만지는 것입니다. 흙과 관계가 안 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저도 이 설교 준비를 위해서 컴퓨터 앞에 오래 앉아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컴퓨터도 사실 흙이 아닙니까? 캘리포니아의 컴퓨터 산업이 발달한 곳을 씰리콘 밸리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왜 씰리콘 밸리라고 부르게 되었습니까? 이는 컴퓨터의 생명과 다름 없는 반도체의 원료가 씰리콘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씰리콘이 어디에서 나오죠? 모래입니다.
저도 설교 준비를 위해서는 모래를 만져야 합니다. 그리고 요즘 컴퓨터를 안 쓰는 직장 어디 있습니까? 우리 모두는 흙 장난을 하며 생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컴퓨터 앞에만 앉기만 하면 설교가 저절로 써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제가 설교 준비를 할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성경본문 말씀이라고 확신이 들면, 먼저 묵상을 하고 관련된 책들을 읽어 봅니다.
웬만큼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하면 컴퓨터 앞에 앉습니다. 몇 시간에 걸쳐서 써 내려 갑니다. 그 후 다음날 다시 읽어 봅니다. 대개 상당 부분을 고칩니다. 줄거리는 비슷해도 많이 손을 봅니다.
저는 영어 통역자들을 위해서 원고를 미리 보내 드려야 하는데, 특히 새로 통역자가 되시거나 토요일에 바쁜 통역자들은 저에게 원고를 일찍 보내달라고 요청합니다.
요청대로 일찍 보내드립니다. 몇 번 보내드리면 그 후에는 더 이상 요청하지 않습니다. 일찍 받아 봤자 후에 또 많이 바뀌니 헛수고를 하는 셈입니다. 어떤 때는 한번에 설교 두개 세개를 번역한 셈이 되는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저도 설교 준비시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항상 만납니다. 컴퓨터 안에 있는 씰리콘 때문인가 봅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씰리콘 때문에 약속의 하나님은 우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흙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지키셨듯이 말입니다. 저는 설교 준비를 하면서 느릅나무가 되어감을 느낍니다.
그런데 흙이 우리들에게 보여주는 최고의 약속이 무엇입니까? 다시 오실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은 약속대로 흙으로 태어나셨습니다. 2000년전에…. 이제는 영원한 구원자가 되셔서 구름타고 다시 오실 것입니다. 이를 흙이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들의 대강절의 삶이 온전해졌을 때 주님께서는 구름 타시고 다시 오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우리가 쌓아 놓은 모래 성을 영원히 보존하실 것입니다.
그 때까지 계속 모래 성을 쌓으십니다. 모래 장난을 하면서…. 느릅나무의 향기를 발하십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희망을 늘 이야기하는 차동엽 신부님이 중국에서 온 학생에게 중국에서는 어떤 희망을 가지고 있을까 궁금한 생각이 들어서 물었다고 합니다. 중국속담으로 답을 하였다고 합니다.
‘희망재전야상!’(希望在田野上)
“희망은 밭과 들판 위에 있다!”
이 속담을 듣고 차 신부님은 다음과 같은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아무리 찢어지게 가난하더라도 밭이 있는 한 희망이 있다.
땅을 일구고 씨를 뿌리라.
밭이 없다면 저 주인 없는 들녘에 희망이 있다.
황무지를 개간하고 나무를 심으라.
희망이 쑥쑥 자라리라.”
이처럼 매일 매일 최선을 다해 주어진 흙장난을 하는 것이 바로 대강절의 촛불을 키는 삶이 아닐까요? 주님께서 다시 오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주님의 약속으로 인해서 온 세상이 희망 밭이며 희망 들판입니다.
대강절을 맞이하여 흙으로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