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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첫 증인 (누가복음 8:1-3, 24:1-12) 03/27/2016

한 남자가 남태평양의 아름다운 섬으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는 어느 원주민에게 안내를 부탁했습니다. 해변을 걷던 남자는 원주민에게 시합 하나를 제안했습니다.
“여기서부터 저쪽 나무까지 달리기 시합을 해 보죠.”
출발 신호와 함께 남자는 재빨리 앞으로 뛰어 나갔습니다. 그는 일그러진 표정으로 이를 악물고 땀을 뻘뻘 흘리며 결승선을 통과했습니다. 뒤돌아본 그의 얼굴에 의기양양한 미소가 흘렀습니다. 원주민은 이제 겨우 중간 지점을 통과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원주민은 사뿐사뿐 춤추듯, 크고 느린 보폭으로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고 달렸습니다. 이윽고 결승선을 통과한 원주민은 껑충껑충 뛰며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그걸 본 남자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물었습니다.
“내가 이겼는데, 왜 그렇게 좋아하는 겁니까?”
그러자 원주민이 순박한 표정으로 되물었습니다.
“내가 이긴 것 아닙니까? 당신보다 훨씬 아름답게 달렸잖아요.”

오늘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들의 심판관이시라면 누구가 이겼다고 하실까요? 빨리 달린 사람? 아니면 아름답게 달린 사람? 아니면…? 부활하신 후 주님께서 제일 먼저 만난 사람들이 누군지 알면 주님께서 누구에게 이겼다고 하실지 알수 있을 것 같습니다. 1절 말씀입니다.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대충 감을 잡으실줄 압니다. 오늘의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이 여자들’입니다. 곧 부활의 이야기를 제일 먼저 접한 사람들은 ‘이 여자’들입니다.

올해 사순절 기간 저는 Ronald Rolheiser라는 영성가의 책을 읽었었는데 이 분의 책을 통해 주님의 수난과 부활에 대해서 새로운 통찰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분은 왜 주님의 부활 이야기에 여성이 등장하는지를 영성학적으로 풀어 나가십니다.
여성은 새 생명을 태어나게 하는 영성을 지닌 자들이기에 여성이 등장할수 밖에 없다고 주장합니다. 곧 여성들에게는 산파의 영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도 새 생명의 탄생이기에 산파가 필요하였는데 바로 산파의 영성을 소유한 이 여성들이 예수님의 부활의 산파 역할을 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여성의 영성이 산파의 영성이라고 말할수는 없다고 봅니다.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겠지만…. 그러면 본문 말씀을 통해 산파의 영성은 어떤 영성인지 살펴 보기로 하겠습니다. 2, 3절 말씀입니다.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대단한 여인들입니다. 열려진 무덤을 보면 겁이 절로 날텐데 도리어 아무렇지 않은듯 들어 가 봅니다. 산파의 영성을 소유했기에 이런 모험을 겁도 없이 감행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막상 용기를 내어 들어가보니 주님의 시체가 온데 간데 없습니다. 보통 사람들 같으면 그야말로 36개 줄행랑을 치고도 남았을줄 압니다. 4절 말씀입니다.
“이로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줄행랑은 커녕 도리어 사라진 주님의 시체로 인해 근심합니다. 역시 산파의 영성을 소유한 사람들은 다릅니다. 순간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섭니다. 5절 말씀입니다.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그런데 천사가 나타나서 여인들에게 대단하다 말씀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깊은 영성을 가졌다고 칭찬하는 것도 아닙니다. 도리어 꾸짖습니다. 그들에게 기억상실증세가 있음을 알려줍니다. 7, 8절 말씀입니다.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산파의 영성의 소유자들은 기억상실을 잘 하나 봅니다. 주님께서 사실 세 차례 이 말씀을 하셨는데 까마득하게 잊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주님은 세번 하신 말씀도 기억하지 못하는 이 여인들에게 천사를 보내셨다는 사실입니다. 아마 주님은 당신의 말씀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그들 안에 있는 독특한 영성 산파의 영성을 보시고 천사를 보내시지 않으셨나 싶습니다. 8, 9절 말씀입니다.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알리니.”
이 여인들이 사도들에게 가서 한 첫 마디가 무엇이었겠습니까? 당연히,
“주님이 부활하셨습니다.”
곧 이들이 부활의 첫 증인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부활절마다 함께 인사를 나누지 않습니까? “주님이 부활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누가 인류 역사상 제일 먼저 했다구요? 이 여인들입니다. 이 여인들의 뒤를 이어서 우리는 부활절마다 고백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면 이들이 어떻게 이 놀라운 부활의 첫 증인이 될수 있었을까요? 누가는 우리들의 궁금증을 다음 귀절을 통해 풀어줍니다. 10절 상반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누가는 이 여인들의 이름을 이처럼 나열한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 또 다른 본문 말씀인 누가복음 8:1-3절 말씀입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새 열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
한 마디로 이 여인들은 섬김의 영성의 소유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3년내내 주님의 공생애 기간에 주님을 섬긴 여인들이었습니다. 물론 물질로 그리고 여러 가지로…. 결국 주님을 3년간 정성껏 섬긴 이 여인들이 첫 부활의 증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들의 섬김의 영성이 부활의 첫 증인이 되게 하였을까요? 섬김의 영성은 곧 산파의 영성일까요? 섬김의 영성과 산파의 영성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산파의 영성은 섬김의 영성에서 한 단계 발전한 영성이 아닐까요?

희망의 사제라고 별명이 붙은 차동엽 신부님이 어느 기자와의 대화를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 늘 당신이 희망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니 어느 기자가 다음과 같이 물었다고 합니다.
“좋습니다. 감당하기 벅찬 절망이 덮치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때도 희망을 고집할 것입니까?” 이렇게 답변하였다고 합니다.
“나는 나에게 딱 3일간만 절망할 시간을 줄 것입니다. 소리를 지르든지, 울든지, 술을 퍼마시든지, 신세타령을 하든지 하면서 실컷 절망하라고 말입니다. 그러고 희망을 추슬러서 다시 벌떡 일어날 것입니다!”

아마 차동엽 신부님의 영성이 바로 산파의 영성이 아닐까요? 그리고 이 산파의 영성을 이 여인들이 소유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여인들은 멀리서 주님께서 금요일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3일을 절망합니다.
그들은 3일간 지난 3년간의 섬김이 물거품으로 돌아 간 것을 생각하면서 절망했을 것입니다. 3년간 보낸 시간과 정성 특별히 안개처럼 사라진 물질적 섬김을 생각하면서 안타까워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무덤안에 주님의 죽은 몸과 함께 자기들의 정성스런 섬김도 시체가 되어 묻혀 있었던 것을 괴로워합니다. 그리고 이를 3일간 아파합니다.
이제 3일째가 되었습니다. 절망의 시간은 지났습니다. 용감하게 일어납니다. 더 이상 뒤엣 일들을 생각하면서 남은 생을 살수가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주님께도 안녕 그리고 자기들의 모든 헛수고로 돌아간 섬김의 시간과 물질과도 안녕을 할 셈으로 그들은 무덤을 찾아 갑니다.
어느덧 그들에게는 산파의 영성이 생긴 것입니다. 3년간의 섬김이 결코 헛수고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3년간의 섬김 그리고 3일간의 절망을 통해 산파의 영성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두려움 가운데 숨어 있는데 이 여인들은 3일만에 박차고 나온 것입니다. 무덤으로 찾아 온 것입니다.
그런데 무덤은 비어 있었습니다. 빈 무덤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부활의 첫 증인이 된 것입니다. 주님은 산파의 영성을 소유한 이 여인들을 사도들에 앞서 부활의 첫 증인이 되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빨리 달리는 사람을 부활의 증인으로 삼지 않으십니다. 아름답게 춤추는 사람을 부활의 증인으로 삼지도 않습니다. 주님은 산파의 영성을 소유한 자들을 부활의 증인으로 삼으십니다. 산파의 영성을 소유한 자들이 바로 이 여인들이었습니다.
곧 산파의 영성은 섬김의 실패를 맛 본자들에게 주어집니다. 아니 섬김의 실패로 인하여 하나님께 크게 실망한 사람들에게 주어집니다. 물론 그냥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3일간의 절망의 시간을 거친 후 생겨납니다. 절망을 박차고 다시 일어날 때 정금과 같은 산파의 영성을 덧입게 됩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들의 섬김은 자주 자주 실패로 끝납니다.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산파의 영성을 소유케 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들의 섬김이 자주 실패로 끝나지 않으면 우리는 교만해 집니다. 부활의 증인이 될수 없습니다. 나의 증인으로 남게 됩니다. 도리어 우리들의 섬김이 실패로 끝났을 때 부활의 주님이 우리들의 실패한 섬김을 부활시킵니다. 결국 부활의 주님은 우리들의 모든 것을 부활시킵니다. 우리들의 죽을 몸을 아울러 실패한 섬김까지 부활시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부활의 증인이 됩니다. 산파의 영성을 소유하였기 때문입니다.

제가 의과대학 2학년때 영락교회 대학부 회장을 하였습니다. 바쁜 시간이었지만 마땅히 할 학생이 없었던지 제가 떠맡게 되었습니다. 부활절 행사로 ‘부활제’라는 축제를 하였습니다. 금요일은 성금요일이니 축제의 분위기가 아니라서 대신 패널토의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토요일과 주일 이틀간 축제를 하였던 기억이 납니다. 아주 오랫동안 많은 예산을 들여서 성대하게 준비했습니다. 포스터도 많이 만들어서 학교 캠퍼스에도 꽤 많이 붙여 놓았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축제는 파리를 날렸습니다. 거의 외부에서는 안 왔고 대학생회 회원들과 지도자들만 참석했습니다. 저에게는 깊은 아픔이었습니다. 저는 저의 기억에서 이 실패한 부활제를 묻어 놓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오늘까지도 저는 부활절 하면 그 때가 생각납니다. 실패한 부활제가 늘 다시 살아 납니다. 결국은 실패한 부활제로 인해서 제가 오늘까지 부활의 증인으로 살려고 애쓰고 있지 않은지 생각해 봅니다. 저는 실패한 부활제로 인해서 도리어 산파의 영성을 소유하게 된 것 같습니다.
교우 여러분,
부활의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섬김의 사람이 되십시요. 언젠가 섬김의 실패도 맛보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3일간 절망하십시요. 그리고 박차고 일어나십시요. 산파의 영성을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부활의 증인이 될 것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미시간주 앤아버에는 ‘New product works (신제품)’ 박물관이 있습니다. 새로운 물품이 나오면 그곳에 전시가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대개 12만개의 물품이 전시되곤 하는데 그중 20%가 안 되는 물품만 상품화가 된다고 합니다. 곧 80% 이상이 실패작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박물관을 찾는 기업인등에게 자동차왕 헨리 포드의 말을 상기시킨다고 합니다.
‘실패란 보다 현명하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다.”
상품화 되기 전 미리 실패를 감지할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인 것 같습니다.

우리들의 섬김도 비슷하지 않을까요? 우리들의 섬김도 80% 이상 실패합니다. 그러나 결국은 실패한 섬김은 우리로 하여금 산파의 영성을 소유하게 합니다. 부활의 증인이 되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섬김은 결국 100% 성공입니다. 20%는 섬김의 열매를 보게 됩니다. 80%는 산파의 영성을 소유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 유명한 부활의 장 고린도전서 15장을 다음과 같이 마칩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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