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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깨끗하게 하자 (고린도후서 6:14-7:1) 06/12/2016

 

추리소설의 거장 시드니 셀던의 이야기입니다. 그의 작품은 1977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언어로 출간되었으며, 이로 인해 기네스북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젊은 시절은 불안과 좌절의 연속이었습니다.

1917년 가난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부터 늘 배고픈 시간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때문에 좋아하는 글이나 음악에 관심을 둘 여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17살에 그는 자살을 결심하고 약국에서 수면제를 몰래 훔칩니다. 하지만 그의 자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맙니다. 아버지에게 발각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가난한 세일즈맨이었습니다. 삶을 마감하려는 아들과 이를 필사적으로 막으려는 아버지. 아들의 자살 계획을 눈치 챈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던집니다.

“시드니, 넌 작가가 되고 싶다고 했잖니?”

“그건 어제 얘기였어요.”

“그럼 내일은?”

“네?”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잖니. 그래서 인생이란 소설같은 거 아니겠니? 숨막히는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잖아. 하루하루가 새로운 페이지인거야. 곳곳에 깜짝 놀랄만한 일들이 숨어 있다고. 때문에 페이지를 다 넘기기 전까지는 누구도 자신의 인생을 알 수 없단다. 나는 네가 너무 빨리 책을 덮어 버리는 걸 보고 싶지 않구나.”

그때부터 그는 6편의 연극 극본과 200편의 드라마 대본, 25편의 영화 시나리오, 18편의 소설을 집필하며  에미상 오스카상 등 각 분야 최고의 상을 모조리 휩쓸며 세계적인 베스트 셀러 작가의 반열에 올라섭니다.

한편 자신의 이야기를 자서전에 고스란히 밝힙니다. 자서전에서 자신의 성공비결을 한 마디로 표현하는데, 그것은 ‘또 다른 나와 마주’했기 때문이라고 밝힙니다. ‘또 다른 나’를 찾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일생 동안 가장 마음에 드는 작업은 쉰 살부터 시작한 소설 집필이었다고 회고합니다. 소설 집필이 가장 마음에 드는 작업이 된 이유도 밝힙니다. 생명력 넘치는 소설 속 캐릭터를 ‘또 다른 나’를 실현하는 도구로 삼았다고 합니다.

시드니 셀든 안에는 자포자기하고픈 ‘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또 다른 나’가 있었습니다. 아버지 덕분에 ‘또 다른 나’ 최고의 작가가 되는 ‘나’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시드니 셀든의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해서 아들 안에 있는 ‘또 다른 나’를 만나게 해주었는데 하물며 우리 하나님은 어떠실까요? 시드니 셀든의 아버지와는 비교도 안 되는 계획을 갖고 계시지 않으실까요?

이와 같은 체험을 한 사람이 바로 사도바울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전권적인 사랑 안에서 ‘또 다른 나’를 만납니다. 크리스챤을 박해하던 ‘나’를 버리고 예수를 위해 박해 받는 ‘또 다른 나’를 발견합니다. 그 ‘나’가 얼마나 좋았던지 로마로 끌려가기 전 아그립바 왕 앞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사도행전 26:29절 말씀입니다.

“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사도바울은 ‘또 다른 나’를 만난 것입니다. 아니 ‘또 다른 나’가 된 것입니다. ‘또 다른 나’를 찾은 사도바울은 그 후 모든 사람들도 자기처럼 ‘또 다른 나’를 만나게 하는데 일생을 바칩니다.

 

특히 사도바울은 고린도 교우들로 하여금 ‘또 다른 나’를 만나게 하려고 그 어느 교회 공동체 보다 애를 많이 씁니다. 생각해 보십시다. 사도바울로부터 편지를 제일 많이 받은 아니 최소한 편지의 분량이 제일 많이 받은 교회가 고린도 교회가 아닙니까?

물론 성경에 기록된 서신만으로 가장 많은 서신을 받았다고 장담할수는 없습니다만, 그래도 로마서는 16장인 반면, 고린도 전서만 16장, 후서는 13장. 물론 장수로도 평가하는 것은 신학적으로는 무리가 있지만 그래도 꽤 큰 의미는 담겨져 있다고 봅니다.

그토록 고린도 교우들은 사도바울에게 많은 권면과 핀잔을 들었지만 아직도 ‘또 다른 나’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14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사실 사도바울은 두 가지 ‘또 다른 나’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좋은 면에서의 ‘또 다른 나’, 그리고 또 하나는 나쁜 면에서의 ‘또 다른 나’. 사도바울이 보기에는 고린도 교우들이 이 두 가지 ‘또 다른 나’ 중에 더 나쁜 쪽을 택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다음 귀절을 보면 더 확실히 알수 있습니다. 15절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벨리알은 바알세불과 같은 급의 악한 마귀를 뜻합니다. 완전 적 그리스도입니다. 벨리알 쪽으로 가까이 가는 교우들을 보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나쁜 ‘또 다른 나’를 향해 가는 교우들을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나쁜 ‘또 다른 나’를 향해 가는 고린도 교우들에게 사도바울은 좋은 ‘또 다른 나’를 향해 갈 것을 다음과 같이 권면합니다. 16절 상반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그런데 자세히 읽으면 ‘또 다른 나’를 향해 갈 것을 권면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또 다른 나’가 되어 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또 다른 나’인 하나님의 성전이 되어 있다고 설파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이 놀라운 사실을 쉽게 믿지 못했을 것입니다. 당연하죠. 그렇지 않으면 왜 더 나쁜 ‘또 다른 나’를 향하여 가고 있었겠습니까?

사도바울은 고심 끝에 그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사도바울은 쓰여진 구약의 여러가지 말씀을 인용합니다. 곧 이는 자기의 주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이미 주장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모세오경중 하나인 레위기와 예레미아서 말씀을 인용합니다. 16절 하반절 말씀입니다.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이처럼 모세와 예레미야를 통하여 ‘또 다른 나’가 될 것을 약속하셨고 이미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오랜만에 신학적인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사도바울의 특징 중 하나가 있습니다. 먼저 기술형 표현을 합니다. 그리고는 명령형이 따라 옵니다.

영어로 하면 indicative라고 하는데, 곧 ‘너희는 하나님의 성전이다.’ 이것은 기술형입니다. 이 기술형을 표현한 후 명령형이 따라 옵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저렇게 하라.’

무엇을 행하기에 무엇이 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기에 무엇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바울 서신에 쭉 깔려져 있습니다. 오늘 문맥에 맞게 표현하면 ‘또 다른 나’가 되었으니 ‘또 다른 나’가 되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사도바울은  17절에서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명령형이 나옵니다. 이미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기에 하나님의 백성답게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다른 나’가 되었으면 ‘또 다른 나’답게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하여튼 성경에 나오는 명령형은 그냥 명령이 아닙니다. Indicative를 전제로 한 곧 이미 무엇이 되었기 때문에 명령을 하십니다.

그러면 명령을 지키면 어떻게 되나요? 호세아서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18절 말씀입니다.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더 이상 단순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나’의 최고의 축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다. 두 자녀가 있습니다. 한 자녀는 아버지의 말씀을 듣지 않습니다. 한 자녀는 잘 듣습니다. 둘 다 자녀이지만 지금 누가 자녀의 축복을 누리면서 살고 있겠습니까? 당연히 아버지의 말씀을 행하는 자가 아니겠습니까? 말씀을 행할 때 최고의 축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처럼 고린도 교인들에게 ‘또 다른 나’가 된 축복을 마음껏 누리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구약의 말씀들을 인용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곧 사도바울은 구약의 말씀 전체가 이미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성전임을 선포하고 있고 그렇게 믿고 행하는 자들에게 놀라운 축복이 예비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학적으로는 기술형과 명령형으로 표현하면 모두 다 쉽게 행해질수 있게 보입니다만 그럴리가 없습니다. 얼마나 어려운 길이면 사도바울이 말씀드린대로 고린도 교회에게 자그마치 16장과 13장 도합 29장에 걸친 편지를 썼겠습니까?

그러나 사도바울에게는 확신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언젠가는 고린도 교인들 모두가 ‘또 다른 나’가 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장황한 편지를 썼을리가 없을줄 압니다.

 

사실 사도바울과 같은 심정으로 요즘도 많은 사역자들이 수고하고 있습니다. 얼마전 저희 교회가 후원하는 프랑스 선교사이신 김은경 선교사님으로부터 선교 편지를 받았습니다. 최근 한 분이 세례를 받게 되었는데 그 분의 이야기를 읽으며 많은 감동을 받게 되었습니다.

 

“교회를 시작했을 때 유독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사람들이 다들 가난하 고 문제가 많은 사람들인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지요. 특히 두 명,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습니 다. 그 중 한 명은 한 6,7년 전에 술이 잔뜩 취해선 교회에 들어 온 크리스티앙 아저씨입니다.

온 몸에 심한 냄새가 나서 처음엔 노숙자인줄 알았지요. 불안한 눈빛으로 옆을 두리번 두리번 하다가 설교만 시작하면 드르렁거리며 코를 골고 잠이 들어서 우리의 눈쌀을 찌푸리게 했었지요.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정말 기가막혔습니다. 동네 유명한 싸움꾼으로 돈 걸고 하는 싸움에서 쇠사슬이나 주먹으로 싸우기도 하고 사탄을 숭배하는 친구들과 했던 이상한 공동묘지 예식에 대해서 제게 모험담을 들 려 주기도 했지요.

그런 사람들이 가는 클럽이 리옹에 있다는 것도 그를 통해 처음 들었습니다. 그런 데 참 이상한 것은 밤새 놀고 술을 먹다가도 주일 아침이면 만신창이가 되어 교회로 오는 것입니다. 한 번은 무시 무시한 전투용 칼을 예배 끝나고 갑자기 꺼내 보여 주어서 저를 참 당황하게 한적도 있 습니다.

그런데 영적 씨름이 시작되었습니다. 교회를 다니니 이상한 기운이 그에게서 흐른다고 더 이 상 클럽에도 못 가게 되고 친구들도 다 그를 떠났지요. 외로워서 다시 또 술을 마시게 되고 몇 달씩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습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아무리 복음을 말해도 변할 것 같지 않던 아저씨,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다시 또 돌아가고 또 무너졌지요.

그런데 그가 기적처럼 몇 달 전부터 완전히 술을 끊고 그의 인생을 주님께 드렸습니다. 그는 동네에서 너무나 잘 알려진 사람이라서 저희와 예배 후에 함께 걷노라면 동네 사람들이 그를 신기해하며 쳐다 봅니다. 뚝뚝한 말투로 “당신은 아직 그 거 피워요? 나는 끊었는데~!” 라고 그들에게 말을 건네기도 합니다. 그 아저씨가 세례를 받는 날 너무나 눈물이 나서 혼났습니다.”

 

크리스티앙 씨가 끝내 세례를 받게 된 이유가 있다면 그는 선교사님을 통해서 ‘또 다른 나’를 보게 된 것입니다. 쉽지는 않았지만 ‘또 다른 나’로 인해서 술취한 채로 교회에 오고 또 오고 한 것입니다. 끝내 ‘또 다른 나’를 찾았고 세례까지 받고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세례를 받았다고 그의 ‘또 다른 나’를 향한 싸움은 끝이 난 것일까요? 어쩌면 시작일지도 모릅니다. 우리 모두들처럼…. 그러기에 사도바울은 지금 우리 모두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7:1절 말씀입니다.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

기술형과 명령형을 섞어서 결론을 내립니다. ‘약속을 가진 우리’는 기술형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알지 못했던 ‘또 다른 나’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 명령형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는 명령형입니다. 과거의 나에 머무르지 말고 새로 발견한 ‘또 다른 나’답게 살자는 것입니다. ‘또 다른 나’는 바로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그러니 자신을 깨끗케 하자고 외치고 있습니다. ‘자신을 깨끗케 해서 성전이 되자’라는 것이 아니고 ‘성전이니 깨끗하게 하자’라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늘 깨끗하게 하십시다. 최고의 ‘또 다른 나’의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다.

 

말씀을 거둡니다.

초대교회에 아가톤이라는 수도승이 있었습니다. 얼마나 훌륭했던지 스승인 포이멘은 제자인 그를 ‘압바’라고 부를 정도였습니다. ‘압바’는 나이많은 성숙한 수도승에게만 불리우던 호칭이었습니다.

마침내 죽음의 시간이 다가오자, 아가톤은 사흘 동안 눈을 크게 뜨고 한 곳만을 응시하며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지냈습니다. 그때 제자들이 “스승님, 어디 계십니까?” 묻자, 그는 “나는 지금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제자들이 두렵지 않느냐고 묻자, 아가톤은 “나는 이 순간까지 하나님의 계명을 충실히 지켜 왔다. 그러나 나는 부족한 인간일 뿐이다. 내가 감히 어떻게 나의 행동들이 그분께 받아들여지지라 기대할수 있겠는가? 그분을 직접 만나기 전까지 나는 결코 자신할 수 없다!” 라고 말했습니다. 형제들이 더 질문하려고 하자, 아가톤은 “더 이상 나에게 말을 걸지 마라. 나는 이제 시간이 없다.”라고 말하면서 기쁨 중에 마지막 숨을 거두었습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아가톤의 이야기를 소개해 드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아가톤의 이 모습이 바로 우리들의 ‘또 다른 나’가 아닐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라면 분명 이 모습은 우리들의 ‘또 다른 나’가 되고도 남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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