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포니아에 근거를 두고 후 세대를 위하여 활동하는 tvnext라는 기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자꾸 멀어져 가는 사회 현상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성경에 근거해서 사회에서 되어지는 일들의 옳고 그름을 밝히는 인터넷 신문입니다. 최근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습니다.
최근 캘리포니아 주정부는 ’차세대와 사회의 정신건강을 파괴하며 자녀들의 정체성을 산산조각 파괴시키는 법안들’을 통과시키려고 한다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두 가지 법안을 준비하고 있는데 학생들이나 학교가 정부로부터 장학금을 받으려면, “태어난 성별”이 아닌 “느끼는 모든 성별”을 존중하고 그외 모든 수십가지의 성별들에 “동의”를 한다고 서명을 해야만 재정적 지원을 받을수 있게 하는 법안이라고 합니다. 학교들도, 이런 법적 조항에 동의서를 내지않으면 주정부나 연방정부로 받던 모든 정부재정을 못받게 되기에, 학생들에게 주는 Grant 나 장학금을 더 이상 줄수없게 되는 난감한 상태에 빠지게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뿐이 아닙니다. 두번째 법안이 더 큰 문제인데 이는 어떤 학교든지 친동성애 / 친성전환 교육을 “의무화” 하고 “강요” 하는 법안입니다. 만일 이 법안이 통과 되면 자신이 원하지 않는 수업도 무조건 들어야 합니다. 곧 동성애가 질환이 아닌 것을 밝히는 수업도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위의 두가지 법안들이 통과되면 다음과 같은 일들이 일어날것을 예측하고 있습니다.
- 말씀드린대로 “친동성애, 친성전환자 정책”들을 학교 전체가 순종하고 준수해야만재정후원을 계속 받아 학생들에게 grant & scholarship 을 줄수있게 됩니다.
- 크리스천 학교들도 남.녀.화장실, 탈의실, 샤워실 그리고 기숙사 방(Dorm)까지 같은 시간에 함께 사용하게끔 합니다.
그런데 이미 공립학교들에게는 공문이 보내졌고, 크리스천 학교들은, 위의 두가지 법안들이 통과되는 순간, 똑같은 위협적인 공문을 정부로부터받게 된다고 합니다. 지금 캘리포니아 상원 교육위원회 ducation Committee 로부터 이미 경고장을 받은 ‘성경적 가치관”을 기준으로 가르치고 있는 대학교들이 있는데 대표적인 학교가 Biola University입니다. 그 외 다섯개 학교가 경고장을 받았다고 합니다.
어떤 분들은 이런 생각을 하실지 모릅니다. “그게 뭐 그리 놀랍습니까? 이미 우리 교단 PCUSA도 다 동성애를 허락하였는데….”
맞습니다. 저희 교단도 벌써 동성결혼도 허락을 했습니다. 그러나 꼬리표를 달아 놓았습니다. 개인이나 교회가 신앙의 양심에 거리끼면 양심의 자유에 맡기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무조건 허락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저희 당회에서는 이성간의 결혼이 아닌 결혼식은 저희 교회당에서 예식을 치룰수 없다고 결정을 해 놓았습니다. 제가 새삼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지금 교회 울타리를 넘어서 사회에서는 아니 어떤 주정부는 아예 모두가 인정해야 하는 법안을 마련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캘리포니아에서 통과된다면 매사츄세츠도 멀지 않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러면 이러한 사회에서 사는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요? 더 보수적인 나라로 가서 살아야 할까요?
이럴 때 우리에게는 늘 답을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이럴 때 어떻게 하셨나 생각해 보면 그래도 큰 도움이 될줄 압니다.
주님께서 공생애를 사실 때 이스라엘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아니 그 때 권세 잡은 자들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복잡한 그 당시 역사책을 펼쳐 보지 않아도 우리는 성경 안에서만으로도 쉽게 감을 잡을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을 예비한 세례요한이 있었는데 세례요한의 죽음을 보면 그 당시 정치적 상황을 알수 있습니다.
세례요한이 죽은 이유는 헤롯왕이 동생의 아내를 가로챘기 때문입니다. 이를 보고 요한이 헤롯에게 바른 소리를 하니 후에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의 청을 들어서 요한의 목을 베게 한 것입니다. 곧 예수님께서 살아 계실 때 헤롯왕은 동생의 아내를 빼앗은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성경에 나오는 짧은 이야기이고 실제로 이 당시 벌어졌던 일들을 읽어보면 정말로 기가 막힌 일들이 벌어지곤 하였습니다. 헤롯왕 이야기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요즘 때로는 미국의 정치인들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곤하는데 그럴 때마다 저는 예수님 당시 유대땅에서 벌어졌던 일들을 생각하곤 합니다. 그러면, “그럴수도 있지” 생각하며 스스로 위로를 받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세례요한이 죽었다는 소식도 직접 들으셨습니다. 주님은 이 당시 권세자들이 얼마나 타락했는지 너무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우리가 지금 이 사회를 향하여 안타까워 하는 것보다 훨씬 안타까운 마음을 갖고 계셨을줄 압니다.
이런 모든 사회적 상황을 잘 아셨던 주님은 오늘 우리들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실까요? 20절 말씀입니다.
“또 이르시되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으로 비교할까”
아마 청중들은 기대했을지 모릅니다. 그들은 정의로운 나라 건설에 대해서 말씀하실 것을 기대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하였을 것입니다.
“ 천군 천사를 보내서 정의의 나라를 세우실까, 아니면 하늘로부터 불을 내리셔서 모든 불의한 세상을 불태우실까?’ 21절 말씀입니다.
“마치 여자가…”
청중들은 귀를 의심합니다. 천군천사도 아니요 불도 아니요, 하찮은 여자가…? 요즘은 여성 대통령도 나오는 시대이지만 이 당시는 여자는 숫자에도 빠지던 시대가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입을 여시는데…, “마치 여자가.”
의아하지만 청중은 계속 귀를 기울입니다.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하셨더라.”
청중은 더 기가 막힙니다. ‘여자’로 시작한 것도 좀 그런데, 결국에는 ‘누룩’으로 끝을 맺습니다. 그것도 흔해 빠진 누룩으로…. 별로 기분은 나지 않지만 어떻게 합니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니 차분히 다시 생각해 봅니다.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하찮은 여자가 하찮은 누룩을 밀가루 반죽에 넣었더니 밀가루 반죽이 부풀어졌습니다. 이 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민족과 국가를 생각하였던 청중들은 크게 실망하였을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어떻게 죽은 것도 잘 아는 분이 지금이 어떤 땐데 여자와 누록에 대해서 말하고 있어…?”
사실 그동안 불의한 세상을 이기는 길은 다윗과 같은 사람이 나타나서 헤롯을 무찌르던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천군천사를 보내셔서 불의한 자들을 혼내주시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하찮은 사람들이 하는 하찮은 일들을 통하여 임한다고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화가 나서 그 자리를 떠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차분히 생각해 봅니다. 순간 정신이 번쩍듭니다. 그동안 청중은 종교지도자들을 원망했고 권세 잡은 자들을 원망했습니다. “저들이 잘 해야 하는데, 잘 해야 하는데…, 우리 같은 하찮은 자들은 하찮은 일밖에 못하니….” 이런 생각에 늘 사로 잡혀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이들의 생각을 쪽집게 처럼 잡아 내시면서 도리어 대반전을 시도하시는 것입니다. 하찮은 사람들이 하는 하찮은 일들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함을 역설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곧 청중은 이 말씀을 듣고 둘로 나뉘어졌을 것입니다. 한 그룹은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를 여자와 누룩으로 비교해 하면서 전혀 아무 것도 듣지 않았다는듯이 태연하게 떠나는 사람들입니다. 또 한 그룹은 하찮은 사람들이 하는 하찮은 일들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속하십니까? 하여튼 후자에 속한 사람들은 계속 스스로 질문해 봅니다.
“그러면 누가 하찮은 사람이지? 바로 내가 아닌가?” 계속 질문합니다. 내가 할수 있는 하찮은 일은 어떤 것이 있지?” 그리고 이들은 하찮은 일들을 기쁨으로 감당하기 시작합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게 됩니다. 이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는 온 세상 구석 구석에 자리를 잡게 됩니다. 언젠가 온 세상이 하나님 나라로 부풀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교우 여러분,
하찮은 사람들이 하찮은 일들을 잘 해내면 하나님 나라가 임합니다. 정치인들이 아무리 잘 못해도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을 막을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찮은 사람들을 통해 임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이 벌써 7월 두번째 주일입니다. 1월 첫 주 신년예배시 ‘네 지경을 넓히리니’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들으면서 시작한 한 해인데 벌써 반이 지나고 하반기의 두번째 주일을 맞이 하였습니다.
하반기로 들어 오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올해도 실패했구나 어서 새 해를 기다려야지 그리고 새해는 정말로 잘 해 봐야지, 올해도 하찮은 나의 인생은 변함이 없구나, 다시 내년이나 기다려 봐야지, 내년에는 나아지겠지….” 이런 생각은 들지 않습니까?
교우 여러분, 아직도 6개월의 시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찮은 우리가 하찮은 일에 정성을 다 할 때 놀라운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반대로 정성을 다하지 않으면 어떨게 될까요? 온 세상은 우리가 원치 않은 것들로 가득 부풀게 되지 않을까요?
언젠가 말씀드린대로 저는 매일 하루는 아시아 기독교 역사 책을 잠시 읽고 또 하루는 이민신학책을 읽고 있습니다. 지난 두 주간 총회에 다녀 올 때는 물론 읽지 못했습니다만, 귀가 후 다시 읽기 시작했습니다. 요즘에는 이슬람이 시작되는 시대를 읽고 있습니다. 마펫 박사님은 이슬람이 쉽게 성장할수 있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모하멧이 태어나고 죽은 직후에는 그 지역에 기독교가 성황을 이루고 있었다고 합니다. 점차 이슬람에게 자리를 내주고만 것입니다. 기독교가 한참 성황을 이루고 있다가 갖 시작한 이슬람에게 자리를 빼긴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기독교가 성경을 아니 신약성경을 아랍말로 번역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랍말 밖에 모르는 서민층 아랍인들이 서서히 아랍말로 기록된 코란을 읽게 되었고 어느덧 이슬람교도들이 점차 많아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당시 많은 크리스챤 아랍인들은 이미 성경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아랍말로 읽지는 않았습니다. 도리어 헬라어로 신약을 읽고 있었습니다. 곧 지식인들만 기독교인이 되어 갈수 있었고 점차적으로 많은 서민들은 코란을 접하게 된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당시 지식이 많은 기독교인들에게는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아랍어로 쉽게 번역을 할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하찮은 일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마 아랍인들에게 헬라어를 가르치면서 더 행복해 했을지 모릅니다.
결과적으로는 오늘의 이슬람을 만들게 된 것이 아닐까요? 하찮은 일을 하지 않았기에….
그렇다면 하찮은 일들은 결코 하찮은 일들이 아닙니다. 하찮게 보이지만 모두가 위대한 일입니다. 그 위대한 일을 하지 않을 때 어떤 큰 일이 벌어질지 가히 상상할수 있습니다. 반면 그 하찮은 일을 할 때 더 크고 놀라운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정호승 시인이 있는데 정호승 시인은 오늘의 당신이 된 것은 어머니 덕분이라고 하면서 어머니가 늘 자신에게 해 주신 말씀을 소개합니다.
“지금도 안 늦었다. 다시 해 봐라.”
32세에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이 당선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후 기자 생활을 하느라 10년간 소설을 쓰지 않았다고 합니다. 마흔 둘에 쓰려니 도저히 안 되서 시를 쓸까 생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때 힘을 준 말씀이 바로 어머니의 말씀,
“지금도 안 늦었다. 다시 해 봐라.”
그 후 시집을 두 권 발간하면서 시인으로 자리를 잡아가게 됩니다.
교우 여러분,
앞으로 올해가 끝날 때까지 저는 자주 외칠 것입니다.
“ 네 지경을 넓히리니.”
그냥 외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마음으로 외칠 것입니다.
“지금도 안 늦었습니다. 다시 해 보십시다.”
하찮은 우리가 하찮은 일을 할 때 지경은 넓혀질 것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언젠가 누룩이 반죽을 부풀게 하듯이 우리들의 지경은 확 넓혀져 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찮은 자들이 하는 하찮은 일 가운데 임하기 때문입니다. 이 위대한 나라에 하찮은 우리 모두가 초대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들이 되십시다.
말씀을 거둡니다.
얼마전 기독일보에 제 눈을 의심할수 밖에 없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에베레스트’에 위치한 중국 티베트 지역에 최근 불교 승려 62명을 포함해 20만여 명의 티베트인들이 기독교인으로 돌아왔다는 뉴우스를 읽게 되었습니다. 특히 최근 기독교인으로 개종한 티베트인 중 대부분은 불교 신자이지만 무슬림도 포함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저는 처음에는 믿을수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20만명이…? 그래서 출처를 찾아서 직접 영어로 된 기사를 읽어 보았습니다. 2하고는 0이 다섯개 곧 20만명이라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작년 한 티베트 라마(불교) 승려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목사가 되었는데, 그는 티베트 지역 대규모 지진이 난 지역의 사람들을 도우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해 왔다고 합니다.
이 같은 엄청난 회심의 사건의 배경은 작년 엄청난 지진의 여파로 고통 받는 티베트 사람들에게 기독교인들이 그들에게 희망과 치유를 전했지만 재해를 만난 티베트인들은 불교나 힌두, 다른 기타 종교 단체들이 지진의 잔해 속에 있는 이들을 돕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예수를 따르는 기독교인들이 이 힘든 시기를 이들과 함께 하며, 자신의 삶을 희생해 봉사하며 예수의 손과 발의 역할을 다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찮은 불교 승려 한 사람이 예수를 영접하여 목사가 된 후 그 지역에서는 하찮게 보이는 기독교인들과 이웃을 섬겼을 때 놀라운 일들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야말로 하나님 나라가 임한 것입니다.
이 놀라운 역사가 자꾸 종교의 양심까지 빼앗아가는 이 땅에도 일어나지 않을까요? 하찮은 우리들의 하찮은 일들을 통해 일어날 것입니다.
하찮은 사람들이여, 하찮은 일을 하십시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