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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바를 알지 못하고 (히브리서 11:8-10) 10/16/2016

 

옛날 한국 부자들을 비꼬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머슴이 주인 방에 들어가면서 말합니다.

“편히 쉬셨습니까?”

주인이 묻습니다.

“여보게, 오늘 따뜻하지?”

“아니올시다. 몹시 추운 날입니다.”

“뭐가 추워? 방이 이렇게 따뜻한데.”

 

방안에만 있으면서 방안이 따뜻하니 바깥도 당연히 따뜻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부자의 모습을 풍자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부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나’라는 좁은 집에 살면서 세상을 다 아는 것처럼 생각하고 살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고발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얼마전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두 주전에 휴스톤을 집회차 다녀 왔습니다. 올해 초에 그 지역 한인교회협의회장님이 그 지역 총회가 열리는 기간에 오셔서 집회를 인도해 달라는 청탁이 왔었습니다. 다행히 올 2월에 유니온 신학교에서 세미나를 한 자료가 있어서 쉽게 응락을 했었습니다.

집회 전 두 달 전에 다시 연락이 와서 강의식으로 하겠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회장님이 사뭇 놀래시더라구요. 사실 저희 교회가 속한 동북대회에도 총회가 있고 총회가 있는 기간에 목회자 연장 교육을 합니다. 당연히 강의식으로 진행이 됩니다. 저는 같은 성격의 집회인줄 알고 쉽게 yes를 한 것입니다.

회장님이 당황하시면서 평신도들도 함께 하는 사명자 대회라고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가 보니 짧게는 두 시간 길게는 아홉시간 운전해서 목회자와 평신도가 1년에 한번 모여서 집회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보스톤에서는 상상할수 없는 집회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로 집회는 잘 마쳤습니다만, NCKPC총회장도 하면서 미국 전역에 퍼진 한인 교회를 잘 아는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만, 저의 보스톤 경험을 가지고 지금도 이웃을 보고 있는 제 모습을 새삼 느껴 보았습니다.

 

그러면 이처럼 자기 자신의 작은 경험에 묶여서 사는 우리들을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사용하실까요? 하나님은 이미 많은 경험을 갖고 있는 자들로만 부르셔서 당신의 뜻을 이루실까요? 8절 말씀입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이 말씀을 통해 알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경험이 많은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은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경험은 부르심을 받은 후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장래의 받을 땅을 약속 받은 후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약속을 받은 후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나갑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아브라함에게 새로운 경험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요즘 사회 생활은 어떻습니까? 취업을 할 때 회사에서는 무엇을 제일 먼저 봅니까? 경험을 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학교 다닐 때 인턴쉽들을 열심히 합니다. 학창 시절에 여러 경험을 잘 쌓아 놓아야지 취직이 잘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반대입니다. 하나님은 먼저 부르십니다. 그리고는 약속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 부르심의 약속을 성취하는 과정에서 많은 경험을 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그 경험은 어떤 경험이라구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사실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넓은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지만 그 땅이 어디에 있다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에게 남은 것은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날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이 어디인지 먼저 알려주시지 않으셨을까요? 만일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약속의 땅을 알면 더 쉽게 떠나 갔고 또 더 힘차게 매일 매일 걸어가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사실 아브라함이 정녕 약속의 땅에 도착할수 있었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곳까지 지치지 않고 갈 수 있었던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을 알려주시지 않았기에 아브라함은 매일 아침 이런 생각을 하면서 일어났을 것입니다.

“오늘이 바로 그 날인가? 오늘 나의 발이 닿는 곳이 약속의 땅인가?” 그래서 매일 매일 기대를 안고 일어납니다. 그리고 무작정 걷습니다.

그러나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도 새롭게 도착한 땅이 약속의 땅이라는 확신이 오질 않습니다. 언제나 약속의 땅에 도달할지 매일 매일이 막연해집니다. 이렇게 오랜 시간을 보내면 아무리 믿음이 좋던 아브라함에게도 어떤 마음이 생기겠습니까? 고향을 그리워 하는 마음.

이윽고 아브라함 안에는 두 가지 마음이 그를 붙잡습니다. 하나는 약속의 땅을 그리워 하는 마음, 또 하나는 고향을 그리워 하는 마음. 사실 약속의 땅이 어딘지 알았더라면 고향을 그리워 하는 마음은 훨씬 덜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웬일인지 약속의 땅이 어디인지는 알려주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아브라함은 사람으로서 고향을 그리워 하지 않을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니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고향이 그리워졌을 것입니다. 한편 고향이 그리워질 때마다 그는 약속의 땅을 그리워 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달랬을 것입니다. 약속의 땅을 알려주시지 않았기에 아브라함은 더욱 약속의 땅을 사모하고 사모했을 것입니다. 아울러 한편으로는 고향을 향한 마음도 무척이나 강렬해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경험을 합니다. 고향을 그리워 하는 마음과 약속의 땅을 사모하는 마음이 신비스럽게 조화를 이루면서 특별한 경험을 합니다.

 

물맷돌을 던지려면 원을 그리면서 계속 돌려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다가 손을 놓으면 돌이 날라가지 않습니까?

돌이 동그라미를 따라 계속 돌기 위해서는 두 힘이 평행을 이루어야 합니다. 소위 말하는 원심력(centrifugal)과 구심력(centripetal). 돌이 밖으로 나가려는 힘 곧 원심력과 안으로 들어오려는 힘 곧 구심력이 같아야지 원은 힘차게 돌지 않습니까?

저는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을 끝까지 찾아 갈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향을 사모하는 마음과 약속의 땅을 사모하는 마음이 잘 조화를 이루었을 때 도리어 이 두 마음은 모터가 되어서 아브라함에게 매일 매일 새로운 힘을 공급해 주었습니다.

저는 이런 결론을 내려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너무도 잘 아셨기에 약속의 땅을 알려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알려주시지 않았기에 도리어 아브라함은 약속의 땅을 향하여 지치지 않고 찾아 갈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미리 알려주시지 않은 첫번째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두 번째 이유는 더 중요합니다.

 

드디어 약속의 땅에 도착합니다. 언제일까요? 창세기 13:14, 15절 말씀입니다.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드디어 약속에 땅에 이른 것입니다. 이젠 더 이상 갈 바를 알지 못하고 헤메는 삶을 살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 때가 언제일까요? 14절 처음에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실 아브라함의 목자들과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목자들이 다투지 않습니까? 그래서 아브라함이 뭐라고 롯에게 제의를 합니까?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이에 롯은 기름진 땅 소돔과 고모라를 선택하여 떠납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아브라함은 약속의 하나님을 믿고 롯에게 양보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양보를 한 바로 그 자리가 약속의 땅의 한 복판이었던 것입니다.

사실 갈 바를 모르고 떠난 사람들의 특징은 하나 같이 지푸라기도 놓지지 않으려고 합니다. 절대 양보가 없습니다. 그들의 입에서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리라”라는 말이 나올수 없습니다.

그런데 아브함은 달랐습니다. 만일 약속의 땅이 어디인줄 알았더라면 당연히 그런 말을 하고도 남습니다. 그러나 어딘지 몰랐습니다. 약속의 땅이 어디인지 몰랐는데도 그런 위대한 말을 한 것입니다. 곧 진정한 양보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양보를 하자마자 양보한 바로 그 자리가 약속의 땅의 한 복판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땅을 허락하시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을 알려주실수 없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갈 바를 모르고 떠날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약속의 땅에 서 있게 된 것입니다.

 

곧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을 미리 알려주시지 않은 이유는 첫번째로는 도리어 그것이 앞으로 전진하는 힘이 되었습니다. 두번째로는 미리 알려주시지 않았기에 아브라함은 진정으로 양보를 할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약속의 땅에 서게 된 것입니다.

오늘도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가는 교우님들 위에 놀라운 하나님의 위로가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런데 이 약속의 땅에는 더 놀라운 축복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9절 말씀입니다.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의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약속의 땅에 도착했지만 사는 것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살았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 보기에는 가나안 땅에 사는 것은 이방의 땅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마음은 아니었습니다. 이 땅은 약속의 땅이었습니다. 자기와 자기의 자손들이 살 땅이었습니다. 그래서 장막을 칩니다. 그 장막에서 이삭과 야곱과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장막을 쳤으면 어떤 식으로 쳤을까요? 그 안에 가구는 어떤 모양이었을까요? 약속의 땅에서 장막을 치고는 바로 마음에 있던 고향을 표현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약속의 땅에서 그는 새롭게 고향을 만나게 됩니다. 아들과 손주들과 함께, 삼세대가 새로운 고향을 창조해 나갑니다. 그것도 약속의 땅에서….

그러기에 우리도 하루에 한끼는 한국음식을 먹지 않습니까?

얼마전 어느 책을 읽던 중 정신이 번쩍 드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선물 받은 책인데 제목은 ‘음악, 말씀과 만나다’라는 책입니다. 어느 분이 온라인으로 음악과 함께 음악에 어울리는 말씀을 올리곤 하였는데 책으로 출판을 하였습니다.

어느 대목에 가니 아주 익숙한 이름이 보였습니다. 박종화 교수를 운운하는 글이 눈에 띄었습니다. 피아니스트인데 자꾸 생각을 하니 기억에 떠 올랐습니다. 약 20년전에 저희 교회 영어 회중 반주를 맡았던 친구였습니다.

변화경 장로님 제자인데 얼마후 유롭으로 떠난 친구입니다. ‘박종화 편곡 동요’라는 제목으로 ‘엄마야 누나야’를 소개하는 글이었습니다.

박종화 교수가 5세에 한국을 떠나 일본, 미국, 독일, 프랑스 등 세계를 떠돌며 ‘피아노 유목민’이란 별명을 얻게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 나라를 돌다 보니 자연히 많은 언어를 하게 되었는데 자그마치 7개 국어에 능통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모국어는 음악이라고 말해 왔다고 합니다. 2007년 33세에 귀국한 후 한국에서 한동안 이방인으로서의 어정쩡한 느낌을 받으면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때 4살배기 딸아이가 부르는 동요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고 위안을 얻습니다.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딸과 함께 동요를 부르면서 할머니와 부모님이 옛날에 들려주었던 유년 시절의 노래들이 떠오르며 옛 기억들이 깨어났죠.”

그 후 자신을 과거와 연결해주고 뿌리를 찾게 해준 동요 11곡을 편곡해 음반 ‘누나야’를 발표합니다. 그 중 ‘엄마야 누나야’를 함께 들어 볼까요?

(동영상)

김소월 시인이 작사한 ‘엄마야 누나야’는 피아니스트 박종화 교수를 통해 클래식으로 멋지게 승화됩니다. 박종화 교수의 약속의 땅은 음악의 세계였습니다. 이 약속의 땅 안에서 그는 자신의 고향을 찾은 것입니다. 아니 완성시킨 셈입니다. 그의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난 시절로 인해 그는 최고의 고향을 찾은 것입니다.

 

한편 이처럼 이 땅에서의 약속의 땅을 갈 바를 알지 못하고 헤메다가 찾은 사람들은 새로운 여행을 시작하지 않을까요? 10절 말씀입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아브라함의 삶은 세차게 굴러가는 바퀴와 같았습니다. 약속의 땅을 향한 마음과 고향을 향한 마음이 멋지게 조화를 이루어서 그의 삶은 힘찬 바퀴가 되어 여기 저기 약속의 땅을 찾아 다닌 것입니다.

어느덧 가나안 땅 약속의 땅에 도착했습니다. 가나안 땅에 도착한 그에게 하나님은 새로운 약속의 땅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하늘의 성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제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살면서 새로운 약속의 땅을 바라보면서 힘차게 새로운 원을 그리며 하늘 나라로 향한 새로운 여행을 시작한 것입니다. 새로운 갈 바를 알지 못하는 여행을….

그러나 이 여행의 특징은 절대로 방향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아울러 분명한 원칙 하나가 있습니다.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이 고백이 있는 곳에 약속의 하나님은 항상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들을 항상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십니다. 사람들 눈에는 갈 바를 알지 못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은 이들과 영원히 함께 계십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마크 한센이라는 저술가가 있습니다. 언젠가 아틀란타에 있는 라이프 카이로프랙틱 칼리지 졸업식 연사로 나갔었습니다. 그는 졸업하는 의사들 가운데서 가장 나이가 많은 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녀의 나이는 일흔두 살이었습니다. 마크는 인사를 나눈 후 물었습니다.

“선생님 여기 카이로프랙틱 의과 학교에 오기 전에는 무얼 하셨습니까?”

“나는 예순 여섯 될 때까지 수녀였어요. 내가 있던 수녀회에서는 그 나이가 되면 반드시 은퇴해야 했지요.”

“왜 그 나이에 7년이라는 세월을 카아로프랙틱 의사가 되는 일에 쓰겠다고 결심하셨습니까?”

그녀가 겸손하게 대답합니다.

“나는 아직 죽지 않았으니까요. 내 인생의 목적은 남을 섬기는 데 있어요.”

그녀는 그 당시 이미 하루에 150명의 환자를 돌보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약속의 땅에서 참 고향을 찾은 사람들은 이처럼 하늘의 약속의 땅에 갈 때까지 최고의 삶을 살지 않을까요? 약속의 땅을 찾아 가는 사람들은 한 길이 막히면 다른 길이 열린다는 것을 믿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길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길 위에서 갈 바를 알지 못하는 여행을 계속하십니다.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노래를 부르며….

성경은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은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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