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안내
주보
주보 모음
설교 영상
설교 원고
찬양
실시간 예배
2015년 이전 설교

우리와 함께 계시다 (마태복음 1:18-25) 12/25/2016

 

오랜 세월 치료법이 변화된 것을 재미있게 표현한 글이 있습니다.

 

기원전 2000년 풀뿌리를 먹어요.

서기 1000년 풀뿌리 섭취는 이교도적이니 기도를 좀 더 하세요.

서기 1930년 기도는 과학적이지 않으니 알약을 드세요.

서기 1980년 알약은 효과가 별로 없으니 항생제를 꼭 챙겨 드세요.

서기 2011년 항생제는 몸에 너무 해로우니 자연산 풀뿌리를 먹어요.

 

2010년이 지난 지금 제일 좋은 치료법은 자연산 풀뿌리임을 알려주는 글입니다. 그런데 이 치료법은 벌써 4000년전에 사용되었던 치료법이라는 것입니다.

 

이 글을 읽으면 전도서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1:9, 10절 말씀입니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가 있기 오래 전 세대들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세상사는 계속 돌고 또 돈다는 것입니다. 이를 치료법의 변화가 증명해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뭐 치료법뿐이겠습니까? 요즘 그토록 사람들이 중요시 여기는 화폐도 그렇고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도 그렇습니다. 화폐는 기원전 9000년에 이미 사용되기 시작했고, 미국이 자랑하는 민주주의도 실상 시작은 기원전 1000년에 그리스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정말로 새 것은 있지 않습니다. 솔로몬의 지혜가 말하고 있고 여러 가지 증거가 사방에 널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새 것은 있지 않을까요? 솔로몬의 지혜로 설명할수 없는 일이 있지 않을까요? 오늘 본문 말씀의 저자 마태는 그 놀라운 사건을 전하고 있습니다. 18절 초반절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글쎄 주석가들은 저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을지 몰라도 저는 이 말씀이 마태복음의 시작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유는 그 전 1절에서 17절까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는 곧바로 기록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예수님의 족보도 어떻게 보면 반복 반복 또 반복입니다. 이를 은연중에 마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지 않나 저는 생각해 보았습니다. 17절 말씀입니다.

“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가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더라.”

하여튼 저는 같은 역사가 반복 또 반복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해도 좋다고 봅니다. 이렇게 기록한 후에 오늘 본문 말씀에서 놀라운 선언을 합니다.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더 이상 반복의 역사의 주기를 벗어나는 위대한 사건 하나님의 역사에 단 한 번 있는 역사를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위대한 역사가 어떻게 펼쳐졌을까요? 계속 18절 말씀입니다.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그리스도의 나심은 성령으로 인한 잉태로 시작되었음을 알리고 있습니다. 정말로 전도서의 이론으로 설명할수 없는 사건임을 마태는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이 놀라운 사건을 알았을까요? 19절 말씀입니다.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사실 마태는 요셉이 의로운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의로운 사람이기 전에 그는 솔로몬의 문하생입니다. 새로운 일은 없다고 배워 온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왕가에도 흔히 있었던 비윤리적인 일을 약혼녀 마리아도 범하게 되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의로운 사람이기에 조용히 헤어지려고 했던 것입니다. 20, 21절 말씀입니다.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요셉은 두 가지로 깜짝 놀랐을줄 압니다. 첫번째로는 천사가 마리아를 누구라고 부르고 있습니까? 네 약혼녀? ‘네 아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요셉은 지금 약혼녀 마리아를 젊잖게 놓아주려고 계획을 세우고 있는데 꿈에 천사가 나타나서 하는 첫 마디가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리고는 더 놀라운 선언을 하는 것입니다.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이에 얼떨떨해진 요셉에게 천사는 전도서가 아닌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으로 달랩니다. 23절 말씀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였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전에 있었던 일은 아니지만 전부터 예언되어졌던 일임을 알려줍니다. 새로운 인류 역사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선포합니다. 더 이상 전에 있던 일이 반복만하는 것이 인류 역사가 아님을 알려줍니다. 물론 계속 전에 있던 일들은 반복 반복되어 일어 납니다. 이 반복 반복되는 인류의 역사 속에 전에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의 주인공이 바로 자기였습니다. 아니 자기의 약혼녀 아니 자기의 아내 마리아였습니다.

 

오늘 아침에 뉴멕시코 단기 선교단이 원주민 선교를 위하여 떠났습니다. 원주민들 자녀 중에 장애인들이 많기에 이를 위해 본교회 교우 중 특수 교육을 전공하신 분과 준비모임을 가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교우님이 보내신 자료에서 다음과 같은 글이 눈에 띄었습니다.

 

“고대 인디언들은 일상 생활 속에서 신과 자연을 소중히 여기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냥을 하다가도 아름다운 자연의 풍경을 보면 바쁘게 가던 길을 멈추고 감사의 기도를 하였다고 합니다. 신앙심 깊은 그들이 경이롭게 여기던 것 중 하나가 바로 다운증후군 아이들입니다. 다운증후군 아이들 특유의 순수함과 영혼의 맑음은 투명한 유리창과도 같아서 우리 인간을 신에게 이끌어 준다고 믿었다고 합니다.”

 

이 글이 저에게는 마리아와 요셉의 마음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Down Syndrome 자녀들을 우리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유전자가 잘 못되어서 태어난 장애인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과학적으로는 맞습니다. 그러나 원주민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특유의 순수함과 영혼의 맑음을 보면서 신에게 이끌어 주는 하늘에서 온 아이들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이들보다 훨씬 더 감격했을줄 압니다. 이유는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미원주민들에게서 다운증후군의 자녀들은 하나님께로 이끄는 자들이지만 마리아를 통해 임신한 아이는 바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아마 요셉은 기쁨 가운데 생각했을 것입니다. “Why us? 왜 우리에게 이처럼 놀라운 축복을 주시나?” 자녀가 신에게 이끌어 주는 하늘에서 온 아이들이라 해도 감격스러운데, 임마누엘의 아이라고 생각할 때 얼마나 감격스러웠을 것입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놀라운 감격을 요셉에게만 주시길 원하셨나요? 그럴리 없습니다. 역사에 단 한 번 있었던 이 놀라운 사건에 하나님은 온 인류를 초대하십니다. 누가 이 축복에 초대받았을까요?

오늘 우리는 세례식과 성만찬에 참여하였습니다. 우리는 오늘 요셉과 함께 임마누엘의 사건에 동참한 것입니다.

 

오늘 성탄 주일을 맞이하여 우리는 세례식을 베풀었습니다. 두 가정의 유아세례와 두분의 성인세례를 베풀었습니다. 목회자들에게 제일 감격스러운 날은 세례식이 거행되는 날입니다. 그야말로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직접 경험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항상 세례 받는 분들은 신앙간증문을 쓰시는데 이번에도 아주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공교롭게도 두 분의 성인세례자들은 모두 독실한 불교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그리고 불교에 심취되셨습니다. 그러나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만나고 그리스도만 참 주님이심을 믿고 고백하여 오늘 세례를 받게 되셨습니다.

유아세례를 받은 두 어린이도 공통점이 있습니다. 태어날 때 많은 기도가 필요했습니다. 한 어린이는 태어난 후에도 많은 어려움도 겪었습니다. 그런데 두 가정 모두 이 모든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체험하셨습니다.

 

네 분 모두 독특한 임마누엘의 이야기를 소유하고 계십니다. 사실 저는 이 분들의 간증문을 통해서 이 분들의 임마누엘의 이야기를 알게 되었지만, 우리가 임마누엘의 눈으로 이웃을 본다면 우리는 간증문을 읽지 않고도 느낄수 있지 않을까요? 미원주민들이 다운증후군 자녀들 안에서 놀라운 하나님의 얼굴을 보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임마누엘의 눈으로 이웃을 볼 때 놀라운 축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솔로몬의 지혜가 닿지 않는 곳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반복되지 않는 또 다른 세계가 있는 것을 경험합니다.

임마누엘의 체험은 모두 독특합니다. 전혀 같지 않습니다. 모두 하나님의 놀라운 새로운 축복의 주인공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만의 독특한 최고의 임마누엘의 나라를 소유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절대로 카피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에는 카피가 없습니다. 우리 각자에게 이처럼 놀라운 세계를 모두 허락하시려고 하나님이 임마누엘이 되셨습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습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를 통해서 놀라운 세계가 펼쳐질 것입니다. 여러분 자녀만 소유한 독특한 축복의 세계를 통해서 온 세상에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선포할 것입니다. 여러분 자녀뿐 아닙니다. 우리 모두의 독특한 축복의 세계를 통해서 우리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만날 것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말씀을 거둡니다.

몽골 제국의 창설자 징기스칸이 기독교를 접하기 하였지만 신앙으로 받아들이진 않은 사실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가 죽은 후의 모습을 보면 잘 알수 있는데 그가 죽은 후 젊은 여인 40명과 말 40마리를 함께 태우면서 장례를 치릅니다.

하여튼 전 세계에 잔혹한 통치자로 알려져 있었던 징기스 칸입니다. 그러나 징기스 칸의 가족이 모두 비슷하진 않습니다. 몽골 제국의 네번째 대왕의 어머니 Sorkaktani왕후가 있는데 그에 대해서 어느 자료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져 있다고 합니다.

“왕후는 네 아들이 있었는데 모두 교육을 잘 시켜서 아주 행정력이 뛰어났다. 그런데 그 왕후는 기독교인이다. 아주 성실한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의 황후 Helena처럼…. 한 시인이 왕후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하였다. “만일 내가 여인이라는 종족(race) 안에 또 다른 이런 여인을 만난다면 나는 여인이라는 종족은 남자라는 종족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잔혹한 몽골 제국 안에 이런 왕후가 있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수 있었겠습니까?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상상할수 없는 곳에 상상할수 없는 방법으로 늘 함께 하십니다.

이 모든 것의 시작은 아기 예수의 탄생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This entry was posted in 설교 원고. Bookmark the permalink.
No. Title Writer Date
375 “너희 창조주를 기억하라(IX): 심판하시리라” 전도서 12:9-14 (11/10/24) webmaster 2024.11.11
374 “너희 창조주를 기억하라(VIII): 도로 찾으리라” 전도서 11:1-6 (11/03/24) webmaster 2024.11.04
373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VII):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전도서 9:1, 7-10 (10/27/24) webmaster 2024.10.29
372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VI): 산 자의 소명” 전도서 9:2-6 (10/06/24) webmaster 2024.10.07
371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V): 하나님의 선물” 전도서 5:10-20 (09/29/24) webmaster 2024.09.30
370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IV): 범사에 기한이 있고” 전도서 3:1-15 (09/22/24) webmaster 2024.09.26
369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III): 가난한 지혜자” 전도서 9:13-18 (09/15/24) webmaster 2024.09.16
368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II): 땅은 영원히 있도다” 전도서 1:1-11 (09/01/24) webmaster 2024.09.03
367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I)” 전도서 12:1-8 (08/25/2024) webmaster 2024.08.26
366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누가복음 4:16-19 (08/11/2024) webmaster 2024.08.12
< Prev 1 2 3 4 5 6 7 8 9 10 38 ... Next > 


The Korean Church of Boston (PCUSA) 32 Harvard St. Brookline, MA 02445
교회 : (617) 739 - 2663, (617) 277 - 8097 / Fax : (617) 739 - 1366 / 담임 목사 : 이영길 목사 (781) 467 - 0002
  Powered by The Korean Church of Bost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