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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마태복음 5:14-16) 01/01/2017

 

한용운 시인의 ‘후회’라는 시입니다.

당신이 계실 때에 알뜰한 사랑을 못하였습니다.
사랑보다 믿음이 많고, 즐거움보다 조심이 더하였습니다.
게다가 나의 성격이 냉담하고 더구나 가난에 쫓겨서,
병들어 누운 당신에게 도리어 소활(疏闊)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가신 뒤에, 떠난 근심보다
뉘우치는 눈물이 많았습니다.

   * 소활(서먹서먹함)

‘당신’이 누구인지는 각자가 생각하기 나름이겠지만, 1년을 보내고 새해 첫 날을 맞이하는 오늘 우리들 모두에게는 바로 ‘당신’은 지난 2016년이 아니겠나 생각해 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시를 읽으면 많은 공감을 갖게 됩니다. 물론 어색한 부분도 있긴 합니다. 하여튼 지난 1년이라는 시간을 마음껏 알뜰한 사랑의 시간으로 채우지 못한 아쉬움을 나누게 합니다. 특히 두번째 행(줄)에 마지막 구절은 더욱 우리들의 마음을 찌릅니다.

“즐거움보다 조심이 더 하였습니다.”

지난 2016년도 즐거움으로 살았기보다는 조심하는 마음으로 산 한 해가 아니었나 생각이 절로 듭니다.

이제 2016년도가 지나가면서 2016년도 겪었던 수많은 근심도 지나갔지만 남은 것은 뉘우치는 눈물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그래도 이렇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목사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한용운 시인이 그런 의도로 이 시를 쓰시진 않았습니다. 너무 마음대로 해석하지 마세요.”

맞습니다. 그런데 저도 자주 글을 씁니다만, 중요한 사실은 글이 저자의 손을 떠나는 순간 그 후로는 읽는 사람이 그 글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저자의 의도에 너무 매일 필요도 없고 매일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저자가 아니기 때문에….

글은 읽는 사람에게 매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 그 글은 새롭게 창조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학의 특징 중 하나입니다.

 

정말 2016년도를 완벽하게 보내신 분들이 과연 있을까요? 그렇다면 우리 모두 지난 해를 생각하며 후회의 눈물까지는 아니어도 후회의 마음을 나누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런 후회의 마음이 있을 때 진정 지난 한 해에 대해서 감사할수 있고 그래서 새로 오는 새해를 사랑하지 않을까요?

  저도 2016년도로 인한 많은 감사가 있지만 한편으로는 깊은 후회도 있습니다.

 

이처럼 지난 1년에 대해서 감사와 더불어 후회의 마음을 갖고 있는 우리들에게 그래서 더욱더 시간을 사랑하게 된 우리들에게 주님은 무슨 말씀을 하실까요?

오늘 본문 말씀은 유명한 산상수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산상수훈의 시작은 이렇게 됩니다. 5:1절입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예수님께서 무리를 보신 후 무슨 생각이 드셨는지 산에 오르셨습니다. 그리고 산에 앉으셨습니다. 그러니 주님의 말씀을 듣기를 원하는 많은 사람들이 올라 왔을 것입니다. 12제자를 부르는 장면은 마태복음 10장에 나오는 것을 봐서 여기서 제자들이란 12제자가 아니고 무리들 중에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산위에 까지 따라온 모든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될줄 압니다.

아마 주님은 무리를 보시고 그 마음 속에 삶에 대한 많은 후회가 있고 그래서 삶을 더 사랑하려는 모습을 보셨을줄 압니다. 결국 삶을 사랑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가르치시려고 산에 오르신 것 같습니다. 그 중 따라 온 자들에게 입을 열어 산상수훈을 펼치십니다. 잠시 후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14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그런데 여기서 꼭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무리를 향해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따라 산에 오른 자들을 향해서만 말씀하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이 기적을 행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산으로 따라 온 것이 아닙니다. 그 중 일부가 따라 왔습니다. 그들만 산으로 따라와서 주님의 말씀을 경청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자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교우 여러분,

오늘 말씀을 경청하기 위해 교회에 나오셨습니까? 바로 여러분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는 자들로 인해서 산 위에 있는 동네가 더 빛이 날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과연 ‘산 위에 있는 동네’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주석가들의 의견도 분분한 것을 보아서 여러 가지 해석의 가능성이 열려져 있습니다. 사실 제일 먼저 생각할수 있는 것은 예루살렘이 바로 산 위에 있는 동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주석가들은 예루살렘을 상징한다고도 말합니다.

그런데 거기에 반대 의견을 갖고 있는 주석가들도 많은데 그 이유는 ‘The city upon the hill’곧 정관사가 사용되었으면 당연히 예루살렘을 뜻할텐데 문제는 ‘A city upon a hill’이라는 것입니다. ‘언덕 위에 한 동네’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딱 예루살렘으로만 못 박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저도 적극 동의합니다.

사실 저만 동의하는 것도 아니고 오래 전 puritan들이 영국에서 매사슈세츠로 올 때에 Arbella라는 배에서 John Winthrop 이 다음과 같은 유명한 설교를 합니다. 그는 후에 매사츄세츠 bay colony governor가 됩니다.

“We shall be as a city upon a hill, the eyes of all people are upon us.”

“우리는 언덕 위에 동네가 될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바라 볼 것입니다.”

곧 주님께서 정관사 the를 사용하시지 않은 이유가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자들이 사는 곳이 바로 산 위의 동네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John Winthrop이 Arbella라는 배 위에서 Puritan들을 향하여 설교한 것입니다.

곧 John Winthrop은 우리 크리스챤들끼리 한 동네를 이루어서 말씀대로 살면 바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산 위에 있는 동네’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이것이 주님께서 말씀하신 ‘산 위에 동네’일까요? John Winthrop으로 인해서 인지 많은 경우 ‘산 위에 있는 동네’는 기독교인들이 모여서 사는 동네로 여겨지기 쉬운 것 같습니다. 산 위에 있는 동네가 과연 기독교인들이 모여 사는 동네인지를 살펴 보야 겠습니다.

 

사실 기독교인들끼리 모여 살았던 시절에도 많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몇 가지 Puritan들에 대한 예를 들어 볼까요?

여러모로 엄격했고 공부를 강조했습니다. 특히 목회자들을 키우기 위해 Harvard 대학을 세웁니다. Harvard를 세운 청교도들이 지금의 하바드를 보면 뒤로 넘어 갈 것입니다. 미국 사람들은 무덤에서 거꾸러 눕는다는 표현을 합니다만….

그래도 교육을 강조한 것까지는 좋습니다. 주일을 철저히 지켜야 했습니다. 무조건 주일에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결석을 하면 벌금을 내었고 경찰들은 주일에 마을을 다니면서 교회에 가지 않은 사람들을 찾아 내어 교회로 끌어 갔습니다. 그것까지도 참을만 합니다. 교회에서 주무실 경우 당연히 벌금을 내어야 했고 자주 주무실 경우 채찍을 맞아야 했습니다.

자녀들은 부모들의 소유물이었고 여자들은 사탄의 도구가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긴 옷만 입고 다녀야 했습니다. 게을러 보이는 사람은 경찰에게 잡혀 갔습니다. 마음대로 수영도 하지 못했고 담배는 물론…. 그러나 가장 깜짝 놀라게 한 것은, 요즘 minimum wage제도가 있는데 그 당시에는 maximum wage제도가 있었다고 합니다. 고용주를 위해서 어느 이상 봉급을 주지 못하도록…. 그리고 하인들은 소나 돼지 취급을 당했다고 합니다.

 

‘A city upon a hill’ 아주 말을 근사하게 들립니다. 기독교인들끼리 모여 살면 이와 같은 천국이 되고 여기서 나오는 빛으로 사방을 비추게 될 것 같습니다. 이 생각으로 John Winthrop은 매사츄세츠에 마을을 건설했지만 결국 하인들을 소나 돼지 취급하는 마을이 된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주는 결론이 있습니다. 기독교인들끼리만 몰려 살 때 최악의 마을이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가장 추악한 모습이 들어 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산 위에 있는 동네’의 뜻은 다른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그 다음 말씀이 많은 도움을 줍니다. 15절 말씀입니다.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등불을 하나 켜서 등경 위에 놓아서 많은 사람들에게 빛을 비춘다는 것입니다. 곧 등불을 모아두지 않습니다.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한다는 것은 말 곧 bowl 아래 모아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청교도가 실패한 이유는 한 마을에 등불을 가두어 놓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만일 모아 놓지 않고 등경 위에 올려 놓으면 어떻게 될까요? 16절 말씀입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그렇다면 ‘산 위에 동네’는 무엇을 뜻할까요? 믿는 자가 사는 동네가 아닐까요? 믿는 자들끼리 사는 동네가 아니라…. 믿는 자들이 찾아 가는 곳이 아닐까요? 그 동네에 어떤 사람들이 사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믿는 자들이 가는 곳마다 빛이 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얼마전 기독교 TV방송을 보다가 ‘산 위에 동네’가 이런 곳이구나 생각이 난 곳이 있습니다. 타일랜드에는 많은 여인들이 거리의 여인으로 일을 하고 있습니다. 많은 경우 좋은 일자리를 찾다가 잘못 걸려든 여인들입니다.

그런데 더 불쌍한 사람들은 그들의 자녀들입니다. 엄마가 밤에 일을 하는 동안 자녀들을 전혀 돌볼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Night Care라는 단체를 만들어서 봉사를 합니다. Day Care가 아니라 Night Care입니다. Night Care단체에서는 밤에 자녀들을 위해서 봉사를 합니다. 좋은 교육을 해주고 친구들끼리 함께 놀게 합니다. 이 친구들의 엄마는 모두 밤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엄마들은 기쁜 마음으로 자녀들을 쎈터에 맡깁니다. 물론 엄마들을 돕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귀한 어린 영혼들을 위한 일입니다.

그 프로그램을 보면서 저의 마음에는 바로 저기가 ‘산 위에 동네’가 아닌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산 위에 동네는 기독교인들이 모여 사는 곳이 아닙니다. 어둠이 가득찬 동네에 기독교인이 빛을 발할 때 바로 산 위에 동네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2017년도 신년예배를 드리면서 조금 색다른 각도에서 ‘산 위에 동네’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자 합니다.

저는 시간적 ‘산 위에 동네’를 생각하고 싶습니다. Night Care와 같은 사역은 공간적 ‘산 위에 동네’입니다. 물론 너무도 중요합니다. 저희 교회도 그 동안 공간적 ‘산 위에 동네’를 위해서 많이 애써 왔습니다.

올해는 그 동안 해 오던 사역과 더불어 시간적 ‘산 위에 동네’를 생각하고 싶습니다. 곧 2017년도를 시간적 ‘산 위에 동네’로 삼고 싶습니다. 당장은 큰 빛을 발하는 것 같지 않지만 먼 훗날 역사에 길이 남는 빛이 된다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당장은 빛이 희미해 보이지만 그 누구도 거들떠 보지도 않는 빛이지만 커지고 또 커져서 먼 훗날 놀라운 광채를 발하는 빛, 이런 빛을 발하는 한 해가 되길 바랍니다.

사실 우리는 올해 표어를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정했습니다. 물론 올해 빛의 역할을 잘 감당하기 위하여 정했습니다. 특히 요즘 세상 정세를 보아서 너무나 빛이 소중한 때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당장 빛을 비추는데만 촛점을 둔다면 정말 필요한 빛을 발하지 못하게 될수도 있다고 봅니다.

올해만큼은 하는 일들이 대수로워 보이지 않지만 진정 미래에 놀라운 빛을 발하게 되는 기반을 쌓는 일을 한다면 진정 2017년도는 시간적 ‘산 위에 동네’가 되지 않을까요?

2017년 때문에 2020년 2030년 그리고 2053년 곧 제2의 희년에 아름다운 꽃을 피게 되는 한 해가 되길 기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가 하는 작은 일에 놀라운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언젠가 놀라운 광채를 발하게 될 것이라는….

 

Vivian Maier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분의 직업은 nanny입니다. 평생 이 집 저 집 전전해 다니면서 아이들을 돌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취미가 하나 있었는데 사진을 찍는 것입니다. 늘 사진기를 목에 걸고 다니면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런데 사진만 찍었지 현상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 분이 세상을 떠나면서 소유한 모든 것들이 auction에 나왔는데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았습니다. 우연히 앞 집에 사는 사람의 눈에 들어 왔는데 약 10만 장의 현상 안된 사진 negative film을 보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 사람이 전부를 구입합니다. 그리고 현상을 하기 시작합니다. 전혀 사진작가 협회에서는 거들떠 보지도 않던 작품들이 세상에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사진전을 여는 곳마다 입추에 여지가 없이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비록 Vivian은 2009년도에 세상을 떠났지만 2013, 14년도 international film festival에 작품이 전시됩니다.

 

그는 nanny로서 현상도 못하고 전시회도 못 열었지만 언젠가 누군가에 의해서 세상에 빛을 발할 것을 믿고 무려 10만여장의 사진을 찍은 것입니다. 그는 시간적 산 위에 동네에서 산 사람인 것 같습니다. 결국 후회없는 삶을 산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 모두를 위해 2017년도가 주어졌습니다. 우리도 산 위에 동네에서 사는 한 해로 맞이하십시다. 2017년도가 미래를 위한 산 위에 동네가 될 것입니다. 먼훗날 2017년도에 놀라운 일이 싹트기 시작했다는 평가를 받는 아름다운 해가 될 것입니다. 진정 2107년도는 후회 없는 한 해가 될 것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지난주에는 오래전 저희 교회를 다니셨던 분의 천국환송예배를 인도했었습니다. 사실 저희 교회를 다니시다가 멀리 북쪽으로 이사 가셔서 그 근처 교회를 다니신 분이십니다. 연로해 지셔서 10여년전에 따님이 사는 버지니아로 이사를 가셨습니다.

가족 장지가 브루클라인에 있고 또 여러모러 저희 교회와도 관계가 되서인지 저에게 천국환송예배를 부탁해 오셨습니다.

그 분의 천국 환송예배를 준비하기 위해 다시 저희 교회 역사를 살펴 보게 되었습니다. 그 중 눈에 띈 것이 오래 전 저희 교회를 다니셨는데 유언으로 큰 액수의 건축헌금을 하신 분을 비롯해서 많은 분들이 예배처소를 마련하기 위하여 건축헌금을 하면서 애쓰신 글들을 다시 접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오래 전에 저희 교회가 지붕도 고치고 대대적으로 수리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건축헌금이 모아져 있어서 할수 있었습니다. 이제 저희 ECC건축도 끝나고 또 새로이 지붕도 단장한 이 때 오늘의 저희 교회가 있는 것은 어려운 그 당시 크고 작게 헌금하신 분들로 시작된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헌신 없이 오늘의 저희 교회가 있을수 있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들의 수고는 수십년 후에야 빛을 받게 되었습니다. 산 위에 동네가 빛을 발하게 된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가 사는 동네를 산위에 동네가 되게 하십니다. 말씀 따라 살 때 우리가 사는 동네는 산 위에 동네가 될 것입니다. 지금은 금방 꺼질듯 한 빛 같지만 언젠가 비추일 놀라운 광채를 생각하면서 한 해를 시작하십시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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