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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가만히 있을지어다 (출애굽기 14:10-20) 01/29/2017

 

언젠가 소개해 드린 나무 의사 우종영 씨의 책에 보면 다음과 같은 제목으로 한 나무를 소개합니다. ‘국회의사당에 심고 싶은 나무.’ 국회의사당에 심고 싶은 나무는 어떤 나무일까 궁금한 생각이 들어서 관심을 갖고 읽어 보았습니다. 그 나무는 회화나무라고 합니다.

어떤 시인은 회화나무를 가리켜 ‘바람도 품에 안는 장엄한 포용으로 풍성한 그늘을 내린다’ 라고 했다고 합니다.

옛 사람들도 비슷한 생각을 했던지 특히나 양반집에서는 회화나무를 심어야 큰 인물이 많이 나온다고 해서 으레 마당 한켠에 회화나무를 심었다고 합니다. 사실 양반집뿐 아니라 궁궐에서 이 회화나무를 즐겨 심었는데, 지금도 서울의 비원, 창경궁, 경복궁에 입구마다 커다란 회화나무가 자리하고 있다고 합니다. 나라를 지키는 대신들로 하여금 회화나무와 같은 품성으로 나라일을 보라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추측을 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생겼는지 우선 사진으로 한번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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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나무 서산 10 10 28.JPG

 

많은 사람들이 아카시아 나무로 혼동을 종종 하지만 저 나무가 회화나무라고 합니다. 우종영 씨는 회화나무를 만나게 되면 그 엄숙함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회화나무 앞에 서면 그는 요즘도 옛 사람들처럼 큰 인물이 나오게 해달라고 기원한다고 합니다.

우종영씨는 나라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이 모두 회화나무와 같은 정기를 가진 분들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 나무를 국회의사당 앞에 심고 싶은 나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럼 어떤 사람들이 오늘도 회화나무와 같은 존재가 되어서 국가와 민족과 인류를 굳건히 지켜 나가게 될까요? 모세의 모습을 통하여 살펴 보기로 하겠습니다. 10절 말씀입니다.

“바로가 가까이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들 뒤에 이른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시간 관계상 본문 말씀을 짧게 잡았습니다만, 그래도 금방 오늘의 이야기의 상황을 쉽게 아셨으리라 생각됩니다. 애굽의 바로가 이스라엘 민족을 떠나게 한 후 잠시 후 마음을 바꿉니다. 다시 이스라엘 민족을 잡으려고 군대와 더불어 좇아 옵니다. 드디어 이스라엘 민족이 거하는 곳에 가까이 왔습니다.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습니다. 자기들을 애굽의 400년 종살이에서 구해 주신 여호와께 부르짖고 있습니다. 여기까지 좋습니다. 그런데 11절 말씀입니다.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계속 부르짖어야지 금방 화살을 모세에게로 향합니다. 계속 모세를 원망합니다. 12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야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이스라엘인들의 모습을 저는 다음의 이야기의 주인공의 모습으로 느끼게 됩니다.

한 사람이 28년의 수감생활 끝에 가석방을 제안했지만 그냥 그 곳에 머물기로 결심합니다. 그는 걱정할 것 없는 감옥 안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는 사람을 죽이고 감옥에 갔고 그 후 죄를 충분히 뉘우쳤지만, 아직도 바깥 세상과 싸워야만 한다는 사실이 감옥 밖을 나가기가 두려워 조용한 감옥에서 국민의 세금으로 걱정할 것 없이 생활해 보고 싶어 한 것입니다.

이 모습이 바로 이스라엘 민족의 모습이었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얼마나 모세가 답답해 했겠습니까? 이에 모세가 어떻게 반응하나요? 이스라엘 민족에게 욕과 저주를 퍼 붓나요? 13절 말씀입니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이스라엘 민족 사이에 우뚝 선 회화나무와 같은 모습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회화나무처럼 우뚝 서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놀라운 역사를 바라 보자고 권합니다. 더 이상 볼수 없는 애굽 사람의 마지막 모습을 바라 보자고 권합니다.

얼마나 큰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까? 이스라엘 민족은 감옥 생활이 편하다고 감옥으로 기어 들어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모세는 회화나무처럼 우뚝 서서 감옥으로 들어가려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4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모세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놀라운 일을 관람할 것을 권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일을 관람하기 위해서는 회화나무가 되어서 가만히 서있는 것입니다.

 

회화나무와 그렇지 못한 나무의 차이는 어떻게 보면 간단한 것 같습니다. 회화나무와 같은 사람은 높은 곳에서 역사를 바라 보며 현재를 사는 자들입니다. 생각해 보십시다. 창덕궁의 회화나무는 궁궐에서 되어지는 것을 늘 보면서 매일 매일을 지냅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수백년을 내다 보면서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반면 많은 사람들은 역사를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그냥 눈 앞에 되어지는 것만 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처럼 애굽으로 돌아 가려고 합니다. 애굽으로 돌아 간다는 것이 이스라엘의 역사에 얼마나 치욕적인 것인지를 보지 못합니다.

 

그런데 현재라도 제대로 보면 다행입니다. 회화나무와 평범한 나무는 현재를 보는 눈에도 큰 차이가 있습니다. 다음 글에서 또 찾아 볼수 있습니다.

 

“풍부와 부족은 우리들의 삶에 항상 함께 있습니다. 어느 정원을 가꾸냐는 우리의 선택입니다. 우리가 부족한 것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고 우리 안에 풍부한 것에 감사한다면 우리는 최고의 하늘 나라의 선물을 이 곳에서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Sarah Ban Breathnach

 

이스라엘 민족은 자기들의 부족함에 눈을 돌렸습니다. 자기들의 힘으로서는 애굽군대를 당할수 없는 것에 눈을 돌렸습니다. 곧 자기들의 약함에 눈을 돌린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를 원망한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자기가 갖고 있는 놀라운 축복에 눈을 돌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위한 군대가 되심을 감사했습니다.

곧 모세는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서 현재를 믿음으로 바라 보는 자였습니다. 그는 역사를 보는 눈이 달랐고 현재를 보는 눈이 달랐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의 회화나무가 된 것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장엄한 미래를 본 사람입니다. 아울러 현재 임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본 사람입니다.

이처럼 모세와 같이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보며 오늘을 사는 자는 모세의 고백을 하는 자들이 됩니다. 역사의 회화나무가 되어집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모세라는 이스라엘의 회화나무를 보면서 너무도 기뻐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모세의 말에 백성들은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을 너무도 잘 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15, 16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서 마른 땅으로 행하리라.”

하나님은 회화나무가 되어서 서 있는 모세 하나로 족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은 가만히 서서 볼수 있는 족속들이 아닌 것을 너무도 잘 아셨습니다. 현재에 매여서 사는 그들은 빨리 빨리 움직여야만 직성이 풀리는 자들임을 잘 아셨습니다. 그들은 회화나무 감이 아닌 것을 너무도 잘 아셨습니다. 갈라진 바다를 빨리 걸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자들임을 잘 아셨습니다. 그래서 모세에게 손을 바다 위로 내밀게 하고 홍해를 가르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걷게 하십니다. 애굽의 감옥으로가 아니라 자유의 땅으로…. 그리고 더 놀라운 일을 체험케 하십니다. 19, 20절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진 앞에 가던 하나님의 사자가 그들의 뒤로 옮겨 가매 구름 기둥도 앞에서 그 뒤로 옮겨 애굽 진과 이스라엘 진 사이에 이르러 서니 저쪽에는 구름과 흑암이 있고 이쪽에는 밤이 밝으므로 밤새도록 저쪽이 이쪽에 가까이 못하였더라.”

결국 이스라엘 민족은 놀라운 것을 경험합니다. 자기들 앞에서 인도하던 하나님의 사자와 구름 기둥이 뒤로 물러가서 애굽 군대를 더 이상 쫓아 오지 못하게 막아 선 것입니다.

 

한편 자기들의 뒤에서 자기들을 방어해 주고 있는 구름기둥을 보면서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에 감탄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제야 가만히 서서 뒤를 돌아 보고 있는 자신들을 발견했을 것입니다.

갈라진 홍해 사이로 허겁지겁 걸어 들어 오면서 “빨리 빨리” 외치며 가던 자기들의 모습이 우스꽝스러운 생각마저 들었을 것입니다. 그제야 모세의 위대함을 마음에 새기며 모세의 음성을 다시금 듣습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올해가 종교개혁 500주년이 됩니다. 개신교로서는 뜻 깊은 해입니다. 500년전에 마틴 루터가 95개 조항을 Wittenberg 성당 복도에 게시함으로 종교개혁의 불꽃이 타게 되었습니다. 그 후 4년 후 1521년 4월에 루터는 로마 황제 챨스 5세 앞에 서서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 때 유명한 말을 한 것이 오늘까지 전해 오고 있습니다. 자기가 발표한 모든 내용을 거두라는 명령에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Here I stand; I can do no other. God help me.”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는 다른 무엇도 할수 없나이다. 나를 도우소서.”

 

그런데 최근에 학자들은 이 말은 후에 마틴 루터의 위대함을 더 묘사하기 위해서 더 해진 것이지 실제 마틴 루터의 말은 아닌지도 모른다는 얘기들을 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그가 역사의 회화나무가 아니었다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분명히 밝혀져 있는 자료만 보아도 그는 정말로 회화나무였습니다. 다음이 마틴 루터의 말입니다.

“성경의 증거나 이성적 판단 없이 무작정 저는 교황과 공의회를 믿을수 없습니다. 확신하기는 교회는 반복적으로 잘 못 하고 있고 스스로 자가당착에 빠져 있습니다. 말씀에 근거해서 저는 확신합니다. 나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있습니다. 그래서 결코 나의 주장을 철회할수도 또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의 양심에 어긋나게 행동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God help me. Amen.”

 

많은 크리스챤들이 로마 교황과 황제가 무서워 숨어 들어가 있었을 때 루터는 모세가 되어 외친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어다.”

그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보는 가운데 현재를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면 이제는 누구가 회화나무가 될까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 한 복판에서 현재를 사는 사람들이 아닐까요?

2017년도에도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놀라운 축복의 세계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애굽을 이기고도 남는 하나님의 손길이 함께 하십니다. 이 확신을 가지고 매일 매일 우리가 가야 할 길을 가십니다. 우리가 져야 할 짐을 지십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사막에서 짐을 실어 나르는 동물은 낙타입니다. 낙타는 아침이 되면 주인 앞에 와서 무릎을 꿇는다고 합니다. 그러면 주인은 낙타에게 짐을 실어줍니다. 결코 주인은 낙타에게 많은 짐을 지우지 않는다고 합니다. 무거운 짐을 많이 실어 주면 얼마 못 가서 쓰러져 죽는다고 합니다.

우리 주님도 우리에게 짐을 실어 주십니다. 우리에게 가장 맞는 짐을 주십니다. 그 짐을 지고 매일 우리의 길을 가십시다. 남은 한 해를 가십니다. 모세의 노래를 부르며,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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