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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하여 하늘을 쳐다보느냐?

날짜 : 2009.04.19
예배명 : 주일예배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어찌하여 하늘을 쳐다보느냐?
성경본문 : 사도행전 1장 6-1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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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소천받으신 김수환 추기경에 관한 일화입니다. 몇 년 전에 카톨릭 대학교 성심교정에서 열린 음악회가 개최되었었다고 합니다. 그 때 그 자리에서 가요인 ‘애모’를 불러서 큰 이야깃거리가 되었었다고 합니다. 그 날 음악회가 끝난 뒤 중학교 1,2학년쯤으로 보이는 소녀가 김 추기경에게 다가와 사인을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추기경님, 사인 좀 해주세요! 이 다섯 장에 하나씩이요!”
기분 좋은 표정으로 소녀가 내민 다섯 장의 종이에다 일일이 사인을 해주던 김 추기경이 소녀에게 물었습니다.
“넌 욕심도 많구나! 한 장이면 됐지. 다섯 장이나 받아 무얼 하려고 그러니?” 그랬더니 소녀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추기경님 사인 다섯 장이 있어야 ‘김건모’ 사인 한 장하고 바꿀 수 있거든요!”
요즘 세상은 영어로 말하면 Celebrity (유명인사)들의 세상인 것 같습니다. 단지 유명인사에 급수가 있을 뿐입니다. 가수 김건모가 김추기경보다 다섯 배 더 유명인사인 것 같습니다. 결국 인생을 두 그룹으로 나눌수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유명인사와 무명인사, 물론 유명인사에는 급수가 따르겠고요.

오래전 프린스턴에 갔을 때 프린스턴 대학교를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한국인들이 보여서 가까이 가 보았습니다. 한국의 어느 드라마의 한 장면을 촬영하고 있었습니다. 기억에는 안 납니다만 그 당시에는 꽤 유명한 드라마였던 것 같습니다. 미국 대학교 졸업식의 한 장면을 촬영하는 것이었습니다. 주인공들은 당연히 한국 배우였습니다. 수많은 엑스트라들이 교정에 깔려 있었는데 까만 졸업가운을 입은 채 자기에게 정해진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감독이 큐 사인을 주면 주인공은 물론이거니와 엑스트라들도 일제히 자기 자리에서 움직입니다. 대화를 나누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열심히 걸어가는 사람이 있고 포옹하는 사람들이 있고…. 이것을 반복하고 또 반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제작진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오늘 얼마 동안 촬영하십니까?” “오늘 하루 종일 걸릴 겁니다.” “오늘 촬영하는 것이 실제로 몇 분짜리를 촬영하시는 것입니까?” 대답하기를 “십 분 정도죠.”
십 분을 촬영하기 위해서 수많은 엑스트라들은 돈 조금 받으려고 했던 것을 반복적으로 또 하고 또 하고 또 하면서 하루라는 시간 가기를 기다리고만 있었습니다. 이들은 ‘지나가는 사람들’이지만 배우들을 위해서 하루 종일 반복하고 반복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배우들은 보람이 있겠죠. 하루를 잘 참으면 10분간 전국적으로 최고로 세련된 자신들의 모습이 TV로 방영되니깐…. 저는 그 자리에 잠시 서서 유명인사와 무명인사들의 차이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그렇다면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유명인사입니까, 무명인사입니까? 주인공입니까, 지나가는 사람입니까?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우리가 누구인지 살펴보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저 합니다.

지난 주 우리는 부활의 주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지난 주에 부활하신 것은 아닙니다. 2000년 전에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는 2000년 전 부활하신 주님을 지난 주에는 마치 그 날 부활하신 것처럼 상상하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우리는 상상 속에서 지난 주 부활의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러면 부활의 주님께서는 부활의 주님을 만난 자들을 어떻게 대하고 계신지 살펴보아야겠습니다. 부활의 주님께서 부활의 주님을 만난 자들을 유명인사로 대하고 계신지 무명인사로 대하고 계신지, 주인공으로 대하고 계신지 지나가는 사람들로 대하고 계신지 살펴보아야겠습니다. 6절 말씀입니다.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분명한 것은 제자들은 예수님을 유명인사로 아니 역사의 주인공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회복하실 수 있는 주인공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자들이 본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제자들이 왜 이런 질문을 했을까요?
사실 오늘 본문 말씀에 기록된 이 날에 일어난 사건은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 40일이 된 날에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40일 후에 승천하신 것을 다 알고 있고 그 것을 안채로 성경을 읽고 있습니다만, 사실 이 제자들은 40일에 주님이 승천하시리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40일이 되었으니 무엇인가 큰 일이 터지겠다 예상은 하였던 것 같습니다. 40일은 제자들에게 무척 낯익은 숫자입니다. 이스라엘 선조들이 40년간 광야생활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40일간 사탄에게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이제 어느덧 예수님께서 부활하신지 40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큰 기대를 안고 이들은 물어 본 것입니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7, 8절 말씀입니다.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동문서답을 하시고 계십니다. 재미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주인공으로 보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하여튼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곧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아하, 우리가 역사의 주인공들이구나. 이제부터는 역사의 주인공으로 살아야지 우리가 아니면 복음이 전파되지 못해,” 금방 이런 생각을 했을까요? 잠시 후 다시 이 점을 생각하기로 하고, 9절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예수님은 “너희가 주인공이다”라는 말씀을 남기시고 승천하셨습니다. 승천하시는 모습을 제자들은 쳐다봅니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은 “너희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곧 “너희가 주인공이다” 말씀하시고는 무책임하게 사라지신 것입니다.
하여튼 제자들 앞에서 예수님은 만유인력의 힘을 어기시고 올라가십니다. 신기한 일이 전개되고 있는 것입니다. 신기한 일을 보면서 어떤 제자들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조금 오르시다가 다시 내려오시겠지. 정말로 저런 능력이라면 이제 우리는 못할 것이 없어졌어. 이제 이 나라를 곧 회복할 수 있을거야.” 어떤 제자는 이런 생각을 했을지 모릅니다. “어 올라가시네 올라가시네. 그냥 올라가시면 안되는데”막상 잡으려고 했을 때는 이미 너무 높이 올라가셨을 때입니다. 그래도 또 기대했을 것입니다. “설마 다시 내려오시겠지.”
그런데 갑자기 구름이 나타나더니 그 속으로 사라지셨습니다. 제자들은 그래도 기다립니다. 구름이 지나가기를. 드디어 구름이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다시 푸른 하늘만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온데 간데없이 사라지셨습니다. 그래도 제자들은 하늘을 쳐다봅니다. “다시 내려오시겠지. 우리에게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시려고 지금 이러고 계실거야.” 시간은 지나가는데 내려오실 기색은 보이지 않습니다. 10절 말씀입니다.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갑자기 천사가 옆에 나타났습니다. 제자들은 눈을 하늘에서 천사들에게 돌립니다. 이 때 천사가 말합니다. 11절 말씀입니다.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 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제자들은 뺨때기를 얻어맞은 기분입니다.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제자들의 한 가지 예상은 적중했습니다. 40일이 지났으니 무슨 일이 생길 것이라는 예상은 적중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예상은 또한 빗나갔습니다. 역사의 주인공 예수님께서 비겁하게 도망가실지는 몰랐습니다. 끝까지 자기들과 함께 싸워서 이스라엘을 회복할 것을 믿었습니다. 믿는 도끼에 발등이 찍힌 것입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하면,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신다고 하셨으니 비겁하게 도망가신 것 같지는 않습니다. 무슨 놀라운 계획이 있으신 것 같은 느낌을 갖습니다. 하여튼 제자들은 이상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제자들의 뇌리에 예수님의 말씀이 울리고 또 울립니다.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제자들은 하나 둘 자신의 모습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그동안 예수님을 역사의 주인공으로 생각해 온 자신들의 모습, 또한 자기들은 지나가는 사람들로 생각해 온 자신들의 모습을 보기 시작합니다. 한편 천사에게 뺨따귀를 맞던 생각이 납니다.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천사가 소리쳤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이 받은 선물은 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예수님으로부터, 하나는 천사들로부터 받았습니다.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그런데 이것이 바로 부활주일을 막 지내고 부활 후 첫 예배를 드리러 나온 우리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닐까요?” 우리뿐이 아니라 모든 현대 크리스챤들에게 주시는 말씀이 아닐까요? 사실 일 년 중 어느 날 교회 출석이 제일 높은 줄 잘 아실 줄 압니다. 부활절입니다. 부활절 예배는 모두 빠짐없이 드리십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역사의 주인공이신 부활의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일 줄 압니다.
미국교회에서는 부활절 다음 주일을 다크 선데이(Dark Sunday)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지난 주 반짝했다가 다시 어두워지니 말입니다. 물론 한인교회는 안 그렇습니다만…. 우리 한인교회는 교인출석은 크게 영향은 안 받지만, 그래도 한인교회도 다크 선데이(Dark Sunday)가 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뭔가 크게 달라질 줄 알았는데 별로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역사의 주인공에게 기대를 하였는데 또 다시 실망입니다. 결국 멍하니 하늘만 쳐다봅니다.
사실 올 해도 우리는 사순절 묵상집을 함께 나누면서 40일간 긴 시간을 주님의 부활을 기다렸습니다. 40일간 주님의 부활을 기다리다 보니 우리들 마음속에는 정말 주님이 역사의 주인공이시라는 확신은 더욱 견고해졌습니다. 우리는 어느 때보다도 주님께서 역사의 주인공이시라는 감격을 안고 지난 주 부활절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지난 일주일 특별히 역사가 바뀐 것은 없어 보입니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역사의 주인공에게 말없는 불만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그렇지만 40일간의 우리의 기대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역사의 주인공이라는 확신은 아직도 견고 합니다. 그러니 멍하니 하늘을 쳐다 볼 수밖에, “주님은 뭘하시나” 생각하면서…, 이런 자세로 예배드리러 나온 우리들에게 천사들이 소리치고 있지 않을까요? “이 사람들아. 너희가 역사의 주인공들이야. 왜 하늘만 쳐다봐.”
사실 천사들은 샘이 나있었습니다. 언젠가 예수님처럼 부활의 몸을 제자들이 입을 것을 알고 샘이 나있었습니다. 자기들이 샘내고 있는 제자들이 하늘만 쳐다보고 있으니 소리친 것입니다. “왜 하늘만 쳐다봐!”
얼마 전 저는 스스로 역사의 주인공임을 망각하고 하늘만 멍하니 쳐다보는 삶의 모습을 저의 삶에서 느끼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저는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오면 저도 모르게 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옷도 갈아입지 않고 TV를 킵니다. 그리고는 케이블 티비 뉴스(cable TV News) 방송을 먼저 봅니다. 세 채널이 있는데 하나씩 잠깐 잠깐 돌려 봅니다. 그리고는 특별히 볼 만한 것이 없다하면 스포츠 방송을 켜봅니다. 잠깐씩 잠깐씩…. 그리고 나서 저의 퇴근 후 하루 일과가 시작됩니다. 어느 날도 집에 오자마자 TV를 켜는 저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순간 천사의 말이 생각이 났습니다.
“어찌하여 하늘을 쳐다보느냐?” 조금 각색하면 “어찌하여 TV만 쳐다보느냐?”
왜 집에 들어오자마자 TV를 킵니까? 그 안에 역사의 주인공들이 나오기 때문이 아닙니까? 온 세상 역사를 이끄시는 분들께서 오늘은 어떻게 이끌고 계신가 궁금하기에 키지 않습니까? 물론 목사로서 뉴스를 알아야 하죠. 그래서 유명한 칼 바르트 선생은 일찍이 ‘크리스챤들은 한 손에는 성경을 한 손에는 신문을’ 주장했습니다. 목사가 아니 크리스챤들이 뉴스를 알아야 합니다만, 퇴근하자마자 TV를 키는 것은 좀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는 큰 이유는 자신이 역사의 주인공이라는 것을 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는 드라마는 안 보지만 드라마에 빠지신 분들도 매한 가지라고 생각됩니다. 왜 그렇게 드라마에 빠집니까? 역사의 주인공들이 TV안에 있기 때문이, 아니 계시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역사의 주인공이 TV 안에 계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지금 천사는 말하고 있지 않을까요?
“이 사람들아, 왜 TV만 쳐다봐.”
이 천사의 말을 듣고 어안이 벙벙해진 사람들에게 주님의 말씀은 멀리서부터 메아리쳐 들려오기 시작할 것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그러면 역사의 주인공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가정사를 다 제쳐놓고 큰일을 감당하는 자가 되어야 하나요? 모든 것을 뒤로 하고 땅끝까지 나가야 하나요? TV가 없던 오래 전 1890년경에 한 촌뜨기 소녀가 스스로 역사의 주인공의 길을 걸어가는 놀라운 결단을 합니다. ‘리쥬의 떼레세’라는 수녀입니다. 수녀원에 들어가서 누구나 거치는 삼년간 계급이 제일 낮은 노비스(novice)생활을 합니다. 노비스는 ‘풋나귀’내지 ‘개종자’라는 뜻입니다. 어떻게 하면 수녀원의 촌뜨기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수녀원에서는 잔심부름을 하는 위치입니다. 삼년이 지나면 다음 계급으로 올라갑니다. 그런데 그녀는 영원히 노비스가 될 것을 수녀원에 요청합니다. 항상 가장 낮은 위치에서 심부름하며 섬기다가 하나님 품에 안기겠다는 요청을 한 것입니다. 그녀의 요청은 받아 드려집니다. 그녀는 평생 노비스로 섬깁니다.
그녀가 그러한 결단을 내린 이유는 그분은 가장 작고 하찮은 것 안에서 거룩함을 체험하고 싶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을 가장 낮은 곳에 처하게 했어야 했습니다. 가장 낮은 곳에서 그분은 놀라운 경험을 합니다. 모든 것이 거룩하고 아름다운 것을 경험합니다. 그분은 리틀 플라워(little flower)라는 별명을 받게 되고 세상을 떠난 후 그가 남긴 글들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천주교에서는 물론 그분을 성자로 추대하게 되었습니다.
테레세는 프랑스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서 프랑스의 작은 수녀원에서 25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납니다. 그분은 멀리 나가 본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15살에 수녀원에 들어가서 10년을 그 안에서 살다가 세상을 떠납니다. 그가 세상을 떠날 때 아무도 그의 죽음을 마음을 두지 않았습니다. 수녀원의 한 노비스가 외롭게 세상을 떠나는 것으로 생각하고 거들떠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00년이 지난 1997년 수백만 권의 그분의 자서전이 팔리게 되었고 50개국의 언어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그 분이야말로 예수님의 예언을 몸소 이루게 된 것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이로서 알 수 있는 것은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은 먼저 땅끝을 보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자신을 보는 사람들입니다. 자신 주변에 일어나는 작은 일들에 충성하는 사람들입니다. 나머지는 부활의 주님의 손에 맡기는 사람들입니다.
리쥬의 테레세는 자신은 작은 자임을 알았습니다. 촌뜨기인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자신은 역사의 주인공임을 알았습니다. 삶 속에서 만나는 수많은 작은 존재 안에 영원함이 깃들여 있음을 체험하곤 하였습니다. 그 결과 땅끝까지 이르러 부활의 증인이 된 것입니다.

저의 이야기를 하나 더 해드려야겠습니다. TV속에 역사의 주인공을 바라보긴 했지만 그 와중에서도 얼마 전부터 좋은 습관이 하나 생긴 것이 있습니다. 아니 어떻게 보면 나쁜 습관을 버린 것이 있습니다. 전에는 식사 시간에는 TV를 보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영성에 관한 책을 보았는데 식사시간에는 전혀 다른 것을 하지 말라는 충고의 글을 읽었습니다. 그 후로 그렇게 하기 시작했습니다. 식사시간에 레드삭스(Red Sox)게임이 시작되곤 합니다. 유혹이 생깁니다만 TV를 끕니다. 그런데 웬일입니까. 점점 신기한 확신이 저에게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할수록 제가 레드삭스 운동선수보다 더 중요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게 되었습니다. 스스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역사의 주인공이 식사를 하시는데 레드삭스게임이 뭐가 중요하고 뉴스가 뭐가 중요한가?”
또 다른 좋은 습관도 하나 생겼습니다. 교회 사무실에 나오면 컴퓨터를 키면서 동시에 전화 메시지를 점검하는 다이얼을 돌립니다. 컴퓨터가 워밍업하는 동안 일초라도 아끼기 위함입니다. 제 딴에는 시간을 절약한다고 하는 습관입니다. 그런데 최근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왜 같은 시간에 두 세 가지 하기를 노력하고 있죠? 곰곰이 생각해 볼만 합니다. 왜 그럽니까? 우리는 시간의 거룩성을 망각한지 오래 되었습니다. 시간의 유용성만 생각하면서 삽니다.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하는 것이 바로 역사의 주인공들의 삶이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시간을 사용할 줄은 알지만 시간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찾는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이유는 간단하죠. 스스로 지나가는 사람으로 생각하니깐. “기왕 지나갈 것 조금이라도 많은 것을 해 봐야지”라고 생각합니다. 자기들이 언젠가 부활의 몸을 입을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참 역사의 주인공들은 시간 안에서 자신을 찾고 있습니다. 시간의 거룩성을 만나고 있습니다. 가장 작은 것 안에서 하나님의 영원함을 만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전화 메시지 다이얼을 돌리면서 기다리며 기도합니다. “저에게 메시지를 남기신 분을 축복하소서.” 기도하고 나면 어떤 때는 메시지가 돌아가고 어떤 때는 메시지가 없다는 소리가 나옵니다. 메시지를 남기신 분에게 저는 축복의 기도를 드린 것이고 아무도 멧세지가 없을 경우는 그 축복은 저에게 돌아오지 않겠습니까?
전에는 시간의 효율성으로 인해 몇 가지 일을 한 번에 하려고 하였는데, 그 때는 모든 시간을 잃어버렸습니다. 참 만남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한 번에 한 가지씩 기도하는 마음으로 합니다. 많은 만남을 누리게 된 저의 모습을 봅니다. 시간의 고귀함을 감사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작은 것에 충실함이 곧 역사의 주인공의 삶을 누리게 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다. 역사의 주인공들에게는 사실 작은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큽니다. 역사의 주인공으로 살았던 예수님은 수많은 작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작은 만남이었습니까? 너무도 큰 만남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역사의 주인공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은 어떤가요? 우리도 이제 역사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우리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하나도 하찮은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역사의 주인공이기 때문입니다. 테레세 수녀는 이것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노비스에서 더 올라갈 필요가 없었습니다. 자기와 만나는 모든 것이 역사적인 만남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역사적인 사건들이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주님을 닮은 부활의 몸을 입을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교우 여러분,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유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요? 우리로 하여금 역사의 주인공이 되게 하려 하셨습니다. 우리의 작은 삶 하나 하나가 역사적인 순간이 되게 하시기 위함이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작은 시간과 공간에서 위대한 역사적인 삶을 사는 자들을 통해서 주님의 복음은 땅끝까지 전파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말씀을 거둡니다.
요즘 종종 오래전 어느 교우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이 나곤 합니다. 어느 이야기 책에서 읽으셨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느 주부가 음식을 만들 때 늘 빈 컵으로 양념치듯 음식에 뿌리곤 하였다고 합니다. 요리를 하시려면 간장도 넣고 설탕도 넣고 식초도 넣고 이것저것 넣지 않습니까? 그런데 항상 빈 컵으로 양념을 붓는 시늉을 한다고 합니다. 그 때가 바로 사랑을 담는 시간이라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적이 있습니다. 왜 사랑을 담겠습니까? 이 음식을 드실 분들이 역사의 주인공들이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교우 여러분, 지난 주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도 언젠가 부활의 몸을 입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무엇을 쳐다보시고 계십니까? 하늘을 쳐다보시고 계십니까? 신문을 쳐다보시고 계십니까? TV를 쳐다보시고 계십니까?
천사들의 음성을 들으십시다.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하늘을 쳐다보느냐?”
이 음성을 듣는 자들에게는 멀리서 주님의 음성이 메아리로서 들려올 것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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