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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이한 어린이

날짜 : 2008.05.04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기이한 어린이
성경본문 : 누가복음 2: 40-52

http://kcbostonmedia.cponsolny.com/Sermon_video_master/5-4-2008.wmv

1957년 샌프란시스코 미식축구 경기장 앞에 큰 키에 삐쩍 마른 열 살짜리 사내아이가 서 있었습니다. 이 사내 아니는 몰래 경기장 안에 들어가려고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아이는 샌프란시스코 49ers와 크리브랜드 브라운(Browns)의 경기를 고대해 왔습니다. 사실 자기 우상이며 프로 미식축구의 거의 모든 러싱 기록을 보유한 러닝백 지미 브라운(Jimmy Brown)을 꼭 보고 싶었습니다. 아이는 제3쿼터가 끝나면 수위가 자리를 뜨는 순간을 이용해 몰래 경기장으로 들어 갈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걸음이 불편했기 때문입니다. 빈민가에서 성장하면서 영양실조로 다리가 약해진데다 휘어 있어서 철재 부목을 의지해야 겨우 걸음을 뗄 수 있었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가까스로 경기장 안에 들어온 아이는 선수용 출구로 향하는 입구 한 가운데에 서서 시합이 끝나기를 기다렸습니다. 드디어 마지막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리자 아이는 몸을 곧추세워 그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다음 순간 그 위대한 러닝백 지미 브라운이 모퉁이를 돌아 자기 쪽으로 걸어오는 게 보였습니다. 자기 옆을 스쳐 지나가는 지미 브라운에게 아이는 종이를 내밀고 공손하게 싸인을 부탁했습니다. 지미 브라운은 싸인한 종이를 건네주고 선수 라커룸으로 가려고 했습니다. 그 때 이 아이는 지미 브라운의 옷자락을 잡아당겼습니다. 그가 다시 몸을 돌리자 아이는 아주 자랑스러운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브라운 형, 형 사진을 제 방에 붙여 놨어요. 우리 집은 텔레비전을 살 형편이 안 되지만 기회가 될 때마다 옆집에서 형 경기를 빼놓지 않고 봐요. 기록도 다 알고 있는 걸요. 형은 정말 대단해요. 제 우상이에요.”

지미 브라운은 아이의 어깨에 손을 얹고 고맙다는 말을 남긴 뒤 라커룸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또 그의 옷자락을 잡아 당겼습니다. 그러고는 목청을 가다듬더니 어깨를 활짝 피면서 머리를 쳐들고 당당한 자세로 말합니다.

“형, 언젠가는 제가 형 기록 중에 하나를 깰거예요.”

지미 브라운은 짐짓 놀란 표정으로 아이에게 물습니다.

“너 이름이 뭐니?”

“심슨(O.J. Simpson)이예요.”

그 후로 16년만인 1973년 심슨은 오랫동안 깨지지 않던 지미 브라운의 한 시즌 최고 러닝 기록을 경신해서 1년 동안 2,000야드가 넘는 러싱 기록을 수립한 최초의 선수가 됩니다. 심슨은 부상으로 은퇴할 때까지 지미 브라운에 이어 통산 러싱 야드 분야에서 2위를 차지합니다.

얼마 전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마음이 심란했습니다. 여러분도 이 이야기를 처음 들으신다면 저처럼 한편으로는 놀라고 한편으로는 많은 궁금증이 생기실줄 압니다. 이 심슨씨가 오늘날 어떠한 삶을 살고 있는지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부인을 살해한 자라고 의심을 받고 있을뿐 아니라, 최근에도 종종 다른 일로 감옥에 가곤 합니다.

어릴 때 그처럼 멋진 승리의 삶을 살았던 심슨이 지금은 왜 많은 사람들의 지탄의 대상이 되었을까 생각하면 안타까울 뿐입니다. 물론 아직도 인생이 다 끝나지 않았으니 절망할 필요는 없지만 그러나 궁금한 것은 ‘어렸을 때 자신의 육체적인 역경을 이긴 사람이 후에 왜 그러한 패배자의 인생 길을 가게 되었을까?’ 질문을 던져 보지 않을수 없습니다.

왜 그런 길을 가게 되었을까요? 이 질문을 염두에 두시고 오늘 본문 말씀을 상고해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등장하는 한 소년의 나이는 심슨이 지미 브라운에게 싸인을 받을 때와 비슷한 나이입니다. 심슨은 열 살 때 싸인을 받았습니다. 반면 오늘 본문 말씀의 주인공인 소년 예수는 12살이 되었을 때입니다.

소년 예수는 잘 아시다시피 어린 시절은 갈릴리 지방 나사렛에서 삽니다. 부모님은 독실한 신앙인인지라 율법을 잘 지켰습니다. 이 당시 독실한 신앙인들이면 매해 반복적으로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일 년에 세 차례 곧 큰 명절이면 예루살렘에 가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요즘 이것을 순례라고도 말합니다만, 하여튼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 세 차례 예루살렘에 올라가 경배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41 절을 보면, 예수님의 가족이 해마다 유월절이면 예루살렘에 올라 갔다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을 당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예수께서 열 두살 될 때에 저희가 이 절기의 전례를 좇아 올라갔다가.”

곧 12살 되던 해에도 유월절이 찾아 왔습니다. 여느 때와 같이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예년과는 다른 일이 생긴 것같습니다. 43절 말씀입니다.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집으로 돌아 오는 길에 소년 예수가 없어졌습니다. 행방 불명이 되었습니다. 아이가 없어지면 처음에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속으로 별 야단을 다 치지 않습니까? ‘이 놈 찾으면 혼내야지….’ 이런 생각하면서 친척들을 찾아 다녔을 것입니다. 그런데 웬걸 아무도 모른다고 합니다. 이제 하루가 흘렀습니다. 부모님들 마음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더 이상 혼낼 생각은 다 사라졌을 것입니다. “살아만다오.” 그리고는 하나님께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어느덧 예루살렘까지 올라 갔습니다. 사흘이 걸렸습니다.

그런데 눈 앞에서는 상상하지 못했던 장면이 펼쳐집니다. 아들이 성전 안에서 선생들 틈에 앉아서 토론하고 있었습니다. 아들을 보고 부모는 어떻게 반응했겠습니까? 선생님들 틈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흐믓해 했을까요? 그것보다는 먼저 아들을 찾았으니 한 숨을 놓았겠죠. 48절 말씀입니다.

“그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 모친은 가로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

참 예상밖의 표현입니다. 그 부모들이 놀랐습니다. 놀랐다고 합니다. 잃은 아들을 만나 반가운 것도 아니고 기쁜 것도 아니고 아니면 말도 없이 사라진 것에 대해 노한 것도 아니고 도리어 놀랐습니다. 왜 놀랐을까요? 우리는 언제 놀랍니까? 전혀 뜻 밖의 일을 당할 때 놀라지 않습니까? 부모들은 아들을 찾은 기쁨을 느끼기 보다는 자기의 아들이 말도 없이 사라질뿐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에서 선생들과 토론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놀란 것입니다. 전혀 그동안 알지 못했던 아들의 한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동안 익숙했던 모습은 말도 없이 사라진 후에 친척네 가서 놀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성전에서 선생님들 사이에서 토론하리라고는 전혀 상상도 못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아들을 보며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니 이럴수가 우리 아들이 말도 없이 이런데 와 있다니 그리고 토론을 하고 있어” 전혀 아들로 인해서 뿌듯해 하는 모습이 아닙니다. 이에 모친이 말합니다.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아들의 반응은 더 기가 막힙니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부모님이 사흘간 걱정하며 찾았다는데 첫 인사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우리들의 자녀들이 이렇게 답변을 하면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한 대…?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더 엉뚱한 답변을 합니다. 엉뚱하기 보다는 약올리는 답변을 합니다.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사실 어머니가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찾았노라” 말씀하였습니다. 거기다대고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이 내용을 풀어 보면, ‘어머니의 남편은 내 아버지가 아닙니다. 내 아버지는 따로 있습니다. 나는 그 내 아버지의 집에 와 있습니다.’

사실 그렇지 않습니까? 마리아가 예수님의 어머니는 됩니다. 그런데 요셉이 예수님의 아버지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는 성령에 의해서 잉태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지금 아버지의 아픈 곳을 찌르는 것입니다. ‘나는 당신의 아들이 아니요 나는 성령으로 잉태되었오.’

그런데 다행입니다. 50절을 읽어 보면 왜 다행인지 알수있습니다.

“양친이 그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 .”

다행히도 마리아나 요셉 모두 아들의 말을 이해를 못했습니다. 자기의 친 아버지는 따로 있다는 사실을 말한 것인데 별로 감을 잡지 못한 모양입니다. 그런데 51절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모친은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

한 번 깜짝 쇼를 벌여 보았지만 그 다음으로는 다시 옛 모습으로 돌아 갑니다. 보통하던대로 부모님께 순종하고 받들어 모십니다. 정상적인 삶을 삽니다.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스러워 가는 아름다운 소년이 됩니다. 이것이 구세주로 이 땅에 오신 소년 예수의 모습입니다.

제가 처음에 심슨(O. J. Simpson)의 열 살 때 모습을 소개 해드렸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말씀에 비친 예수님의 12살 때의 모습을 살펴 보았습니다. 두 분의 삶의 차이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사실 한 인간을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과 비교한다는 것은 좀 무리가 있긴 있습니다만, 누가복음 기자는 지금 예수를 하나의 소년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달리 말씀드려서 누가복음 기자는 소년 예수의 모습을 가지고 온 세상 소년들이 소유하고 있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소년 예수와 심슨을 비교하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아울러 우리들의 자녀들의 모습과 소년 예수와의 모습도 능히 비교해볼수 있다고 봅니다.

이 시간 한 가지 부탁을 드립니다. 잠시 심슨의 현재의 모습은 머리 속에서 지워 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서 심슨과 소년예수의 모습을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심슨은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신은 철재 부목을 의지하고야 겨우 걸어 다닐수 있으면서도 지미 브라운의 기록을 깨겠다고 지미 브라운에게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에 따르는 필사의 노력을 감행합니다. 얼마나 멋진 소년의 모습입니까?

반면 소년 예수는 12살이 되어서 예루살렘 순례를 마치고 돌아 오다가 잠깐 실례를 합니다. 부모님의 가슴을 철렁이게 합니다. 놀라게 합니다. 부모님을 걱정시키게 하고는 전혀 자기는 상관이 없다고 합니다. 걱정한 사람이 잘못이라고 대꾸를 합니다. 그뿐 아닙니다. 아버지를 향하여 자기는 다른 아버지가 있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이 두 소년 중에 어느 소년을 아들로 삼고 싶습니까? 심슨은 자신의 목표를 똑바로 정하고 그 목표가 이루어지도록 노력한 소년입니다. 그런데 그의 목표는 누구나 쉽게 이해가 되는 목표였습니다. 소년이라면 모두 갖고 싶은 목표였습니다.

두 번째 소년은 가출한 전과를 소유한 소년입니다. 꿈도 뚜렷하지 않습니다. 아니 이해가 안되는 말을 합니다. 꿈을 소유한 보통 소년들과는 전혀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한 번 가출했으니 또 다시 가출하지 않을까 늘 부모님들의 가슴을 조아리게 하는 소년입니다. 자 그러면 이제는 어느 소년을 아들로 삼고 싶어 하실지 감을 잡으셨을줄 압니다. 그런데 우리들 마음에 꼭드는 첫번째 소년은 나중에 어떻게 되었다고요?

좀 소재가 달라 다른 이야기 같지만 실제로는 소년 심슨의 모습을 이해하게 해 주는 이야기 하나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요즘도 그렇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관악기를 부는 연주자들을 오디션(audition)할 때 커튼 뒤에서 연주를 하게 한다고 합니다. 가장 큰 이유는 모든 사람들의 선입견은 여자는 관악을 하기에 부족한 폐활량과 신체적인 조건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같은 음악을 연주해도 남자가 연주하면 더 잘 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커튼 뒤에서 연주를 하면 전혀 선입견없이 감상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난 30년간 이처럼 커튼을 사용해서 오디션을 한 결과 전보다 5배의 여성 연주자들이 미국 오케스트라에 뽑히게 됐다고 합니다.

왜 음악인들은 커튼이 필요할까요? 세상적인 선입견이 자기도 모르게 음악인들에게 스며든다는 것입니다. 음악인들은 자신들에게 있는 선입견을 인정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커튼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어린이들의 특징을 살펴볼까요? 어린이들의 특징은 선입견이 없는 것입니다. 세상사람들의 선입견에 물들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어린 아이들이 심사를 한다면 커튼이 필요할까요? 어린 아이들은 커튼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선입견이 없기 때문에…. 그런데 요즘의 어린이들은 어떤 가요? 어른들보다 더 선입견에 물들어 있지는 않습니까?

심슨의 비극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고 싶습니다. 그는 어릴 때 이미 세상 선입견의 희생자가 되었습니다. 세상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기준에 자신을 팔아 버렸습니다. 세상 어른들이 말하는 세계 최고라는 말장난에 넘어 간것입니다. 지미 브라운이 세계의 최고의 선수라고 평가하는 그 말 장난에 넘어 간 것입니다. 지미 브라운이 그토록 칭송을 받자 자신도 그와 같이 되길 원했습니다. 그러한 목표를 세웠습니다. 잠시 이루워지는 듯했습니다. 심슨은 어릴 때 이미 어른들의 가치기준과 선입견에 자신을 빼앗긴 것입니다.

오늘 어린이 주일 예배로 드립니다. 우리들의 자녀들은 어떻습니까? 심슨처럼 어른들의 가치관과 선입견에 그들의 삶이 빼앗기지 않았습니까?

한편 어른들의 가치관과 선입견의 희생자가 안된 자녀들의 모습은 어떠하겠습니까? 아마도 소년 예수의 모습을 닮지 않았을까요? 때로는 깜짝 놀라게 합니다. 예측 못하는 행동을 합니다. 또다시 그런 행동을 하지 않을까 두려운 마음조차 생깁니다. 이들이 깜짝 놀라게 하는 이유는 이들은 아직 어른들의 선입견에 물들지 않았기 때문이지 않겠습니까?

교우 여러분 어린이들 안에는 우리 어른들이 소유하고 있지 못하는 새로운 세계가 있습니다. 우리 어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세계가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종종 어른들을 놀래게 합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우리들의 어린이들에게는 우리를 놀라게 하는 귀한 특징들을 소유한채 이 땅에 보내졌습니다. 그렇지 않고는 이 곳에 하나님께서 보내셨을리가 없습니다. 아니 그렇지 않고는 인간의 역사가 발전할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어른들이 소유하지 못한 그 무엇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때때로 어른들을 놀라게 할수 밖에 없는 어린이들의 모습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도 부모님을 놀라게 한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참 어린이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자녀들을 우리의 가치관과 선입견으로 쇄뇌시켜 놓았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어른들을 놀라게 하는 기이한 모습을 잃게 된 것입니다. 대표적인 희생자가 심슨이 아닐까요? 그래도 심슨은 눈에 보이는 희생자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현재 최고로 교육 받은 사람들을 통해서 가장 큰 집단 살인극이 벌어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우리들의 자녀들이 그 길을 가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어른들의 선입관과 가치관을 자녀들에게 계속 주입시킨다면 우리들의 자녀들은 지금은 착한 것 같지만 언젠가 온 세상을 공포로 몰아가게 하는 무서운 존재가 되지 않을까요?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요?

교우 여러분,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우리들의 자녀들을 우리들의 가치관으로 쇄뇌시키는 것은 그만 두고 그들 안에 있는 우리를 위한 놀라운 선물을 찾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들의 자녀들의 기이한 모습 안에 하나님의 멧세지가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 기이한 모습을 소중히 여기십시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어린 아이들에게 있는 소중함을 소중히 여기는 삶을 산다면 우리의 자녀들이 훌륭한 삶을 살뿐 아니라, 우리들도 새로운 세계를 늘 맛보는 삶을 살게 되지 될 줄로 압니다.

어린이들 안에 이처럼 소중한 선물이 있음을 인정한 분이 바로 톨스토이입니다.

때때로 톨스토이는 읽을 거리를 가방에 넣고 시골길을 따라 여행을 다니곤 했습니다. 하루는 말에서 내려 잠시 쉬고 있는데 엄마 손을 잡고 길을 가던 일곱살 난 소녀가 톨스토이의 말 안장에 걸린 가방에서 눈을 떼지 못하더니 엄마에게 가방을 가지게 해달라고 졸랐습니다. 이것을 보고 톨스토이는 “3일후에 가방을 줄테니 이곳으로 오라”고 약속했습니다. 당시 가방 속에는 여행 도구와 책들이 들어 있었기 때문에 줄수가 없었습니다.

톨스토이는 여행에서 돌아 오는 길에 가방을 소녀에게 주려고 약속 시간에 그 자리에 들렸습니다. 하지만 소녀의 엄마만 치마로 눈물을 훔치며 그 자리에 있을 뿐이었습니다. 딸아이가 전날 밤 갑작스런 병으로 급사했다는 것입니다.

톨스토이는 소녀의 무덤을 찾아가 주변에 있던 나뭇가지를 꺾어 소녀의 무덤에 꽂고 그 백합 무늬 가방을 걸어놓은 뒤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훗날 이 사실을 전해 들은 마을 사람들이 ‘톨스토이 가방비’를 세웠습니다. 톨스토이의 가방비는 그가 얼마나 어린 아이들의 소중함을 알고 지낸 사람이었는지를 밝혀줍니다. 그리고 그가 그처럼 위대한 작가가 된 이유는 바로 어린이들의 진기함을 늘 소중하게 여겼기 때문일줄 압니다. 그래서 그는 세상 사람들의 선입견에서 해방되어 있었고 늘 새로운 세계를 만나는 삶을 산 것이 아니겠습니까?

교우 여러분, 우리 자녀들 안에 하나님의 선물이 있음을 인정할 때 우리는 비로소 세상이 주는 선입견에서 해방이 됩니다. 그 때 우리는 우리들의 자녀를 바로 보게 됩니다. 아울러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을 기쁨으로 받게 됩니다. 그 결과 우리도 기이한 삶을 살게 됩니다. 놀라운 축복의 세계를 만납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다. 많은 놀람도 함께 우리를 찾아올 것입니다. 놀람도 하나의 선물입니다. 우리들의 자녀들은 모두 소년 예수를 닮은 기이한 어린이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어른들을 위한 예언자와 선생으로 우리들 사이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자녀들을 대하는 두 가지 자세가 있다고 봅니다. 하나는 우리의 선입견을 주입시키는 자세입니다. 또 하나는 그들을 우리의 선생으로 맞이하는 자세입니다. 어느 것을 택하시겠습니까?

말씀을 거둡니다.

지난 주 견신 세례식이 있었는데 아시다시피 7명의 고등부학생들이 견신 세례를 받았습니다. 7명 모두 감명 깊은 간증문을 발표했습니다. 그 중 한 학생의 간증에서 저는 세상 선입견에서 해방된 아름다운 마음을 읽어 보았습니다.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6학년에 미국에 왔고 지금은 하이스쿨 주니어(High School Junior)가 되었습니다. 처음 교회 문에 발을 디딘 것은 저의 부모님께서 다니시는 교회이기도 했지만, 친구라도 만날 수 있는 즐거움이 있었기에 교회를 왔는데 날이 가면 갈수록 교회는 내 마음 속에서 멀어져 가고 있었습니다. 친구의 기대감이 나에게는 또 다른 실망으로 다가왔습니다.

그것은 누구나 느끼는 언어의 장벽이었습니다. 난 영어를 잘 못하고 미국에 왔는데 한국친구들은 모두 영어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멀어졌고 하루 이틀 자꾸 교회 오는 것이 싫어졌습니다. 부모님의 꾸중으로 억지로 오는 날이 많아졌고,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내가 내 마음대로 교회를 안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날 엄마의 차를 타면서, 어느 목사님의 설교를 듣게 되었습니다. 아무런 생각 없이 듣던 어느 날, 그냥 교회에 가고 싶어졌습니다. 그날부터 겁쟁이의 태도를 버리고, 마음으로 일어서서 하나님의 힘을 활용하여 강하게 서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몇 번이라도 하겠다고 마음 먹고 처음부터 시작하는 자세로 오늘 이렇게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승리의 삶을 예비해 놓으신 것처럼 남들이 저를 위해 기도하고 도움을 주는 것처럼 저 또한 그것들을 베풀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내 안에는 하나님의 힘이 있고 사랑이 있고 승리의 삶을 살수 있다는 마음으로….”

이 학생은 예수님의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자녀들도 모두 같은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모두 기이한 어린들입니다. 그러니 모두 우리들의 스승입니다.

기이한 어린이들을 계속 보내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모친은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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