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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내게 있는 것 아니라

날짜 : 2007.10.21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이는 내게 있는 것 아니라
성경본문 : 창세기 41장 14절-3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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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날드 롤라이져(Ronald Rolheiser)라는 영성 신학자가 어느 날 청년들에게 성윤리에 대하여 강의를 했습니다. 강의가 끝나자 한 청년이 일어서더니 말합니다. “저는 원칙적으로 신부님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이상적입니다. 비현실적입니다. 신부님 지금 이 세상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아십니까? 아무도 신부님 말씀처럼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신부님 말씀하신대로 사는 사람은 천명에 한명쯤 있을까요? 모든 사람이 다르게 살고 있습니다.”

청년 옆에는 곧 결혼할 것 같이 보이는 한 여자 청년이 앉아 있었습니다. 신부는 청년에게 묻습니다. “자네가 바로 옆에 앉아 있는 청년과 결혼할 것 같은데 자네는 천명 중에 한 사람이 되길 원해, 아니면 보통 사람이 되길 원해?”

청년은 곧바로 대답합니다. “천명 중에 한 사람이죠.”

신부님은 말합니다. “그러면 천명 중에 한 사람처럼 살아야지. 만일 일반사람처럼 산다면 똑 같은 사람이 되는 거야. 만일 천명 중 한 사람처럼 산다면 천가정중에 한 가정을 이루게 될 것이지.”

이 이야기의 배경은 설명을 안 드려도 잘 이해하실 줄 압니다. 현재 미국청년들의 생활이 어떤지 잘 알려주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읽고 혼자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 청년은 과연 어떻게 살았을까? 정말 천명 중 한 명으로 살았을까 아니면 일반 청년들처럼 살았을까? 이 청년은 급한 김에 천명 중 한 사람이 되겠다고 말했는데 정말로 천명 중 한 사람이 되었을까?’ 저는 혼자 자문해 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청년이 천명 중 한 사람처럼 살았을까요?

어떻게 보면 우매한 질문일줄 압니다. 그러나 하나 확실한 것은 그가 천명 중에 한 사람처럼 살 확률은 천분의 일 일줄 압니다. 우매한 대답 같지만 정말로 명 대답입니다. 천분의 일의 확률입니다. 정말로 쉽지 않은 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천분의 일의 길을 가야합니까? 그냥 천명 중에 한 명이 되기 위해서? 그러면 우리가 천분의 일의 길을 가면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될까요? 고리타분한 사람? 만일 고리타분한 삶이 기다리고 있다면 우리는 그런 삶을 살 필요가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천분의 일의 길을 간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로 요셉입니다. 요셉의 삶을 생각하며 천분의 일의 삶은 어떤 삶인지 생각하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특히 오늘은 청년부 헌신예배로 드리는데 우리교회 청년들 고리타분한 청년들이 되지 말고 모두 요셉의 삶을 사는 멋진 청년들이 되길 바랍니다.

오늘 말씀에 비쳐진 청년 요셉의 모습은 너무도 멋진 모습입니다. 먼저 요셉에 대해서 중요한 면들만 소개해드리면, 청년 요셉은 못해도 이년간 감옥살이를 하였습니다. 감옥살이를 하게 된 이유는 보디발이라는 시위대장 집에서 하인으로 일을 하였는데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물리쳤기에 감옥에 갇힙니다. 곧 천명 중에 한 사람의 길을 갔기에 감옥에 갇힙니다. 감옥에서 이년 이상을 지냅니다. 그러나 그에게 감옥에서 석방될 기회가 생겼습니다. 꿈의 해석능력이 있는 요셉은 감옥에서 바로의 신하들의 꿈을 해석해 줍니다. 그 중 술맡은 신하가 다시 바로를 섬기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바로가 꿈을 꾸었는데 이상한 꿈을 꾸었습니다. 나라의 술객들과 박사들을 불러 꿈을 말해 주었지만 아무도 해석하지 못합니다. 이때 술맡은 신하가 요셉이 생각이 났습니다. 요셉을 감옥에서 불러 옵니다. 이제부터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바로가 요셉에게 말합니다. 15절 말씀입니다.

“내가 한 꿈을 꾸었으나 그것을 해석하는 자가 없더니 들은즉 너는 꿈을 들으면 능히 푼다더라.”

이에 요셉이 대답합니다. 16절입니다.

“이는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바로에게 평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

요셉은 아주 담대한 말을 합니다. “하나님이 바로에게 평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

정말 하찮은 이방인 그것도 감옥에 갇혀 있는 죄수 청년의 입에서 어울리지 않는 말이 나옵니다. 감히 애굽의 왕 바로에게 겁도 없이 자신만만하게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로에게 평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 그러다가 평안한 일이 안 일어나면 어떡합니까? 사실 애굽의 술객들과 박사들 모두 잘 못 말했다가 그대로 안 이루어질 것이 겁이 나서 모두 함구무언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요셉은 대담하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바로에게 평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

이 말을 듣고 바로가 용기를 얻어 요셉에게 말합니다.

“내가 꿈에 하숫가에 서서 보니 살지고 아름다운 일곱 암소가 하숫가에 올라와 갈밭에서 뜯어 먹고 그 뒤에 또 약하고 심히 흉악하고 파리한 일곱 암소가 올라오니 그같이 흉악한 것들은 애굽 땅에서 내가 아직 보지 못한 것이라 그 파리하고 흉악한 소가 처음의 일곱 살진 소를 먹었으며 먹었으나 먹은듯하지 아니하여 여전히 흉악하더라 내가 곧 깨었다가 다시 꿈에 보니 한 줄기에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나오고 그 후에 또 세약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 나더니 그 세약한 이삭이 좋은 일곱 이삭을 삼키더라 내가 그 꿈을 술객에게 말하였으나 그것을 내게 보이는 자가 없느니라.”

이에 요셉이 앞으로 칠년 풍년이 들고 칠년 흉년이 들것을 예언합니다. 그리고 두 가지 꿈을 겹쳐 꾼 것은 이 일이 속히 이루어 질 것임을 뜻한다고 말합니다. 아울러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까지 알려줍니다.

“바로께서는 또 이같이 행하사 국중에 여러 관리를 두어 그 일곱해 풍년에 애굽 땅의 오분의 일을 거두되 그 관리로 장차 올 풍년의 모든 곡물을 거두고 그 곡물을 바로의 손에 돌려 양식을 위하여 각 성에 적치하게 하소서 이와 같이 그 곡물을 이 땅에 저장하여 애굽 땅에 임할 일곱해 흉년을 예비하시면 땅이 이 흉년을 인하여 멸망치 아니하리이다.”

바로가 요셉에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 너는 내 집을 치리하라 내 백성이 다 네 명을 복종하리니 나는 너보다 높음이 보좌 뿐이니라 .”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요셉은 하루아침에 죄수의 몸에서 대국 애굽의 총리가 된 것입니다. 요즘에는 총리가 되었다고 하면 전처럼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미국도 한국도 대통령 선거로 인해 나라가 시끄러운데 요즘에는 요셉과 같은 분들을 정치계에서 찾아 보기는 정말로 어려운 때입니다. 그래서 대통령이나 총리가 되는 것도 그렇게 존경을 받고 있지 못합니다. 어떻게 보면 헌신예배에서 총리가 되는 설교가 좀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단순히 총리가 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총리를 넘어서 많은 사람들의 구원자가 되었습니다. 애굽의 모든 사람들의 가뭄을 해결하였을 뿐더러 주위의 모든 나라들의 기근의 문제까지 해결시켰습니다. 요셉이 아니었다면 애굽을 비롯해 그 주변 모든 나라 사람들이 굶어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은 총리가 되었지만 어떤 면에서는 많은 사람들을 살리는 역할을 감당한 사람인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 우리 모두 총리는 될 수 없지만 많은 사람을 살리는 구원자가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헌신예배를 드리는 청년들 총리는 되지 않아도 구원자가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아니 사실 그 것을 위해 헌신예배를 드리고 있는 줄 압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요셉이 많은 사람들의 구원자가 되었을까요? 조금 전에 언급한 대로 바로로 하여금 자신의 고민을 내 놓게 한 말이 중요한 열쇠가 아닌가 싶습니다. 요셉은 말합니다. “이는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바로에게 평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 이 말로 인해서 바로는 용기를 얻어 요셉에게 자기의 꿈을 말했습니다. 결국 요셉은 애굽의 총리로 많은 사람들의 구원자가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보통 사람과 요셉의 차이는 다른 것 아닙니다. 이 말을 하느냐 못하느냐 입니다. “이는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당신에게 평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

어떤 사람이 와서 자기의 문제를 다 털어 놓는데 겨우 한다는 말이 “정말 문제네요. 하나님도 해결하시기 어렵겠습니다.” 이런 답변을 한다면 정말 구원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사실 아무나 요셉의 말을 할 수 있지는 못합니다. 요셉이 그러한 말을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이 것을 알면 요셉과 같은 구원자가 되는 길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요셉은 감히 이런 말을 어떻게 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요셉의 이 표현에서 우리가 찾아낼 수 있습니다. “이는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가 요셉에게 “너는 꿈을 잘 푼다더라” 하니 요셉이 대답한 것입니다. “이는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요셉은 모든 것이 하나님께 있다고 고백합니다.

이로서 알수 있는 것은 요셉은 하나님을 아는 청년이었습니다. 요셉은 꿈꾸는 청년이기 전에 하나님을 아는 청년이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과 깊은 교제가 있는 청년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 갔습니다. 요셉은 그 동안의 짧은 인생 여정 속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 그래서 모든 분들에게 좋은 것을 예비해 두신 하나님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평안한 대답을 갖고 계신 분인 것을 알고 체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확신이 없으면 제 아무리 꿈을 꾸고 또 꾸고 또 꾸더라도 감히 바로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바로에게 평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

사실 바로의 꿈은 좋은 꿈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꿈은 나쁜 꿈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요셉으로 인해 그 꿈이 좋은 꿈이 된 것입니다. 요셉에 의해서 나쁜 꿈이 좋은 꿈으로 바뀌었던 것입니다.

노르위치의 줄리앙(Julian of Norwich)라는 성자가 있습니다. 그는 마지막 인생을 작은 방에서 지냅니다. 찾아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한 마디를 들려주곤 했다고 “모든 것이 잘 될 것입니다.” 그가 이런 표현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은 모든 것을 잘 되게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삶 속에서 경험하고 또 하고 또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누구에게나 말합니다. “모든 것이 잘 될 것입니다 (All will be well).”

요셉도 같은 표현을 바로에게 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잘 될 것입니다.” 이 말에 용기를 얻고 바로는 자기의 꿈을 어린 요셉에게 알려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요셉은 이러한 고백을 하는 자가 되었을 까요? “모든 것이 잘 될 것입니다”의 확신을 갖는 자가 되었을까요?

오늘의 본문 말씀 중엔 없지만, 39장 23절 말씀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전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 비록 감옥에 갇혔지만 신기한 체험을 한 것입니다.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억울하게 갇혔지만, 그는 감옥 안에서 “모든 것은 잘될 것이야”라는 체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옥 안에서 더 좋은 기회가 생긴 것입니다. 옥에 갇힌 자 중에 왕의 포도주를 맡은 자와 떡을 맡은 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의 꿈을 해석해줍니다. 꿈의 해석대로 포도주를 맡은 자가 풀려나가 다시금 와의 포도주를 맡게 되었습니다. 요셉이 풀려나가는 포도주를 맡은 신하에게 자기를 기억해달라고 부탁합니다. 당연히 요셉은 이제나 저제나 자기도 풀려나갈까 기다렸을 것입니다. 하루 이틀 간수가 와서 “요셉, 석방이다.” 기다렸을 것입니다. 사실 그 전에는 큰 기대를 안고 기다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다릅니다. 포도주 맡은 신하가 나갔으니 당연히 자기의 이야기를 했을 것이고 그렇다면 곧 석방이 될 것임에 틀림이 없으니 하루하루 손꼽아 기다립니다. 하루하루가 아주 길어졌습니다. 간수의 발걸음 소리만 들려도 가슴이 뛰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하루가 지나도 이틀이 지나도 한달이 지나도 소식이 없습니다. 일년이 지났습니다. 소식이 없습니다. 요셉은 포도주 맡은 자에 대한 희망은 버리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에 대한 희망은 버렸어도 버려지지 않는 희망이 끝까지 그에게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생각했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잘 될 거야.”

그리고는 요셉은 혼자 있는 시간이면 상상했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잘 될 거야.” 세상 모든 것은 잘 되고야 말 것임을 더욱 느끼게 됩니다. 자신의 석방이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하나님에 대한 확신 온 세상 역사에 대한 확신은 더욱 강해집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니 “모든 것이 잘 될 거야.” 그는 같이 갇혀있는 죄수들에게 늘 입버릇처럼 말했을 것입니다. “걱정하지마세요. 모든 것이 잘 될 것입니다.”애굽 나라를 생각하면서 그는 느꼈을 것입니다. “애굽은 잘 될 것입니다.” 자기 이스라엘 가족을 생각하면서 고백했을 것입니다. 비록 자기를 팔아 버린 형들이지만 “모든 것이 잘 될 거야.” 전 세계를 생각하면 그는 생각했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잘 될거야.”

포도주를 맡은 신하가 석방된 후 2년을 감옥에서 지냅니다. 그러나 그 시간은 결코 헛된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더 깊게 만납니다. 그리고 온 세상은 하나님 손 안에서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는 확신 가운데 거합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는 그 누구 앞에서도 말할 수 있는 자가 됩니다. “모든 것이 잘 될 것입니다.” 2년 만에 바로 앞에서도 말할 수 있는 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 때 바로에게 하나님은 이상한 꿈을 주신 것입니다. 요셉은 많은 사람의 구원자가 될 준비가 되었던 것입니다. 요셉의 감옥 생활이 그로 하여금 “모든 것이 잘 것입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의 시작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주신 꿈의 은사일까요? 천명 중에 한 명이 되는 길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어떤 분들은 ‘요셉은 꿈의 은사로 인해서 구원자가 됐지’라고 생각하실지 모릅니다.

요셉의 생애를 보면 요셉이 자신의 의지로 할 수 있었던 것은 단 하나뿐입니다. 유혹을 물리치는 것뿐이었습니다. 꿈꾸는 것 어쩔 수 없었죠. 그런 꿈을 달라고 원했나요? 하나님께서 꿈을 주셨으니 말한 것뿐입니다. 어떤 유대교 신학자는 꿈을 말한 것이 잘못이었다고 생각하는 분도 있습니다. 상인들에게 팔리는 것 어쩔 수 없었죠. 형들의 시기로 팔린 것 아닙니까? 감옥에 갇히는 것 어쩔 수 없었죠. 감옥에 쳐 넣으니 들어 간 것입니다.

요셉의 생애에서 성경에 기록된 것만 보면 요셉이 당신의 의지로 행한 것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물리친 것입니다. 그 이외는 다 어쩔수 없이 되어진 일입니다. 모든 것이 주어졌습니다. 한 가지만 요구되었던 것입니다. 요셉이 자의로 행한 것은 하나뿐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을 요셉되게 할 수 있었던 것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천명 중에 한 사람이 되는 길을 간 사실입니다. 이 요셉의 행위가 요셉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깊이 만나게 하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세계역사를 깊이 이해하는 자가 되게 한 것입니다. 그로 하여금 그 누구에게도 “모든 것이 잘 될 것입니다”고백하는 자가 되게 한 것입니다.

오늘 청년1,2부 헌신예배로 드립니다. 저희 교회 청년들을 생각하면서 좀 더 거창하고 세계를 마음에 품는 멋진 설교를 하고픈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멋진 청년의 길을 갔던 요셉을 택했습니다. 말씀준비를 하면서 깨달은 것은 요셉은 먼저 세계를 품은 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삶의 규례를 아는 자였습니다. 물론 이 때 십계명은 주어지지 않은 때이지만 그는 삶에는 지켜야할 법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천명에 한명이 가는 길을 택한 것임을 저도 새삼스레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했을 때 그는 세계를 품는 자가 된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실비노 아리에뜨(Silvano Ariete)라는 정신과의사가 있습니다. 이 분은 이태리 사람인데 무쏘리니의 파시즘(fascism)이 팽배한 시절에 어린 시절을 보냅니다. 선생님이 파시즘에 대해서 가르쳤고 아리에뜨는 파시즘이 너무도 좋은 것으로 받아드립니다. 그는 파시즘에 대한 시도 잘 썼습니다. 어느 날은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아리에뜨가 쓴 시를 읽어 줄 정도였습니다. 학생들에게도 많은 칭찬을 받았습니다. 하루는 집에 와서 아버지에게 읽어드렸습니다. 아버지는 너무도 놀랍니다. 자기 아들이 파시즘에 빠진 것을 경악해 합니다. 아버지의 자극으로 인해 그는 서서히 파시즘에서 빠져 나옵니다. 뉴욕으로 피신 오게 되고 그는 유명한 정신과의사가 됩니다. 특히 어릴 때 잠시 파시즘에 빠져 있었던 자신의 모습을 분석합니다. 인간은 모두 주위 환경의 영향을 내면화시킨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은 영어로 ‘endocracy’라고 부릅니다. 주위환경을 그대로 받아드려 자신의 삶에 한 부분으로 받아드린다는 것입니다. “Endocracy 는 좋게도 사용될 수 있고 나쁘게도 사용될 수 있습니다.

나쁘게 사용된 대표적인 것이 흑인 노예제도였습니다. 백인들은 크리스챤이건 아니건 너나 할 것 없이 흑인노예제도를 “endocracy”그대로 받아 드렸습니다. 각 시대마다 “endocracy”되어지는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 때 그 때마다 어떤 환경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endocracy”영향 가운데서 도리어 이기는 자들을 사용하시는 것 같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아브라함 링컨 아닙니까? 모든 사람들이 흑인 노예는 합당하다고 생각할 때 그는 천명 중에 한명의 길을 걸었습니다. 세상의 구원자가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도 세계의 구원자가 되는 길은 자명해졌습니다. “Endocracy”를 역행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팽배한 “endocracy”가 무엇인지 알고 거꾸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요즘은 무엇을 “endocray”하고 있을까요? 남녀간의 윤리문제일 줄 압니다. 이제는 더 이상 남녀간의 윤리문제에 대해서 불문하기 시작하는 시대인 것 같습니다. 아니 불문하는 것이 아니라,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시대인 것 같습니다. 이러한 때 요셉의 모습은 더욱 소중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닥아 옵니다. 특히 오늘 헌신예배를 드리는 청년들에게 너무도 귀한 사표가 되는 것 같습니다.

요즘 성윤리에 대해서 제가 따로 말씀드리지 않아도 너무도 잘 아실 줄 압니다. 통계자료를 보면 도저히 믿겨지지가 않습니다. 엊그제 TV를 보는데 고등학교에 피임약 복용하는 방법을 채택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는 뉴스를 들었습니다. 저는 순간 절망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바로 미국의 고등학교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적 상황도 비슷하다는 말을 많이 접하고 있습니다. 잠시 후 하나님께서 깨달음을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이럴수록 천명 중에 한명의 길을 가는 자들을 하나님께서는 놀랍게 사용하시겠지.”

사랑하는 청년교우 여러분, 천명 중에 한 사람이 가는 그 길을 가시게 되길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천명 중에 한 명에게 주시는 축복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천명 중에 한명에게 내려주시는 축복을 원하시지 않습니까? 이 축복을 받은 자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던지 ‘모든 것이 잘 될 것이야’의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온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어 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매일 체험할 것입니다. 아울러 모든 사람에게 아름다운 고백을 하는 자들이 되어 갈 것입니다. “모든 것이 잘 될 것입니다.”

정말로 축복된 자는 이웃을 향하여 “모든 것이 잘 될 것입니다” 고백하는 자들입니다. 물론 유혹을 물리치는 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유혹이 올 때마다 주님 앞에 나오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세상 모든 유혹을 십자가로 이기신 분입니다. 주님께서 도우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고 도리어 승리케 하실 것입니다. 아울러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일꾼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를 천명 중에 한명이 되게 하십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의 ‘가지 않은 길’을 낭송해드립니다.

가지 않은 길

두 길이 노란 숲 속에 갈라져 있었다, 유감스럽지만 나는 둘 다 여행할 수 없고 한 길의 여행자가 되어야 하기에, 오랫동안 서서

가능한 한 멀리

내려다보았다 그 길이 잡목 숲으로 굽어진 곳까지.

그리곤 다른 길을 택했다. 똑같이 아름다운, 아마도 보다 더 자격이 있는, 왜냐면 그것은 풀이 우거졌고 덜 닳았으므로,

그것에 대해 말하자면 거기를 지남으로써

그것들이 정말 거의 비슷하게 닳게 했지만서도.

둘 다 그날 아침 똑같이 놓여 있었다 어떤 발길도 검게 밟지 않은 낙엽에 덮힌 채 아, 나는 한 길을 다음 날을 위해 남겨 두었다! 그러나 길이 어떻게 다른 길로 이어지는지 알기에

내가 돌아올 수 있을지를 의심했다.

나는 이것을 한숨쉬며 말할 것이다 지금부터 많은 세월이 지난 후 어떤 곳에서. 두 길이 숲 속에 갈라져 있었다고, 그리고 나는

나는 사람들이 덜 다닌 길을 택했노라고,

그리고 그것이 이 모든 차이를 가져왔노라고.

교우 여러분,

남이 가지 않은 길을 가십시다. 천 명중에 한명이 가는 길을 가십시다.

우리는 프로스트의 고백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 모든 차이를 가져왔노라고.”

우리는 남이 가지 않은 길을 갔기에 또한 요셉의 고백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바로에게 평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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