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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고 통곡하라

날짜 : 2007.10.07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울고 통곡하라
성경본문 : 야고보서 5장 1절-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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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교회에서는 4년전 곧 2003년에 첫 희년 행사를 훌륭하게 치룬 적이 있습니다. 지난 2003년 당시 교인이셨던 분들은 희년의 의미를 잘 아실줄 압니다. 그 당시 안 계셨던 분들을 위해서 잠시 희년에 대해서 설명해드리면, 구약에 보면 50년마다 땅을 쉬게 했고 아울러 남의 것을 받은 것이 있으면 돌려주게 되어 있는 해입니다. 곧 부자와 가난한 자들이 평등해지는 해입니다. 높은 자가 낮아지고 낮은 자가 높아짐으로 사회 정의가 회복되는 해입니다. 물론 구약시대에 희년이 얼마나 잘 지켜졌는지는 잘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뉴욕의 월스트리트에서 언젠가 희년 행사가 크게 치루어졌습니다. ‘Simple Way’라는 사회정의를 위해서 일하는 단체가 있습니다. 이 단체에서 희년 행사를 치루었습니다. 어느 익명의 부자가 1만 달러를 기부했습니다. 졸지에 2만 달러가 생겼습니다. 1만 달러를 기부 받았는데 어떻게 2만달러가 되었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하여튼 2만달러가 생겼습니다. 이들은 희년의식을 거행하기로 계획을 세웁니다. Simple Way는 사회정의를 위해 일하는 기관이니 늘 희년의 주제를 다뤄 왔을 것입니다. 2만불이 거져 생겼으니 희년행사를 하기로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먼저 1만불은 자선사업을 하는 100군데 공동체에 100불씩 보내어 주기로 했습니다. 나머지 1만불로는 월스트리트에서 멋진 행사를 계획합니다.

많은 동전을 바꿔 와서 요소요소마다 친구들이 동전을 갖고 대기하게 해놓았습니다. 또한 2달러짜리 지폐를 많이 가져와서 공중전화나 공원과 거리식당에 숨겨 놓았습니다. 시간이 되었습니다. 일제히 친구들은 광장에 서서 “소유를 재분배하여야 합니다” 외쳤습니다. 근처 골목과 공사장에서 순식간에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 때 70이 넘은 마가렛 수녀가 희년을 선포합니다.

“우리 중에 어떤 사람은 월스트리트에서 일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월스트리트에서 잠을 잡니다. 우리는 모두 나름대로 몸부림치며 살고 있습니다. 우리 중에는 고독에서 도망치려 발버둥치는 부자들도 있고, 추위에서 도망치려 발버둥 치는 가난한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 중에는 마약에 중독된 사람도 있고 돈에 중독된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서로를 필요로 하는 깨어진 인간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세상을 엉망진창으로 어질러 놓았고, 또 그로 인해 몹시 고통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낡은 껍데기 안에서 새로운 사회를 탄생시키기 위해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세상이 가능합니다. 또 다른 세상이 필요합니다. 또 다른 세상이 이미 여기 있습니다.”

이 말이 끝나자 마가렛 수녀가 뿔 나팔을 불었고, 희년의 시작은 뿔나팔을 불어 시작을 알리게 되어 있습니다. 모두가 “희년의 시작이다!”라고 일시에 외쳤습니다. 동시에 군중 위쪽의 발코니에 미리 자리하고 있던 친구들이 소액지폐 수백 달러를 공중에 뿌렸습니다. 파란 지폐들이 허공을 가득 채웁니다. 그런 다음 현수막을 내렸습니다. 이와 같이 써 있었습니다. “폭력을 중지하라!”, “나누자!”, “사랑하자!”

더불어 거리는 온통 은빛으로 변했습니다. 보행자, 회사원, 노숙자, 관광객들로 변장한 친구들이 3만여개의 동전을 거리에 쏟아 붓기 시작한 것입니다. 바닥은 분필로 그림을 그려서 장식을 해 놓았고 비눗방울로 허공을 가득 채웠습니다. 이상한 일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누군가 도넛을 사서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나눠주기 시작했고, 사람들이 겨울옷을 나누었고, 청소부 한 사람은 동전으로 가득 찬 쓰레받기를 반짝이며 친구들에게 기쁨의 윙크를 보내었습니다. 어떤 남자는 옆에 있는 사람을 끌어안으며 “이제 약을 살 수 있게 되었어요!” 소리쳤습니다. 온통 기쁨으로 가득찬 축제의 한 현장이었습니다.

듣기만 해도 흥분되어지는데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어떠했을까요? 저는 이 글을 읽으며 정말 희년의 축제는 이러해야 하지 않나 생각해 보았습니다. 온통 돈이 날라다니고 돈이 필요한 사람들은 마음껏 주어서 각자 필요한 일에 쓰고…, 물론 짧은 시간이지만 빈부의 격차의 아픔을 잊고 함께 이 땅 위에 사회정의가 이루워질수 있음을 기대하는 놀라운 축제였습니다. 그런데 희년의 축제를 누리기 위해서 시간만 나면 이렇게 할수 없지 않겠습니까? 물론 매번 1만불씩 쓰라고 줄 사람도 없겠지만, 어떻게 보면 이것은 그 때뿐입니다. 진정한 희년을 우리들 가슴에 안겨다 줄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진정한 희년의 축제를 누릴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언제나 1만불씩 필요로 할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상고하면서 참 희년의 축제의 삶은 어떤 삶인지, 돈 없이도 축제를 벌일 수 있는지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1절 말씀입니다.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

와, 소름이 끼칩니다. 야고보는 지금 무서운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부자들에게 어려움이 임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부자라고 생각하고 계시거나 남들로 인해서 부자라고 인정받은 사람들에게는 좀 황당한 말씀일줄 압니다.

사실 우리가 왜 부자가 되길 원합니까? 가장 큰 이유는 부자가 되면 고생을 안하니까 부자가 되길 원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오늘 야고보는 얼토당토한 말을 합니다.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 부자가 되면 고생한다면 누가 부자가 되겠습니까? 그러면 어쩔수 없이 알아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과연 부자가 되면 어떤 고생이 임한다는 것인가? 아마 부자들은 주의 깊게 읽어 내려갔을 것입니다.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

그동안 번 재물과 구입해 놓은 옷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부자들은 좀 한 숨 놓았을 것입니다. 재물은 썩으면 다시 얻으면 되는 것이고 옷도 다시 사면 되는 것이니 부자들에게는 별게 아닙니다. 계속 읽어 내려갑니다. 3절 말씀입니다.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이 당시 교회를 다닌 사람이라면 부자라도 이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 다 알았을 것입니다. 특히 “너희 살을 먹으리라”는 말씀은 영원한 형벌을 의미하는 말씀임을 누구나 다 알았습니다. 야고보는 지금 부자들은 영원토록 고생한다는 심판의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마치 부자들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 있는 것으로 가정하고 논지를 펴 나갑니다. 하나님이 재판장이시고 피고가 부자들입니다. 그런데 그 증인이 바로 녹슨 금과 은이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그토록 소중히 여겼던 재물 곧 금과 은이 바로 심판날에 증언대에서 주인을 향하여 고소한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내용의 말씀입니까? 생각해 보십시다.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금과 은이 마지막 심판 날에 증언대에 서서 우리를 향하여 “저 사람이 나쁜 사람입니다” 고소하고 있다면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우리들 은행의 통장이 우리를 고소한다는 것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고소하는 소리가 또 있습니다. 4절 말씀입니다.

“보라 너희 밭에 추수한 품군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일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지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연약한 자의 돈을 갈취하면 그 것으로 끝나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야고보 기자는 참 재미있게 표현합니다. 먼저 일꾼이 소리 지른다는 표현을 안합니다. 삯이 소리 지른다고 합니다. 왜 삯이 소리를 지를까요? 일꾼들은 받은 것만으로도 만족해 하고 있을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일꾼은 알지 못하지만 삯은 심판날에 증언대에 서서 소리를 지른다는 것입니다. 일꾼은 속여도 삯은 속일수 없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세번째 증언대에 서는 사람을 소개 합니다.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일꾼도 삯을 갈취당한 줄을 알 때는 삯과 일꾼이 함께 하나님께 고소한다는 것입니다. 재물에 쓴 녹, 주지 않은 삯, 일꾼, 이 셋이 증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처럼 세 증인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서는 어떤 판결을 내리실까요? 5절 말씀입니다.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연락하여 도살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지게 하였도다.”

한 마디로 말하면 자기만을 위하여 사는 자라는 것입니다. 영어로 하면 Me, Me, Me, Me…. 그런데 그뿐이 아닙니다. 한 가지 판결이 더 있습니다. 6절 말씀입니다.

“너희가 옳은 자를 정죄하였도다 또 죽였도다 그는 너희에게 대항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이 구절은 해석하기가 어려운 구절입니다. 그러나 쉽게 생각하면 또 쉽게 생각할수 있습니다. 부자들은 자기도 모르게 의인을 죽인다는 것입니다. 곧 살인자라는 것입니다. 이것 얼마나 무서운 판결입니까? 생각해 보십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판결을 내리십니다. “너희는 자기 자신만을 아는 살인자이다.” 이러한 판결을 우리에게 내리셨다면 얼마나 소름이 끼치겠습니까?

그런데 어떤 분들은 생각하실지 모릅니다. “나는 다행히 이러한 부자가 아니니 나와는 상관이 없지…. 나는 밭도 갖고 있지 않고 일꾼도 부리지 않으니 아니 나는 부림을 받는 일꾼이니 나와는 전혀 해당사항 없음.”

교우 여러분 정말 우리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말씀일까요? 물론 미국 안에서 부자라고 불리려면 10억불은 갖고 있어야 할줄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미국만을 내려다보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전세계를 내려다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관점을 미국에서 전 세계로 넓혀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얼마 전 어느 책에서 보았는데 미국의 대학교 한 학기 등록비를 가지고 르완다의 한 마을 사람들이 일년을 지낼수 있다고 합니다. 자 4년 대학을 마친다면 8학기일테니 그러면 몇 마을을 1년 먹일수 있는 액수일까요? 여덟 마을이 생활할수 있는 돈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학생교우가 많은데 만일 한 학기 등록금을 그냥 르완다에 보낸다면 아마 일년 간 수많은 르완다 주민들이 생활할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만일 그렇게 한다면 그 것이 하나의 희년축제가 아닐까요? 이렇게 말씀드리면 학생교우 분들이 하나 둘씩 교회를 떠날테니 이것은 없었던 것으로 하겠습니다.

그런데 야고보 기자는 등록금을 안 보내도 희년의 축제를 누리는 길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다시 1절 말씀으로 돌아갑니다.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

야고보 기자는 부자들에게 무엇을 명령하고 있습니까? ‘울고 통곡하라.’ 사실 우리가 부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감사하세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울고 통곡하라.” 그것이 바로 사회정의를 이루는 길이고 바로 희년의 축복을 나누는 길이기 때문이지 않겠습니까?

교우 여러분 우리는 사회정의를 이룬다는 명목 하에 희년 행사를 하면서 한 두시간에 1만불씩을 날려버릴 필요가 없습니다. 물론 가끔 그렇게 하는 것도 의미는 있겠죠. 그러나 진실로 희년을 지키는 길이 우리에게 열려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미국에 산다는 이유로, 우리가 대학을 다닌다는 이유 하나로 우리의 자녀들이 대학을 다닌다는 이유로 인해서 울고 통곡하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우리의 재물이 썩어 있는 것이 보일 것입니다. 우리의 옷이 좀 먹은 것이 보일 것입니다. 우리의 금과 은이 녹슨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우리가 착취한 품삯의 소리를 들을 것입니다. 우리가 땅에서 사치하고 있고 연락하게 살고 있음을 알게 될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살지어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살인자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 때 희년은 시작됩니다. 사회 정의는 우리 안에 이루워집니다.

교우 여러분 울고 통곡한 적이 언제이십니까? 가정의 어려움이나 건강이나 어떤 문제로도 울고 통곡한 것은 여러분에게 유익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희년의 축복을 가져다 주는 통곡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부하다는 사실로 인해서 울고 통곡할 때입니다.

지난 주간 오늘 설교를 생각하면서 일주일을 지내는데 저 스스로도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과연 울며 통곡하였는가?” 물론 다른 일로는 해보았지만 미국에 산다는 이유로, 전 세계에 사는 가난한 자들을 생각하면서 울며 통곡하지 못했습니다.

지난 주에는 마침 저의 알러지가 심해졌습니다. 아마도 가뭄이 심해서 알러지가 더 심했던 것 같습니다. 계속 콧물이 쏟아져 내리는 것이었습니다. 책을 보는데 자꾸 흘러내립니다. 처음에는 화장실로 달려가곤 했는데 너무 자주 가자니 책읽는 속도가 늦어져서 결국 그냥 읽어 내려갔습니다. 콧물 한 방울이 책에 떨어졌습니다. 그것도 방금 까만 펜으로 밑줄을 그은 부분에 떨어졌습니다. 순간 저의 뇌리에 스쳐지나가는 생각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것이 나의 눈물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고는 혼자서 기도드렸습니다. “주님 저도 가난한 자들을 생각하며 눈물 흘리는 자가 되게 하소서.”

1970년대 흑인 차별이 심할 때입니다. 조지아 주의 애틀란타에서 흑인 아이들이 연속 살해를 당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살해당한 아이들을 위하여 어느 목사님이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있었던 일을 말합니다. 어느날 집에 오니 부인이 또 흑인아이가 살해당했다는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목사님은 “오 그래요” 하고는 계속 밥을 먹었다고 합니다. 결국 그는 설교시간에 말합니다. “우리에게는 또 다른 비극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눈물이 없어졌습니다.” 설교 준비하면서 아무리 흑인 아이들이 살해를 당해도 더 이상 눈물을 잃은 안타까운 자신의 모습을 고백한 것입니다. 저도 설교 준비를 하면서 온세상 가난한 자들을 위한 눈물을 잃은 모습을 느꼈듯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이러한 고백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우리에게 눈물이 없어졌습니다.”

요즘 통계에 의하면 일년에 굶주려 죽는 아이들이 6백만이 넘는다고 합니다. 하루에 약 2만명이 굶어서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눈물샘은 말라 있지 않습니까?

야고보는 먼저 우리들에게 주머니를 털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울고 통곡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야고보가 우리에게 울고 통곡하라고 명령한 이유는 우리가 울고 통곡할 때 희년이 온 세계에 올 것이기에 이것을 명령한 것입니다. 그런데 온 세계에 오기 전 먼저 우는 바로 그 분에게 희년의 기쁨이 임합니다. 크게 울고 나면 히브리 말로하면 ‘샬롬’, 형용할수 없는 평화를 느끼지 않습니까? 이와 관련해서 재미있는 자료를 읽어 보았습니다.

최근 과학자들의 연구 조사에 의하면 감정으로 인한 울음은 눈물을 통해서 몸의 나쁜 물질들을 내보내게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눈물이 다 그렇지 않습니다. 눈물이 그런 효과가 있다면 이제부터 많은 분들이 양파껍질을 마구 벗기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양파를 다루다가 흘린 눈물은 그런 효과가 없다고 합니다. 감정으로 인해 흘린 눈물 안에는 자극으로 인해 흘린 눈물보다 더 많은 단백질이 발견된다고 합니다. 어떤 학자는 기관지 천식환자가 많이 울은 다음에 완쾌된 것을 보고하였습니다. 알러지와 천식은 사촌 관계인데 그런 관점에서 보면 저도 울음이 필요한 사람인 것 같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우리가 이웃을 위하여 안타깝게 울 때 우리에게 먼저 여러 가지 좋은 일이 생깁니다. 하물며 이웃에게는 더욱 좋은 일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이것을 다 아시고 하나님께서는 야고보에게 이러한 편지를 부자들에게 쓰게 하신 것입니다.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

교우 여러분 진정한 희년은 눈물로 시작됩니다. 아니 눈물과 통곡으로 시작됩니다. 이 때 진정한 사회정의가 이루워집니다. 눈물을 흘리는 자들을 통하여 온 세상에는 새로운 평화의 물결이 일어 날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기억하십시다. 애통이 없을 때 우리들의 부는 저주가 됩니다. 반면 우리들의 부가 우리들의 애통과 눈물을 만날 때 희년의 나팔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열심히 공부하시고 열심히 돈을 버십시요. 그러나 일년에 몇차례는 부로 인해 애통해하시기 바랍니다. 가난한 자들을 위해 애통해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눈물을 절제하는 것이 아니라 눈물이 우리를 절제하게 하십시다. 우리들의 부는 사회정의를 이룩하는 아름다운 재물이 되어 갈 것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찰스 피기(Charles Peguy)라는 분이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순례를 마치고 하늘문에 다다르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물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어디에 있니? (Where are the others?)’”

조금 각색해보았습니다.

“우리가 하늘 문에 다다르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물을 것이다. 너의 눈물은 어디 있니? 가난한 자들을 향한 눈물은 어디있니?”

부하면 부할수록 더욱 많은 눈물을 요구하실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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