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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날짜 : 2007.02.25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성경본문 : 마태복음 17:1-8

한 신부님이 밤 늦게 집으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강도가 나타나서 권총을 들이 댑니다. “돈을 내어 놓으세요! 아니면 목숨을!”

신부님이 주머니에 손을 넣는 순간 강도는 신부님의 목에 두른 collar를 보았습니다. “신부님이시군요. 그냥 가세요.”

신부님은 예상하지 않는 행동에 고맙게 생각이 들어서 주머니에 있는 사탕을 꺼내서 강도에게 주었습니다. 강도가 하는 말, “신부님, 저는 사순절 기간 사탕을 먹지 않습니다.”

재미있는 이야기이지만 많은 도전을 주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의 목적은 한 마디로 ‘사순절의 참 뜻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가’ 새롭게 우리에게 도전하고 있습니다. 이번 사순절을 통해서도 기도와 금식 구제등 아름다운 시간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진실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순절의 축복을 누리시게 되길 원합니다.

그러면 사순절의 축복은 과연 어떤 것일까요? 아울러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아니면 40일간 자신을 테스트 해보는 시간일까요? 많은 분들이 마음에 깊숙한 기도의 제목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마음을 안고 사순절을 시작하셨을 줄 압니다. 저도 한가지 기도 제목을 안고 사순절을 맞이한 적이 있습니다. 필라델피아에서 전도사로 교회를 섬기고 있을 때 장래 문제를 놓고 기도하던 중 사순절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40일 동안 빼놓지 않고 새벽 제단을 쌓으면 하나님께서 무엇인가 응답하시겠지 기대했습니다. 열심히 하루도 빠지지 않고 40일 새벽 제단을 쌓았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물론 저의 기도의 제목이 40일 만에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여러분 모두도 안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저에게는 안 이루어졌습니다. 그로 알 수 있었던 것은 사순절을 잘 지킨다고 해서 기도의 제목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구나를 깨달았습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사순절을 지켜야 하나요? 40일간씩이나…

얼마전 어느 목사님으로부터 실제 있었던 가슴 아픈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40일 금식 기도를 작정하고 금식을 하셨습니다. 처음 어려운 10일은 잘 넘기고, 20일도 잘 넘겼습니다. 30일도 잘 넘겼습니다. 40일이 되었습니다. 40일도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의 마음에 유혹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40일 금식하셨는데 나는 41일을 해야지.” 41일째 금식하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금식으로 자신의 기록을 삼고자 할 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 것입니다. 여기에 사순절의 위험이 있습니다. 40일간 금식을 하던가 아니면 각자 하나님께 작정해서 어떤분들은 술 어떤 분들은 커피등을 바치시는데 너무 훌륭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의 자신의 기록으로만 남을 때 오는 위험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40일간 무엇을 이루워 놓았다고 생각할 때 오는 위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상으로 살펴 보건데 사순절을 지킨다고 해서 딱 기도 제목이 40일 만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고, 자신의 죄성을 깨달으려고 사순절을 지키긴 하지만 도리어 그것이 자신의 기록으로, 훈장으로 남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사순절 벽두부터 제가 사순절의 무용론을 주장하고 있는 것 같은데 느낌입니다.

사실 사순절은 우리에게 큰 실망을 주기도 하고 때로는 기록 갱신의 유혹과 위험이 있기는 하지만 이러한 것들을 감수하기에 조금도 아깝지 않은 아주 소중한 그 무엇이 있습니다. 과연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그것이 무엇인지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유명한 변화산 사건에 대한 내용입니다. 본문 말씀 처음에 ‘엿새 후에’라는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세번 당신이 수난 받으실 것을 예고하셨는데 첫번째 당신이 수난 받으실 것을 예고하신지 엿새 후에 이루어진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인자가 예루살렘에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예고하신지 엿새 후에 예수님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제자를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 가셨습니다. 그 동안 성경에는 예수님이 높은 산에 오르신 기록은 없는 것으로 보아서 아마 높은 산에는 세 제자들과는 처음 오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세 제자는 예수님께서 높은 산에 오르시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하셨을지 모릅니다. 이 당시 높은 산은 신비스러운 곳이니 세 제자들은 많은 호기심을 안고 주님을 따라 올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2절)”

그뿐 아닙니다. 말로만 듣기만 했던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았습니다. 예수님과 대화를 나눕니다. 모두 정신을 잃습니다. 사실 변화된 예수님 또한 엘리야와 모세와 대화를 나누시는 예수님을 보고 온전한 정신을 유지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종종 유명한 연예인들을 보고 열광하는 사람들을 봅니다만 연예인을 갑자기 만나도 그러한데 엘리야와 모세 그리고 변화하신 예수님, 상상이 가질 않습니다. 이 때 여느때처럼 베드로가 입을 엽니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4절)”

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습니다. 5절 말씀입니다.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5절)”

제자들은 엎드려 심히 두려워합니다.

어떻게 보면 순식간에 되어진 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모세와 엘리야와 얼마나 오래 말씀 하셨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단지 추측할 수 있는 것은 베드로의 성격으로 비추어 보아 베드로가 오래 기다렸을리가 없습니다. 베드로는 세 분이 대화하는 것을 보았을 때 성급히 예수님께 물었을 것입니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한편 베드로의 말이 시작하기가 무섭게 빛난 구름이 또 저희를 덮었습니다. 그러니 실제로 예수님께서 변화하신 시간이 그리 오래가 아닐 줄 압니다. 짭은 시간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시간의 길이가 아닐 줄 압니다. 세 제자가 주님의 변화하신 모습을 보았습니다. 아주 짧은 시간 동안이지만….

짧은 시간이지만 효과는 있었습니다. 세 제자들은 모두 정신을 잃었고 베드로는 얼떨결에 입을 열었고 이에 하나님이 빛난 구름 사이로 말씀하십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를 저의 말을 들으라.”

심히 떨며 엎드려 있는 제자들을 어느새 예수님께서 다가오시사 손을 대시며 말씀하십니다.

“일어나라, 두려워말라.”

눈을 들어 보니 예수님 이외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당황합니다. 어리둥절해 합니다. 그들은 지금 자기들이 어디에 있는지 무슨일이 일어났었는지, 또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헷갈려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속으로 고백했을 것입니다. “I am lost.”

저는 올 해 사순절 첫 설교를 산을 배경으로하는 본문을 골랐습니다. 그런데 사순절은 산보다는 광야를 주제로 해야하는 절기입니다. 사순절은 40일간 지킵니다. 40일 하면 생각나는 것은 예수님의 40일간의 광야의 시험입니다. 아울러 40하면 생각나는 것은 모세의 40년 광야 생활입니다. 또 다른 40년은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 후 40년간 광야에서 방황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고난을 40일간 지키는 이유는 우리는 이 40일간 광야의 체험을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사순절은 산의 절기가 아니라 광야내지 사막의 절기입니다. 저는 변화산 본문을 사순절 첫 설교본문으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있습니다.

사실 저는 이 변화산 사건에서 광야의 사건을 느꼈습니다. 저는 이 변화산에서의 사건이 사순절을 올바로 지키는 자들 모두에게 일어나는 광야의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사순절 기간 변화하신 주님을 모두 볼 수 있다고 말씀드리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저는 이 세 제자의 모습이 바로 사순절 기간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축복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세 제자들의 모습을 한마디로 표현해 볼까요? “I am lost.” 제자들 모두 공통적으로 경험한 것이 있습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이 지금 어디있는지, 어디로 가야할지 그 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방향을 잃었습니다. 무엇을 해야할 지, 무슨 말을 해야할 지 갈길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외친 것입니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그런데 사실 그의 실망 속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고 있는 것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I am lost.” 그리고 “I am lost”는 광야에서 사는 자들의 고백입니다. 세 제자들은 산에서 광야의 삶을 체험한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광야 한 가운데 우리가 놓여 있다면 우리의 입에서 처음 터져 나오는 말이 무엇이겠습니까? “I am lost.”모세는 40년간 광야에서 외쳤습니다. “I am lost.” 이스라엘 민족도 40년간 광야에서 외쳤습니다. “I am lost.” 예수님은 광야에서 40일간을 지내셨습니다. 인간의 소리에 동참하시기 위해서입니다. “I am lost.”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은 광야가 아니라 산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산에서 세 제자들을 철저하게 ‘lost’의 경험을 하게 합니다. 이 산 위에서 광야의 경험을 하게 합니다. 사순절의 체험을 하게 합니다. 세 제자들은 산 위에서 광야의 삶을 체험한 것입니다.

산은 종교적으로는 하나님과의 만남을 상징합니다. 사회적으로는 성취를 상징합니다. 반면 광야는 사탄이 있는 곳이요, 방황이 있고 실패가 있는 곳을 의미합니다.

‘산 위에서의 광야의 삶’, 이것이 바로 현대인을 위한 사순절의 삶이 아닐까요? 아니, 현대 종교인들을 위한 사순절의 삶이 아닐까요? 우리들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요? 우리는 지금 종교적 산, 사회적 산위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마치 종교적 산 위에 올라온 것 같습니다. 산 위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는 길을 잃었습니다. . “We are lost.” 이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같이 있으면 다 되는 줄 알았습니다. 모든 목표가 다 이루어질 줄 알았습니다. 그토록 그리던 산 위에 올라갔습니다. 신앙적으로 최고봉에 올라간 것 같았습니다. 그것도 예수님과 더불어…, 아니나 다를까 예수님이 변화하셨습니다. 모든 것은 다 이루어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예수님이 제자들의 등을 두드리십니다. “일어나라. 두려워말라” 제자들은 산 위에서 길을 잃은 느낌입니다. 산 위에서 광야를 체험한 느낌입니다. “We are lost.” 그들은 이 고백을 하면서 변화산을 내려옵니다.

교우여러분, 사순절은 그 동안 산위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사회적으로 성공했다고 생각했던 우리의 무지함을 발견하는 계절입니다. 도리어 우리는 길을 잃었음을 발견하는 절기입니다. 이 때 참 사순절의 축복이 임합니다.

왜냐하면 “I am lost” 느낄 때 우리는 참 안내인을 찾기 시작합니다. 참 길과 진리와 생명을 찾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순절 벽두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경험은 “I am lost”입니다. 이제 우리는 진리를 찾는 열망이 생깁니다. 세 제자들은 “I am lost”의 경험 후 주님을 새롭게 보게 됩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을 바라 보았을 것입니다.

지난 수요일부터 사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사순절의 첫날을 재의 수요일이라고 부릅니다. 제가 본교회 시무한 후 첫번째로 재의 수요일 예배를 드렸습니다. 재는 흙을 뜻하는데 재의 수요일 예배에는 재를 이마에 그으면서 집례자가 선언을 합니다. “너는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지니라.” 저는 설교 말씀을 통해서 재의 수요일은 바로 우리들의 무덤 묘비 앞에 서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참석한 모든 분들에게 큰 은혜의 밤이 된줄로 압니다.

저도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제가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 갈지어다.” 선포할 때마다 모든 분들이 아멘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아멘’의 의미는 그동안 이 사실을 잊고 살았다는 고백에 대한 아멘이었습니다. 곧 “I am lost”에 대한 ‘아멘’이었습니다. 모든 교우 분들은 “Amen, I am lost” 고백하시며 집으로 돌아 가셨습니다. 교우님들은 길과 진리, 생명의 데한 열망을 갖게 되셨습니다. 교우님들은 사순절의 축복의 문이 열려진 것을 느끼며 기쁨을 안고 귀가하셨습니다.

어느 분이 뉴잉글랜드 지역의 묘비들을 관찰한 후 특이한 사실을 발표했습니다. 17, 18, 19세기에 묘비에 새겨진 글들은 모두 인격적인 표현이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아버지, 헌신된 어머니, 용감한 남자, 용감한 여인.’ 반면에 20세기에 와서는 대개 직업이 기록되었다고 합니다. 의사, 간호사, 목사, 교수, 사업가 등등…. 21세기는 더 심해지지 않을까요?

오늘 21세기는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산 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종교적으로 산 위에 있는 자들은 스스로 하나님을 만났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따라 산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너무도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종교적으로 산 위에서 살고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산 위에서 살고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산 위에 있는 자들은 무엇인가 이 땅 위에서 목표를 이루었다고 생각합니다. 훌륭한 직업을 자신의 완성으로 생각합니다. 자신 안에 주어진 재능을 10분 발휘함을 통해서 온전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가장 무서운 것은 종교적으로 산 위에 있으며 사회적으로도 산 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늘 만난다고 생각하고 있고, 사회적으로도 최고의 재능을 십분 발휘하면서 산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정 이러한 확신 가운데 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I am lost.” 아니, 이들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모든 크리스챤들은 일년에 한번 사순절의 경험을 하여야 합니다. 사순절을 통해서 이 고백을 하여야 합니다. “I am lost.”

“나는 아버지로서 나의 갈 길을 잃었습니다.

나는 어머니로서 나의 갈 길을 잃었습니다.

나는 목사로서 나의 갈 길을 잃었습니다.

나는 제직으로서 나의 갈 길을 잃었습니다.

나는 교수로서 나의 갈 길을 잃었습니다.

나는 사업가로서 나의 갈 길을 잃었습니다. “

이제까지는 종교적으로, 사회적으로 산 위에 올라 온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닌 것을, 철저히 길을 잃은 것을 고백해야 합니다. 이것이 사순절의 축복입니다. 이 축복은 사순절을 온전히 지키는 자에게는 그 누구에게도 임합니다.

저는 목사로서 길을 잃고 있었음을 이번 저희 교회에서 발간한 사순절 묵상록을 통해 발견했습니다. 이번에 묵상록을 편집하시는 분에게 저의 글은 제가 오래전 설교했던 ‘깊어가는 골고다’ 씨리즈에서 골라서 넣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두 편이 실려 있는데 그 중 한 편을 읽으면서 저의 모습을 재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6-7년전 다음과 같이 설교했었습니다.

“주님의 고난은 한번 체험하고 끝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해마다 우리 몸 안에서 더 깊어가야 합니다. 작년 사순절 때 느꼈던 고난보다 올해에 더 깊은 고난을 느껴야 합니다. 내년에는 그보다 더 깊게 느껴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을 깊게 체험해갈 때 세계를 밝게 비추는 빛의 역할을 감당케 됩니다.”

저는 그리스도의 고난은 해가 갈수록 더욱 깊게 느껴져야 한다고 설교했었습니다. 묵상록에 기록된 저의 설교문을 보면서 저의 모습을 되돌아 보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I am lost.” 해가 갈수록 주님의 고난을 깊이 느끼지 못 했던 저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저는 묵상록을 통해서 광야의 체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아울러 저의 삶의 안내자를 다시 찾은 것입니다. 저의 안내자는 제 앞에서 십자가로 향하시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끝내 십자가에 달려 돌아 가셨습니다. 상상할 수 없은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를 볼 때 저는 더 이상 길 잃은 자가 아니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사순절은 깊어가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멀어져 간 우리들의 모습을 발견하는 절기입니다. 교역자로서, 제직자로서, 찬양대원으로서 교사로서 하나님의 산에서 주님을 만난다고 생각하면서 하루종일 살았지만 실제로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멀어진 우리들의 모습을 발견하는 절기입니다. 그 모습을 발견하고서 외치는 절기입니다. “I’m lost.”

이처럼 “I am lost”를 고백하는 자들에게 어떤 일이 생길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세 제자들이 안절 무절 못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나님은 길잃은 우리들에게 한 분을 보여 주십니다. 예수님을 새롭게 보여 주십니다. 세 제자들은 새로운 예수님 변화되셨던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을 보는 제자들의 안목이 변화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변화된 안목으로 예수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예수님은 제자들 앞에서 새로운 여정을 시작하십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산을 내려 오십니다.

“I’m lost.” 외치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I’m lost.” 외치는 자들의 시선은 주님을 향합니다. 주님께서 가시는 길을 끝까지 바라봅니다. 새로운 안목으로 고난의 주님을 바라봅니다.

고난의 주님을 바라보노라면 나를 위하여 고난 당하시는 주님의 모습이 제일 먼저 보여집니다. 잠시 후 가족을 위하여 고난당하시는 모습이 보여집니다. 또 잠시 후 이웃을 위하여 고난당하시는 모습이 보여집니다. 한 민족을 위하여 고난당하시는 모습이 보여질 것입니다. 니카라과 사람들을 위하여 피를 흘리시는 모습이 보여질 것입니다. 부르클라인의

그때 진정 우리는 더이상 lost된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가 된 것을 체험할 것입니다.

우리들 위에 어느덧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질 것입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딸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그런데 이처럼 사순절 기간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말씀하시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에게 놀라운 은혜가 임합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것입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딸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사순절을 마칠 때 우리는 우리를 향한 이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Assisi의 성프란시스는 자주 이렇게 중얼거렸다고 합니다. “Love is not loved (사랑은 사랑받고 있지 않습니다).” 주님의 우리를 향한 십자가의 사랑은 사랑받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은 늘 버림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버릴때 우리는 길을 잃습니다.

교우여러분,

이번 사순절 기간 주님의 사랑을 사랑하십시다. 주님의 사랑은 우리를 위한 십자가의 고난입니다. 이 고난의 주님을 사랑하십시다. 십자가의 사랑을 사랑하십시다.

사실 하나님은 주님의 사랑이 사랑받지 못함을 너무나 잘 아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주님의 말은 곧 십자가의 사랑의 말입니다.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말을 듣는 것은, 곧 주님의 고난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실 주님을 가르키면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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