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차례 언급해 드린 나무 의사 우종영씨가 어느날은 늙고 병든 잣나무를 만났습니다. 그 나무는 서 있는 자체가 신기할 정도로 많이 힘들어 보였습니다. 늘 병든 나무는 보기만 하면 치료하곤 하는 습관에 따라 끌을 들이댄 순간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이런 나무를 치료하는 게 과연 잘 하는 일일까.”
고개를 들고 찬찬히 나뭇가지를 올려다 보았습니다. 가지 하나 하나에서 “이젠 그만 놔줘” 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습니다. 결국 나무에게 손 한번 대지 못한 채 돌아설수 밖에 없었습니다.
돌아 오는 길에 끝없는 의문이 우종영씨를 괴롭힙니다. 그래도 그 나무가 혹시나 더 살고 싶지 않았을까. 내가 할 일을 미루고 온 것은 아닌가….
그렇게 일년이 지난 뒤 그 나무가 있던 곳을 다시 찾게 되었습니다. 혹시 죽음의 현장을 맞닥뜨리게 되면 고통스러울 것 같아서 차일피일 미룬 시간이 일년이었습니다.
조바심치는 마음을 애써 누르며 잣나무가 서 있던 자리에 다가서는 순간 그는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늙은 잣나무가 자취를 감춘 그 자리에는 어린 잣나무가 한참 자라고 있었습니다. 가냘픈 가지마다 연한 연록빛 새순을 올리고 하늘을 향해 줄기를 뻗은 어린 잣나무. 일년 전 늙고 병든 잣나무를 치료했더라면 결코 볼 수 없을 새 생명이었습니다.
오늘 부활주일 예배를 드립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이 날 누가 제일 먼저 기뻐하실까요? 아니 2천년 전 주님께서 부활하셨을 때 누가 제일 먼저 기뻐하셨을까요? 물론 하나님이셨을줄 압니다.
이틀 전만해도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면서 아파하시는 주님을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그냥 보고 계실수 밖에 없으셨습니다.
물론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의 고통에서 구해 내실까 생각도 당연히 들으셨을줄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대로 버려 두셨습니다. 그 결과 삼일만에 부활하신 당신의 아들의 멋진 모습을 보실수 있게 되셨습니다. 너무도 기쁘셨을줄 압니다.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그대로 놔두신 것을 너무도 잘 하셨다고 생각하셨을줄 압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그대로 놔두실수 밖에 없으셨던 이유가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3, 4절 말씀입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여기서 눈에 띄는 것은 사도바울은 ‘성경대로’라는 표현을 두번씩이나 합니다.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사도바울은 지금 구약을 한 마디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주제는 두 가지라는 것입니다. 하나는 죽음 또 하나는 부활. 곧 메시야의 죽음과 부활의 이야기가 예언된 것이 구약이라는 것입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하나님께서는 메시야의 죽음과 부활의 이야기를 성경에 기록해 놓으셨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죽음을 그냥 지켜 볼수 밖에 없으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복음이라고 사도바울은 역설합니다.
복음은 곧 메시야의 죽음과 부활의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오늘 본문을 통해 새로운 각도에서 복음을 정의합니다. 사실 3, 4절로 복음의 정의를 내린 것이 아닙니다. 복음의 정의는 계속 이어집니다. 다시 어떻게 이어지나 볼까요? 3절부터 이어지는 말씀이 어디에서 마쳐 지는지 봉독해 드리겠습니다.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이어집니다.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사도바울의 복음의 정의는 3절에서 8절까지입니다. 그런데 눈에 띄게 많이 나오는 단어가 있습니다. 보이셨다는 단어입니다. 죽음에서 사흘만에 부활하신 것이 사도바울의 복음의 전부가 아닙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자기에게까지 보이신 것이 바로 사도바울의 복음입니다.
이로서 알수 있는 것은 사도바울은 주님의 나타나심과 함께 복음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나타나심은 복음의 한 연장이었던 것입니다. 곧 주님의 나타나심의 사건은 사도바울을 완전히 뒤집어 놓은 것 같습니다. 9절 말씀을 통해 알수 있습니다.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사도바울은 놀라운 체험을 한 것입니다. 율법에 정통한 사도바울에게는 상상할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율법대로라면 선행을 행한 자들에게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게 되어 있습니다. 아니 그들에게만 하나님은 나타나시게 되어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받은 첫번째 충격은 당신의 교회를 핍박하는 자기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더해서 자기를 사도로까지 임명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사건이 바로 사도바울에게는 복음의 정수가 되었습니다. 복음의 내용이 자기의 삶에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죽을 수 밖에 없는 자가 하나님의 은혜로 부활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부활의 결과에 대해서 더 구체적으로 말씀합니다. 10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사도바울은 “내가 나 된 것은” 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아무나 이런 말을 사용할수 있습니까? 자기는 아주 독특한 인물이 되었다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자, 생각해 보십시다. 만삭되지 못한 자 그것도 부족해서 교회를 박해하던 자가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 아주 특별한 인물이 되어 갔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존재가 되어 갔다는 것입니다. 두 분 사이에 아주 특별한 만남이 있었음에 틀림 없습니다.
어떤 일이 벌어졌기에 사도바울의 삶은 오고 가는 세대를 위한 복음의 놀라운 사건의 대표적 사건이 되었을까요?
성경에는 기록이 되어 있지 않지만 부활하신 주님과 죽을 죄를 지은 두 분 사이에 특별한 대화가 오고가지 않았을까요? 저는 이렇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를 디딛고 일어서라.”
“주님 제가 어떻게 감히 주님을 밟습니까?”
“나는 너희를 섬기러 왔다. 너희들의 죄를 위해 이미 죽었다. 너희가 아무리 밟아도 더 이상 아프지 않다. 너희의 죄로 나를 마음 놓고 밟아라. 그리고 나를 디딛고 일어서라. 대신 나를 위해 부활의 꽃을 활짝 피어다오.”
아니 사도바울뿐 아닙니다. 열두 제자도 주님을 버리고 다 달아났으니 얼마나 부끄러웠겠습니다. 절망 중에 있는 열두 제자를 향해서도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나를 디딛고 일어서라.”
오백여 형제들에게도…. 그리고 오늘은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나를 디딛고 일어서라.”
교우 여러분,
주님은 우리 모두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맞는 방법으로…. 그래서 우리 모두도 사도바울의 고백을 하도록 나타나셨습니다.
“내가 나 된 것은….”
사도바울의 이 표현은 현대말로 바꾸면 이렇게 바꾸고 싶습니다.
“I am uniquely beloved.”
사실 이 표현은 제가 만든 것은 아니고 Jean Vanier라고 L’Arche(방주)공동체라고 장애인들을 위한 공동체를 만들어 세계적으로 큰 공헌을 하신 분이 있습니다. 이 분이 장애인들과 오래 산 후 모든 크리스챤들의 모습을 이처럼 규정합니다.
“Every Christian is uniquely beloved.”
그는 장애인들의 어두움을 늘 접하면서 살았습니다. 아울러 그 안에서 피어나는 부활의 꽃 향기를 늘 맡으면서 살아 갔습니다. 결국 모든 사람은 아니 주님을 만난 모든 사람은 uniquely beloved하다고 고백을 합니다.
오늘 백합화와 튜립으로 강단이 장식이 되어 있습니다. 오래전 읽은 글을 보면, 튜립은 매번 다르게 핀다고 합니다. 겨울동안 받은 상처에 따라서 피는 모양이 달라진다고 합니다. 상처가 사랑스러움으로 독특하게 나타난다고 합니다.
사실 사도바울의 사랑스러움의 시작도 그의 어두움이었습니다. 그의 죄성이었습니다. 그의 어둠으로 인해 주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로 인해 그의 어두움은 신비한 아름다움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멋진 부활의 꽃을 피운 것입니다. “내가 나 된 것은…”고백할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이 모든 것의 시작은 주님께서 죽으셨고 부활하셨으면 결국 사람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 모두도 uniquely beloved합니다. 이유는 우리들의 어두움 때문입니다. 죄성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어두움과 죄성이 주님의 죽으심을 만났을 때 신비한 아름다운 꽃을 피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부활입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많은 분들이 왜 하나님께서는 나에게도 사도바울에게 나타나신 것 처럼 나타나시지 않나 안타까워 하시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주님은 사도바울에게 보이신 것처럼 우리에게 보이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도바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의 죄성과 어두움은 사도바울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맞는 방법으로 나타나십니다.
교우 여러분,
주님은 우리에게 이미 나타나셨습니다. 우리 각자에게 맞는 방법대로…. 그리고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디딛고 일어서라.”
우리들의 죄성과 주님의 죽으심이 만났을 때 아름다운 부활의 꽃으로 피어나는 것입니다. 함께 각자 아름다운 꽃을 피워 가십시다. 아울러 우리들의 이웃이 특유의 꽃을 피우도록 도와 주십시다. 서로를 향해서도 말하십시다.
“나를 디딛고 일어서세요.” 부활의 주님께서 기뻐하십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얼마전 어느 분으로부터 아래와 같은 글을 받아 보았습니다.
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의 차이
지구가 멸망해서 탈출하는 우주선이 있다면,
좋아하는 사람은 내 옆자리에 태우고 싶은데,
사랑하는 사람은 내 자리를 주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좋아하는 것은 감정의 흔들림 이지만,
사랑하는 것은 영혼의 떨림이라 합니다.
‘좋아해’는 그 사람이 나 없으면 힘들기 바라는 것이고,
‘사랑해’는 그 사람이 나 없어도 행복하길 바라는 것입니다.
저는 한 가지를 더하고 싶습니다.
좋아하는 사람은 함께 일어서자고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를 디딛고 일어서라고 합니다.
교우 여러분,
주님의 음성을 들으십시다.
“나를 디딛고 일어서라.”
서로 주님의 음성을 나누십시다.
“나를 디딛고 일어서세요.”
함께 사도바울의 고백에 동참하십시다.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