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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경문 목사, 연약함을 마주하는 자리 (고린도후서 12장 7-10절) 06/18/2017

다양한 주제로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나와서 강의를 하는 Ted Talk이란 강좌가 있습니다. 많이 본 강의중 하나가, Brene Brown란분의 “The Power of Vulnerability” (취약함이 가진 힘) 입니다. 취약함(“Vulnerability”), 자신의 약점이나 상처받기 쉬운 연약함 부분을 의미하는 것인데, 자신의 약점을 어떻게 다뤄야하는지에 관한 강의입니다. Brene Brown은, 이 주제를 연구하려고 twitter에 사람들에게 언제 자신이 가장 취약한지, 연약한지를 물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몇 분이 안되서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twitter에 자신이 약해지는 순간들이 어떤순간인지 올려서 깜짝놀랐다고 합니다. 그만큼 사람들에겐 누구나 자신의 취약함, 쉽게 상처받는 순간, 그런 연약함을 느끼고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런 연약함을 마주하는 것은 쉽지 않고, 누구나 힘든 싸움을 해야 하는 과제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취약점을 마주하기 보다는 감추거나 뒷전으로 밀쳐놓고 있죠.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어쩌면 사실 우리 모두는 어떻게 자신의 취약점, 연약한 부분을 다루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읽은 성경말씀에서 바울도 자신의 연약함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자신의 연약함을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고린도후서 11장부터 오늘 읽은 말씀 부분은 소위 ‘어리석은 자의 연설'(The Fool’s speech)이라고 불리우는 장입니다. 바울은 여러 번에 걸쳐, ‘어리석은자’같아 보일지라도 라고 말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그런데, 여기서 ‘어리석은 자’란 말은 좀 파라독스하게 쓰이고 있습니다. 당시 고린도교회에서는 문제를 일으키고 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능력과 자랑거리를 앞세우며, 사도 바울의 권위를 의심하며, 도전하며, 무리를 일으키고 있었죠. 그런 자들이 자신이 가진 것들을 내세우며 자랑하는데, 사도 바울 자신도 그 어리석은 자와 같이 자랑을 해 보겠노라라고 하십니다.

11장 17절 말씀입니다. “오직 어리석은 자와 같이 기탄 없이 자랑하노라”(11: 17). 물론 자신이 히브리인이라고 시작하시만 막상 그가 자랑하려는 것은, 그가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당한 어려움과 고난들입니다. 그가 죽을 만큼 매를 맞은 일과 겪었던 위험과 위협, 그리고 그가 느꼈던 자신의 연약함입니다. 아울러, 약한 자들과 함께 약해졌고, 실족한 자들을 위해 애타하던 자신의 모습을 그는 자랑하려 하고 있습니다.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11장 30절).

사실, 바울은 세상적으로 자신을 비판하는 자들을 능가할만한 자랑거리가 많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가 자발적으로 어리석음을 선택하고, 자신의 연약함을 드러내고 있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4장 10절 말씀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들을 향해 어리석음을, 자신의 약한 것을 자랑하기로 선택합니다. 오늘 본문 앞에 12장 5절에서 그는 아예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아니하리라”

 

사실, 자기를 비난하고, 끌어내리려고 하는 자들 앞에서, 혹은, 자기의 권위를 믿어주고 따르는 자들앞에서 자기의 약한 것, 연약함을 드러내기란 정말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일반적으로도 사람들은 자기의 약한 점들을 드러내가 불편해 합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많은 분들이 아픔과 연약함을 드러내기 쉽지 않습니다. 자신, 그리고 가족의 약한 것을 드러낸다는 것은 쉽지 않고, 심적으로 매우 편치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려분, 사도 바울이 그렇게 말하기 쉽지 않던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고, 그것을 자랑까지 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사도바울은 자신의 약한 것들을 드러내놓고 있습니다. 지극히 본인 혼자만 씨름하고 있던 문제까지도 풀어놓습니다. 오늘 봉독한 7절 말씀입니다. ”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주님이 보여주신 환상과 계시가 있었지만, 그것보다도 자신이 가진 육체의 가시- 자기를 찌를 듯이 아파오는 가시가 있음을 고백합니다.

사실 이 가시가 어떤 가시였는지는 여러가설은 있지만 무엇이었는지 우리가 정확히 알수 없습니다. 몸과 관련된 육체적 약함이었을지 모릅니다. 아니면, 어떤 주석가들의 의견에 따르면, 마찰을 잘 일으키는 그의 날카로운 성격, 아니면, 어디가도 만나게 되는 비난의 화살들과 반대자들의 훼방이었을지도 모릅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가시던 간에 바울의 몸과 마음을 상처나게 하는 아픔을 주며,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가 고통을 주며, 그를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 가시를 주심으로 자신을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얼마나 괴로웠으면 세 번이나 주님께 그것이 떠나게 해달라고 간구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의 응답은 참 의외입니다. 첫 번째 간구도, 두 번째도, 세 번째도 들어주시지 않았습니다. 그 육체의 가시를 사라지게 하시지 않은 채 이렇게 말씀으로 응답하셨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그 육체의 가지로 인한 고통 가운데 있을지라도, 사도 바울에게 임한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충분하다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데, 언뜻 들으면, 좀 너무하신 말씀처럼 들리지 않습니까?

그런데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바로 다음에 설명되어 지고 있습니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주님께서 주시고, 베푸시는 능력이 너의 약함 가운데서 완전하여 지기 때문이라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이건 무슨 뜻입니까? 그리스도의 능력이 온전해 지는 곳은 바로 이 약함 안에서란 말씀인데요…왜 인간의 약함 가운데, 연약한 가운데서 주님의 능력이 온전해 집니까?

요즘, 우리가 살고 있는 문화 속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능력을 발견하기란 참 어렵습니다. 성취주의와 물질 추구의 문화 속에서 우리는 세상에서 요구하는 우리들의 능력, 그 능력대로 보장받는 사회에 살고 있죠. 직장과 학교에서 흔희 사람들은 약점이 아니라, 강점과 능력을 내 보이기에 바쁘고, 또, 그것을 추구해가면서 자신의 가치를, 값을 매기면서 살아가는 것이 세상의 모습입니다. 그런 곳에서 우리가 주님의 능력을 발견하고, 고백하고 살아가기란 참 어렵습니다. 그래서, 크리스챤으로 살지만, 늘 주님의 능력에 의지하기 보다는, 자신의 능력, 재능, 네트웤에서 의지하려 합니다. 자신이 이루는 일 가운데서 주님의 능력이 설 자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만일, 사람들이 자신의 가장 연약할때, 약함에 처핼을때는 어떤가요?

자신이 약함을 느낄 때, 자신의 연약함을 마주하는 그 자리에서 그때야 비로소 사람들은 주님의 능력만을 바라지 않습니까? 주님의 능력의 크심을 느끼게 될 때, 주님의 능력은 우리 안에서 온전하여 진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잊고 있던 주님의 은혜를 비로소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께서는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을 위해 살면서 그 누구보다도 자신의 연약함을 마주했던 분입니다. 그리고 그 연약함에 섰을 때 그곳에서 주님의 능력이 자신 안에 임하고,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의 은혜를 누렸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자이기에 주님께서는 그에게 “네게 내 은혜가 족하다”하는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 주님이 자신에게 부어주신 은혜가 사실 너무 크기에, 바울은 이제 그 음성을 듣고는 자신을 괴롭히는 사단의 사자와 같은 육체의 가시를 없애주시지 않아도, 도리어 기뻐한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약한 것들을 더 자랑하고자 합니다. 9절 후반부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이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아픔과 고통을 주는 가시들이 없어지지 않아도, 오히려 그것으로 인한 자신의 약함을 더 기뻐하고, 자랑하려 함은, 바로 그가 계속 자신 안에 임하시는 주님의 능력을 더 드러내 보기이 원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하기 위함이었습니다.

 

PCUSA의 homeless 사역에 큰 공헌을 하신 한국인 김진숙목사님이란 분이 계십니다. 어린 시절부터 수많은 병치례를 하며 자라고, 나이들어서도 힘든 병에 시달리셔야만 했던 분이지만, homeless 사역을 위해 능력있는 일을 많이 하셨습니다. 이분이 자신이 겪은 삶에서 받은 은혜를 이렇게 고백을 하셨습니다.

“내가 앓은 병으로 말하자면 나는 이미 다섯 살에 죽었어야 했다. 내가 겪은 아픔과 한으로 말하자면 나는 십대에 이미 완전히 망가져야 했다. 내가 범한 죄로 말하자면 나는 이십대에 이미 사형대에 서야했다. 하나님의 부름에 불복종한 것으로 말하자면 나는 삼십대에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아야 했다. 사십대에 자식을 잃고 살기를 거부했을 때 나는 절대 놓지 않고 쏟아 부어주신 축복과 은혜로 말하자면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닷물을 먹물 삼아도 다 기록 못한다.”

자신 안에 약함을 더 많이 마주했던 그 분은 그 가운데서 주님의 주신 축복과 은혜를 더 깊이 바라볼 수 있는 눈이 트였던 것 같습니다.

사도바울도 자신이 당했던 아픔과 고통들, 또, 때론 비난과 매맞음, 위협 등을 겪을 때, 그 안에서 연약해진 자신의 모습, 그 약 함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를 더 많이 체험했었음에 틀림 없습니다. 자신의 약함 가운데서 시시때때로 간절히 기도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 오히려 그 상황 속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충분히 부어주신 은혜를 경험합니다. 그리고 그 연약함을 만나는 곳에서 주님의 능력이 발휘되는 것을 봅니다.

맥스 루카도 목사님은 바울에게 주어진 이 은혜의 충분함이 그에게 육체의 가시를 거두어가지 않으신 이유라고 말하며, 우리들에게도 주님은 때때로 유혹과 원수들, 병과 결점있는 성격 등을 뿌리채 뽑아주시지 않는다면 거기엔 이유가 있다고 말합니다. “ 하나님께 당신은 그분의 은혜 대신 자신의 능력을 의지하려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지칠 줄 모르고 내내 활보하고 다니는 것보다 이따금 절뚝거리며 덛는 것을 더 좋아하실지도 모른다고” 말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의 약함을, 연약함을 이렇게 마주해 보신적이 있으십니까? 주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시기에 주신 약함이라구요. 그래서, 그 안에서 주님의 능력이 드러남을 보고, 주님의 은혜가 새롭게 느껴졌던적이 있으십니까?

사도 바울은 자신의 약함속에서 만난 주님의 능력과 그 은혜가 너무 크기에 그는 이제 능욕과 궁핍과 잠 못이루며, 배고픔과 목마름, 고통 가운데서도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오히려 자신의 약함을 기뻐합니다. 그리고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라고 외칩니다.

사실, 그가 이렇게 확신 가운데 약함을 외칠 수 있는 것은 그가 이해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모습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13장 4절 말씀에서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라고 말씀한것처럼, 그리스도께서 먼저 우리를 위하여 연약하여 지셨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나신 주님의 모습은 사도바울은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그리스도의 연약함에 자신이 함께 하길 원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편지를 읽을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도 그 그리스도의 연약함의 모습에 동참하기를 촉구합니다. “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 말씀합니다.

사실, 오늘 사도 바울이 자신의 약함을 드러내고, 자신의 약함이 강함이라고 자랑하는것은 바울 자신만을 위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자신의 약함, 연약함의 고백을 통해 그안에 드러나는 주님의 능력을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알게하기 원했습니다. 고린도후서 말씀은 결코 바울 개인을 위한 편지가 아니라, 바로, 주님을 믿던 교린도교회 공동체 일원들을 위한 편지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약함에 거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의 약하여지심에 참여하는 것이고, 동시에, 자신 안에 드러내실 주님의 능력을 증거하기를 원한것처럼, 그렇게 고린도교인들이 그리스도의 연약함게 참여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고린도교인들도 그들의 연약함 속에서 주님의 능력이 일하시는 것을 볼 수 있기를 바랬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충분히 누리길 바랬습니다. 그리스도가 그들의 연약함 안에 함께하심으로써, 그곳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크게 드러나길 원하면서요.

14세기 영국 Norwich에 알려졌던 Julian of Norwich란 평신도 영성가는 젊은시절에 하나님의 은혜를 늘 사모하면서, 주님께 선물들을 달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중 한가지 gift로 구한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고난 당하실때 받으신 아픈 상처의 흔적을 자기에게도 달라고 한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긍휼을 자신도 품길 원했기에, 그리스도의 연약하신 그 상처를 갖게 되기를 바랬습니다.

Julian은 그 주님의 연약함, 그 상처 안에서, 그리스도의 긍휼과 은혜를 찾았고, 그것으로 긍휼이 필요한 많은 이들을 섬겨갔습니다. 자발적으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연약함을 마주하면서요. 그곳에서 그분은 주님의 능력을 보았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덧입습니다. 마치 사도바울이 그러했던것처럼요.

교우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인들은 우리자신의 약함은, 연약함을 어떻게 마주해야 할까요? 우리가 주님 안에서 우리의 연약함은 마주한다면 그곳은 우리가 주님의 능력을 드러나고, 은혜가 새롭게 솟아나는 자리가 되지 않을까요?

Ted Talk에서 Brene Brown은 우리가 우리의 가장 약한 부분, 상처받기 쉬운 연약한 부분들을 피하지 않고 껴안는다면(embrace) 우리들의 연약함이 바로 기쁨과 창조성, 소속감이 생겨나는 곳이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어쩌면, 우리 크리스챤들에겐 이 연약함을 마주하는 자리가 그 이상으로 더 중요한 자리가 될것입니다. 오히려 우리의 연약함을 자랑할때 그곳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물고, 약한 그때가 강함이 되는 은혜의 자리가 되지 않겠습니까? 주님의 은혜가 충분하게 임하는 자리가 되지 않을까요? 그 연약함을 마주하는 자리에 기쁨이 텨저나오고, 감사가 솟아나지 않을까요?

교우여러분, 사도 바울께서는 바로 이 메시지를 오늘 말씀을 통해 고린도교인들에게, 또 우리들에게 전해주고 계십니다. 사도 바울 뿐만이 아니라, 고린도교회 모든 믿는 자들이 자신들의 연약함 속에서 그리스도의 능력을 만나고, 또, 공동체 안에서 서로의 연약함을 마주할때, 그곳에 더 크게 임하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드러내기를 원하시면서요.

사실, 주님께서는 주님의 능력을 드러내시기 원하시며, 우리 각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한 공동체로 부르셨습니다. 서로의 연약함을 마주하며, 그곳에서 피어나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보게하시려고, 그래서, 그렇게 능력의 사람들이 되어 진정한 기쁨을 누리며 주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게 하시려구요.

이전에 연약함에 관한 설교를 청년부에서 한적이 있는데, 예배후에 한 친구가 “목사님, 제 카톡창 프로필에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 이 말씀을 적어 놓았는데, 오늘 하신 이 말씀이 저를 향해서 하신 말씀 맞죠?” 사실, 당시 저는 그 친구에 카톡에 그 말씀이 쓰여있는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이 친구의 말을 듣고는, 어쩜 우리 모두는 이 연약함을 이야기할 때 다 자기 이야기로 듣게 되지 않나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 모두 이것이 바울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바로 나의 이야기, 우리들의 이야기가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들의 연약함을 감추고 드러내지 못하고, 혼자 끙끙앓으며, 어딘가로 숨겨버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다른 이들의 연약함도 보려하지 않고, 때로 이로 인해 이웃들과 벽을 쌓고 외롭게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주님의 능력과 은혜를 느끼지 못하면서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오늘 사도바울이 말씀하듯이, 주님의 믿는 자들의 공동체가 서로의 약함안에 주님의 능력을 드러내는 공동체, 그리서, 은혜가 충분하게 느껴지는 그런 사랑의 공동체를 우리가 이루어가길 원하십니다. 그런데, 그것은 바로 우리들의 연약함을 마주하는 자리에서 시작합니다. 그곳에서 자신의 연약함과 더불어, 서로의 연약함을 새롭게 바라보며,그 약함속에서 강함으로 드러나는 주님의 능력을 바라보게 되고, 은혜를 새롭게 느끼게 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 모두, 어리석어 보일지라도, 우리 자신의 약함을 공동체 안에서 드러내며 살면 어떨까요? 그리고 그 안에 나타나는 능력이 있다면 그것을 통해 주님의 능력이 우리 자신에게도 드러나는 것을 다른 이들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나의 약함과 다른 이들의 약함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요?

말씀을 마치려합니다.

헨리 나우웬은 예일과 하버드 대학에서 가르쳤었는데, 어느날 하버드의 교수직을 그만 둡니다. 그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며 “하나님 , 제가 무엇을 하기 원하십니까?”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데이 브레이크란 장애인들과 봉사자들이 함께 하는 공동체에서 사제로 와달라는 제의를 받고 그 공동체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장애인들과 같이 살아갑니다. 처음에 그는 자신의 약함으로 더 힘든 싸움을 해야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점차, 그들과 함께 살아갈때, 그 자신이 전에는 알지 못했던 자신의 약한 모습을 그들을 통해 더 잘 알아가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공동체에 있으면 정말로 자신을 알게 된다” 라고 말하면서요. 공동체안에는 훌륭한 모습도 있지만, 아픔 상처가 모두 드러나는 곳이기에, 그곳에서 헨리 나우웬은 자가보다 먼저 자신의 연약함을 알고 있는 장애자들을 통해서 은혜를 더 많이 체험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하고 서로 용서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배운다.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내 아집을 버리고 진정으로 남을 위하여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터득한다”라고요.

아무리 지식을 많이 가진자라도, 아무리 세상에서 강한 권위와 힘을 갖고 있더라도, 자신의 연약함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자신의 연약함을 마주했던 자들, 그리고 그 연약함을 마주하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만났던 자들이야 말로, 다른 이들에게 주님의 능력과 은혜를 바라볼 수 있게 도와줄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갑니다.

같은 눈높이란 제목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교통사고 인해 양쪽 시력을 다 잃게 되어 비관에 빠진 학생이 있었습니다. 학교도 그만두었다가, 부모님의 제안으로 시각장애자학교에 입학하기록 하고 그곳을 찾아갔습니다. 학교에 가자 마중 나온 교장선생님은 젊은 한 선생님에게 학교 구경을 기켜주도록 합니다. 젊은 선생님은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넨 뒤 학생을 데리고 현관 안으로 들어가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학생, 이젠 계단을 내려가야 한답니다. 이 계단의 층계는 모두 열다섯 개입니다.

보통의 돌계단이니까 한 계단을 짚어보면 그 높이를 금방 알 수 있을 거예요….. 이 계단을 다 내려가면 바로 오른쪽에 화단이 있습니다….혹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내 손을 학생의 팔꿈치 뒤에 대고 있겠습니다. 불안하면 언제든지 내 손을 잡으세요. 너무나도 친절한 선생님의 말씀에 학생은 마음이 편해짐을 느꼈습니다. 선생님과 함께 학교를 모두 둘러본 학생은 이 학교를 꼭 다녀야겠다는 생각과 선생님께 고마운 마음이 생겨났습니다. “선생님, 감사해요. 저같이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의 마음을 정말 잘 이해해 주셔서… ”

그러자 선생님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습니다.

“물론, 이해하고 말고요… 저도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거든요.”

 

연약함을 먼저 경험한자가 다른 이의 연약함을 돕는 모습입니다. 이런 때가 자신이 연약함이 마주했던 자리에 피어나는 능력과 기쁨, 은혜가 드러나는 순간이 아니겠습니까?

눈 높이를 연약한 자와 같이 낮출 때, 높이만 보았을때 우리는 그 전에 보지 못하던, 깨닫지 못하던 모습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자신의 연약함 속에 감추인 진짜 자신의 모습,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 안에 들어날 수 있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보게 됩니다…..

이런 때야 말로, 연약함의 자리에 깊은 그곳에서 솟아오르는 참된 기쁨을 느께게 될것입니다. 그리고, 그안에 일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게 될것입니다. 깊은 보화를 만납니다.

그때 우리의 연약함이 마주하는 자리는, 진정한 감사와 은혜를 새롭게 발견하게 되는 장소가 될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여러분의 연약함이, 약함이 있습니까? 주님 앞으로 가져오십시요. 그리고, 그 안에서 주님이 주시는 능력을 구하십시요, 여러분들은 그곳에서 일하시는 주님의 능력을 만나고, 솟아오르는 기쁨과 은혜를 발견하고 누리시게 될것입니다. 아울러, 신앙공동체에서 다른 이들의 연약함에 눈 높이를 맞추보십시요. 여러분의 연약함이 다른 분의 연약함 안에서 기쁨과 은혜를 피어나게하는 아름다운 일들이 생겨날 것입니다. 연약함이 만나는 그곳에서 주님의 능력이 드러나게 될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섬기고 있는 주님의 공동체가 연약함을 통해 주의 능력을 더 드려내는 아름다운 공동체가 되어 갈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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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Title Writer 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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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4 “너희 창조주를 기억하라(VIII): 도로 찾으리라” 전도서 11:1-6 (11/03/24) webmaster 2024.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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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2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VI): 산 자의 소명” 전도서 9:2-6 (10/06/24) webmaster 2024.10.07
371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V): 하나님의 선물” 전도서 5:10-20 (09/29/24) webmaster 2024.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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