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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립보서 4:10-20) 10/15/2017

 

초대교회 사막 교부들의 이야기입니다. 파베라는 수도승이 말라죽은 나무 한 그루를 가져다 산 위에 심었습니다. 그리고는 요한이라는 제자에게 이 죽은 나무에 매일 한 동이씩 물을 주라고 일렀습니다. 열매를 맺힐 때까지…. 그런데 물가는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이라는 제자는 저녁 때 다시 돌아오기 위해 아침 일찍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고 석 달이 지나고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고…, 놀랍게도 3년만에 싹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열매를 맺기 시작했습니다. 수도승은 열매를 따 수도원의 수도자들에게 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서 이리들 와서 이 나무의 열매를 맛보도록 하시오.”

 

어리벙벙하게 하는 이야기지요. 먼저 말라죽은 나무를 심는다는 것이 이해가 안 갑니다. 그러나 제자는 놀랍게도 순종했습니다. 드디어 3년 간의 수고가 열매를 맺었습니다. 이에 수도승은 모든 수도사들에게 그 나무의 열매를 줍니다. 나무의 열매를 손에 든 제자들은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아니 수도승은 무엇을 가르치려고 열매를 한 사람씩 주었을까요? 잠시 후 이 질문으로 다시 돌아 오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사도바울이 감옥에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어느 감옥에서 쓴 것인지는 주석가들이 아직도 일치를 보고 있지 못 합니다. 중요한 것은 감옥에서 썼다는 사실만큼은 누구도 부인할수 없습니다.

먼저 사도바울과 빌립보 교회의 상황을 간단히 요약해 드리면, 사도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빌립보 교회 안에 다툼이 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이에 빌립보 교회를 향하여 사도바울은 편지 마지막에 하고 싶은 말을 합니다.  4:2절 말씀을 보면,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교회의 리더였는데 다툼이 있었습니다. 이에 사도바울은 하나됨을 권하는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이처럼 하고 싶은 말을 다 한 사도바울은 편지를 마무리 짓습니다. 그러면 주 안에서 하나 되라고 꾸짖는 편지를 쓴 후 마지막으로는 어떻게 마치는 것이 가장 훌륭한 서신이 될까요?

 

얼마전 어느 성경공부에서 자녀 셋을 두신 분에게 온 가족이 함께 만나면 자녀들에게 무슨 충고를 주시냐는 질문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교우님께서 하신 말씀이, “화목하라.” 이번주 설교 준비를 하면서 한 가지 궁금한 생각이 더 들었습니다. ‘교우님께서는 자녀들에게 “화목하라” 말씀하신 후 어떤 말씀을 또 하셨을까?’

 

사도바울은 어떤 말씀을 하셨을까요? 10절 말씀입니다.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사도바울은 야단을 친 후에 끝으로 빌립보 교인들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고개를 갸우뚱 했을지 모릅니다. 마지막으로 또 하나가 되라고 권면할 것 같았는데 과분한 칭찬의 말을 듣습니다. 요즘식으로 하면 빌립보 교회는 한 마디로 선교헌금을 잘 보낸 교회입니다. 이를 사도바울이 알아 주고 있습니다. 교우들은 분열은 있지만 그 와중에서 선교헌금을 보낸 사실에 대해서 잠시 우쭐했을 것입니다. 11, 12절 말씀입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그런데 감사의 뜻을 표하려면 계속 감사할 일이지 좀 갑자기 뜬 구름 없는 이야기를 합니다. 한 마디로 ‘받긴 받았지만 없어도 된다’ 입니다. 저희 교회 선교위원회에서 애써서 선교헌금을 보냈는데 이런 답장을 받으면 과연 계속할까요? 빌립보 교인이라면 삼척동자도 사도바울의 뜻을 알아챘을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겉으로는 감사하지만 하고 싶은 말이 따로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이었을까요? 13절 말씀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수 있느니라.”

사도바울은 계속 생뚱맞은 표현을 합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완전히 헷갈립니다. “칭찬하려면 속 시원히 칭찬하던가 아니면 꾸짖으려면 꾸짖던가 이건 또 무슨 엉뚱한 소리람….” 사실 누가 봐도 전혀 선교비가 없어도 된다는 표현입니다. 14-16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뿐 아니라 두 번이나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그런데 또다시 전혀 기대밖으로 칭찬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그동안 빌립보 교회가 얼마나 자기를 물질로 도왔는지 하나 하나 빠짐없이 나열하고 있습니다. 다시 다음 글로 눈이 내려 갑니다. 이젠 무슨 말씀을 하시려나? 17절 말씀입니다.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풍성한 열매를 구함이라.”

사도바울은 속 마음을 드러냅니다. 사도바울의 바람은 하나였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의 삶에 풍성한 열매가 맺혀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원하고 있는 풍성한 열매가 무엇일까요? 선교 헌금일까요? 그 동안의 문맥으로 보면 선교 헌금이 풍성한 열매는 아닌 것 같습니다. 만일 선교 헌금이 풍성한 열매라면 사도바울은 선교 헌금을 더 하도록 물질이 많이 필요하다고 말했을텐데 도리어 은연 중 필요 없다는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 필요 없다고 표현했다고 볼수는 없습니다만 사도바울은 선교헌금을 잘하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더 큰 축복이 임할 것을 바라고 있음에 틀림 없습니다. 그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잠시 읽던 편지를 멈추고 진정 사도바울이 원하는 풍성한 열매를 맺히는 삶이 무엇일까 생각한다면 쉽게 그 삶이 어떤 삶일지 알아차렸을 것입니다. 못 알아차리는 사람은 잠시 읽던 것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잠시 멈춘 자들의 뇌리에 무엇이 울렸을까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수 있느니라.”

 

처음 수도사 이야기로 돌아 갑니다. 파베 수도승이 죽었던 나무에서 나온 열매를 제자들에게 주었습니다. 왜 주었을까요?

“풍성한 열매를 맺어라. 너희도 죽은 나무를 살릴수 있다.”

사도바울도 같은 축복을 빌립보 교인들에게 주길 원했습니다. 수도사는 나무 열매를 사용했지만 사도바울은 감옥에 갇혀 죽은 자와 같은 자신의 이야기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남들은 죽었다고 생각하겠지만 감옥에서도 살아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위대한 고백과 함께,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수 있느니라.”

 

사도바울이 자기의 믿음을 자랑하려고 이 표현을 했겠습니까? 아닙니다. 빌립보 교인들도 이런 고백의 사람이 되길 바래서 이 고백을 한 것입니다.

 

 그러면 분열 가운데 있는 빌립보 교회가 어떻게 이런 위대한 고백을 할수 있게 될까요? 사도바울은 어떻게 이런 고백을 할수 있게 되었는지 살펴 보면 답이 나올줄 압니다. 저는 그 답을 사도바울의 인삿말에서 찾아 볼수 있었습니다. 1:1절 말씀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사실 사도바울이 이런 고백의 주인공이 될수 있었던 것은 그를 그림자와 같이 따라 다니던 디모데 때문입니다.

유대인 학자인 마틴 부버가 ‘I and Thou’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Through the Thou a man becomes I.”

(당신을 통해서 나는 ‘나’가 됩니다.)

 

디모데 없이 이런 고백을 하는 사도바울은 없다는 것입니다. 곧 디모데가 있기에 사도바울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가 된 것입니다.

인삿말을 통해 알수 있는 것은 사도바울과 디모데는 한 사람이 되어서 빌립보 교회에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디모데가 없는 사도바울이 편지를 쓰는 것이 아니고 디모데와의 하나됨의 관계 안에서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분열된 교회에게 편지를 쓰다가 가장 중요한 부분에서 생뚱맞은 고백을 한 것입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여기의 나는 그냥 사도바울이 아니라 디모데와 함께 하는 사도바울인 것입니다.

 

죽은 나무를 살리는 이야기도 매한 가지입니다. 죽은 나무를 살릴수 있었던 것은 파베 수도승에 달려 있었던 것도 아니고 제자 요한에게 달려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두 사람의 관계에 있었습니다. 파베는 요한을 믿고 명령하였고 요한은 스승을 믿고 따랐습니다. 이에 죽은 나무가 열매를 맺었습니다.

 

이것이 사도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원하는 풍성한 열매의 삶입니다. 나와 너가 하나가 된 나를 통해서만 사도바울의 고백을 할수 있는 것이고 빌립보 교회가 이런 고백을 하는 교회가 될 것을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사도바울은 분열의 아픔이 있는 빌립보 교회를 향하여 말씀하는 것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는 사도바울이 자기를 위해서 물심양면으로 섬기고 있는 빌립보 교인들을 향한 최고의 선물이었습니다.

 

사실 지난 2000년간의 기독교의 역사는 이런 고백을 하는 자들로 인해서 오늘까지 이어 오고 있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한 사람이 500년전에 이 고백을 한 마틴 루터입니다.

마틴 루터는 로마 교황 레오 10세의 타락상을 보다 못해 95개조 논제를 비텐베르크 성 교회 문에 게시합니다. 이날이 바로 1517년 10월 31일입니다. 그래서 10월 마지막 주일을 종교개혁주일로 지키는 것입니다. 두 논제만 읽어드리면,

 

67.신부들이 사죄부가 가장 큰 은혜라고 대대적으로 선전하는 것은 순전한 거짓으로 이익을 챙기는 행위이다.

  1. 그러나 사죄부는 하나님의 은혜와 십자가의 거룩한 능력에 절대로 비할 수 없다.

 

그 후 교황청과 루터는 서로 공박을 하기 시작합니다. 드디어 약 3년 후 루터에게 파문 경고장을 보냅니다. 그러나 루터는 그 교황의 교서를 불태웁니다. 결국 교황청으로부터 파문을 당합니다.

그러나 이 당시 교황과 견주는 사람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5세였습니다. 카를 5세가 마틴 루터를 보름스 국회로 부릅니다. 루터는 황제와 대면하는 것을 택하고 기다립니다. 루터의 그 다음 이야기는 앞으로 두 주간에 걸쳐서 더 나누게 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루터가 이렇게 교황과 대항하고 황제가 주관하는 국회에 출석할수 있게 된 힘이 어디에 있었겠습니까?

마틴 루터가 이런 고백의 주인공이 되었던 이유도 그에게는 디모데가 있었습니다. 마틴 루터의 종교 개혁을 가까이서 도운 사람이 세 사람이 있습니다. 루터의 디모데라고 할수 있는 멜라히톤이 있습니다. 멜라히톤은 루터를 이어 종교 개혁을 이어 갑니다. 그 외에도 카를슈타트라는 대학 교수가 있고 또 루터의 스승 격인 수도원장 슈타우피츠 등이 있습니다. 곧 세 사람의 강력한 도움에 힘입어 루터는 그 위대한 일을 해 낼수 있었습니다.

 

사도바울도 마틴 루터도 “내가 모든 것을 할수 있느니라” 고백할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맺어주신 디모데 덕분이었던 것입니다. 마틴 루터의 디모데인 멜라히톤은 루터를 위한 장례예배에서 다음과 같은 조사를 하였습니다.

“적대자들에 대해서는 가끔 곤봉을 가지고 때리고 덤벼들며, 뇌우와 같이 거칠고 사나운 성품을 보였던 이 위대한 투쟁가는 어떤 인간이라도 개인적인 적대자로 삼은 적은 없다. 루터가 누구와 싸웠든지, 그것은 그가 하나님을 섬기는 일 때문에 싸운 것이다.”

이러한 디모데가 있었기에 루터는 그 위대한 도전을 할수 있었지 않았을까요? 한편 멜라히톤과 하나가 된 루터는 황제를 만나기 위해 웜스 국회로 들어가기 전 군중들에게 외칩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하실 것입니다. 저는 괴수의 입안으로 뛰어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사도바울의 신앙을 이어가는 고백이 아닐까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수 있느니라.”

 

말씀을 거둡니다.

마틴 루터의 정신을 이어 세계 선교에 앞장 선 사람으로서 인도 선교를 위해 평생을 바친 세계 선교의 아버지 William Carey선교사가 있습니다. 그의 인도 선교에 대한 기록을 보면 정말로 상상할수 없는 어려움에 직면하고 또 직면합니다. 그런데 그가 끝까지 성공적으로 선교를 마칠수 가 있었습니다. 네 명의 친구들 때문이었습니다. 캐리 선교사는 네 명의 친구들과 계약을 맺었다고 합니다. 그에게는 네 명의 디모데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Carey 선교사를 다음과 같이 회고합니다.

“마치 캐리 선교사는 깊은 광산의 굴로 내려가면서 우리들에게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굴로 내려 간다…, 만일 너희가 밧줄을 꼭 붙들어 준다면….’”

캐리 선교사의 유명한 고백을 많은 분들이 아실줄 압니다.

“Expect great things from God. Attempt great things for God.”

(하나님으로 부터 위대한 것을 기대하십시요.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하십시요.)

이는 21세기의 사도바울의 고백이 아닐까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수 있느니라.”

 

교우 여러분,

새로운 종교개혁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단순한 반복일뿐입니다. 언제 반복이 되냐구요? 주님 안에서 나와 너가 하나가 된 자들을 통해서 전에도 있었던 바로 그 위대한 종교 개혁은 계속됩니다. 너와 나가 하나가 되었습니까? 함께 사도바울의 고백을 하십시다.

“내가 모든 것을 할수 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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